1. 개인사 및 배경
1.1. 어린 시절 및 유소년 경력
레오베지우두 링스 다 가마 주니오르는 1954년 6월 29일 브라질 파라이바주의 주앙페소아에서 태어났다. 신장은 183 cm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플라멩구의 열렬한 팬이었고, 이러한 열정은 그를 플라멩구의 유소년 팀에 입단하게 했다. 1974년, 그는 플라멩구의 1군 팀에 합류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라이트백으로 뛰었으며, 축구 경력을 위해 당시 공부하던 경제학을 포기했다.
2. 선수 경력
주니오르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활약한 브라질의 대표적인 축구 선수로, 클럽 축구와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2.1. 클럽 경력
주니오르는 브라질의 플라멩구에서 선수 경력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이탈리아의 토리노와 페스카라에서도 활약했다.
2.1.1. 플라멩구
주니오르는 1973년부터 1974년까지 플라멩구의 유소년 팀에서 활동한 후, 1974년에 1군 팀에 합류하며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그는 1974년부터 1984년까지 플라멩구에서 첫 번째 전성기를 보냈다. 이 기간 동안 플라멩구는 지쿠와 함께 브라질 전국 리그에서 4차례(1980, 1982, 1983, 1992)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81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코브렐로아를 꺾고 우승했으며, 같은 해 인터콘티넨털컵에서도 리버풀을 3대0으로 완파하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주니오르는 이 경기에서 선발 출전하여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원래 미드필더였으나, 플라멩구와 국가대표팀에서는 지쿠의 존재로 인해 주로 레프트백으로 뛰었다. 그는 플라멩구 역사상 최다 출장 기록(857경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기간 동안 77골을 기록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플라멩구로 복귀하여 두 번째 활동기를 가졌으며, 1990년 코파 두 브라질 우승, 1991년 카리오카 주립 리그 우승, 1992년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2.1.2. 토리노
1984년 6월 12일, 주니오르는 토리노로 200.00 만 USD의 이적료로 이적했다. 당시 30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유럽 팀들의 관심을 받았다. 토리노로의 이적을 수락하기 전, 그는 풀백보다는 미드필더로 뛰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는 미드필더 역할이 덜 부담스러워 선수 경력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루이지 라디체 감독의 전술에 성공적으로 녹아들며 팀의 미드필더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코파 이탈리아 체세나전에서 데뷔했으며, 두 번째 경기인 크레모네세와의 코파 이탈리아 경기에서는 1골 2도움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세리에 A 데뷔골은 리그 6라운드 라치오전에서 터뜨렸다. 1984-85 시즌 동안 26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하며 팀이 베로나에 이어 리그 2위를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는 팬들과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1985년 세리에 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토리노에서 뛰는 동안 그는 두 차례의 인종차별 사건을 겪었다. 밀라노에서는 경기장을 떠나는 도중 부모님과 함께 반복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침을 맞는 사건이 있었다. 토리노 더비에서는 유벤투스 팬들이 그의 피부색을 비하하는 공격적인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에 토리노 팬들은 "유벤투스 팬보다 흑인이 낫다"는 현수막으로 맞대응하며 주니오르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토리노 팬들은 그를 "파파 주니오르"(papà Júnior, '아버지 주니오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는 1987년까지 토리노에 머물렀으나, UEFA컵 하이두크 스플리트전에서 교체된 것에 대한 불만과 라디체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났다.
2.1.3. 페스카라
주니오르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이탈리아의 또 다른 클럽인 페스카라에서 활약했다. 1988-89 시즌에는 언론 투표에서 리그 최우수 외국인 선수 2위에 오르는 등 개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은 세리에 A에 잔류하지 못하고 강등되었다.
2.1.4. 플라멩구 복귀
이탈리아에서 5시즌을 보낸 후, 주니오르는 35세의 나이에 1989년 플라멩구로 복귀했다. 1991년 초에는 미트로파컵에 참가하는 토리노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플라멩구에서 단기 임대 선수로 토리노에 다시 합류했다. 주니오르는 이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특히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토리노의 우승에 기여했다. 1992년에는 플라멩구 소속으로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93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주니오르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과 브라질 비치사커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2.2.1.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주니오르는 1976년 몬트리올 하계 올림픽 남자 축구 토너먼트에 브라질 올림픽 대표팀으로 출전했다. 그는 1979년 5월부터 1992년 12월까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총 74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다.
그는 1982년 FIFA 월드컵과 1986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1982년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의 '황금의 4중주'로 불리는 팀의 레프트백으로 출전했다.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기 시간의 상당 부분을 미드필더보다 앞선 지역에서 플레이하며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브라질의 측면 공격을 지원했다. 그는 2차 조별 리그 아르헨티나전에서 1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86년 월드컵에서는 지쿠의 부상으로 인해 미드필더로 출전하여 카레카와 뮐러 등에게 찬스를 만들어주었다. 1986년 월드컵 이후 한동안 국가대표팀에서 멀어졌던 그는 1992년 4월 15일 핀란드와의 경기에서 약 6년 만에 복귀했다. 그의 마지막 브라질 국가대표팀 경기는 1992년 12월 16일 독일과의 경기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2.2.2. 브라질 비치사커 국가대표팀
주니오르는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브라질 비치사커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총 201골을 기록했으며, 이 중 71골은 월드 챔피언십에서 기록한 것이다. 그는 비치사커 월드 챔피언십에서 6차례(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우승을 차지했으며, 비치사커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6차례(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우승을 경험했다. 개인적으로는 비치사커 월드 챔피언십 득점왕을 4차례(1997, 1998, 1999, 2000) 차지했고, 최우수 선수상도 4차례(1995, 1997, 1998, 2000) 수상했다. 그는 비치사커의 발전을 위해 선수 생활을 중단하기도 했다. 2019년에는 비치사커 스타즈 시상식에서 "베스트 레전드" 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풋볼 매거진이 선정한 "비치사커 10대 레전드" 중 5위에 이름을 올렸다.
3. 지도자 경력
주니오르는 선수 은퇴 후 축구 지도자로서도 활동했다.
3.1. 플라멩구
그는 자신의 선수 경력 대부분을 보냈던 플라멩구에서 1993년부터 1994년까지, 그리고 1997년에 다시 감독직을 맡았다.
3.2. 코린치안스
주니오르는 2003년 10월 1일부터 2003년 10월 10일까지 코린치안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주니오르는 그의 뛰어난 기술, 팀워크, 그리고 다재다능함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레프트백과 왼쪽 미드필드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으며, 양발 사용 능력 덕분에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클럽에서는 주로 중앙 미드필더나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로 뛰었으며, 오른쪽 측면에서도 플레이할 수 있었다. 그의 경력은 공격형 라이트백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공격 움직임을 조율하면서도 수비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능력을 가진 선수로 평가받았다. 또한 그의 우아함, 리더십, 전술적 지능은 물론, 전진하여 정확한 크로스를 제공하거나 직접 골을 노리는 능력 또한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프리킥과 페널티킥에 능한 세트피스 전문가이기도 했다. 축구의 황제 펠레는 주니오르를 "종합적인 능력 면에서 지쿠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하며 그의 실력을 높이 샀다.
5. 음악 활동
축구 선수로서의 뛰어난 경력 외에도, 주니오르는 뮤지션으로서도 활동하며 여러 장의 레코드를 발매했다. 특히 1982년 FIFA 월드컵 기간에 발매된 그의 곡 "Boa Canarinho"(Boa Canarinho보아 카나리뉴포르투갈어)는 72만 장 이상 판매되며 큰 히트를 기록했다. 1990년에는 일본에서 삼바 가수로 라이브 공연을 펼치기도 했으며, 이 공연 실황은 이듬해 Júnior Live in Japan이라는 제목의 CD로 발매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6. 은퇴 후 활동
선수 및 지도자 경력을 마친 후, 주니오르는 축구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그는 브라질의 주요 방송사인 헤지 글로부의 텔레비전 해설가로 활동하며 축구 팬들에게 깊이 있는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 2006년에는 지쿠 감독이 이끄는 2006년 FIFA 월드컵 일본 국가대표팀의 스카우트 담당 스태프로 합류하여 팀의 전력 분석에 기여했다.
7. 평가 및 수상
주니오르는 그의 뛰어난 축구 실력과 다재다능함으로 인해 여러 개인상과 단체 우승을 경험했으며, 축구 역사상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7.1. 펠레 선정 FIFA 100
2004년 3월, 축구의 전설 펠레는 FIFA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현존하는 위대한 축구 선수 125명을 선정하는 FIFA 100 명단에 주니오르를 포함시켰다. 이는 그의 축구 역사적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평가이다.
7.2. 클럽 기록 및 주요 개인 수상
- 플라멩구 역대 최다 출장 기록: 857경기
- 볼라 지 프라타 (브라질 전국 리그 올해의 팀): 1980, 1983, 1984, 1991, 1992
-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 3위: 1981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82
- FIFA XI: 1982
-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세리에 A 올해의 팀: 1985, 1988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1985
- 볼라 지 오우루 (브라질 올해의 선수): 1992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92
- 비치사커 월드 챔피언십 득점왕: 1997 (11골), 1998 (14골), 1999 (10골), 2000 (13골)
- 비치사커 월드 챔피언십 최우수 선수: 1995, 1997, 1998, 2000
- 비치사커 스타즈 레전드 상: 2019
- 프랑스 풋볼 선정 "비치사커 10대 레전드" 5위
7.3. 주요 단체 수상
- 플라멩구
- 인터콘티넨털컵: 1981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81
- 브라질 전국 리그: 1980, 1982, 1983, 1992
- 코파 두 브라질: 1990
- 카리오카 주립 리그: 1974, 1978, 1979 (특별 대회 포함), 1981, 1991
- 토리노
- 미트로파컵: 1991
- 세리에 A 준우승: 1984-85
- 브라질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82년 2라운드 (5위), 1986년 8강 (5위)
-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1983)
- 브라질 비치사커 국가대표팀
- 비치사커 월드 챔피언십: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 비치사커 코파 아메리카: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7.4. 역사적 평가 및 사회적 영향
주니오르의 경력은 단순히 축구 실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평가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뛰던 시절 겪었던 인종차별 사건은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기록된다. 밀라노에서 모욕을 당하고 침을 맞는 사건, 그리고 토리노 더비에서 유벤투스 팬들이 인종차별적인 현수막을 내걸었을 때, 토리노 팬들이 "유벤투스 팬보다 흑인이 낫다"는 현수막으로 맞대응하며 주니오르를 옹호했던 것은 당시 사회의 인종차별 문제와 이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 의식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축구의 황제 펠레가 주니오르를 "종합적인 능력 면에서 지쿠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한 것은 그의 축구 실력에 대한 높은 인정을 보여주며, 이는 주니오르가 브라질 축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선수임을 입증한다.
8. 선수 경력 통계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클럽, 시즌, 대회별 출장 및 득점 기록
|-
!rowspan="2"|클럽
!rowspan="2"|시즌
!colspan="3"|리그
!colspan="2"|국내 컵
!colspan="2"|리그 컵
!colspan="2"|대륙 대회
!colspan="2"|합계
|-
!디비전!!출장!!득점!!출장!!득점!!출장!!득점!!출장!!득점!!출장!!득점
|-
|rowspan="11"|플라멩구
|1975
|rowspan="10"|세리이 A
|27||0||||||||||||
|-
|1976
|21||1||||||||||||
|-
|1977
|18||0||||||||||||
|-
|1978
|25||4||||||||||||
|-
|1979
|7||1||||||||||||
|-
|1980
|19||1||||||||||||
|-
|1981
|6||0||||||||||||
|-
|1982
|23||0||||||||||||
|-
|1983
|26||0||||||||||||
|-
|1984
|20||0||||||||||||
|-
!colspan="2"|합계
!174!!6
|-
|rowspan="4"|토리노
|1984-85
|rowspan="3"|세리에 A
|26||7||||||||||||
|-
|1985-86
|30||4||||||||||||
|-
|1986-87
|30||1||||||||||||
|-
!colspan="2"|합계
!86!!12
|-
|rowspan="3"|페스카라
|1987-88
|rowspan="2"|세리에 A
|28||3||||||||||||
|-
|1988-89
|34||3||||||||||||
|-
!colspan="2"|합계
!62!!8
|-
|rowspan="7"|플라멩구
|1988
|rowspan="6"|세리이 A
|1||0||||||||||||
|-
|1989
|15||1||3||1||||||||||||
|-
|1990
|12||0||4||0||||||||||||
|-
|1991
|17||0||||||||||||
|-
|1992
|25||9||||||||||||
|-
|1993
|0||0||8||1||||||||||||
|-
!colspan="2"|합계
!70!!10!!15!!2
|-
!colspan="3"|커리어 합계
!41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