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월터 매런빌은 1891년 11월 11일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났다.
1.1. 유년기 및 교육
그의 유년기나 교육 배경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1.2. 야구 입문 및 초기 경력
매런빌은 1912년 뉴잉글랜드의 뉴베드퍼드 구단에서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이적하며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그는 비록 체구가 작고 타격 능력이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넓은 내야 수비 범위로 빠르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2. 선수 경력
월터 "래빗" 매런빌은 데드볼 시대와 라이브볼 시대를 모두 아우르는 긴 선수 경력을 보냈다. 그는 오른손으로 던지고 타격했으며, 키는 0.1 m (5 in), 몸무게는 70 kg (155 lb)였다.
2.1. 소속 팀 및 포지션
그는 선수 생활 동안 여러 팀에서 활약했다. 주요 소속 팀은 다음과 같다.
- 보스턴 브레이브스: 1912년 ~ 1920년, 1929년 ~ 1933년, 1935년
- 피츠버그 파이리츠: 1921년 ~ 1924년
- 시카고 컵스: 1925년
- 브루클린 로빈스: 1926년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27년 ~ 1928년
그는 주로 유격수로 활약했으며,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글렌 라이트를 유격수로 기용하면서 1924년부터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기도 했다.
2.2. 주요 기록 및 수상
매런빌은 23시즌의 긴 선수 경력 동안 통산 타율 .258, 2,605 안타, 1,255 득점, 28 홈런, 884 타점, 291 도루를 기록했다. 특히 유격수로서 통산 5,139 자살을 기록하며 포지션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의 수비 기록은 다음과 같다.
- 1914년부터 1917년까지 4년 연속 유격수 자살 수 내셔널 리그 최다 기록.
- 1923년에는 유격수로서 자살 수, 보살 수, 병살타 수, 수비율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 1924년에는 2루수로서 보살 수, 병살타 수, 수비율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으며, 그 해에만 무려 109개의 병살타를 잡아냈다.
그는 1914년 월드 시리즈에서 보스턴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며, 1928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으로 내셔널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개인 수상으로는 1913년 최우수 선수상 투표에서 3위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1914년에는 팀 동료 조니 에버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41세의 나이였던 1933년에도 타율 .218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 투표에서 공동 12위에 올랐다.
다음은 월터 매런빌의 주요 타격 기록이다.
| 연도 | 팀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
| 1912 | BSN | 26 | 86 | 18 | 2 | 0 | 0 | 8 | 1 | .209 | .292 | .233 |
| 1913 | BSN | 143 | 571 | 141 | 13 | 8 | 2 | 48 | 25 | .247 | .330 | .308 |
| 1914 | BSN | 156 | 586 | 144 | 23 | 6 | 4 | 78 | 28 | .246 | .306 | .326 |
| 1915 | BSN | 149 | 509 | 124 | 23 | 6 | 2 | 43 | 18 | .244 | .308 | .324 |
| 1916 | BSN | 155 | 604 | 142 | 16 | 13 | 4 | 38 | 32 | .235 | .296 | .325 |
| 1917 | BSN | 142 | 561 | 146 | 19 | 13 | 3 | 43 | 27 | .260 | .312 | .357 |
| 1918 | BSN | 11 | 38 | 12 | 0 | 1 | 0 | 3 | 0 | .316 | .381 | .368 |
| 1919 | BSN | 131 | 480 | 128 | 18 | 10 | 5 | 43 | 12 | .267 | .319 | .377 |
| 1920 | BSN | 134 | 493 | 131 | 19 | 15 | 1 | 43 | 14 | .266 | .305 | .371 |
| 1921 | PIT | 153 | 612 | 180 | 25 | 12 | 1 | 70 | 25 | .294 | .347 | .379 |
| 1922 | PIT | 155 | 672 | 198 | 26 | 15 | 0 | 63 | 24 | .295 | .355 | .378 |
| 1923 | PIT | 141 | 581 | 161 | 19 | 9 | 1 | 41 | 14 | .277 | .327 | .346 |
| 1924 | PIT | 152 | 594 | 158 | 33 | 20 | 2 | 71 | 18 | .266 | .307 | .399 |
| 1925 | CHC | 75 | 266 | 62 | 10 | 3 | 0 | 23 | 6 | .233 | .308 | .293 |
| 1926 | BRO | 78 | 234 | 55 | 8 | 5 | 0 | 24 | 7 | .235 | .312 | .312 |
| 1927 | STL | 9 | 29 | 7 | 1 | 0 | 0 | 0 | 0 | .241 | .290 | .276 |
| 1928 | STL | 112 | 366 | 88 | 14 | 10 | 1 | 34 | 3 | .240 | .310 | .342 |
| 1929 | BSN | 146 | 560 | 159 | 26 | 10 | 0 | 55 | 13 | .284 | .344 | .366 |
| 1930 | BSN | 142 | 558 | 157 | 26 | 8 | 2 | 43 | 9 | .281 | .344 | .367 |
| 1931 | BSN | 145 | 562 | 146 | 22 | 5 | 0 | 33 | 9 | .260 | .329 | .317 |
| 1932 | BSN | 149 | 571 | 134 | 20 | 4 | 0 | 37 | 4 | .235 | .295 | .284 |
| 1933 | BSN | 143 | 478 | 104 | 15 | 4 | 0 | 38 | 2 | .218 | .274 | .266 |
| 1935 | BSN | 23 | 67 | 10 | 2 | 0 | 0 | 5 | 0 | .149 | .186 | .179 |
| 통산: 23년 | 2670 | 10078 | 2605 | 380 | 177 | 28 | 884 | 291 | .258 | .318 | .340 | |
2.3. 수비와 플레이 스타일
매런빌은 넓은 수비 범위와 기민한 플레이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의 작은 체구와 큰 귀, 그리고 민첩하게 땅볼을 처리하는 모습 때문에 '래빗'(Rabbit영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경기 중 유머러스한 행동으로 '야구계에서 가장 유명한 광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었다. 심판을 놀리거나 타자나 투수가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때 그들의 행동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다양한 장난을 쳤다. 폭죽을 던지거나 호텔 난간에 서 있거나 금붕어를 삼키는 등의 기행을 벌였다. 한번은 뉴욕으로 원정을 갔을 때, 팀 동료 잭 스콧이 타임스 스퀘어에서 그를 쫓아가며 "도둑이야!"라고 외치게 한 적도 있었다. 또 다른 일화로는, 그의 호텔 방에서 비명, 유리 깨지는 소리, 총성이 들리고 매런빌이 "에디, 날 죽이고 있어!"라고 신음하자 걱정스러운 팀 동료들이 방으로 들이닥쳤는데, 매런빌과 친구 두 명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선수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매런빌의 통산 28개 홈런 중 22개는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이었다. 이는 보스턴 브레이브스 시절 그의 홈구장이었던 브레이브스 필드의 비정상적으로 넓은 구장 크기 때문이었다. 1910년대에는 양쪽 펜스까지 123 m (402 ft), 중앙 펜스까지 134 m (440 ft)였고, 우중간 가장 깊은 곳은 152 m (500 ft)에 달하기도 했다.
2.4. 야구 외 활동 및 개인사
1914년 월드 시리즈 우승 후 매런빌은 여러 팀 동료들과 함께 보드빌 투어에 참여했다. 이 투어에서 그는 월드 시리즈의 플레이를 재연하고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메인주 루이스턴에서 관객들에게 도루 시범을 보이던 중 실수로 무대 가장자리에서 미끄러져 오케스트라 피트의 드럼 위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에서 복무하며 1918년에는 단 11경기만 출전했다.
브루클린 로빈스 소속이던 1926년에는 시즌 중반 방출되었고, 그해 11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했으나 1927년에는 인터내셔널 리그의 로체스터 트라이브로 강등되었다. 이 시기에 매런빌은 메이저 리그에서 계속 뛰려면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술을 끊고 야구에 진지해지거나 아니면 끝장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1927년 5월 24일, 매런빌은 금주를 결심했다. 그해 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단장 브랜치 리키는 "월터는 변한 사람이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그의 태도 변화는 놀랍다"라고 언급했다. 그해 9월 말 카디널스에 다시 합류하여 9경기를 뛰었고, 1928년에는 팀의 정식 로스터에 포함되어 시즌을 보냈다.
그는 1934년 전시 경기 중 홈 플레이트 충돌로 왼쪽 비골과 경골이 부러져 시즌 전체를 결장했다. 1935년 재기를 시도했지만 이전과 같은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메이저 리그 경력 이후, 매런빌은 몬트리올 로열스, 뉴욕주 올버니, 뉴욕주 엘미라,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 등 마이너 리그 팀에서 감독을 맡았다. 1936년 엘미라에서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123경기에서 타율 .323을 기록하기도 했다. 마이너 리그 감독직을 마친 후에는 디트로이트와 로체스터의 청소년 야구 프로그램에서 일했으며, 뉴욕 저널-아메리칸 신문이 후원하는 야구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즐겼고, 자신의 과거 방탕했던 생활 방식을 따르지 말라고 항상 아이들에게 조언했다.
3. 감독 경력

월터 매런빌은 1925년 시카고 컵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컵스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시즌 중 하나를 보내고 있었다. 감독이 된 후에도 그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그는 팀의 유일한 규칙이 "내가 잠들기 전에는 아무도 잠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밤, 그는 풀먼 객차를 돌아다니며 잠든 선수들의 머리에 물을 붓고는 "매런빌 감독 아래에서는, 특히 밤에는 잠들 수 없다"고 외쳤다.
그가 감독을 맡은 53경기 동안 컵스는 23승 30패의 기록으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브루클린의 에베츠 필드 밖 거리에서 신문팔이를 흉내 내며 "모두 읽어봐! 매런빌 해고!"라고 외쳤다. 그리고 실제로 다음 날 그는 해고되었다.
메이저 리그 감독 경력 외에도, 그는 몬트리올 로열스, 뉴욕주 올버니, 뉴욕주 엘미라,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 등 여러 마이너 리그 팀에서 감독을 역임했다. 특히 1936년 엘미라에서는 선수 겸 감독으로 뛰면서 123경기에서 타율 .323을 기록하는 등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4. 사망
월터 "래빗" 매런빌은 1954년 1월 6일 자정 직후 뉴욕주 퀸스 우드사이드에 있는 자택에서 심각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사망은 거의 즉각적으로 일어났으며, 그는 당시 62세였다. 그의 시신은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세인트 마이클스 묘지 홀리 패밀리 구역 B, 206번지, 5번 묘에 안장되었다.
5. 명예 및 유산
매런빌은 사망한 지 6개월 후인 1954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빌 테리와 빌 디키와 함께 헌액되었으며, 이는 그가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을 얻은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그의 헌액은 주로 뛰어난 수비 능력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선수 시절의 기행과 유머러스한 성격으로 '야구계의 광대'라는 독특한 유산을 남겼다. 또한,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고 청소년 야구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자신의 과거 실수를 경계하라고 아이들에게 조언하는 등, 후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