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라일 마틴 앨제이도(Lyle Martin Alzado라일 마틴 앨제이도영어, 1949년 4월 3일 ~ 1992년 5월 14일)는 미국의 미식축구 선수이자 배우였다. 그는 내셔널 풋볼 리그(NFL)의 디펜시브 엔드로 활약하며 격렬하고 위협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명성을 얻었다. 덴버 브롱코스,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레이더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특히 레이더스 소속으로 제18회 슈퍼볼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5년간의 선수 경력 동안 그는 세 차례 올프로에 선정되고 두 차례 프로볼에 이름을 올리는 등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앨제이도는 미식축구 경력 외에도 다양한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배우로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사용과 그로 인한 사망 논란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그는 스테로이드 사용을 공개적으로 인정했으며, 자신의 뇌종양이 스테로이드 남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여 스포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앨제이도의 고백과 사망은 약물 남용의 위험성에 대한 중요한 경고이자, 선수들의 건강과 윤리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라일 앨제이도는 뉴욕주 브루클린의 브라운스빌(Brownsville, Brooklyn브라운스빌영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계-스페인계인 모리스(Maurice모리스영어)였고, 어머니는 러시아계 유대인 혈통인 마사 소콜로프 앨제이도(Martha Sokolow Alzado마사 소콜로프 앨제이도영어)였다. 앨제이도는 유대교를 따랐다.
2.1. 유년 시절과 가족
앨제이도가 10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롱아일랜드의 시더허스트(Cedarhurst시더허스트영어)로 이주했다. 그는 아버지를 "술꾼이자 길거리 싸움꾼"으로 묘사했는데, 아버지는 앨제이도가 로렌스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 가족을 떠났다. 앨제이도는 고등학교에서 3년간 미식축구를 플레이했다.
2.2. 교육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장학금 제의를 받지 못했던 앨제이도는 텍사스주의 지역 사회 대학인 킬고어 칼리지(Kilgore College킬고어 칼리지영어)에 입학하여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다. 2년 후 그는 흑인 팀원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팀을 떠나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후에 언급했다. 이후 그는 사우스다코타주의 양크턴 칼리지(Yankton College양크턴 칼리지영어)로 전학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전미대학간경기협회(NAIA) 소속 학교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앨제이도는 덴버 브롱코스의 코치이자 스카우트인 스탠 존스(Stan Jones스탠 존스영어)의 눈에 띄어 NFL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존스는 자동차 문제로 발이 묶여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양크턴의 상대 팀 중 하나인 몬태나 공과대학교(Montana Tech몬태나 공과대학교영어)에 들렀다가, 몬태나 공과대학교의 코치들이 돈 히터(Don Heater돈 히터영어)의 경기 영상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 팀의 알려지지 않은 수비 라인맨 앨제이도의 플레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존스는 그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서를 팀에 제출했고, 브롱코스는 결국 1971년 NFL 드래프트 4라운드에서 앨제이도를 지명했다. 앨제이도는 신인 시즌 후 양크턴 칼리지로 돌아가 부족한 학점을 이수하고 중등 교육에 중점을 둔 체육 학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 앨제이도는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도 활동했으며, 1969년 오마하에서 열린 미드웨스트 골든 글러브 권투 토너먼트 준결승에 진출하기도 했다.
3. 미식축구 경력
라일 앨제이도는 대학 시절의 두각을 바탕으로 NFL에 입성한 후 15년간 프로 선수로 활약하며 리그 정상급 디펜시브 엔드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경력은 덴버 브롱코스,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레이더스에서의 성공적인 시간들로 특징지어진다.
3.1. 대학 경력
킬고어 칼리지와 양크턴 칼리지에서 미식축구를 했던 라일 앨제이도는 1971년 NFL 드래프트 4라운드에서 덴버 브롱코스에 지명되었다. 그는 비록 작은 대학에서 뛰었지만, 몬태나 공과대학교와의 경기에서 상대 오펜스를 압도하는 모습을 덴버 브롱코스의 스카우트 스탠 존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프로 진출의 기회를 얻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도 활약하여 1969년 미드웨스트 골든 글러브 권투 토너먼트 준결승에 올랐다.
3.2. 덴버 브롱코스
1971년, 덴버 브롱코스의 주전 오른쪽 디펜시브 엔드 리치 잭슨이 부상을 당하자 앨제이도는 그 자리를 이어받아 60태클과 8새크를 기록하며 여러 올루키 팀에 선정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에는 91태클과 10.5새크를 기록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3년, 앨제이도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브롱코스는 7승 5패 2무를 기록하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승률 5할을 넘겼다.
1974년에는 13새크와 80태클(8개의 로스 태클 포함)을 기록하며 올-AFC에 선정되는 등 엘빈 베제아, 잭 영블러드, L. C. 그린우드, 클로드 험프리, 칼 엘러와 함께 NFL 최고의 디펜시브 엔드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이들 중 베제아, 영블러드, 험프리, 엘러는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덴버 브롱코스는 7승 6패 1무를 기록하며 두 시즌 연속 승률 5할 이상을 달성했다.
1975년 시즌에는 앨제이도가 디펜시브 태클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그는 91태클과 7새크를 기록했지만, 브롱코스는 6승 8패로 부진했다. 1976년 시즌 개막전에서 앨제이도는 무릎 부상을 당해 시즌 전체를 결장했다. 브롱코스는 9승 5패를 기록했지만, 스포츠 매거진(SPORT magazine스포츠 매거진영어)은 앨제이도를 포함한 12명의 선수가 존 랠스턴(John Ralston존 랠스턴영어) 감독으로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보도했다. 랠스턴은 1977년 시즌을 앞두고 레드 밀러(Red Miller레드 밀러영어) 감독으로 교체되었다.
1977년 시즌은 브롱코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기였다. 브롱코스는 NFL 최고의 수비진 중 하나를 자랑했으며, 12승 2패를 기록한 후 플레이오프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와 그가 후에 뛰게 될 오클랜드 레이더스를 꺾고 제12회 슈퍼볼에 진출했다.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그들은 댈러스 카우보이스에게 10대 27로 완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는 앨제이도에게 큰 성공의 해였다. 그는 컨센서스 올-프로와 컨센서스 올-AFC에 선정되었으며, UPI통신이 선정한 AFC 최우수 수비수로 선정되었다. 또한 8새크와 80태클을 기록하며 브롱코스에서 가장 많은 새크를 기록했다.
1978년, 브롱코스는 다시 AFC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첫 라운드에서 최종 챔피언인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패배했다. 앨제이도는 77태클과 9새크를 기록했으며, NFL에서 처음으로 세이프티를 기록했다. (그는 경력 동안 두 번 더 세이프티를 기록하여 역대 통산 2위에 올랐다.) 그는 올-프로 세컨드 팀과 컨센서스 올-AFC에 선정되었다. 1979년, 그는 계약 문제로 팀과 갈등을 겪었고, 브롱코스는 그를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로 트레이드했다. 덴버 브롱코스에서의 8시즌 동안 그는 총 64.5새크를 기록했다.
3.3.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1979년, 앨제이도는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 합류하여 디펜시브 엔드로 활약하며 올-AFC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그는 그해 80태클과 7새크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80년, 브라운스는 AFC 중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디비전 라운드에서 오클랜드 레이더스에게 패배했다. 앨제이도는 9새크를 기록하며 브라운스에서 가장 많은 새크를 기록했으며, 올-프로와 올-AFC에 선정되었다. 1981년에는 83태클과 8.5새크를 기록했지만, 브라운스는 1980년의 11승 5패에서 1981년에는 5승 11패로 추락했고, 그를 1982년 오클랜드 레이더스로 트레이드했다.
3.4. 로스앤젤레스 레이더스
브라운스에서 사실상 방출되면서 앨제이도 내면의 불꽃이 다시 타올랐고,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맹렬히 훈련했다. 그가 레이더스에 합류했을 때 팀은 이미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옮긴 상태였다. 1982년 파업으로 인해 9경기로 단축된 시즌 내내 압도적인 플레이를 보여준 그는 NFL 올해의 복귀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또한 7새크와 30태클을 기록하며 올-AFC에 선정되었다. 이는 그의 12년 경력 중 6번째로 시즌 후 영예를 안은 것이었다.
앨제이도는 1983년 시즌 제18회 슈퍼볼 우승에 기여하며 50태클과 7.5새크를 기록했다. 그는 미래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 하우이 롱과 함께 오른쪽 엔드에서 선발 출전했다. 플레이오프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는 왼쪽 태클 툰치 올루지미(Tunji Olujimi툰치 올루지미영어)를 압도하며 2.5새크를 기록, 팀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슈퍼볼 경기 전반 종료 직전에는 스크린 패스를 받으려던 조 워싱턴을 방해하여 잭 스콰이렉의 인터셉션 리턴 터치다운을 도왔다. 이 플레이에 대해 워싱턴은 홀딩 반칙을 주장하기도 했다. 팀은 38대 9로 승리했고, 앨제이도는 사이드라인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앨제이도는 1984년에도 63태클과 6새크를 기록하며 뛰어난 시즌을 보냈고, NFL 올해의 선수 후보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5년 시즌 중반 부상으로 인해 태클과 새크 기록이 31태클, 3새크로 떨어졌다.
앨제이도는 1985년 시즌이 끝난 후 은퇴했다. 그는 1990년에 현역 복귀를 시도했지만, 훈련 캠프 도중 무릎 부상을 당해 방출되었다. 총 196번의 NFL 경기에 출전하여 112.5새크, 24개의 강제 펌블, 그리고 약 1,000개의 태클을 기록했으며, 1977년과 1978년 두 차례 프로볼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3.5. 은퇴 및 후기 경력
선수 생활 은퇴 후, 앨제이도는 1988년부터 1989년까지 NBC의 NFL 중계에서 컬러 해설자로 활동했다. 2018년에는 프로 축구 연구자 협회(PFRA)가 선정한 'PFRA 매우 훌륭한 명예의 전당 2018년 클래스'에 이름을 올렸다.
4. 플레이 스타일과 성격
라일 앨제이도는 NFL에서 그라운드 위의 '폭력적인 싸움꾼'으로 불렸지만, 실제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성격은 복합적인 면모를 보였다. ESPN은 그를 "짧은 성질로 유명한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선수"라고 묘사했으며, 심지어는 상대 선수의 헬멧을 벗겨 던지는 행동을 하기도 하여, 이로 인해 리그 내에서 헬멧을 던지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칙이 생겨나기도 했다.
앨제이도의 동생인 피터 앨제이도는 그의 격렬한 플레이 스타일이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부재하고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어머니는 과로에 시달렸던 유년기는 앨제이도에게 "지속적으로 맹렬한" 플레이 스타일을 형성하는 용광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동생은 "경기장에서 보였던 그 폭력은 진짜가 아니었다"며, "라일은 미식축구를 세상과 그가 자란 방식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기장 밖에서의 앨제이도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레이더스의 팀 동료였던 그렉 타운젠드(Greg Townsend그렉 타운젠드영어)는 앨제이도의 난폭함이 그의 "이중인격"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타운젠드는 "경기장 밖에서는 그는 온화한 거인이었어요. 정말 배려심 많고, 따뜻하고, 베푸는 사람이었죠"라고 회상했다. 마커스 앨런은 제18회 슈퍼볼 우승이 거의 확정된 순간, 거친 파이팅으로 유명했던 앨제이도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미식축구가 즐겁다고 말하는 녀석은 거짓말쟁이다. 필드는 전장이다. 전장으로 향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하는 녀석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앨제이도는 40야드 대시 4.75초의 빠른 속도와 아마추어 복서를 꺾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패스 러시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5. 미식축구 외 활동
라일 앨제이도는 미식축구 선수로서의 경력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특히 배우로서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으며, 권투 선수로서의 재능을 선보이고 사회 공헌 활동에도 참여했다.
5.1. 배우 경력
앨제이도는 영화와 텔레비전을 넘나들며 배우로서의 경력을 쌓았는데, 주로 젊은층을 겨냥한 코미디 및 어드벤처 역할에 출연했다.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 출연작으로는 어니스트 캠프에 가다에서 악당 건설 노동자 역할, 디스트로이어 (1988년 영화)에서 막을 수 없는 살인마 역할이 있다. 또한 마이크 해머: 살인은 모든 것을 가져간다에서는 악명 높은 보디가드이자 저격수로 등장했다. 그는 1990년 영화 클럽 페드에서 교도소 직원 브로운 역을 맡았고, 영화 네온 시티와 불타는 태양에 공동 출연했다.
텔레비전에서는 1980년대 중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광고에 "잭"과 함께 출연하여 코믹한 연기를 선보였다. 어메이징 스토리 (1985년 TV 시리즈)의 "리모트 컨트롤 맨" 에피소드에서는 레이더스 유니폼을 입은 자신의 모습으로 출연했으며, 1988년에는 스몰 원더 (TV 시리즈) 에피소드에서 역시 자신으로 등장했다. 1989년에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슈퍼 쇼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시트콤 Learning the Ropes에서 고등학교 교사이자 비밀리에 "가면의 광인"이라는 프로 레슬러로 활동하는 이중생활을 하는 주인공을 연기하며 수많은 NWA 레슬링 스타들과 함께 출연했다. 앨제이도는 1991년 단명한 시트콤 굿 스포츠의 첫 회에 라이언 오닐과 패라 포셋과 함께 출연했으며, It's Garry Shandling's Show와 맥가이버 (1985년 TV 시리즈) 에피소드에도 모습을 비췄다.
5.2. 권투 및 기타 활동
앨제이도는 아마추어 권투 선수였으며, 1979년에는 무하마드 알리와 마일 하이 스타디움(Mile High Stadium마일 하이 스타디움영어)에서 친선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수많은 청소년 단체" 활동에 참여했으며, 1977년에는 지역 사회 공헌 활동으로 바이런 "휘저" 화이트 상을 수상했다. 또한 1985년 레이건 행정부가 후원한 반약물 뮤직비디오 Stop the Madness에도 출연하여 약물 근절 캠페인에 동참했다.
q=Mile High Stadium Denver Colorado|position=right
번호 | 결과 | 전적 | 상대 | 유형 | 라운드, 시간 | 날짜 | 장소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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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해당 없음 | 0-0 (1) | 무하마드 알리 | 해당 없음 | 8 | 1979년 7월 14일 | 마일 하이 스타디움, 덴버, 콜로라도주, 미국 | 비공식 경기 |
6. 스테로이드 사용 및 사망
라일 앨제이도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사용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주요 미국 스포츠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그의 경력에 큰 논란을 가져왔고, 결국 그의 사망과 연관되며 스포츠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6.1. 스테로이드 사용 공개 인정
생애 마지막 해, 앨제이도는 결국 그의 죽음을 초래한 뇌종양과 싸우면서 자신의 스테로이드 남용이 치명적인 질병으로 직접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영어)에 기고한 기사를 통해 자신의 스테로이드 남용 사실을 상세히 고백했다.
"저는 1969년에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기 시작했고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이제 저는 아프고, 두렵습니다. 그것은 중독성이 있었고, 정신적으로 중독성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운동선수 90%가 약물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무게 136 kg (300 lb)이 되거나 높이 9.1 m (30 ft)를 뛰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경기장에서 매우 폭력적으로 변했습니다. 경기장 밖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1979년 덴버에서 어떤 남자가 제 차를 들이받았는데, 저는 그를 동네 언덕을 오르내리며 쫓아갔습니다. 그런 짓을 자주 했습니다. 사람을 쫓아가서 차에서 끌어내려 실컷 때렸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를 보세요. 걸을 때 비틀거리고 때로는 누군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질문에 답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억하는 데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앨제이도는 이 글을 통해 스테로이드가 자신을 "성공적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정신적으로 중독적"이었고, 그로 인해 경기장 안팎에서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또한 스테로이드가 자신의 건강을 파괴했다고 주장하며, 다른 선수들이 자신과 같은 비극적인 운명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6.2. 뇌종양 투병 및 사망
라일 앨제이도는 뇌종양 투병 끝에 1992년 5월 14일,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스테로이드 남용이 뇌종양 발병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했으며, 그의 죽음은 스포츠계에 약물 남용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유해는 오레곤주 포틀랜드의 리버 뷰 묘지(River View Cemetery리버 뷰 묘지영어)에 안장되었다. 앨제이도의 고백은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겪고 있는 스테로이드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q=River View Cemetery Portland Oregon|position=right
7. 유산과 영예
라일 앨제이도는 미식축구 선수로서의 뛰어난 업적과 더불어, 스테로이드 사용과 그로 인한 사망이라는 비극적 고백을 통해 스포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운동선수의 삶을 넘어, 스포츠 윤리, 선수 건강, 그리고 약물 남용의 심각성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촉발하는 유산으로 남았다.
그는 1977년 바이런 "휘저" 화이트 상을 수상하며 지역 사회 공헌 활동을 인정받았다. 또한 그의 미식축구 경력을 기리기 위해 2018년에는 프로 축구 연구자 협회가 선정한 'PFRA 매우 훌륭한 명예의 전당 2018년 클래스'에 이름을 올렸다. 사후인 2008년에는 국제 유대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그의 유대인 혈통과 스포츠 업적을 기렸다.
앨제이도의 죽음과 그의 고백은 내셔널 풋볼 리그(NFL)를 비롯한 주요 스포츠 리그에 스테로이드 검사 및 약물 정책 강화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약물 남용의 어두운 이면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후대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건강하고 윤리적인 경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용기 있는 고백은 스포츠계가 성능 향상 약물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8. 같이 보기
- 뇌종양 환자 목록
- 스포츠 도핑 사례 목록
- 유대인 스포츠 선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