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유년기 및 교육
카르바우스키스는 1969년 12월 5일 나이샤이에서 태어났다. 1987년 샤울랴이에 위치한 율리우스 야노니스 중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 리투아니아 농업 아카데미 농학과에 입학하여 1992년에 졸업했다. 젊은 시절 카르바우스키스는 체커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국제 체커와 러시아 체커 부문에서 마스터 후보 자격(qualification degree)을 획득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는 러시아 체커 리투아니아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일원이기도 했다.
1.2. 사업 경력
1993년 카르바우스키스는 회사 아그로콘체르나스(Agrokoncernas)를 설립하고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20년 동안 아그로콘체르나스는 8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는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농업 그룹 중 하나로 성장했다. 카르바우스키스는 이 회사의 모든 소유권을 유지하여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3. 초기 정치 활동
카르바우스키스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리투아니아 국회인 세이마스에 세 차례 선출되었다. 1996년 리투아니아 총선에서는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샤울랴이 (농촌) 단일 의석 선거구(45번)에서 제7대 세이마스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8년에는 리투아니아 농민당(LVP)에 입당하여 당의 의장직을 맡았다. 1997년과 2000년에는 샤울랴이 지역 자치단체 의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2000년 리투아니아 총선에서는 LVP 대표로 자신의 지역구에서 재선되었으며, 제8대 세이마스에서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부의장을 역임했다.
1.4. 리투아니아 농민녹색연합 의장 및 2016년 총선 승리
2009년부터 카르바우스키스는 리투아니아 농민인민연합의 의장으로 재직했으며, 이 당은 2012년에 리투아니아 농민녹색연합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그가 이끄는 이 당은 2016년 리투아니아 총선에서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며 리투아니아 정치계를 놀라게 했다. 선거 당시 리투아니아 농민녹색연합은 겨우 한 명의 현역 의원만을 보유한 중도 우파의 군소 정당이었으나, 총 141석 중에서 38%에 달하는 54석을 획득하며 제1당으로 급부상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승리를 당시 리투아니아 국민들이 겪고 있던 저임금, 경기 침체, 그리고 인구 유출에 대한 깊은 실망감의 결과로 분석했다. 카르바우스키스 의장은 선거 승리 후 "경제성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 자신은 카우나스에 있는 실라이냐이 단일 의석 선거구에서 의석을 확보하며 국회에 진출했다.
1.5. 주요 정치적 활동
카르바우스키스는 2014년 리투아니아 헌법 국민투표의 주요 주최자 중 한 명이었다. 이 국민투표는 리투아니아 토지의 외국인 소유를 금지하려는 목적을 가졌는데, 이는 리투아니아의 유럽 연합 가입 조건에 위배되는 내용이었다.
2. 사회 공헌 및 기타 활동
카르바우스키스는 자선 활동과 문화 예술 분야에 기여하며 다양한 대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알코올이 없는 야외 여름 엔터테인먼트 축제인 나이샤이 가족 축제를 시작했다. 또한 자신이 태어난 나이샤이 마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TV 시리즈 《나이샤이의 여름》(Naisių vasara나이샤이의 여름리투아니아어)의 작가이자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2013년에는 리투아니아의 유명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안드리우스 마몬토바스와 협력하여 자선단체 '아이들을 밝히자'(Švieskime vaikus아이들을 밝히자리투아니아어)를 공동 설립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활동하여 2006년부터 리투아니아 체커 연맹 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2009년부터 리투아니아의 역사적인 말 품종인 제마이투카스 연합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3. 논란 및 의혹
카르바우스키스와 그의 소유 기업 아그로콘체르나스는 여러 비판과 의혹에 직면했다.
OCCRP의 언론 조사에 따르면, 카르바우스키스와 그의 가족은 '유령 회사'(shell companies)를 이용하여 한 개체가 소유할 수 있는 토지 양에 대한 독점 금지 규제를 회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 나아가, 아그로콘체르나스가 이러한 편법을 통해 유럽 연합으로부터 추가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조사는 카르바우스키스가 회사로부터 배당금을 받아 세금을 내는 대신, 회사 재정을 이용하여 자신의 개인 주택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고 지적하며 탈세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4. 개인 생활
카르바우스키스의 개인적인 삶은 대중에게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카르바우스키스는 현재 아내 리나와 결혼하여 두 아들 유스티나스와 만타스를 두고 있다. 그의 형 민다우가스 카르바우스키스는 모스크바 마야콥스키 극장의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첫 번째 아내 유라테와는 이혼한 상태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카르바우스키스는 리투아니아 이교를 지지하며, 신이교 운동인 롬우바를 자신이 태어난 나이샤이로 초청하여 여러 행사와 축제를 주최하기도 했다. 비록 그 자신이 롬우바 운동의 회원은 아니지만, 이 운동의 대사제인 이니야 트린쿠니에네는 카르바우스키스와 그의 정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