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두경(杜瓊, 杜瓊Dù Qióng중국어, 160년대 ~ 250년)은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관료이자 학자로, 자는 백유(伯瑜)이다. 촉군 성도현(蜀郡成都縣), 즉 현재의 사천성 청두시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천문학과 점술에 깊이 통달했으며,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여 촉한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비와 그의 아들 유선의 치세 동안 간의대부(諫議大夫), 좌중랑장(左中郎將), 대홍려(大鴻臚), 태상(太常) 등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두경은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적인 교류를 최소화하고 학문에 몰두하는 삶을 살았다. 당시 촉한의 주요 인사였던 장완과 비의로부터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다. 특히 그의 천문학 및 점술 지식은 후대의 학자 초주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촉한의 미래에 대한 그의 예언적 통찰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韓詩章句한시장구중국어》라는 주요 저술을 남겼으나, 그의 학문이 후대에 계승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다. 두경은 250년 80여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역사적 기록과는 달리 주로 문관이자 때로는 장수의 보조 역할로 묘사된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두경은 160년대에 태어나 250년에 80여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자는 백유(伯瑜)이며, 촉군 성도현(蜀郡成都縣) 사람으로, 이는 현재의 쓰촨성 청두시에 해당한다.
2.1. 학문적 배경
두경은 젊은 시절 임안(任安)에게서 학문을 배워 그의 술법, 즉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을 깊이 익혔다. 그는 특히 천문학과 점술(예언)에 전문성을 보였다. 또한, 하종(何宗)과 함께 《주역》을 공부했으며, 같은 스승 밑에서 두위(杜微)와도 동문이었다.
2.2. 초기 경력
두경은 유장이 익주를 다스리던 시절에 천거되어 종사(從事) 관직을 시작했다. 214년,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익주를 평정하고 그 목(牧)을 겸하게 되자, 두경은 그의 행정부에서 의조종사(議曹從事)로 발탁되어 일하게 되었다.
3. 촉한에서의 관직 경력
두경은 유비와 유선 시대에 걸쳐 촉한에서 중요한 관직을 수행하며 국가 운영에 기여했다.
3.1. 유비의 황제 즉위 주장
220년 후한이 멸망하고 조위의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두경은 양천후(陽泉侯) 유표(劉豹), 청의후(淸義侯) 상거(向擧), 편장군(偏將軍) 장예와 황권, 대사마속(大사마屬) 은순(殷純), 익주 별가종사(益州別駕從事) 조작(趙莋), 치종종사(治中從事) 양홍(楊洪), 종사좨주(從事祭酒) 하종(何宗), 권학종사(勸學從事) 장상(張爽)과 윤묵, 초주 등 여러 관료들과 함께 상언하여 유비가 황제에 오르기를 강력히 주장했다. 두경은 특히 점술 서적들을 인용하며 유비의 황제 즉위를 촉구했으며, 이에 따라 유비는 221년 촉한을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3.2. 유선 치하에서의 활동
223년 유비가 사망한 후, 두경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유선의 치세에도 계속해서 관직을 수행했다. 그는 간의대부(諫議대부)에 임명되었고, 이후 좌중랑장(左중랑장), 대홍려(大홍려), 태상(태상)으로 승진했다. 234년,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사망하자, 유선은 두경에게 조서를 내려 제갈량의 무덤에 조문하고 승상 무향후(武향후)의 인수를 가지고 가서 제갈량을 제사 지내고 그의 시호인 충무후(충무후)를 추서하는 임무를 맡겼다.
4. 천문학 및 점술 전문성
두경은 천문학과 점술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초기에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거나 천문을 직접 관측하여 논하는 일이 드물었다. 후배 학자인 초주가 끊임없이 그의 견해를 묻자, 두경은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초주에게 "이러한 술법을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렵다. 반드시 스스로 직접 관측하여 천문의 모습과 형태를 알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밤낮으로 고통스럽게 노력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데, 그 후에는 미래의 비밀이 누설될까 걱정하게 된다.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나는 더 이상 천문을 관측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초주가 과거의 주징군(周徵君)이 "도고(當塗高)는 응당 위(魏)를 가리킨다"고 한 말의 의미를 묻자, 두경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위(魏)는 대궐 문 이름이기도 하다. 도로에 닿아 있고 높이 솟아 있으니, 성인(聖人)이 위나라와 대궐 문 이름 '위'가 같은 글자인 것을 취하여 말한 것이다." 초주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두경은 이어서 말했다. "옛날에는 관직명에 조(曹)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 한나라가 시작된 이래로 모든 관직명에 조(曹)자를 쓰게 되었으니, 관리를 속조(屬曹)라 하고, 관졸을 시조(侍曹)라 했다. 이것은 아마 하늘의 뜻일 것이다." 이는 조위가 후한을 대체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적 해석이었다.
5. 성격 및 평가
두경은 성품이 조용하고 과묵하여 말이 적었다. 그는 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며 세상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직장 밖에서는 동료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고, 비업무 시간에는 대부분 자신의 거처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완과 비의와 같이 234년부터 253년까지 촉한 중앙 정부의 수장을 역임했던 인물들은 모두 두경의 기량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존경했다.
6. 저술 및 학문적 유산
두경은 생전에 《韓詩章句한시장구중국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이는 한영(韓嬰)의 《시경》 버전에 대한 상세한 주석서로, 10만 자 이상의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학술을 자식들에게 전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학문적 유산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자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화양국지華陽國志중국어》의 기록에 따르면, 고완(高玩)이 두경의 제자였다고 전해지며, 고완은 훗날 진나라에서 태사령(태사령)을 역임했으므로 두경의 지식 중 일부를 계승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두경의 학문은 직접적인 후계자가 없다는 기록과 일부 제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공존한다.
7. 사망
두경은 250년, 80여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시기는 촉한의 연호인 연희(延熙) 13년에 해당한다.
8. 후대의 영향
두경의 학문적 견해와 예언 해석은 후대의 저명한 학자 초주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주는 두경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점술 사상을 발전시켰다.
초주는 두경의 방식에 따라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춘추》에는 진 목후가 태자를 '구(仇)'라 하고, 동생을 '성사(成師)'라 명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하 사복(師服)이 '임금께서 아들들의 이름을 이상하게 지으셨습니다! 좋은 짝을 비(妃)라 하고, 원망스러운 짝을 구(仇)라 합니다. 이제 임금께서 태자를 '구'라 하고 동생을 '성사(군대를 이룬다)'라 하셨으니, 이는 동생이 형을 대신하여 반란을 일으킬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과연 사복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한 영제가 두 아들을 '사후(史侯)'와 '동후(董侯)'라 불렀는데, 둘 다 황제가 되었으나 결국 폐위되어 제후로 강등되었으니, 이는 사복의 말과 유사합니다. 선제(유비)의 휘(諱)는 '비(備)'이니, 그 뜻은 '갖춤'이요, 후주(유선)의 휘는 '선(禪)'이니, 그 뜻은 '넘겨줌'입니다. 이는 유씨가 이미 '갖출' 것을 다 '갖추었으니', 마땅히 남에게 '넘겨줄' 때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 이름들이 진 목후와 한 영제의 아들들 이름보다 더욱 불길합니다." 이 예언은 촉한의 멸망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262년, 환관 황호가 촉한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궁궐 안의 큰 나무가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초주는 이를 깊이 근심했으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기둥에 "뭇이 크고, 기약이 모이며, 갖추어 주니, 어찌 다시 서겠는가?" (衆而大,期之會,具而授,若何復?)라는 12글자를 썼다. 이는 '조(曹)는 무리이고, 위(魏)는 크다'는 의미로, '뭇이 크니 천하가 마땅히 모일 것이고, 갖추어 주니 어찌 다시 설 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1년 뒤인 263년 조위에 의한 촉한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촉한이 멸망한 후 사람들이 초주의 정확한 예언을 칭찬하자, 그는 "이것은 비록 나 스스로 추론한 것이지만, 두경의 말에서 비롯되어 이를 확장시킨 것일 뿐, 특별히 신이한 사상이나 독자적으로 이른 특이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는 두경의 학문적 통찰이 초주의 예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또한, 두경의 동족 또는 후예로 추정되는 두진(杜禎)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두진은 자가 문연(文然)으로, 두경과 같은 성도현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유은(柳隱), 유부(柳孚)와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승상 제갈량에 의해 익주 별가종사로 발탁되었다. 촉한 멸망 후에는 진나라에서 관직을 지냈으며, 부절현령(부절현령)을 시작으로 양주(양주)와 익주(익주)의 도독(도독)에까지 올랐다. 두진의 아들 두진(杜珍)은 자가 백중(백중)으로 약양호군(약양호군)을 지냈고, 손자인 두미(杜彌, 또는 두도(杜韜))는 경문(경문)이라는 자를 가졌으며, 진나라에 저항하는 촉 유민 봉기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9.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두경은 제80회, 제85회, 제100회에 등장한다. 역사서에서 보이는 예언가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주로 문관으로서의 역할이나 때로는 장수의 보조 역할로 묘사된다.
제80회에서는 제갈량이 유비를 황제에 오르게 하기 위해 병을 칭하고 유비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을 때, 병풍 뒤에 숨어 있던 문무관원 중 한 명으로 나온다. 그는 유비에게 황제 즉위를 건의하는 관원 중 하나로 묘사된다.
제85회에서는 조위의 조비와 사마의가 맹달, 맹획, 손권, 가비능 등을 포섭하고 조진에게 명하여 다섯 길로 각각 10만 군사를 보내 촉한을 침공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주 유선이 크게 놀라 황문시랑(황문시랑) 동윤과 간의대부 두경을 명하여 승상 제갈량이 왜 대전에 나타나지 않는지를 묻게 한다. 두경은 동윤과 함께 승상부로 가서 제갈량을 찾았으나, 제갈량은 병이 났다는 핑계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두경은 후주에게 돌아가 친히 승상부로 갈 것을 상주했고, 유선은 승상부로 가서 제갈량의 대책을 듣게 된다.
제100회에서는 장수로서 등장하여, 제갈량의 명령을 받아 위연, 장억, 진식과 함께 기곡(기곡)으로 출진한다. 제갈량은 등지를 보내 위군의 매복에 주의할 것을 당부했으나, 진식과 위연은 제갈량을 비웃으며 대비하지 않고 진군했다가 사마의가 준비한 복병에 걸려 크게 패한다. 두경과 장의는 겨우 포위를 빠져나온 위연과 진식을 접응하여 추격해 온 위군을 물리친다. 나중에 기산(기산)으로 돌아와, 위연, 장억, 진식과 함께 패배의 죄를 청한다. 제갈량은 패배의 주범인 위연과 진식 중에서 진식을 주동으로 삼아 죽이고 위연은 후방에 두었다. 역사서에는 두경이 장수로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소설 작가가 두경의 관직 중 하나인 좌중랑장(좌중랑장)을 바탕으로 이러한 묘사를 추가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