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 및 선수 경력 시작
도널드 에드워드 윌슨의 초기 생애와 학업 배경, 그리고 그가 프로 야구 선수로서 경력을 시작하게 된 과정은 그의 선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학력 및 아마추어 시절
윌슨은 캘리포니아주 컴턴에 위치한 센테니얼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같은 지역의 컴턴 커뮤니티 칼리지에 진학하여 학업과 야구를 병행했다. 대학 시절의 활약을 바탕으로 1966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스카우트되면서 그의 프로 경력이 시작되었다.
1.2. 프로 데뷔 및 초기 활동
1966년 9월 29일, 윌슨은 시즌 막바지에 메이저 리그에 콜업되어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6이닝 동안 2점을 내주면서도 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팀의 3대2 승리에 기여했다. 1967년은 윌슨에게 첫 풀 시즌이었으며, 그는 31경기(28선발)에 등판하여 10승 9패 평균자책점 2.79를 기록했다. 이 시즌 동안 그는 184이닝을 소화하며 69개의 볼넷과 159개의 탈삼진을 기록했으나, 10개의 폭투를 기록하는 등 제구에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경력 초반에는 다소 불안한 제구력을 보였지만, 그는 내셔널 리그에서 가장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2. 메이저 리그 경력
도널드 윌슨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핵심 투수로 활약하며 수많은 업적과 기록을 남겼다. 그의 경력은 두 번의 노히트 노런,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 그리고 올스타전 선정 등 중요한 이정표로 가득하다.
2.1. 주요 성과 및 기록
윌슨의 메이저 리그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 중 하나는 두 차례의 노히트 노런이었다.
첫 번째 노히트 노런은 1967년 6월 18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애스트로돔에서 2대0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달성되었다. 이 노히트 노런은 돔 구장 또는 인조 잔디에서 기록된 최초의 노히트 노런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윌슨은 이 경기에서 15개의 탈삼진을 기록했으며, 마지막 아웃 카운트는 전설적인 타자 행크 에런을 상대로 잡아냈다.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은 1969년 5월 1일,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4대0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나왔다. 이 노히트 노런은 전날 레즈의 짐 말로니가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다음 날에 이루어진 것으로,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백투백 노히트 노런이 기록된 사례였다. 이 경기 9일 전 레즈에게 14대0으로 대패했던 윌슨에게는 일종의 설욕전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1968년 7월 14일 크로슬리 필드에서 열린 신시내티 레즈와의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에서 18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휴스턴 애스트로스 구단 단일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 1969년 시즌에는 개인 최고인 235개의 탈삼진을 기록했으며, 이 시즌에는 래리 디어커(232개)와 톰 그리핀(200개)도 200개 이상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애스트로스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한 팀에서 세 명의 투수가 200탈삼진을 달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1971년은 그의 경력에서 최고의 시즌으로 평가된다. 그는 16승 10패와 함께 개인 최고 평균자책점인 2.45를 기록했다. 또한 18번의 완투와 268이닝을 소화하며 모두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고, 180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는 1971년 올스타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정되었으며, 팀 내 MVP로도 선정되었다. 올스타전에서는 7회와 8회에 등판하여 1개의 볼넷과 2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1972년 9월 11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윌리 크로퍼드를 상대로 1000번째 통산 탈삼진을 달성했다. 그는 1974년 7월 30일, 리버프론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8이닝 4실점 9탈삼진으로 승리하며 투수로서 통산 100승을 달성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1974년 9월 28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2안타 5대0 완봉승이었다.
2.2. 시즌별 활약
도널드 윌슨의 메이저 리그 경력은 해마다 성장과 변화를 보였다.
시즌 | 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세이브 | 승 | 패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폭투 | 삼진 | 병살타 | 보크 | 실점 | 자책점 | 방어율 | WHIP |
---|---|---|---|---|---|---|---|---|---|---|---|---|---|---|---|---|---|---|---|---|---|---|---|---|
1966 | HOU | 1 | 0 | 0 | 0 | 0 | 1 | 0 | 0 | 1.000 | 22 | 6.0 | 5 | 1 | 1 | 0 | 0 | 7 | 0 | 0 | 2 | 2 | 3.00 | 1.00 |
1967 | HOU | 31 | 28 | 7 | 3 | 1 | 10 | 9 | 0 | .526 | 757 | 184.0 | 141 | 10 | 69 | 2 | 7 | 159 | 10 | 3 | 67 | 57 | 2.79 | 1.14 |
1968 | HOU | 33 | 30 | 9 | 3 | 0 | 13 | 16 | 0 | .448 | 884 | 208.2 | 187 | 9 | 70 | 5 | 4 | 175 | 9 | 1 | 85 | 76 | 3.28 | 1.23 |
1969 | HOU | 34 | 34 | 13 | 1 | 0 | 16 | 12 | 0 | .571 | 979 | 225.0 | 210 | 16 | 97 | 8 | 9 | 235 | 16 | 3 | 119 | 100 | 4.00 | 1.36 |
1970 | HOU | 29 | 27 | 3 | 0 | 1 | 11 | 6 | 0 | .647 | 806 | 184.1 | 188 | 15 | 66 | 4 | 7 | 94 | 15 | 1 | 92 | 80 | 3.91 | 1.38 |
1971 | HOU | 35 | 34 | 18 | 3 | 1 | 16 | 10 | 0 | .615 | 1067 | 268.0 | 195 | 15 | 79 | 3 | 7 | 180 | 5 | 0 | 80 | 73 | 2.45 | 1.02 |
1972 | HOU | 33 | 33 | 13 | 3 | 2 | 15 | 10 | 0 | .600 | 927 | 228.1 | 196 | 16 | 66 | 2 | 2 | 172 | 11 | 0 | 79 | 68 | 2.68 | 1.15 |
1973 | HOU | 37 | 32 | 10 | 3 | 0 | 11 | 16 | 2 | .407 | 988 | 239.1 | 187 | 21 | 92 | 6 | 7 | 149 | 7 | 1 | 94 | 85 | 3.20 | 1.17 |
1974 | HOU | 33 | 27 | 5 | 4 | 0 | 11 | 13 | 0 | .458 | 875 | 204.2 | 170 | 16 | 100 | 2 | 4 | 112 | 4 | 1 | 80 | 70 | 3.08 | 1.32 |
통산 | 266 | 245 | 78 | 20 | 5 | 104 | 92 | 2 | .531 | 7305 | 1748.1 | 1479 | 119 | 640 | 32 | 47 | 1283 | 77 | 10 | 698 | 611 | 3.15 | 1.21 |
- 1969년 볼넷(16개)과 1971년 피안타(195개)는 리그 최저 기록으로, 이는 그의 강한 구위와 효율적인 피칭을 나타낸다.
- 통산 기록에서 1748.1 이닝 동안 1283개의 삼진을 기록하며 뛰어난 삼진 능력을 입증했다.
- 1969년 그는 애스트로스의 개막전 선발 투수였다. 애스트로스가 창단 8년 동안 8번째로 다른 개막전 선발 투수를 기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 1974년은 그의 마지막 시즌이었으며, 11승 13패에 평균자책점 3.08을 기록하며 중간 정도의 성적을 보였다. 204.2이닝 동안 112개의 삼진을 기록했으나, 100개의 볼넷을 허용하며 개인 최다 볼넷을 기록했다.
2.3. 투구 스타일
도널드 윌슨은 내셔널 리그에서 손꼽히는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다. 그의 주요 구종으로는 하드 슬라이더, 커브, 그리고 체인지업 등이 있었다. 그는 공의 회전수와 속도를 활용하여 타자들을 압도하는 스타일을 지녔으며, 특히 초기에 보였던 제구 불안을 극복하며 더욱 완성도 높은 투수로 발전했다.
3. 개인 생활
도널드 윌슨은 휴스턴의 폰드런 사우스웨스트 지역에 위치한 자택에서 아내 버니스, 딸 데니스, 아들 도널드 "알렉스"와 함께 살았다. 그의 가족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지만, 불행히도 이 가족은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4. 사망
도널드 윌슨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야구계와 그의 가족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를 넘어 여러 의문과 추측을 남겼다.
4.1. 사망 경위
1975년 1월 5일, 도널드 윌슨은 휴스턴 자택의 차고에 주차된 자신의 포드 썬더버드 승용차 조수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아내 버니스가 시동이 걸린 채 주차되어 있는 차 안에서 그를 발견했다. 차고는 집과 연결되어 있었고, 차에서 배출된 일산화탄소 가스가 차고 바로 위 침실에서 잠자고 있던 그의 아들 도널드 "알렉스" (5세)를 치명적으로 질식시켜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의 딸 데니스 (9세)는 다른 침실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아내 버니스 역시 일산화탄소 흡입과 함께 자신이 어떻게 다쳤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턱 부상으로 치료를 받았다.
4.2. 공식 조사 및 이론
1975년 2월 5일, 해리스 카운티 검시관 조지프 야킴칙 박사는 도널드 윌슨과 그의 아들 알렉스의 죽음을 우발적인 사고사로 판정했다. 야킴칙 박사의 부검 보고서에 따르면 윌슨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67%였다. 이러한 수치를 바탕으로 제기된 한 가지 이론은 윌슨이 차고로 차를 몰고 들어와 자동 차고 문을 닫은 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차량을 그대로 두어 일산화탄소 중독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5. 추모 및 영예
도널드 윌슨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추모 활동과 영예가 이어졌다.
5.1. 등번호 영구 결번
윌슨의 사망 이후,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1975년 4월 13일 그의 등번호 '4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이는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고, 팀에 대한 그의 공헌을 영원히 기리기 위한 조치였다. 다음 시즌, 애스트로스는 팀의 "레인보우 저지" 왼쪽 소매에 흰색 등번호 40번이 새겨진 검은색 원형 패치를 달고 경기에 임하며 윌슨을 추모했다.
5.2. 영향 및 기타 추모 활동
도널드 윌슨은 비록 짧은 경력을 보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야구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명예의 전당인 '월 오브 아너(Wall of Honor)'에 헌액되어 그를 기리는 명패가 설치되었다. 이는 그의 뛰어난 업적과 팀에 대한 헌신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조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