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도쿠가와 이에하루는 1737년 6월 20일(음력 5월 22일)에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장남으로 에도성 니시노마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우메가키 미치노리(梅渓通条우메가키 미치노리일본어)의 딸인 우메가키 사치코(梅渓幸子우메가키 사치코일본어)로, 사후 시신인(至心院시신인일본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유년명은 다케치요(竹千代다케치요일본어)였다.
이에하루는 어린 시절부터 그 총명함으로 인해 제8대 쇼군이자 조부인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깊은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다. 요시무네는 언어 표현이 불분명하여 정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에하루의 아버지 이에시게에게 전수하지 못했던 제왕학 등의 교육을 이에하루에게 직접 지도했다. 이에하루가 문무에 모두 능했던 것은 요시무네의 이러한 직접적인 교육과 영향이 매우 컸다.
1741년 8월, 이에하루는 원복(元服원복일본어, 성인식)을 치르고 곤다이나곤(権大納言곤다이나곤일본어)에 서임되었다. 1754년 12월에는 간인노미야 나오히토 친왕의 딸인 이소노미야 도모코(五十宮倫子女王이소노미야 도모코일본어)와 결혼했다.
2. 가족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시게
- 어머니**: 오코노카타(お幸の方오코노카타일본어, 1728년 사망), 사후 신신인(至心院시신인일본어)
- 정실**: 이소노미야 도모코(五十宮倫子女王이소노미야 도모코일본어, 1738년 ~ 1771년), 사후 신칸인(心観院신칸인일본어). 간인노미야 나오히토 친왕의 딸.
- 장녀**: 치요히메 (千代姫, 1756년 ~ 1757년), 사후 카코인(華光院카코인일본어).
- 차녀**: 만쥬히메 (万寿姫, 1761년 ~ 1773년), 사후 조다이인(乗台院조다이인일본어). 도쿠가와 하루요시의 약혼자였으나 요절했다. 어머니 도모코 사망 후 이에하루의 측실 오마키노카타(お巻の方오마키노카타일본어)에게 양육되었다.
- 측실**: 오치호노카타(お知保の方오치호노카타일본어, 1737년 ~ 1791년), 사후 렌코인(蓮光院렌코인일본어). 쓰다 노부나리의 딸.
- 장남**: 도쿠가와 이에모토 (徳川家基, 1762년 ~ 1779년).
- 측실**: 오시나노카타(お品の方오시나노카타일본어, 1778년 사망), 사후 요렌인(養蓮院요렌인일본어). 후지이 카네쓰네의 딸.
- 차남**: 도쿠가와 사다지로 (徳川貞次郎, 1762년 ~ 1763년).
- 측실**: 오미요노카타(お美代の方오미요노카타일본어)
- 양자**:
- 도쿠가와 이에나리 (徳川家斉) -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하루사다의 장남.
- 타네히메 (種姫, 1765년 ~ 1794년), 사후 테이쿄인(貞恭院테이쿄인일본어). 도쿠가와 무네타케의 딸. 도쿠가와 하루토미의 아내.
3. 쇼군 취임
1760년 5월 3일, 이에하루는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은거에 따라 도쿠가와 종가의 가독(家督)을 상속받았다. 이에시게의 은거는 그의 건강 문제와 함께, 언어 표현이 불분명했던 이에시게의 '입' 역할을 해왔던 오오카 다다미쓰가 사망하면서 이에시게가 더 이상 정무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가독 상속 후, 같은 해 9월 2일 이에하루는 정식으로 쇼군 선하(宣下)를 받아 제10대 쇼군직을 계승했으며, 동시에 정2위 내대신(内大臣내대신일본어)으로 승진했다.
4. 재임 기간 및 통치
도쿠가와 이에하루는 쇼군으로서 1760년부터 1786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아버지 이에시게의 유언에 따라 다누마 오키쓰구를 소바요닌(側用人소바요닌일본어)으로 중용했으며, 로주 마쓰다이라 다케모토 등과 함께 정치에 힘썼다. 그러나 마쓰다이라 다케모토가 사망하자, 이에하루는 다누마를 로주로 임명하고 막부 정치를 전적으로 맡겼으며, 자신은 점차 쇼기 등의 개인적인 취미에 몰두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 시기는 다누마 오키쓰구의 권한이 막강했던 '다누마 시대'(田沼時代다누마 시대일본어)라고 불린다.
다누마 오키쓰구는 일본 경제 개혁을 시도하며 대담한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인바 늪과 테가 늪의 대규모 간척 사업을 실시하여 농지를 확장하려 했으며, 에조치(현재의 홋카이도) 개발과 러시아와의 무역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다누마는 동시에 에도 시대의 가장 부패하고 사악한 관리로 알려져 있었는데, 막부에서 높은 직위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다누마 오키쓰구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5. 재임 중 주요 사건 및 재해
이에하루의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중요한 사건과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1764년, 이에하루는 조선 통신사를 에도에서 영접한 마지막 쇼군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조선과 일본 간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772년에는 에도에서 대규모 메이와 대화재(明和の大火메이와 대화재일본어)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1781년, 고카쿠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여 새로운 연호인 '덴메이'(天明덴메이일본어)가 제정되었다. 같은 해 이에하루는 천황의 구교(公卿구교일본어) 중 우대신(右大臣우대신일본어)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당시 쇼군에게는 매우 드물고 큰 영광으로 여겨졌다.
1782년에는 일본 전역에 걸쳐 대규모 덴메이 대기근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쿠쓰키 마사쓰나(朽木昌綱쿠쓰키 마사쓰나일본어)는 중국과 일본의 은화에 대한 분석서인 『신선전보』(Sin sen sen pou신선전보중국어)를 천황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1783년, 시나노국의 아사마산이 대규모로 분화(덴메이 대분화)하여 화산재와 용암으로 주변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이는 이미 시작된 덴메이 대기근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일본학자 이삭 티치싱이 1820년에 발표한 아사마산 분화 기록은 서양에 알려진 최초의 기록이었다.
1784년, 950년 전 사망한 진언종의 창시자 구카이를 기리는 전국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다. 같은 해 다누마 오키쓰구의 아들인 다누마 오키토모가 에도성 내부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키토모는 연소한 와카도시요리(若年寄와카도시요리일본어)였으며, 국무 회의가 끝난 후 아버지와 함께 가마로 돌아가던 중 살해되었다. 이 사건에는 막부 고위 인사의 연루가 의심되었으나, 암살자 사노 마사코토(佐野政言사노 마사코토일본어) 외에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 암살 사건으로 인해 다누마가 추진하던 막부 내의 자유화 개혁과 쇄국 정책 완화가 저지되었다.
이 시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데지마 상관장 이삭 티치싱은 이에하루를 알현했으며, 란가쿠(蘭学란가쿠일본어, 서양 학문)가 일본에서 크게 번성했다.
6. 후계자 문제
1779년 2월, 이에하루의 유일한 아들이자 세자였던 도쿠가와 이에모토가 18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이에하루에게는 다른 아들이 없었고, 이에하루의 동생인 도쿠가와 시게요시(徳川重好도쿠가와 시게요시일본어) 또한 자식이 없었기에 쇼군 후계자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졌다.
이에하루는 1781년 2월 이에모토의 3주기 법요를 마친 후, 4월에 로주 다누마 오키쓰구, 와카도시요리 사카이 다다야스(酒井忠休사카이 다다야스일본어), 루스이(留守居루스이일본어) 요다 마사쓰구(依田政次요다 마사쓰구일본어) 세 명에게 쇼군 후계자로 삼을 양자 인선 임무를 명했다. 그 결과, 윤5월 18일 고산쿄의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도쿠가와 하루사다의 적자 도요치요(豊千代도요치요일본어)로 결정되었고, 11월 2일 도요치요는 이에나리(家斉이에나리일본어)로 개명했다. 1782년 4월 2일에는 종2위 곤다이나곤(権大納言곤다이나곤일본어)에 서임되었다.
이에나리를 쇼군 후계자로 결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다누마 오키쓰구였으며, 1781년 7월 15일 이에하루로부터 양자 인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0000 석이 가증되었다. 역사학자 기타지마 마사모토는 이 후계자 결정에 어떤 이면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오키쓰구의 동생인 다누마 오키마사(田沼意誠다누마 오키마사일본어)와 그의 아들 다누마 오키무네(田沼意致다누마 오키무네일본어) 등이 가로(家老가로일본어)로서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와 통하고 있었기에, 오키쓰구와 도쿠가와 하루사다가 필연적으로 쇼군 후계자를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7. 개인 생활 및 관심사
이에하루는 막부 정무를 가신들에게 맡기고 개인적인 취미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취미 분야에서는 높은 능력을 보였다. 이 때문에 쇼군으로서 주체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단순히 의욕이 없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는 학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특히 서화에 능했다. 쇼기를 매우 즐겨 두었으며, 7단(段)을 인정받을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 그의 기보(棋譜기보일본어)가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과거 간사이 쇼기 회관의 쇼기 박물관 웹사이트에서는 "주변에서 약간 느슨하게 대국하는 듯한 느낌이 기보에서 느껴져 솔직히 실력 7단은 의문이지만, 매우 훌륭한 스타일의 가벼운 기풍으로 현재 아마추어 고단자의 실력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이에하루는 새로운 쇼기 용어를 고안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오른쪽 위에서부터 '이로하니호헤토치리누루오' 등으로 불렀다. 그는 쓰메쇼기(詰将棋쓰메쇼기일본어, 막힌 장기)를 창작하는 재능이 특히 뛰어났으며, 도식집 『고센 쇼기 코카쿠』(御撰象棊攷格고센 쇼기 코카쿠일본어) 100번을 저술했다. 쓰메쇼기 작가로도 유명한 프로 기사 후타카미 다쓰야(二上達也후타카미 다쓰야일본어)는 이에하루의 실제 대국 실력에 대해서는 "결국은 아마추어의 취미"라고 일축했지만, 쓰메쇼기 작품에 대해서는 "다른 추종을 불허하는 명작·호작을 남겼다"고 극찬했다. 그는 또한 시치코쿠 쇼기(七国象棋시치코쿠 쇼기일본어)를 즐겨 했다. 한편, 대국 중에 어려운 국면에서 '기다렸다'고 하며 말을 원래 위치로 되돌리는 등 품행이 좋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쇼군의 기상 시간은 오전 6시로 정해져 있었으나, 50세 가까이 된 이에하루는 일찍 잠에서 깨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다다미방 안에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용히 오가며 오전 6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화장실에 갈 때도 당번인 오난도야쿠(御納戸役오난도야쿠일본어)를 깨우지 않으려 발소리를 죽여 복도를 걸었다고 한다.
그는 조부 요시무네와 같은 명군이 되려 항상 의식했으며, 새로운 음식이 나오면 "이것은 선선대(요시무네)께서도 드셨던 것인가?"라고 확인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쇼군으로서의 사생활에서는 요시무네 이상으로 검소하고 절약에 힘썼으며, 오오쿠(大奥오오쿠일본어)의 경비를 요시무네 시절보다 30% 더 절감했다. 조부 요시무네와 마찬가지로 자주 매사냥을 나갔다.
어느 비가 심하게 내리던 날, 이에하루는 한 근신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는 것을 보았다. 다른 이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가난하여 집이 낡아 비가 새고 있어, 지금쯤 부모님이 고생하고 계실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하루는 얼마나 있으면 고칠 수 있는지 다시 묻자, "100 냥 정도면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하루는 몰래 한숨을 쉬던 근신을 불러 "효를 다하라"며 100 냥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쇼군가에서는 예외적으로 애처가였다. 미다이도코로 이소노미야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었으나(이것 자체가 이례적), 아들을 얻지 못했다. 측근들이 측실을 권해도 좀처럼 선택하지 않다가, 결국 다누마 오키쓰구의 권유로 측실을 두는 대신 다누마도 측실을 두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 이에모토 출생 후에는 이에모토를 이소노미야의 거처에서 양육하게 했다. 또한 두 측실이 각각 남자아이를 낳은 후에는 마치 임무를 마친 듯 더 이상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데지마 상관장 이삭 티치싱은 이에하루를 알현했다.
다이주지에 봉안된 위패가 쇼군의 신장과 거의 같은 높이라는 설이 있으며, 이에 따르면 이에하루의 신장은 153 cm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에시게의 위패는 151 cm인데 실제 신장이 156 cm인 점을 감안하면, 이에하루의 신장은 그보다 높은 158 cm라는 설도 있다.
8. 사망

도쿠가와 이에하루는 1786년 9월 17일(음력 8월 25일) 에도성에서 사망했다. 향년 50세(만 49세). 공식적인 사인은 각기병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추정되며, 만년에는 발의 부종으로 고통받았다고 전해진다.
도쿠가와 가문의 공식 기록인 『도쿠가와 실기』에서는 역대 쇼군의 사망에 대해 기일과 사망 경위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나, 이에하루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서술되어 있어 여러 의혹을 낳았다. 『도쿠가와 실기』는 이에하루의 기일을 9월 8일 사하각(오전 10시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귀한 인물의 사망은 한 달 정도 비밀에 부쳐지는 것이 통례였으며(실제 발인된 날짜는 9월 8일, 양력으로는 9월 29일이었다), 역사학자 기타지마 마사모토는 다누마 오키쓰구가 병을 이유로 저택에 틀어박힌 것이 8월 22일, 로주 사임을 요청한 날이 8월 26일, 로주에서 해임되어 간노마즈메(雁間詰간노마즈메일본어)가 된 것이 8월 27일인 점을 들어, 이에하루가 이 시점에는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 이에하루가 살아있었다면 자신이 신임하는 다누마의 사임을 인정할 리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도쿠가와 실기』에서는 기일 전날인 9월 7일에 "쇼군께서 편찮으시니, 문안을 위해 다음 8일 오전 10시경에 모두 등성하라"는 명이 미리 다이묘와 하타모토에게 내려진 점, 그리고 9월 8일 총등성(総登城총등성일본어) 시 이에하루의 사망이 공식 발표된 점으로 미루어, 이는 이에하루의 사망을 미리 알리기 위해 내려진 명령이며, 이에하루의 사망은 9월 8일보다 이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9월 8일의 기록에도 9월 6일에 위독해졌고, 8일 사하각(오전 10시경)에 "마침내 병이 깊어져 평소의 거처에서 사망하셨다. 향년 50세. 이 날 도쿠가와 고산케를 비롯한 신하들이 아침부터 등성하여 상황을 살피려 했으나, 다이로(大老다이로일본어)와 슈쿠로(宿老슈쿠로일본어)가 나와 그 사실을 전했다"고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에하루의 기일은 8월 20일, 8월 25일, 9월 7일 등의 설이 있다. 9월 7일 설은 이날 내려진 총등성 명령이 근거지만, 기타지마는 충분한 근거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8월 20일 설은 『오키나구사』(翁草오키나구사일본어) 제109권을 근거로 하는데, 이 책에는 "실은 (이에하루는) 8월 20일 밤에 사망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기타지마는 이 책의 저자인 간자와 도코(神沢杜口간자와 도코일본어)가 당시 교토(京都교토일본어)에 있었는데 어떻게 이 중대한 사실을 알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간자와가 다누마가 추천한 의사(히나타 도안, 와카바야시 게이준)의 약을 마신 후 이에하루가 위독해졌기 때문에 다누마가 독을 썼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점, 그리고 8월 20일이 그 의사의 조약이 거부된 날이라고 기록된 점에서, 자신의 예상으로 기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한다.
8월 25일 설은 『덴메이 코세쓰』(天明巷説덴메이 코세쓰일본어)라는 사료를 근거로 한다. 이 사료에는 이에하루의 사망에 대해 당시 신반시(新番士신반시일본어)였던 센고쿠 지효에(仙谷次兵衛센고쿠 지효에일본어) 조의 오오키 이치자에몬(大木市左衛門오오키 이치자에몬일본어)의 직접적인 증언으로 "8월 24일 당번 날, 에도 성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25일 새벽에 갑자기 성 안이 소란스러워지고, 어의(御医어의일본어)들이 모두 등성했으며, 세자 이에나리도 니시노마루에서 급히 달려왔다"는 기사가 실려 있고, 오오키는 "이에하루는 8월 25일 새벽에 사망했다"고 진술했다. 이 설은 『도쿠가와 실기』의 의심스러운 기록 방식에 의해 보강된다. 『실기』에는 8월 25일 기사가 전혀 없으며, 8월 26일 조에 "이 새벽부터 다시 병이 깊어졌다는 소문이 들려, 내반(内班내반일본어)의 신하들이 모두 상직(上直상직일본어)하여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왜 대소동이 일어난 8월 25일에는 기록이 없고, 8월 26일에 대소동이 일어났다고 보충하듯이 기록했는지 의문이다.
사인에 대해서는 각기병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도쿠가와 실기』에는 그 기록이 없고, 수종(水腫수종일본어, 부종)과 감모(感冒감모일본어, 감기)로 기록되어 있다. 애초에 그의 죽음도 갑작스러웠던 것으로 보이며, 기타지마는 심장 또는 신장이 쇠약해져 감기로 인해 악화되어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에하루는 8월 1일 아침 조회에 참석했으므로, 병에 걸렸다면 그 이후일 것이다. 『도쿠가와 실기』는 8월 15일 아침 조회 총등성에 대해 "(이에하루는) 감기를 이유로 전중(殿中전중일본어)에서의 알현을 하지 않았고, 세자 이에나리가 대신 이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같은 날 기사에는 에도 성이 격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고 하며, "이전까지는 쇼군께서 큰 병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날 성중에 나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놀랐다. 이에하루는 쇼군이 된 이래 26년 동안 아침 조회 날에는 아무리 더위와 추위가 심해도 게을리하지 않고 성중에 나와 신하들의 알현을 받았는데, 이런 일이 처음이었으므로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모두들 말했다"고 되어 있다.
이에하루 사망 직전, 다누마 오키쓰구에 의한 독살설이 상당히 퍼졌다. 이에하루를 진찰하던 초기 의사는 고노 센주인(河野仙寿院고노 센주인일본어)이었으나, 이에하루의 병세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8월 15일 오쿠이시(奧医師오쿠이시일본어) 오오야기 덴안(大八木伝庵오오야기 덴안일본어)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8월 16일 다누마가 마을 의사 와카바야시 게이준(若林敬順와카바야시 게이준일본어)과 히나타 도안(日向陶庵히나타 도안일본어)을 추천했고, 이에하루가 이를 받아들여 이 두 사람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8월 19일 오쿠이시로 승격되어 각각 쿠라메(蔵米쿠라메일본어) 200 섬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같은 날, 와카바야시의 조약을 받은 이에하루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고, 8월 20일 오오야기가 다시 약을 조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8월 25일 이에하루는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하루의 죽음은 심상치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덴메이 코세쓰』에서는 기일 다음 날인 8월 26일에 "이에하루의 시체가 심하게 떨리고 토혈이 심했으며, 비정상적인 죽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키나구사』에서는 "오오쿠의 여중들이 입을 모아 다누마 도노모노카미(오키쓰구)가 쇼군께 독약을 올렸다고 수천 명의 여중이 심하게 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이에하루의 죽음은 정치적 의도가 겹쳐 독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하루의 묘소는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의 간에이지(寛永寺간에이지일본어)이다. 사망 후에는 슌묘인(浚明院슌묘인일본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9. 평가 및 유산
도쿠가와 이에하루는 막부 정무를 가신에게 맡기고 취미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쇼군으로서 주체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단순히 의욕이 없었다는 비판적인 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다누마 오키쓰구를 중용한 것 자체가 영단(英断영단일본어, 현명한 판단)이다"라고 높이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원래 다누마를 중용한 것은 이에하루의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시게였으며, 이에시게는 이에하루에게 "다누마는 올바른 사람이니, 앞으로도 마음을 써서 잘 쓰도록 하라"고 유언했다. 다만 다누마를 소바요닌 겸 로주라는 전례 없는 대발탁을 한 것은 이에하루 자신이다.
오키쓰구가 대담한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이에하루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며, 앞서 언급했듯이 이에하루의 죽음으로 다누마는 실각한다. '암군'(暗君암군일본어)이라는 이에하루에 대한 평가는 다누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함께 형성된 것이었으며, 그 다누마에 대한 평가가 크게 개선되려는 현재에도 이에하루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과거의 암군설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0. 가계도 및 계보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주요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도쿠가와 요리노부 | 기슈번 초대 번주 |
조부 | 도쿠가와 미쓰사다 | 기슈번 2대 번주 |
아버지 | 도쿠가와 요시무네 | 제8대 쇼군 |
아버지 | 도쿠가와 이에시게 | 제9대 쇼군 |
본인 | 도쿠가와 이에하루 | 제10대 쇼군 |
아들 | 도쿠가와 이에모토 | 이에하루의 장남 |
양자 | 도쿠가와 이에나리 | 제11대 쇼군 |
이에하루의 이름 '이에하루'(家治이에하루일본어)에서 '治'자(편휘(偏諱편휘일본어))를 받은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니조 하루타카(二条治孝니조 하루타카일본어) (공가)
- 도쿠가와 하루요시(徳川治休도쿠가와 하루요시일본어) (오와리번 9대 번주 도쿠가와 무네쓰구의 장남, 이에하루의 차녀 만쥬히메의 약혼자, 요절)
- 도쿠가와 하루오키(徳川治興도쿠가와 하루오키일본어) (도쿠가와 무네쓰구의 차남, 요절)
- 도쿠가와 하루유키(徳川治行도쿠가와 하루유키일본어) (도쿠가와 무네쓰구의 양자, 요절)
- 도쿠가와 하루사다(徳川治貞도쿠가와 하루사다일본어) (기이 도쿠가와가, 이에하루의 의종형제)
- 도쿠가와 하루토미(徳川治宝도쿠가와 하루토미일본어) (도쿠가와 하루사다의 조카이자 양자, 정실은 이에하루의 양녀)
- 도쿠가와 하루야스(徳川治保도쿠가와 하루야스일본어) (미토 도쿠가와가, 니조 하루타카와 의형제)
- 도쿠가와 하루노리(徳川治紀도쿠가와 하루노리일본어) (도쿠가와 하루야스의 아들)
- 도쿠가와 하루아키(徳川治察도쿠가와 하루아키일본어) (다야스 하루아키, 이에하루의 사촌)
- 도쿠가와 하루사다(徳川治済도쿠가와 하루사다일본어) (히토쓰바시 하루사다, 이에하루의 사촌이자 제11대 쇼군 이에나리의 친아버지)
- 도쿠가와 하루쿠니(徳川治国도쿠가와 하루쿠니일본어) (하루사다의 차남이자 이에나리의 동생)
- 마쓰다이라 하루요시(松平治好마쓰다이라 하루요시일본어)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하루사다의 친형 마쓰다이라 시게토미의 아들)
- 마쓰다이라 하루사토(松平治郷마쓰다이라 하루사토일본어) (후마이, 마쓰에번주)
- 우에스기 하루노리(上杉治憲우에스기 하루노리일본어) (요잔)
- 우에스기 하루히로(上杉治広우에스기 하루히로일본어) (요잔의 양자)
- 마에다 하루나가(前田治脩마에다 하루나가일본어)
- 이케다 하루노리(池田治恕이케다 하루노리일본어)
- 이케다 하루미치(池田治道이케다 하루미치일본어) (이케다 하루노리의 동생, 돗토리번주)
- 이케다 하루마사(池田治政이케다 하루마사일본어) (오카야마번주)
- 모리 하루치카(毛利治親모리 하루치카일본어) (초명 하루모토)
- 하치스카 하루아키(蜂須賀治昭하치스카 하루아키일본어)
- 쿠로다 하루유키(黒田治之쿠로다 하루유키일본어) (히토쓰바시 하루사다의 친동생이자 이에하루의 사촌, 후쿠오카번 쿠로다 가문에 양자 입적)
- 쿠로다 하루타카(黒田治高쿠로다 하루타카일본어) (쿠로다 하루유키의 양사자)
- 나베시마 하루시게(鍋島治茂나베시마 하루시게일본어)
- 호소카와 하루토시(細川治年호소카와 하루토시일본어)
11. 재임 기간의 연호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쇼군 재임 기간인 1760년부터 1786년 동안 사용된 일본의 연호(年号연호일본어)는 다음과 같다.
- 호레키 (宝暦, 1751년 ~ 1764년)
- 메이와 (明和, 1764년 ~ 1772년)
- 안에이 (安永, 1772년 ~ 1781년)
- 덴메이 (天明, 1781년 ~ 17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