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도야마 간켄은 오키나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스승 밑에서 가라테를 수련했으며, 이후 대만과 도쿄에서 교육자이자 무도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1. 출생과 초기 생애
도야마 간켄은 1888년(메이지메이지일본어 21년)에 일본 오키나와현 슈리시에서 오야도마리 간켄(親泊寛賢오야도마리 간켄일본어)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그는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의 아버지인 하토야마 가즈오와 그의 부인 하루코의 신교육 사상에 공명하여 하토야마 유치원 경영자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사상가 도야마 미쓰루에게 공명하여 자신의 성씨를 도야마로 개정했다.
1.2. 교육 및 수련
도야마 간켄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스승에게 가라테를 사사했다. 그는 이타라시키 초이쿠, 이토스 안코, 히가시온나 간료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이토스 안코의 만년 고제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도야마는 9세 무렵인 1897년경부터 이토스 안코 밑에서 슈리테 가라테 수련을 시작했으며, 이토스가 사망한 1915년까지 그의 제자로 남았다. 그는 또한 히가시온나 간료에게 나하테를, 아라가키 안키치에게 도마리테를 배웠다.
1906년 오키나와 사범학교에 입학했을 때, 당시 사범학교의 가라테 사범은 이토스 안코였고, 사범대리는 야부 겐쓰였다. 도야마는 재학 중이던 1908년부터 3년간 이토스와 야부의 조수를 지냈으며, 1911년에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도쿠다 안분, 마키야와 함께 '이토스 안코의 세 마리 까마귀'로 불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다나에게 봉술과 사이술을, 초대 슈리 구청장을 지낸 지바나 초쇼에게 '지바나 구상쿠' 형을 배웠다.
1.3. 대만에서의 활동
1924년(다이쇼다이쇼일본어 13년)에 도야마는 가족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그는 타이베이의 천푸지(陳仏済천푸지중국어)와 타이중의 린셴탕(林献堂린셴탕중국어)으로부터 중국 권법을 연구하고 배웠다. 그가 연구한 권법에는 다쿠, 마카이탄, 루타오바이, 우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무술 배경 덕분에 일본 정부는 곧 도야마의 기량을 인정하고, 그에게 오키나와 가라테의 모든 유파에서 어떠한 단급도 승단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공식적으로 대사범 칭호를 수여했다.
1.4. 도쿄에서의 활동과 슈도칸 설립
1930년 초(쇼와쇼와일본어 6년) 도야마는 일본으로 돌아와 1930년 3월 20일, 도쿄 아사쿠사 이시하마 초등학교 앞에 자신의 첫 도장을 열었다. 그는 도장을 '슈도칸'(修道舘슈도칸일본어, '가라테의 길을 수련하는 전당'이라는 의미)이라 명명했다. 도야마는 이토스에게 배운 것과 대만에서 익힌 중국 권법을 가르쳤으며, 새로운 가라테 유파를 창시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슈도칸에서는 많은 한국계 제자들이 가라테를 수련했는데, 대표적으로 윤병인, 윤쾌병, 김기황 등이 있다.
2. 가라테 철학 및 가르침
도야마 간켄은 가라테를 단순한 격투기가 아닌, 심신수련과 윤리적 수양을 위한 도덕적 무도로 정의하며 평생 무류파주의를 강조했다.
2.1. 가라테의 정의
도야마 간켄은 가라테를 "강유, 음양, 호흡의 원리에 근본을 둔 맨손으로 몸을 보호하고 적을 막는 공방자재의, 윤리적 교훈을 최우선으로 하는 무도"라고 정의했다. 그는 가라테가 자기 방어의 기술일 뿐만 아니라, 수련을 통해 도덕적 가르침을 체득하고 심신을 단련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2.2. 도덕적 가르침
도야마 간켄이 남긴 세 권의 저서에는 다음 여섯 가지 도덕적 가르침이 명시되어 있다.
- 守礼のくに슈레이노쿠니일본어 (예절을 지키는 나라)
- 空手に先手なし가라테니 센테나시일본어 (가라테에 선제공격은 없다)
- 忍は百行の基なり시노부와 햐쿠교노 키나리일본어 (인내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다)
- 手が出たら意地を引け、意地が出たら手を引け테가 데타라 이지요 히케, 이지가 데타라 테오 히케일본어 (손이 나가려거든 고집을 꺾고, 고집이 생기거든 손을 거두어라)
- 柔即和、剛即和주소쿠와, 고소쿠와일본어 (유는 곧 화합이요, 강은 곧 화합이다)
- 喧嘩争いは買っても捨てよ켄카 아라소이와 캇테모 스테요일본어 (싸움은 사더라도 버려라)
2.3. 수련자의 자세와 마음가짐
도야마 간켄은 가라테 수련자가 갖춰야 할 정신 자세와 노력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武무일본어의 글자 의미는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들어가 싸움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수련자는 이 글자의 본질적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실전에 임해야 한다.
- 가라테에 선제공격은 없다. 가라테를 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인내하고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리 작은 적이라도 경멸하지 않고 호전적으로 선제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적 태도를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가라테 형에 선제공격이 없는 것은 평화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의 넓이이며, 고금에 통하는 변치 않는 큰 가르침이다.
- 남이 한 번 하면 자신은 백 번 하고, 남이 백 번 하면 자신은 천 번 하라. 요컨대 노력과 단련, 그리고 사색과 궁리가 가라테 실력 향상의 비결이다.
- 이치로 들어서는 자는 기술로 들어서는 자보다 한 수 위이다. 먼저 이치를 알고 그 기술을 터득한 후에 손발을 단련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 가라테는 신중하고 겸손하며 인의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최후이자 유일한 공방과 호신의 정기가 나온다.
-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옛날에 잘 싸우는 자는 먼저 이길 수 없는 상태를 만들고, 그 후에 적이 이길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고 했다. 즉, 먼저 자신을 불패의 지위에 두고, 그 후에 적의 패배하는 형세를 이용한다는 의미이다.
- 대담하게, 그리고 세심하게 행동하라. 담력은 큰 바다와 같고, 요점은 소리 없는 가는 물줄기와 같아야 하며, 큰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작은 적을 경멸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 자신을 보호하라. 상대방을 공격하려 하면 스스로 빈틈이 생겨 적에게 이용당한다. 자신을 보호하고 있으면 상대방의 빈틈이 자연스럽게 보이게 된다.
- 拳の大要八句권의 대요 팔구일본어: "인심은 천지와 같고, 혈맥은 일월과 같으며, 법은 강유를 삼키고 토하며, 몸은 언제든 변화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손은 빈 곳을 만나면 들어가고, 보법은 진퇴와 이합을 따른다. 눈은 사방을 관찰해야 하고, 귀는 팔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2.4. 무류파주의
이토스 안코의 직계 제자임을 자부했던 도야마 간켄은 평생 '가라테에 유파는 없다'는 무류파주의를 관철했으며, 자신의 가라테에 유파 이름을 붙이지 않고 유파 자체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의 이론은 "가장 엄숙해야 할 묘한 기술에 두세 가지 다른 유파의 지극한 기술과 묘법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도야마는 강유, 완급 등 다양한 사색과 궁리를 통해 수련을 쌓는 것이 가라테의 정도이며, 당시 유파라고 불리던 모든 것은 각자의 수련 방식의 차이로 보아야 하며 유파로 성립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서 『공수도 대보감』에서 당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쇼린류와 쇼레이류에 대해 "이 두 유파가 현재 실재하는 것처럼 세상에 전해지고 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에 어떠한 확고한 근거도 고증도 없다"고 주장하며, 이들이 동일한 형식으로 통합되고 재편성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쇼와 시대 초기에 탄생한 여러 유파에 대해, 도야마는 시토류의 마부니 겐와와 고주류의 미야기 초준을 직접 만나 질문했다. 마부니는 "유파 이름을 붙이는 것이 더 그럴듯하고, 은사를 사모하는 의미에서도 의미가 있지 않은가"라고 답했고, 미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가라테에 대해 인식이 부족하여, 그 전체상을 강과 유 두 글자로 알기 쉽게 표현했다"고 답했다. 이에 도야마는 "유파도 파벌도 없는 진정한 오키나와 가라테이므로 유파명은 결국 무의미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또한 당시 새로운 유파의 탄생이 빈번했던 것에 대해 "최근 기이하고 새로운 유파 이름을 붙이는 정체불명의 가라테가들이 보이지만, 이는 정통 가라테의 전체상을 모르는 어설픈 사람들이다"라고 비판했다.
2.5. 계승된 비전 기술
도야마 간켄은 스승 이토스 안코로부터 다음의 일곱 가지 신비로운 기술을 계승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비전 기술은 평범한 기술에서 시작하여 평범한 기술로 끝난다. 처음에는 비전 기술이 없고 끝에 비전 기술이 있다. 성공 여부의 열쇠는 단련이 쥐고 있다"고 말하며, 평범한 기술이라도 개인이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단련을 쌓으면 그것 또한 독자적인 훌륭한 비전 기술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複式呼吸法후쿠시키 코큐호일본어 (복식 호흡법)
- 獅子の法시시노 호일본어 (사자법)
- 虎の法도라노 호일본어 (호랑이법)
- 握力法아쿠료쿠호일본어 (악력법)
- 鍛眼法단간호일본어 (단안법, 눈 훈련법)
- 熊の手쿠마노 테일본어 (곰의 손)
- 三角飛び산카쿠토비일본어 (삼각 뛰기)
3. 주요 활동 및 업적
도야마 간켄은 슈도칸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가라테의 스포츠화에 기여했으며, 중요한 저술 활동을 통해 가라테의 보급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 슈도칸 활동과 제자 양성

1930년 도쿄에 슈도칸 도장을 설립한 도야마 간켄은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특히 그의 제자 중에는 윤병인, 윤쾌병, 김기황 등 한국계 인물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한국 가라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GHQ의 무술 금지령을 피하고 가라테 수련을 계속하기 위해 도야마의 고제자들은 칸부칸(Kanbukan칸부칸영어, '한국 무술의 전당'이라는 의미)이라는 도장을 결성하고, 당시 제3국인 신분이었던 윤쾌병을 관장으로 임명하여 GHQ의 폐쇄를 피했다.
3.2. 가라테 스포츠화 기여
도야마 간켄은 자신의 제자들이 시작한 전국 가라테도 선수권 대회(현재의 전국 방호구 착용 가라테도 선수권 대회)에서 모범 연무를 선보였다. 1951년(쇼와쇼와일본어 26년)에 구 전일본 가라테도 연맹(현재의 전일본 가라테도 렌부카이)이 발족되었을 때, 슈도칸은 총본부가 되었고, 도야마는 대사범으로서 방호구 착용 가라테와 같은 경기 가라테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3.3. 저술 활동
도야마 간켄은 가라테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기술을 담은 여러 중요한 저서를 남겼다. 이 시기에 츠루쇼보(鶴書房츠루쇼보일본어) 출판사에서 『공수도 오의 비전』(空手道・奥手秘術가라테도 오쿠테 히주쓰일본어), 『공수도 대보감』(空手道大宝鑑가라테도 다이호칸일본어), 『공수도 입문』(空手道入門가라테도 뉴몬일본어) 등의 책을 발간했다. 이 저서들은 그의 가라테 철학, 도덕적 가르침, 그리고 기술적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논쟁 및 비판
도야마 간켄은 가라테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만큼, 특히 후나코시 기친과의 '가라테 본가' 논쟁과 같은 주요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4.1. 후나코시 기친과의 논쟁
1948년(쇼와쇼와일본어 23년)경, 도야마 간켄은 후나코시 기친과 '가라테의 본가'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이토스 안코의 직계 제자임을 자처했던 도야마는 후나코시가 이토스 문하의 방계(후나코시는 아자토 안코의 직계 제자였다)에 불과하며, 이토스의 직계에 속하지 않는 자는 오키나와 가라테의 정통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의 또 다른 쟁점은 도야마가 오키나와 사범학교의 본과 졸업생인 반면, 후나코시는 오키나와현 사범학교의 속성과(1년 과정) 출신이었다는 점이었다. 도야마는 사범학교 본과에서 이토스에게 배운 자만이 이토스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토스가 사범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05년(메이지메이지일본어 38년)부터였고, 비록 후나코시가 본과에 입학했더라도 (호적상) 1870년(메이지메이지일본어 3년)생인 후나코시가 이토스에게 사사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도야마-후나코시 논쟁을 통해 이토스 문하의 제자들 사이에 직계와 방계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5. 개인적인 삶
도야마 간켄은 엄격한 무도인이었지만, 개인적인 삶에서는 예술적 취미를 즐기고 가족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다. 그의 무도적 역량과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들도 전해진다.
5.1. 가족 및 개인적 관심사
도야마 간켄의 아들로는 바이올리니스트 하토야마 히로시가 있다. 하토야마 히로시는 알렉산드르 모길렙스키에게 사사했으며 제5회 일본 음악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도야마 간켄 본인도 바이올린을 즐겨 연주했다고 한다.
5.2. 일화
- 검객 습격 사건**: 1927년(쇼와쇼와일본어 2년) 어느 날, 진검을 든 고류 검술의 달인이 길가에서 도야마를 기습했다. 두 사람 사이에 면식은 없었으며, 도야마를 못마땅하게 여긴 다른 가라테가가 검술가에게 의뢰한 것이 원인이었다. 도야마는 순간적으로 진검을 피하고,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천천히 반신 자세를 취하며 2차 공격에 대비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정적을 깨는 기합 소리와 함께 검객이 칼을 휘둘렀다. 다음 순간, 백도를 피한 도야마의 왼발이 검객의 팔을 붙잡았고, 검객은 그대로 흙담에 부딪혀 쓰러졌다. 도야마는 검을 주워 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났다. 이 모든 과정은 불과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 미군 병사 폭행 사건**: 1947년 12월 10일, 도야마는 술에 취한 미군 병사에게 예고 없이 폭행을 당했다. 도야마는 일체의 저항 없이 병사가 하는 대로 잠시 동안 맞고 있었다. 병사가 때리다 지쳐 폭행을 멈추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나자, 도야마는 태연히 일어섰다. 그의 몸은 '복식 호흡법'으로 철인처럼 단련된 육체였으며, 이토스 안코에게 비전 '호랑이법'까지 전수받은 인물 앞에서는 건장한 미군 병사도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6. 유산과 평가
도야마 간켄은 사후에도 가라테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가르침과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6.1. 사후의 평가 및 기여
도야마 간켄은 1966년 11월 24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고향 오키나와가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학동들이 읽을 책마저 부족해지자, 도야마는 수백 권의 자신의 저서를 오키나와현에 기증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오키나와의 초대 지사인 시키야 다카노부로부터 '가라테도 대사범'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무도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6.2. 가라테계에 미친 영향
도야마 간켄의 슈도칸은 1951년에 발족된 구 전일본 가라테도 연맹(현재의 렌부카이)의 총본부가 되면서, 그는 대사범으로서 방호구 착용 가라테와 같은 경기 가라테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무류파주의' 철학과 근본적인 수련, 그리고 윤리적 가르침은 현대 가라테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야부 겐쓰에게 전수받은 고류 오십사보 형을 즐겨 수련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름 | 칭호 | 직책 / 위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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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초신 | 사범 | 오키나와 슈리시 토쇼칸 | |
이와사 가호야 | 한시 사범 | 홋카이도 상위 지부 탄광, 지부 채굴 이사 | |
이토 미키히로 | 한시 사범 | 도쿄 명문 대학 교사, 모리 도장 관장 | |
윤병인 | 사범 | 한국 서울 도장 | |
윤쾌병 | 사범 | 도쿄 칸부칸 (한국 무술 전당) 관장 | |
이노우에 기요시 | 사범 | 도쿄도 오타구 | |
이즈미카와 히로키 | 한시 사범 | 가와사키시, 센부칸 관장 | * |
하나우에 도시오 | 한신 사범 |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고도칸 관장 | |
도시신가 후미오 | 사범 | 홋카이도, 도시신가 도장 관장 | |
지토세 다다시 | 한신 사범 | 지바현, 조시시 넨 도장 관장 | |
오니시 에이조 | 사범 | 에히메현, 이요시, 고에이칸 가라테도 설립자/관장 | |
오니시 가즈히로 | 사범 | 에히메현, 가와노이시 | |
오가와 히데하루 | 사범 | 도쿄도 신주쿠구 | |
와타나베 겐이치 | 한신 사범 | 도쿄도 오타구, 세이도칸 관장 | |
가쓰무라 마사오 | 한신 사범 | 요코하마시, 세이도칸 관장 | * |
요시카와 히데오 | 한신 사범 | 도쿄도 네리마구, 세이후칸 관장 | |
요시다 데쓰오 | 사범 | 이바라키현, 다쓰가사키시, 타이이쿠쿄카이 가라테 클럽 관장 | |
다마키 하쿠후 | 한신 사범 | 오이타현, 벳푸시, 다치나카 구역 중학교 교장 | |
다카미네 미치오 | 사범 | 규슈 | |
모 호조 | 사범 | 규슈 | |
쓰치야 히데오 | 사범 |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 |
나라자키 다케오 | 한신 사범 | 도쿄도 세타가야 겐포칸 관장 | |
나카고미 이치로 | 사범 | 야마나시현, 유단샤 (단/급) 회장 | |
고리시마 이치로 | 한신 사범 | 도쿄, 육군 중장 (예비역) | |
구리타 요시후미 | 사범 | 에히메현 | |
야비쿠 이사무 | 사범 | 도쿄도 무로노우치 | |
후지와라 후미요시 | 사범 | 후쿠오카시, 덴진초, 세이키 도장 관장 | |
기노시타 요시후미 | 사범 | 사이타마현, 기타아다치군 | |
고이즈미 쇼노스케 | 사범 | 도쿄도 메구로구 | |
小安道夫고야스 미치오일본어 | 사범 | 규슈 | |
아마미야 히로시 | 사범 | 야마나시현, 시오야마시 | |
아카미네 쇼스케 | 쇼스케 사범 | 가와사키시, 나카지마 | * |
아라이 도시로 | 사범 | 도쿄도 도시마구, 지하야 예비 학교 관장 | |
아라카키 류쇼 | 사범 | 도쿄도 요요기 슈도칸 지부 도장 관장 | |
사쿠라 도시오 | 사범 | 도쿄도 다이토구 | |
金城裕긴조 히로시일본어 | 한시 사범 | 도쿄 렌부칸 사범 | * |
시마부쿠로 고스케 | 사범 | 요코하마시, 쓰루미구, 시마부쿠로 도장 관장 | |
시바나카 이와오 | 사범 | 에히메현 | |
시모노 게이지 | 사범 | 자위대 총무 이사 | |
히가 요시토 | 한시 사범 | 오키나와, 검찰총장 | |
히가 요시아키 | 사범 | 요코하마시, 쓰루미구 | |
히가시온나 히로시 | 한시 사범 | 가나가와현, 오미치칸 본부 관장 | * |
히가 세이토쿠 | 사범 | 류큐 검찰청, 검사 | |
이치카와 이사오 | 한신 사범 | 가라테도 도시칸 설립자 | |
모리타 사다오 | 사범 | 요코하마시 | |
스즈키 히데아키 | 사범 | 도쿄도 오타구 | |
스즈키 요시쓰구 | 사범 | 시즈오카현, 세이슈칸 관장 | |
스나베 고이치 | 사범 | 요코하마시, 쓰루미구, 스나베 도장 관장 | |
아키타니 세이지 | 사범 | 슈도칸 회장 | |
무라타 요시타로 | 사범 | 홋카이도 | |
다카자와 마사나오 | 사범 | 나가노현 오카야시 (사망) |
- 위 목록에서 '*' 표시는 도야마 간켄에게 직접 수련받지는 않았으나, 사범 칭호와 고단 승급의 책임이 있는 회원으로 인정된 인물 및 단체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