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도로테아 소피에 폰 푸파츠-노이부르크(독일어: Dorothea Sophie von Pfalz-Neuburg독일어, Dorotea Sofia di Neuburg도레아 소피아 디 네우부르그이탈리아어, 1670년 7월 5일 ~ 1748년 9월 15일)는 팔츠 선제후 필립 빌헬름과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아의 딸이다. 그녀는 파르마 공국의 상속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와 첫 결혼을 통해 두 자녀를 두었으며, 이후 오도아르도의 이복형제인 프란체스코 파르네세와 재혼하여 1695년부터 1727년까지 파르마 공작 부인으로 재위했다. 남편 프란체스코가 사망하고 파르네세 가문의 직계 혈통이 끊기자, 그녀는 외손자인 카를 3세를 대신하여 1731년부터 1735년까지 파르마 공국의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2. 초기 생애 및 가족 배경
도로테아 소피에는 1670년 7월 5일 노이부르크성에서 팔츠 선제후 필립 빌헬름과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7명의 자녀 중 14번째이자 6번째 딸이었다.
2.1. 부모 및 형제자매
도로테아 소피에의 아버지는 팔츠 선제후 필립 빌헬름이었고, 어머니는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게오르크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 아말리아였다. 그녀에게는 여러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유럽 왕가와 중요한 혼인을 맺었다.
주요 형제자매는 다음과 같다:
- 요한 빌헬름: 팔츠 선제후
- 카를 3세 필립: 팔츠 선제후
-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황후
- 마리 조피: 포르투갈의 왕 페드루 2세의 왕비
- 마리아 안나: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2세의 왕비
3. 결혼 및 자녀
도로테아 소피에는 생애 동안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파르마 공국의 상속자와 이루어졌으며, 두 번째 결혼은 첫 남편의 이복형제와 이루어졌다.
3.1. 첫 번째 결혼: 오도아르도 파르네세와의 혼인
1690년 5월 17일, 도로테아 소피에는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의 상속자이자 라누치오 2세 공작의 장남인 오도아르도 파르네세와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식은 파르마에서 열린 행사 중 가장 성대하고 화려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두 사람은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자녀는 다음과 같다:
- 알레산드로 이냐치오 파르네세(1691년 12월 6일 ~ 1693년 8월 5일): 유아기에 사망했다.
- 엘리자베타 파르네세(1692년 10월 25일 ~ 1766년 7월 11일): 훗날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와 결혼하여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고, 여러 자녀를 두었다.
오도아르도 파르네세는 아들 알레산드로가 사망한 지 한 달 후인 1693년 9월 6일에 사망했다.
3.2. 두 번째 결혼: 프란체스코 파르네세와의 혼인
오도아르도 파르네세가 사망한 후, 도로테아 소피에는 1695년 12월 8일 오도아르도의 이복형제인 프란체스코 파르네세와 재혼했다. 프란체스코는 169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파르마 공작이 된 상태였다. 이 결혼은 프란체스코 자신이 도로테아의 지참금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결혼에서는 자녀가 태어나지 않았다.
4. 파르마 공작 부인으로서의 역할
도로테아 소피에는 1695년 12월 8일 프란체스코 파르네세 공작과 결혼한 이후 1727년까지 파르마 공작 부인으로 재위했다. 그녀는 남편 프란체스코가 파르마 공국을 통치하는 동안 공작 부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5. 파르마 공국의 섭정
1727년 프란체스코 공작이 사망한 후, 그의 유일한 남동생인 안토니오 파르네세가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1731년 1월 20일에 사망했는데, 사망 전날 자신의 아내인 엔리케타 데스테가 임신했다고 발표했다. 안토니오의 사망 후, 잠재적 후계자를 위한 섭정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엔리케타, 주교, 국무장관, 그리고 두 명의 궁정 신사가 위원으로 참여했다.
섭정 위원회는 만약 태어날 아이가 딸일 경우, 파르마 공국은 도로테아 소피에의 딸이자 스페인 왕비인 엘리자베타의 세 아들 중 장남인 당시 12세의 스페인의 카를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엔리케타는 황제군의 지원을 받아 파르마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왕비 엘리자베타는 어머니 도로테아 소피에를 통해 엔리케타의 임신에 의문을 제기하며 카를의 권리를 옹호하려 했다. 한편, 교황은 공국을 교황령에 합병시키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리케타는 파르마에 대한 스페인의 영향력을 반대하는 황제의 지지를 받았다. 스페인의 요청에 따라 1731년 5월 엔리케타는 의사들의 진찰을 받았고, 임신이 확인되었다. 이 소식은 파르마 전역과 유럽 각국 궁정에 보고되었고, 그녀의 섭정은 황제의 지지 아래 계속될 수 있었다.
하지만 1731년 7월 22일, 제2차 빈 조약은 1718년 런던 조약에 따라 카를의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작으로서의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스페인이 엔리케타의 출산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자, 황제는 엔리케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원래 계획했던 가장 출산 계획을 중단시켰다.
스페인의 엘리자베타 왕비는 어머니 도로테아 소피에를 설득하여 1731년 9월 13일 엔리케타를 다시 진찰하게 했다. 그 결과, 사실상 아이가 없으며 파르네세 가문의 직계는 단절되었음이 보고되었다. 이에 스페인의 카를이 공작으로 인정되었고, 엔리케타 데스테의 섭정은 폐지되었다. 카를이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외할머니인 도로테아 소피에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도로테아 소피에는 1735년까지 섭정으로 통치했으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파르마 공국이 오스트리아에 할양되면서 섭정으로서의 역할이 종료되었다.
6. 말년 및 사망
섭정 기간이 끝난 후 도로테아 소피에는 1748년 9월 15일 파르마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산타 마리아 델라 스테카타 성역에 안장되었다.
7. 가계
도로테아 소피에 폰 푸파츠-노이부르크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1. 도로테아 소피에 폰 푸파츠-노이부르크
- 2. 필립 빌헬름 (아버지)
- 3. 엘리자베트 아말리아 폰 헤센-다름슈타트 (어머니)
- 4. 볼프강 빌헬름 폰 팔츠-노이부르크 (친할아버지)
- 5. 바이에른의 마그달레네 (친할머니)
- 6. 게오르크 2세 폰 헤센-다름슈타트 (외할아버지)
- 7. 작센의 조피 엘레오노레 (외할머니)
- 8. 필립 루트비히 폰 팔츠-노이부르크 (친증조할아버지)
- 9. 클레베의 안나 (친증조할머니)
- 10. 빌헬름 5세 폰 바이에른 (친증조할아버지)
- 11. 로렌의 레나타 (친증조할머니)
- 12. 루트비히 5세 폰 헤센-다름슈타트 (외증조할아버지)
- 13. 브란덴부르크의 마그달레네 (외증조할머니)
- 14. 요한 게오르크 1세 폰 작센 (외증조할아버지)
- 15. 프로이센의 마그달레네 지빌레 (외증조할머니)
- 16. 볼프강 폰 팔츠-츠바이브뤼켄 (친고조할아버지)
- 17. 헤센의 안나 (친고조할머니)
- 18. 빌헬름 폰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친고조할아버지)
- 19.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친고조할머니)
- 20. 알브레히트 5세 폰 바이에른 (친고조할아버지)
- 21. 오스트리아의 안나 (친고조할머니)
- 22. 프랑수아 1세 폰 로렌 (친고조할아버지)
- 23.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친고조할머니)
- 24. 게오르크 1세 폰 헤센-다름슈타트 (외고조할아버지)
- 25. 리페의 마그달레네 (외고조할머니)
- 26. 요한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 (외고조할아버지)
- 27. 안할트-체르프스트의 엘리자베트 (외고조할머니)
- 28. 크리스티안 1세 폰 작센 (외고조할아버지)
- 29. 브란덴부르크의 조피 (외고조할머니)
- 30.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외고조할아버지)
- 31. 클레베의 마리 엘레오노레 (외고조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