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도니 레이 무어는 1954년 2월 13일 미국 텍사스주 러벅에서 태어났다. 그는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인 휴비 브룩스의 사촌이다. 무어는 파리 주니어 칼리지와 레인저 칼리지를 다녔으며, 197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의 1월 2차 드래프트에서 시카고 컵스에 1라운드 전체 3순위로 지명되어 프로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2. 프로 야구 경력
도니 레이 무어는 13시즌에 걸쳐 프로 야구 경력을 쌓았으며, 여러 팀에서 투수로서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총 655이닝을 투구하며 43승 40패, 89세이브, 416 탈삼진, 3.6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또한, 타자로서도 0.281의 타율과 11 타점을 올렸다. 1985년에는 스플리터, 슬라이더, 브레이킹 볼 등 다양한 구종을 개발하며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다.
2.1. 초기 경력 및 기타 팀
1972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12라운드에 지명받았으나 계약하지 않았다. 이후 1973년 1월 2차 드래프트에서 시카고 컵스에 1라운드 전체 3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1975년 9월 14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1978년에는 팀 내 최다이자 리그 3위에 해당하는 71경기에 등판하여 9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1979년에는 부진에 빠져 그해 10월 17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80년에는 6.23의 높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1981년 9월 3일 밀워키 브루어스로 이적했으나 같은 해 11월 5일 다시 카디널스로 복귀했다. 1982년 2월 1일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되어 그해 팀의 지구 우승에 기여했다. 카디널스와의 1982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등판하여 무실점을 기록했으나, 팀은 3연패로 탈락했다. 1984년에는 마무리 투수로서 4승 5패 16세이브, 2.9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1985년 1월 24일, 자유계약선수 보상 선수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로 이적했다.
2.2.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85년~1988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서 무어는 선수 경력의 가장 두드러진 활약 시기를 보냈다. 특히 마무리 투수로서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1985년 이적 첫해에 전반기 7승 17세이브, 1.4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시즌 총 8승 8패 31세이브, 1.9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팀은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우승 경쟁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에 1경기 차로 뒤져 2위에 머물렀지만, 무어는 사이 영 상 투표에서 7위, MVP 투표에서 6위에 오르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86년에는 4승 5패 21세이브, 2.9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팀의 4년 만의 지구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2.2.1. 1986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
1986년 10월 12일 애너하임의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에서 열린 1986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은 도니 레이 무어의 경력에서 가장 기억되는 경기가 되었다. 당시 에인절스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앞서 있었고, 구단 역사상 첫 월드 시리즈 진출에 단 1승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5차전에서도 에인절스는 9회초까지 5대2로 앞서며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9회초, 선발 투수 마이크 위트가 전 에인절스 선수였던 돈 베일러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하며 점수는 5대4로 좁혀졌다. 이어서 게리 루카스가 리치 게드먼에게 몸에 맞는 공을 허용하여 1루에 주자를 내보냈다. 이 위기 상황에서 도니 레이 무어가 마운드에 올랐다. 그는 2아웃 주자 1루 상황에서 데이브 헨더슨을 상대로 승리까지 단 한 스트라이크만을 남겨두었으나, 2볼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던진 공이 헨더슨의 방망이에 맞아 2점 홈런으로 이어지면서 레드삭스가 6대5로 역전했다. 이 홈런은 에인절스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에인절스는 9회말 극적으로 동점 득점을 올리며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으나, 무어는 10회초 짐 라이스를 병살타로 유도하며 위기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11회초 다시 데이브 헨더슨에게 희생 플라이를 허용하여 결승점을 내주었고, 결국 에인절스는 7대6으로 패배하며 무어는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 악몽 같은 패배 이후 에인절스는 원정에서 열린 6차전과 7차전에서도 각각 10대4, 8대1로 대패하며 시리즈를 3승 4패로 역전당해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경기 후 무어는 헨더슨에게 던진 공이 나쁜 투구였음을 인정하며 "직구를 던지니 헨더슨이 파울로 쳐냈고, 그래서 스플리터로 갔는데, 그가 방심한 틈을 타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그의 스윙 궤적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공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이 경기는 무어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겼고, 그 이후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3. 말년 경력 및 은퇴
1986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이후 도니 레이 무어는 어깨 부상에 시달렸고, 이후에도 부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이로 인해 1987년에는 고작 14경기에만 등판하는 등 부진을 겪었으며, 1986년 ALCS 5차전의 패배에 대한 팬들의 비난과 야유에 시달려야 했다. 다음 두 시즌 동안 41경기에 등판하여 9세이브를 추가했지만, 부상의 여파와 경기력 저하로 1988년 8월 26일 에인절스에서 결국 방출되었다.
자유계약선수가 된 그는 1988년 1월 22일 잠시 자유계약선수 신분이 되었으나 2월 9일 에인절스와 재계약했고, 1989년 시즌을 앞두고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했다. 그러나 로열스에서는 마이너 리그에서만 짧게 활동하다가 그해 6월에 방출되면서 14년간의 프로 야구 경력을 마감했다. 야구 경력의 마감과 함께 그의 삶은 점차 피폐해졌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 등 힘든 시기를 보냈다.
3. 메이저 리그 통계
다음은 도니 레이 무어의 메이저 리그 통산 성적이다.
연도 | 팀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사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75 | CHC | 4 | 1 | 0 | 0 | -- | 0 | 0 | 0 | -- | ---- | 42 | 8.2 | 12 | 1 | 4 | 0 | 0 | 8 | 0 | 0 | 4 | 4 | 4.15 | 1.85 |
1977 | CHC | 27 | 1 | 0 | 0 | -- | 4 | 2 | 0 | -- | .667 | 207 | 48.2 | 51 | 1 | 18 | 7 | 0 | 34 | 2 | 4 | 27 | 22 | 4.07 | 1.42 |
1978 | CHC | 71 | 1 | 0 | 0 | -- | 9 | 7 | 4 | -- | .563 | 450 | 102.2 | 117 | 7 | 31 | 11 | 2 | 50 | 7 | 2 | 55 | 47 | 4.12 | 1.44 |
1979 | CHC | 39 | 1 | 0 | 0 | -- | 1 | 4 | 1 | -- | .200 | 330 | 73.0 | 95 | 8 | 25 | 7 | 2 | 43 | 3 | 0 | 46 | 42 | 5.18 | 1.64 |
1980 | STL | 11 | 0 | 0 | 0 | -- | 1 | 1 | 0 | -- | .500 | 93 | 21.2 | 25 | 1 | 5 | 1 | 1 | 10 | 0 | 1 | 15 | 15 | 6.23 | 1.39 |
1981 | MIL | 3 | 0 | 0 | 0 | -- | 0 | 0 | 0 | -- | ---- | 19 | 4.0 | 4 | 0 | 4 | 0 | 0 | 2 | 1 | 0 | 3 | 3 | 6.75 | 2.00 |
1982 | ATL | 16 | 0 | 0 | 0 | -- | 3 | 1 | 1 | -- | .750 | 121 | 27.2 | 32 | 1 | 7 | 3 | 2 | 17 | 0 | 1 | 13 | 13 | 4.23 | 1.41 |
1983 | ATL | 43 | 0 | 0 | 0 | -- | 2 | 3 | 6 | -- | .400 | 276 | 68.2 | 72 | 6 | 10 | 3 | 0 | 41 | 0 | 1 | 30 | 28 | 3.67 | 1.19 |
1984 | ATL | 47 | 0 | 0 | 0 | -- | 4 | 5 | 16 | -- | .444 | 271 | 64.1 | 63 | 3 | 18 | 6 | 1 | 47 | 1 | 0 | 27 | 21 | 2.94 | 1.26 |
1985 | CAL | 65 | 0 | 0 | 0 | -- | 8 | 8 | 31 | -- | .500 | 417 | 103.0 | 91 | 9 | 21 | 3 | 0 | 72 | 2 | 0 | 28 | 22 | 1.92 | 1.09 |
1986 | CAL | 49 | 0 | 0 | 0 | -- | 4 | 5 | 21 | -- | .444 | 295 | 72.2 | 60 | 10 | 22 | 4 | 0 | 53 | 4 | 1 | 28 | 24 | 2.97 | 1.13 |
1987 | CAL | 14 | 0 | 0 | 0 | -- | 2 | 2 | 5 | -- | .500 | 122 | 26.2 | 28 | 2 | 13 | 2 | 0 | 17 | 0 | 0 | 12 | 8 | 2.70 | 1.54 |
1988 | CAL | 27 | 0 | 0 | 0 | -- | 5 | 2 | 4 | -- | .714 | 150 | 33.0 | 48 | 4 | 8 | 2 | 0 | 22 | 2 | 4 | 20 | 18 | 4.91 | 1.70 |
통산: 13년 | 416 | 4 | 0 | 0 | -- | 43 | 40 | 89 | -- | .518 | 2793 | 654.2 | 698 | 53 | 186 | 49 | 8 | 416 | 22 | 14 | 308 | 267 | 3.67 | 1.35 |
4. 사망 및 관련 사건
1989년 7월 18일, 도니 레이 무어는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 힐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아내 타냐(Tonya)와 격렬한 말다툼을 벌이던 중 .45 구경 권총으로 그녀를 세 차례 총격했다. 당시 집안에는 세 자녀가 함께 있었다. 타냐 무어와 당시 17세였던 딸 데메트리아(Demetria)는 집 밖으로 도망쳐 나왔고, 데메트리아가 어머니를 차에 태워 병원으로 옮겼다. 타냐는 이 총격에서 살아남았다.
총격 사건 직후, 도니 레이 무어는 집 안에서 아들 중 적어도 한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고 자살했다. 그는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메이저 리그 팬들과 언론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1986년 ALCS 5차전의 홈런 사건과 연관되어 그의 삶에 드리워진 비극적인 그림자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5. 유산 및 평가
도니 레이 무어의 유산과 평가는 주로 1986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에서 데이브 헨더슨에게 허용한 홈런과 그의 비극적인 사망 사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신화'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많은 이들은 이 홈런이 무어의 정신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그의 개인적인 고난과 자살로 이어졌다는 서사를 믿어왔다. 언론과 팬들은 그를 에인절스의 월드 시리즈 좌절의 '희생양'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는 그가 겪었던 압력과 정신적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는 무어의 복잡한 삶과 사망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의 사망은 야구 경기 하나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라기보다는, 부상, 경력의 하락, 재정적 어려움, 그리고 개인적인 관계 문제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더슨의 홈런은 그의 이름에 영원히 따라붙는 꼬리표가 되었고, 이는 스포츠에서 한순간의 실패가 선수 개인의 삶에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대중의 비난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짐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그의 이야기는 스포츠계에서 선수들의 정신 건강과 스트레스 관리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