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덴무 천황(天武天皇텐무 텐노일본어, ? ~ 686년 10월 1일)은 7세기 후반 일본의 제40대 천황으로, 673년부터 686년까지 재위했습니다. 그의 본명은 오아마노 미코토(大海人皇子오아마노 오지일본어)이며, 형인 덴지 천황 사후 벌어진 임진의 난에서 조카 오토모 황자를 물리치고 즉위했습니다.
덴무 천황의 치세는 일본의 통치 기구, 종교, 역사, 문화의 원형이 만들어진 중요한 시기로 평가됩니다. 그는 황족을 요직에 등용하는 황친정치(皇親政治고신 세이지일본어)를 통해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화를 강력히 추진했으며, 팔색성을 제정하여 씨성 제도를 재편했습니다. 또한 일본 최초의 율령인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의 제정을 시작했으며, 새로운 수도인 후지와라쿄의 건설을 계획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부본전을 발행하여 화폐 제도를 정비하고, 호족의 사적 지배를 제한하는 토지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675년에는 육식 금지령을 내려 농업 진흥을 도모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신라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독자적인 노선을 취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신토를 국가 신도로 확립하고 이세 신궁의 위상을 높였으며, 불교를 보호하고 통제하여 국가 불교를 추진했습니다. 동시에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의 칭호나 능묘 형태에도 도교적 요소가 반영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편찬 사업을 시작하여 일본 역사 기록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만요슈》에 실린 와카를 통해 문학을 진흥했습니다. 또한 일본 최초의 천문 관측 기구인 점성대를 설치하여 천문학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그는 '천황'이라는 칭호와 '일본'이라는 국호를 처음 사용한 군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통치와 정책은 후대의 지토 천황에게 계승되어 일본 고대 율령 국가 체제의 기반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 이름
덴무 천황은 일본 역사상 '천황'이라는 칭호와 '일본'이라는 국호를 처음 사용한 군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2.1. 휘와 시호
덴무 천황의 휘(諱휘일본어)는 오아마노 미코토(大海人皇子오아마노 오지일본어)입니다. 이 이름은 그가 어린 시절 양육을 받았던 가이후시 일족의 오아마씨(凡海氏)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서기》에 직접적으로 휘가 기록된 부분은 없지만, 덴무 천황의 장례식에서 오아마노 아라카마(凡海麁鎌)가 임생(壬生, 양육)에 대해 뇌(誄뇌일본어)한 기록을 통해 이러한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의 일본식 시호(和風諡号와후 시고일본어)는 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天渟中原瀛真人天皇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일본어)입니다. 여기서 '오키(瀛오키일본어)'는 중국 도교에서 동해에 존재한다고 믿는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을 의미하며, '마히토(真人마히토일본어)'는 뛰어난 도사를 뜻합니다. 이 시호는 덴무 천황의 도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가 도교적 관념에서 최고위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음을 시사합니다.
그의 중국식 시호(漢風諡号간푸 시고일본어)인 '덴무 천황(天武天皇텐무 텐노일본어)'은 나라 시대에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에 의해 찬진되었습니다. 이 시호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근대의 모리 오가이는 중국 《국어》의 초어(楚語) 하(下)편에 나오는 "천사(天事)는 무(武), 지사(地事)는 문(文), 민사(民事)는 충(忠) · 신(信)이라"는 구절에서 '덴무'가 유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설로는 한 무제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과 "하늘이 무왕을 세워 나쁜 왕(주왕)을 멸했다"는 의미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2.2. 칭호와 국호
덴무 천황은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군주의 칭호와 '일본'이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한 군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의 강력한 통치와 새로운 국가 체제 확립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변화였습니다.
'천황'이라는 칭호는 원래 덴무 천황이라는 위대한 군주 한 명만을 위한 존칭이었으나, 후대의 천황들이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계승하고자 군주의 공식 칭호로 삼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실제로 《일본서기》의 지토 천황 기록에는 단순히 '천황'이라고 표기했을 때 지토 천황이 아닌 덴무 천황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됩니다.
'일본'이라는 국호의 채택 또한 덴무 천황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이는 덴무 천황 시대에 편찬이 시작되어 《일본세사》(日本世記)의 존재 등에서 추론됩니다. '일본'이라는 국호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일(日)'을 중심으로 한 국가라는 사상을 담아 천황이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후예로서 대대로 군림하는 신화적 정당성을 표현했다는 설과 단순히 동방의 아름다운 나라라는 미칭으로 사용되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이 국호는 《일본서기》의 편찬 및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새로운 율령 국가 체제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3. 생애
덴무 천황은 7세기 중반 일본에서 태어나 격동의 시기를 거쳐 천황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3.1. 출생과 어린 시절
덴무 천황은 조메이 천황과 고교쿠 천황(훗날의 사이메이 천황)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훗날 덴지 천황으로 즉위하게 되는 나카노오에 황자와는 동복 형제 관계이며, 하시히토 황녀(間人皇女, 고토쿠 천황의 황후)와도 동복 형제입니다. 그의 황후가 된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鸕野讃良皇女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일본어)는 훗날 지토 천황으로 즉위했습니다.
덴무 천황의 출생 연도는 《일본서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여러 설이 존재합니다. 《일본서기》에서 천황의 생년을 명시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지만, 덴지 천황의 생년(626년)이 기록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일대요기》(一代要記), 《본조황윤소운록》(本朝皇胤紹運録), 《황년대략기》(皇年代略記) 등 중세 사료들은 덴무 천황의 사망 당시 나이를 65세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역산하면 그의 출생 연도는 스이코 천황 30년(622년) 또는 31년(623년)이 됩니다. 이는 덴지 천황의 출생 연도인 스이코 천황 34년(626년)보다 앞서는 것이어서, 덴무 천황이 덴지 천황보다 나이가 많았다는 '나이 역전설'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나이 역전설은 1974년 작가 사사 가쓰아키가 덴무 천황이 덴지 천황보다 연상이며, 《일본서기》가 형제로 기록한 것은 사실을 숨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부 재야 역사학자들은 덴무 천황의 정체를 신라의 김다수 또는 고교쿠 천황이 조메이 천황과 재혼하기 전 다카무코 왕(高向王)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아야노 미코(漢皇子)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대요기》 등 중세 사료들도 덴지 천황의 나이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는 덴지 천황이 덴무 천황보다 연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중세 사료 내부에서 비교했을 때 덴지-덴무의 형제 관계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주류 역사학자들의 견해입니다. 단순히 《일본서기》의 덴지 천황 생년과 중세 사료의 덴무 천황 생년만을 비교하여 발생하는 모순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결국 덴무 천황의 정확한 생년은 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음은 주요 사료들이 기록한 덴지 천황과 덴무 천황의 생년입니다.
사료 | 덴지 천황의 생년 | 덴무 천황의 생년 | 을사의 변 당시 덴지/덴무 나이 | 덴지 사망 당시 덴지/덴무 나이 |
---|---|---|---|---|
일본서기 | 스이코 천황 34년(626년) | 불명 | 덴지 20세, 덴무 -- | 덴지 46세, 덴무 -- |
(덴무 56세 사망설) | 스이코 천황 34년(626년) | 조메이 천황 3년(631년) | 덴지 20세, 덴무 15세 | 덴지 46세, 덴무 41세 |
일대요기 | 스이코 천황 27년(619년) | 스이코 천황 30년(622년) | 덴지 27세, 덴무 24세 | 덴지 53세, 덴무 50세 |
인수경(仁壽鏡) | 스이코 천황 22년(614년) | 불명 | 덴지 32세, 덴무 -- | 덴지 58세, 덴무 -- |
고후쿠사약년대기(興福寺略年代記) | 조메이 천황 3년(631년) | 조메이 천황 12년(640년) | 덴지 15세, 덴무 6세 | 덴지 41세, 덴무 32세 |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 여시원연대기(如是院年代記) | 스이코 천황 22년(614년) | 스이코 천황 22년(614년) | 덴지 32세, 덴무 32세 | 덴지 58세, 덴무 58세 |
신황정통록(神皇正統録) · 본조황윤소운록(本朝皇胤紹運録) | 스이코 천황 22년(614년) | 스이코 천황 30년(622년) | 덴지 32세, 덴무 24세 | 덴지 58세, 덴무 50세 |
황년대략기(皇年代略記) | 스이코 천황 22년(614년) | 스이코 천황 31년(623년) | 덴지 32세, 덴무 23세 | 덴지 58세, 덴무 49세 |
3.2. 형제 관계와 가족
오아마노 미코토는 조메이 천황과 고교쿠 천황(사이메이 천황)의 아들로, 나카노오에 황자와는 동복 형제입니다. 그는 덴지 천황의 딸들을 여러 명 아내로 맞이하여 정치적 유대를 강화했습니다. 주요 황후와 비, 그리고 자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황후**: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鸕野讃良皇女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일본어), 훗날 지토 천황. 덴지 천황의 황녀이자 덴무 천황의 조카이자 아내입니다.
- 차남: 구사카베 황자(草壁皇子, 662년 ~ 689년) - 몬무 천황과 겐쇼 천황의 아버지.
- 비**: 오타노 히메미코(大田皇女오타노 히메미코일본어), 덴지 천황의 황녀이자 지토 천황의 동복 언니.
- 차녀: 오오쿠노 히메미코(大伯皇女오오쿠노 히메미코일본어, 661년 ~ 701년) - 이세 신궁의 사이오(斎王, 673년 ~ 686년).
- 3남: 오쓰 황자(大津皇子, 663년 ~ 686년).
- 비**: 오에노 히메미코(大江皇女오에노 히메미코일본어), 덴지 천황의 황녀이자 지토 천황의 이복 여동생.
- 7남: 나가노 황자(長皇子나가노 오지일본어, ? ~ 715년).
- 9남: 유게노 황자(弓削皇子유게노 오지일본어, ? ~ 699년).
- 비**: 니이타베노 히메미코(新田部皇女니이타베노 히메미코일본어), 덴지 천황의 황녀이자 지토 천황의 이복 여동생.
- 6남: 도네리 친왕(舎人親王, 676년 ~ 735년) - 준닌 천황의 아버지.
- 부인**: 후지와라노 히카미노이라츠메(藤原氷上娘후지와라노 히카미노이라츠메일본어, ? ~ 682년),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딸.
- 황녀: 다지마노 히메미코(但馬皇女다지마노 히메미코일본어, ? ~ 708년) - 다케치 황자의 비.
- 부인**: 후지와라노 이오에노이라츠메(藤原五百重娘후지와라노 이오에노이라츠메일본어),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딸. 훗날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아내이자 후지와라노 마로의 어머니.
- 10남: 니이타베노 친왕(新田部親王니이타베노 친왕일본어, ? ~ 735년).
- 부인**: 소가노 오호누노이라츠메(蘇我大蕤娘소가노 오호누노이라츠메일본어, ? ~ 724년), 소가노 아카에의 딸.
- 5남: 호즈미 친왕(穂積皇子호즈미 오지일본어, ? ~ 715년).
- 황녀: 기노 히메미코(紀皇女기노 히메미코일본어).
- 황녀: 다카타노 히메미코(田形皇女다카타노 히메미코일본어, 674년 ~ 728년) - 이세 신궁의 사이오(706년 ~ 707년).
- 빈**: 누카타노 오키미(額田王누카타노 오키미일본어), 가가미노 왕(鏡王)의 딸.
- 장녀: 도오치노 히메미코(十市皇女도오치노 히메미코일본어, 653년? ~ 678년) - 고분 천황의 황후.
- 빈**: 무나카타노 아마코노이라츠메(胸形尼子娘무나카타노 아마코노이라츠메일본어), 무나카타노 기미 도쿠젠(胸形徳善)의 딸.
- 장남: 다케치 황자(高市皇子, 654년? ~ 696년).
- 빈**: 시시히토노 가지히메노이라츠메(宍人梶媛娘시시히토노 가지히메노이라츠메일본어), 시시히토노 오미 오마로(宍人大麻呂)의 딸.
- 4남: 오사카베 황자(刑部/忍壁皇子, ? ~ 705년).
- 황자: 시키노 황자(磯城皇子시키노 오지일본어).
- 황녀: 하쓰세베노 히메미코(泊瀬部皇女하쓰세베노 히메미코일본어, ? ~ 741년) - 덴지 천황의 아들 가와시마 황자(川島皇子)의 비.
- 황녀: 다키노 히메미코(託基皇女/多紀皇女다키노 히메미코일본어, ? ~ 751년) - 이세 신궁의 사이오(698년 ~ 701년 이전). 덴지 천황의 아들 시키 황자의 비.
오아마노 미코토는 누카타노 오키미를 아내로 삼아 도오치노 히메미코를 낳았으나, 훗날 누카타노 오키미는 형인 나카노오에 황자(덴지 천황)의 비가 되었습니다. 이 삼각 관계가 훗날 형제 간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존재합니다.
3.3. 덴지 천황 시대와 황태제 책봉
오아마노 미코토의 아버지 조메이 천황은 그가 어렸을 때 사망했으며, 그는 주로 어머니인 사이메이 천황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습니다. 당시 형인 나카노오에 황자(훗날의 덴지 천황)가 어머니의 뒤를 이을 황태자였기 때문에, 오아마노 미코토가 황위에 오를 것이라고는 예상되지 않았습니다.
사이메이 천황이 사망한 후, 나카노오에 황자는 즉위식을 거행하지 않고 칭제의 형식으로 통치했습니다. 덴지 3년(664년) 2월 9일, 오아마노 미코토는 나카노오에 황자의 명을 받아 관위 26계제를 시행하고, 우지카미(氏上)를 인정하며 민부(民部)와 가부(家部)를 정하는 것을 군신에게 선포했습니다. 덴지 6년(667년) 2월 27일, 사이메이 천황의 장례 의식이 치러졌고, 하시히토노 히메미코(間人皇女)가 사이메이 천황과 합장되었으며, 오타노 히메미코(大田皇女)가 그 능 앞에 묻혔습니다. 이들은 모두 오아마노 미코토에게 어머니, 누이, 그리고 아내에 해당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덴지 7년(668년) 1월 7일, 나카노오에 황자가 비로소 천황으로 즉위했습니다. 《일본서기》 권28 덴무 천황 즉위전기에는 이때 오아마노 미코토가 동궁(東宮, 황태자)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책의 권27 덴지키(天智紀)에는 이 기록이 없으며, 덴지키 안에서 오아마노 미코토는 '대황제(大皇弟)', '동궁태황제(東宮太皇弟)', '동궁(東宮)' 등으로 기록됩니다. 《일본서기》는 임진의 난 이전부터 오아마노 미코토를 '천황'으로 적는 등, 그의 지위에 대한 기록의 정확성과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됩니다. 때문에 오아마노 미코토가 처음부터 황태자 지위였다는 학설도 있지만, '대황제' 등의 단어는 임진의 난을 통해 정권을 잡은 덴무 천황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식일 뿐 실제로는 그러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설, 단순한 존칭일 뿐 황위 계승 예정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설 등, 오아마노 미코토의 황태자 책봉 사실을 의심하는 설이 유력합니다.
황위 계승자로 인정되었는지 여부를 떠나, 오아마노 미코토가 덴지 천황의 조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는 다이카 개신 이후 확립된 군사 제도를 개선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지와라씨의 가전(家傳)인 《도지 가전》(藤氏家傳)에 따르면, 덴지 7년(668년)의 어느 연회에서 오아마노 미코토가 술에 취해 격분하여 장창으로 상판(床板)을 꿰뚫는 일이 있었고, 이에 격노한 덴지 천황이 그를 죽이려 했으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만류로 무사했다고 전해집니다.
덴지 천황 10년(671년) 1월 2일, 덴지 천황은 자신의 아들 오토모노 미코를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임명하고, 좌대신 · 우대신과 어사대부를 보좌로 붙였습니다. 태정대신은 국정을 총괄하는 관직으로, 그 직무는 오아마노 미코토가 기왕에 해오던 일들과 겹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서기》는 이 직후 '동궁태황제가 관위 · 법도를 시행시켰다'고 기록했지만, '어떤 책에 이르기로는' 오토모가 이를 행했다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또한 《회풍조》(懐風藻)는 오토모가 덴지 10년에 황태자가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대부분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의 주석을 따르거나, 이 기사를 덴지 3년(664년) 2월 9일의 관위 26계제 기록의 중복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오토모의 태정대신 임명과 더불어 오아마노 미코토는 조정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소외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토모에게 황위를 잇게 하려는 덴지 천황의 의도가 강하게 표출된 것이라는 데에는 반론이 없습니다.
3.4. 임진의 난
덴지 천황은 병이 깊어진 덴지 10년(671년) 10월 17일, 오아마노 미코토를 병상으로 불러 후사를 맡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미리 측근인 소가노 야스마로(蘇我安麻呂)의 경고를 받은 오아마노 미코토는 "황후(야마토히메노 오키미)에게 즉위하게 하시고 오토모 황자에게 여러 정사를 행하게 하소서. 신은 천황을 받들어 출가수도하고자 합니다."라며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오아마노 미코토는 삭발하고 야마토국의 요시노 산으로 낙향하여 은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요시노에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훗날의 지토 천황)와 구사카베 황자를 비롯한 가족, 그리고 소수의 사인(舎人)과 궁녀만을 데리고 갔으며, 다른 비와 자녀들은 수도인 오미쿄(近江京, 오늘날의 오쓰시)에 남겨두었습니다.
이듬해인 덴무 천황 원년(672년) 6월 22일, 덴지 천황이 사망하고 오토모 황자가 고분 천황으로 즉위하자, 오아마노 미코토는 요시노에서 거병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무라쿠니노 오요리(村國男依) 등을 미노국에 사자로 파견했으며, 이틀 뒤 자신도 소수의 측근만을 거느린 채 뒤를 따랐습니다. 오아마노 미코토는 후와(不破)의 길을 봉쇄하여 오미 조정과 동국(東國) 사이의 연락을 차단한 뒤, 군사를 일으키는 사자를 히가시야마(東山, 시나노국 등지)와 도카이(오와리국 등지)에 보냈습니다. 그의 군대는 붉은 깃발을 내걸고 붉은 옷을 표식으로 삼았습니다.
한편, 야마토 분지에서는 오토모노 후케이(大伴吹負)가 거병하여 아스카의 야마토쿄(倭京)를 급습, 점령했습니다. 오미 조정 측에서는 가와치 국수(河内国守) 구메노 시오코(来目塩籠)가 오아마노 미코토에게 가담하려다 살해되었고, 오미 방면의 장수 야마베 왕(山部王) 또한 살해되는 등 동요가 확산되었습니다. 오미의 호족 하타노 야쿠니(羽田矢国)는 오아마노 미코토 측으로 돌아섰습니다. 오아마노 미코토는 동국에서 수만의 군세를 후와에 집결시킨 뒤, 오미와 야마토 두 방면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오미 방면으로 진군한 군세는 비와호 동쪽을 따라 진격하여 여러 차례 적을 격파했으며, 7월 23일 세키가하라를 비롯한 각지에서 전투를 벌인 끝에 오토모 황자를 자결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로써 임진의 난은 막을 내렸습니다.
4. 치세 (673-686)
덴무 천황의 치세는 일본 고대 국가의 기초를 다지고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한 시기로 평가됩니다.
4.1. 즉위와 수도 건설
임진의 난에서 승리한 오아마노 미코토는 오토모 황자의 죽음 이후에도 한동안 미노에 머물며 전후 처리를 마쳤습니다. 그는 덴지 천황이 수도로 삼았던 오미의 오쓰노미야로 향하지 않고, 아스카의 옛 수도로 돌아왔습니다. 9월에 아스카의 시마 궁(島宮)에 들어갔고, 그 해에 새로운 궁실을 지어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 궁실은 원래 조메이 천황과 사이메이 천황의 궁이었던 오카모토 궁(飛鳥岡本宮)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이 대극전(大極殿)을 추가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 궁을 아울러 '아스카 기요미하라 궁(飛鳥浄御原宮아스카 기요미하라노미야일본어)'이라 이름 붙인 것은 그의 치세 말년의 일입니다. 고고학 발굴 결과, 현재 아스카 궁(전승 아스카 이타부키 궁) III-B기에 해당하는 건물 유적군이 이곳으로 추정됩니다.
덴무 천황 2년(673년) 2월 27일에 즉위식을 거행한 천황은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를 황후로 삼았습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단 한 명의 대신도 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정무를 살폈습니다.
덴무 천황은 이 궁에 만족하지 않고, 대대적인 국가 변혁에 걸맞은 새로운 궁궐, 즉 영구적인 수도를 건설할 포부를 가지고 적합한 땅을 물색했습니다. 덴무 5년(676년)에 훗날 후지와라쿄로 완성될 새로운 수도, 신성(新城)의 건설 계획을 시작했습니다. 이 공사는 기존의 기복을 고르고 평탄하게 다지며 도로마다 측면 도랑을 파는 작업이 포함되었습니다. 《만요슈》에는 "대군(大君)은 신이시기에" 논과 늪을 수도로 만들었다는 노래 두 수가 실려 있는데, 이는 이 공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에는 방위에 구애받지 않던 기존 도로와 건물들을 철거하고 남북 축을 중심으로 하는 바둑판 모양의 도시를 조성하려 했으나, 천도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덴무 11년(682년) 3월 1일, 천황은 미노 왕(三野王) 등에게 명하여 지형을 답사하게 했고, 16일에는 천황 자신도 직접 신성으로 행차했습니다. 이듬해 12년(683년) 7월 18일에도 수도 건설 부지를 둘러본 뒤, 13년(684년) 3월 9일에 궁실을 지을 부지를 최종 결정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수정된 도시 계획에 따라 공사가 재개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천황의 사망으로 중단되었으나, 그의 능은 새로운 수도의 중심축을 남쪽으로 연장한 바로 앞에 조성되었습니다. 조영 사업은 덴무 천황 사후 지토 천황에 의해 계속 추진되어 완성되었으며, 이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도성으로 평가받습니다.
덴무 천황은 수도가 2~3개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복도제) 새로운 수도 건설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던 덴무 12년(683년) 12월 17일에 나니와쿄(難波京)를 부수도로 설치했습니다. 이곳의 건물은 선대 고토쿠 천황이 지은 나니와궁(難波宮)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듬해 2월 28일에는 시나노국에도 부수도를 만들 부지를 살펴보기 위한 사신을 파견했지만, 이는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끝났습니다. 시나노 조도 계획에 대해서는 외적(신라)에 대한 방비, 임진의 난 경험을 통한 동국 호족층 경계, 동국 개척의 거점 마련, 천황의 온천 치료 목적, 말 산지로서의 중요성, 도교에 심취한 천황이 신선과 만날 수 있는 장소로 여겼다는 등 여러 설이 제기됩니다.
4.2. 정치 및 행정 개혁
덴무 천황은 강력한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치 및 행정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4.2.1. 황친 정치와 중앙 집권화
임진의 난에서 승리함으로써 강력한 인상을 남긴 덴무 천황은 '대군(大君)은 신이시기에'로 시작하는 《만요슈》의 여러 노래에서 묘사되듯이 높은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로 부상했습니다. 그는 단 한 명의 대신도 두지 않고 법관, 병정관 등을 자신의 직속으로 두어 스스로 정무를 살폈습니다. 요직에 황족을 등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이를 황친 정치(皇親政治고신 세이지일본어)라고 합니다. 황족은 관위 26계제와는 별도로 5위까지의 황족 전용 위계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황족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으며, 권력은 어디까지나 천황 개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덴무 천황은 중신에게 정무를 위임하거나 신하의 합의나 동의에 의지하지 않고, 천황 스스로가 군림하고 통치함으로써 일본 역사상 보기 드문 최고도의 권력 집중을 이루어냈습니다.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고대 일본에서 천황 전제의 정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신뿐만 아니라 후세의 의정관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 임명도 하지 않았으며, 관위 승진에서도 제도상 고위 관직 임명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대금하(大錦下, 관제 개혁 후 직광이直広弐) 이상의 상위 관위 승진을 허용하지 않고 전체적인 관위 승진을 억제하는 방침을 취했습니다. 반면 하위 관위는 임진의 난으로 감소한 관료 보충의 의미를 포함하여 승진을 촉진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전제를 억제할 수 있는 신하의 출현을 막으면서도 자신에게 충실한 관료층을 형성하여 정권 기반을 안정시키려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인사 정책의 반영으로, 임진의 공신 중 한 명으로 덴지 천황 시대에 이미 대금하 지위를 얻었던 하타노 야쿠니는 관위 48계제로 이행할 때 현직 대변관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관위가 강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정치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때때로 이루어졌던 초야의 인재 대발탁은 일절 없었습니다. 임진의 난에서 공을 세운 공신이라 할지라도 지방 출신자는 여전히 기존 귀족층 아래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임진의 난이 본질적으로 황위 계승 다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최고도의 전제정치에서도 귀족제적인 한계가 컸음을 보여줍니다.
4.2.2. 팔색성 개편
덴무 천황은 호족의 사적 지배를 부정하고, 이들을 관인 질서에 편입시켜 국가의 지배를 관철하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천황의 의도는 귀천의 차이를 자신이 정한 질서대로 재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몇몇 씨족의 성(姓가바네일본어)을 승격시켜 우대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덴무 천황 13년(684년) 10월 1일에 팔색성(八色の姓)을 제정하여 기존의 씨성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편했습니다.
이 개편에서 황족의 후예는 마히토(真人마히토일본어), 기존의 오미 씨족은 아손(朝臣아손일본어), 무라지는 스쿠네(宿禰스쿠네일본어) 등으로 분류되었으며, 임진의 난에서의 공적 또한 가바네를 정하는 데 반영되었습니다. 팔색성은 마히토, 아손, 스쿠네, 이미키, 미치노시, 오미, 무라지, 이나기 등 8가지 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씨족 정책의 의도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중소 호족을 규합하여 기존의 대호족을 억압하려 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기나이 호족을 우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특정 계층만을 선별하여 우대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설도 존재합니다. 덴무 천황 11년(682년) 8월 22일에 천황이 근무 평가에서 족성(族姓)을 제1 기준으로 삼도록 명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태생의 귀천은 여전히 관료 제도 안에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었습니다.
4.2.3. 율령 제정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
덴무 천황은 덴무 천황 10년(681년) 2월 25일에 율령을 정하고 법식을 개혁하는 대규모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이 사업은 관료들을 분담시켜 진행되었으나, 천황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율령 중 영(令) 부분만이 지토 천황 3년(689년) 6월 29일에 발포되었는데, 이를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飛鳥浄御原令)이라고 합니다. 이 율령은 일본 최초의 율령으로 평가됩니다.
덴무 천황은 덴지 천황이 정한 관위 26계제를 답습했지만, 덴무 14년(685년) 1월 21일에는 새로운 관위 48계제를 제정했습니다. 이 새로운 관위 체제에서는 황족과 신하에게 다른 위계가 마련되었으며, 친왕에게도 위가 하사되었습니다. 최고위는 구사카베 황자에게 내려진 정광일(淨廣壹)이었습니다. '명(明)', '정(淨)', '정(正)', '직(直)'과 같은 수식어는 신토에서 존중하는 가치로, 덴무 천황의 도덕적·종교적 관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덴무 천황은 관과 밀접하게 관련된 복장 규제도 강화했습니다. 덴무 11년(681년)에는 기존의 일본 고유 머리 모양인 각발(角髪)을 바꾸도록 명하여, 이후 관을 쓰는 데 적합한 형태로 머리 모양이 바뀌었습니다. 덴무 12년(682년)에는 위계를 나타내는 색깔을 기존의 관 색깔에서 조복(朝服)의 색깔로 변경했습니다. 이러한 규정들은 관료들의 근무 시 복장에 대한 것으로, 귀가 후 복장이나 민중의 복장에까지 미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덴무 천황이 확립한 이러한 제도들은 후대의 다이호 율령이나 요로 율령과는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실질적인 의의와 내용은 동일하며 율령 관인제의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시의 관제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정무를 논의하는 여러 명의 납언(納言)으로 구성된 태정관, 그 아래에 민관(民官), 법관(法官), 병정관(兵政官), 대장(大蔵), 이관(理官), 형관(刑官)의 6관, 그리고 기타 관사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자마다 덴무 시대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만, '덴무 정권 아래서 일본 율령 체제의 기초가 정해졌다'는 등 덴무 시대의 의의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 견해가 대다수입니다.
4.3. 경제 및 사회 정책
덴무 천황은 중앙 집권 국가 건설을 위해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걸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4.3.1. 화폐와 조세
일본 최초의 화폐로 여겨지는 부본전(富本銭)이 주조된 것은 덴무 천황의 시대입니다. 《해동제국기》에는 덴무 12년(683년)에 처음으로 수레를 만들고, 은전(銀錢) 사용을 정지시키는 대신 동전(銅錢)을 사용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부본전이 주술용일 뿐 실제 유통 화폐는 아니었다는 설, 부본전보다 앞서 무문은전(無紋銀銭)이 통용되고 있었다는 설도 존재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부본전이 무문은전 이후에 주조되었으며 주술용이 아닌 유통 화폐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덴무 천황은 호족과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인민에 대한 사적 지배를 부정하고, 이들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덴무 4년(675년) 2월 15일, 그는 덴지 천황 3년(664년)부터 여러 씨족에게 인정되었던 부곡(部曲)과 황족, 신하, 사원에 인정되었던 산택(山沢), 섬과 포구(島浦), 임야(林野), 연못을 다시 거둬들이는 조를 내렸습니다.
이어서 현지의 유력자들이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부정하고, 관위나 관직, 공적에 따라 개인에게 봉호(封戸후고일본어, 식봉)를 지급하는 형식으로 전환했습니다. 봉호 제도의 도입 자체는 덴무 천황 이전부터 있었으나, 그 내실의 전환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덴무 5년(676년) 5월 14일에는 서쪽 지방에 있는 봉호의 세금을 거두어 동쪽 지방으로 대체함으로써, 한 사람을 장기간 같은 장소에 봉하여 발생하는 피봉자와 현지 간의 주종 관계를 단절하려 했습니다. 덴무 8년(679년) 8월 2일에는 소금(小錦) 이상의 황족과 신하에게 일괄적으로 식봉을 지급함으로써 신제도로의 전환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와 전후하여 덴무 8년(679년) 4월 5일에는 사찰의 식봉 조사를 명하고, 9년(680년) 4월에는 그 연한을 30년으로 한정했습니다. 덴무 11년(682년) 3월 28일에는 식봉을 중단하고 공에 반환하라는 조를 내렸으나, 실제로는 그 이후에도 봉호가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식봉 관리에 대한 관여를 금지하는 등의 제도 개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4.3.2. 토지 및 노동 정책
덴무 천황은 호족의 사적 지배를 부정하고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 토지 및 노동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호족과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인민에 대한 사적 지배를 일체 부정하고, 이들을 천황 중심의 관료 질서에 편입시켜 국가의 지배를 관철하려 했습니다.
덴무 4년(675년) 2월 15일, 그는 덴지 천황 3년(664년)부터 여러 씨족에게 인정되었던 부곡(部曲)과 황족, 신하, 사원에 인정되었던 산택(山沢), 섬과 포구(島浦), 임야(林野), 연못을 다시 거둬들이는 조를 내렸습니다. 이는 호족의 사적 지배를 부정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지배 체제 수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태생의 귀천에 의한 차별을 부정하거나 평등한 능력주의에 따른 관료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현지의 유력자들이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부정하고, 관위나 관직, 공적에 따라 개인에게 봉호(식봉)를 지급하는 형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포함했습니다. 봉호 제도의 도입 자체는 덴무 천황 이전부터 있었으나, 덴무 천황은 이를 통해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덴무 5년(676년) 5월 14일에는 서쪽 지방에 있는 봉호의 세금을 거두어 동쪽 지방으로 대체함으로써, 장기간 같은 장소에 봉하여 발생하는 피봉자와 현지 간의 주종 관계를 단절하려 했습니다.
4.3.3. 동물 보호
덴무 천황은 덴무 4년(675년) 4월 17일(양력 5월 19일)에 '육식 금지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금지령은 매년 4월 1일(양력 5월 3일)부터 9월 30일(양력 10월 27일)까지 어린 물고기를 잡거나 먹지 말고 보호할 것과, 다섯 종류의 가축인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금지령은 육식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벼농사 기간에 해당하는 4월부터 9월까지만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농한기인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육식이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수도에서 소와 말의 고기가 소비되었음이 뼈에 남은 흔적을 통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벼농사에 해를 끼치는 동물로 여겨지던 사슴과 멧돼지에 대해서는 사냥 방법을 규제했을 뿐 육식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육식 금지령은 육식의 전면 금지보다는, 율령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세수 확보를 위해 벼농사를 장려하고 농업에 유용한 소와 말 등의 동물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강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율령 국가 체제 하에서 쌀의 신성함이 강조되고 벼농사 촉진을 위한 동물 보호 및 육식 제한·금지 정책이 후대에도 반복되면서, 일본인들은 점차 육식 자체를 벼농사에 해를 끼치는 '부정함'으로 여기고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4.4. 군사 정책
덴무 천황은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 군사력 증강과 군사 제도 정비에 힘썼습니다.
덴무 4년(675년) 10월 20일, 그는 여러 오키미(王) 이하 초위(初位) 이상의 관인들에게 무장을 의무화했습니다. 명령이 내려진 후, 5년(676년) 9월 10일에는 실제로 무기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8년(679년) 8월에는 도미역(迹見驛)의 역가(驛家)에서 왕경(王卿)들의 말을 달리게 했으며, 11월에는 다쓰타산(竜田山)과 오사카산(大坂山)에 관(関)을 설치하고 나니와에는 외벽을 쌓도록 했습니다. 9년(680년) 9월 9일에는 나가라(長柄) 신사에서 대산위(大山位) 이하 관인들의 말을 조사하고 기사(騎射)를 시연하게 했습니다.
이후 덴무 12년(683년) 11월 4일에는 여러 쿠니(国)에 진법(陣法)을 가르치도록 명했으며, 13년(684년) 윤 4월 5일에는 "정치의 요점은 군사이다"라고 선포하며 문무 관인과 모든 사람에게 용병술과 승마를 배우고, 무장이 부족한 자는 처벌하겠다는 조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4년(685년) 8월 11일에는 실제로 수도와 기나이 지역 인부들의 무기를 검사했습니다. 11월 4일에는 군대 지휘용 도구와 대형 무기를 고오리(評)의 역소(役所)에 납입하도록 했습니다.
율령제 하에서 국군 주력의 위치에 있던 군단은 이 시대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덴무 천황은 관인과 기나이의 무장 강화를 특별 정책으로 삼았지만, 이러한 관리 무장 정책은 덴무·지토 시대 이후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관인의 무장화는 군단 창설 이전의 상황에 대응한 것으로 보이며, 지휘용 도구를 고오리에 거두게 한 것 등 당시의 전국적인 병제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뉩니다. 고오리의 지방관이 병사를 이끌던 평제군(評制軍)이 있었다는 설, 후대의 군단과 거의 같은 것이 성립해 있었다는 설, 그리고 전통적으로 구니노미야쓰코가 지배하던 현지 인민을 모아 편성한 구니노미야쓰코군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4.5. 외교 정책

덴무 천황이 임진의 난을 일으킨 것은 당나라 사신 곽무종이 672년 5월 30일 귀국한 지 약 한 달 후인 6월 22일이었습니다. 백강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한편 일본과의 통교를 원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외교적 환경은 다소 호전되었습니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덴무 천황은 정복이나 간섭을 위한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즉위 후에는 대외적으로 전쟁이 없었습니다.
덴무 조정은 저자세를 취하는 신라와 사신을 주고받으며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덴무 천황은 고분을 물리친 후 676년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신라 사신의 관위는 6세기 후반 급찬에서 나마·대사로, 덴지 천황 때에도 급찬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덴무 천황이 즉위한 673년 무렵부터 일길찬이 파견되기 시작했는데, 신라 사신의 관위가 오른 것을 두고 신라가 일본에 저자세로 나왔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668년부터 700년 사이에 한정된 현상이며 이후로는 다시 급찬에서 대나마로 사신의 지위가 내려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신라뿐만 아니라 서방 해상의 제주도에 있던 탐라에서도 사절이 왔습니다. 덴무 11년(682년) 7월 25일에는 난세이 제도의 다네(多禰, 지금의 다네가섬), 야쿠(掖玖, 야쿠시마), 아마미(阿麻弥, 아마미오시마)의 섬 사람들에게 녹(禄)이 내려졌습니다. 동북 지방에서는 덴무 11년(682년) 3월 2일에 무쓰국의 에미시에게 관위를 수여했으며, 4월 22일에는 고시국의 에미시 이코키나(伊高岐那)에게 고오리(評)를 설치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덴지 천황이 친백제적 성향을 보인 것과 달리, 덴무 천황은 친신라 외교를 펼쳤다고 평가됩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신라계 도래인을 특별히 우대하거나 백제계 도래인을 냉대하지 않았습니다. 덴무 2년(673년) 윤 6월 6일의 사택소명(沙宅昭明), 3년(674년) 1월 10일의 백제왕 창성(百濟王昌成)에 대한 증위(贈位), 14년(685년) 10월 4일의 백제 승려 상휘(常輝)에 대한 봉호 30호 지급 등 백제인에 대한 많은 혜택이 있었습니다. 또한 한반도에서 귀화한 도래인들에게는 자신의 재위 원년(672년)부터 10년(681년)까지 과세를 면제했으며, 10년이 지난 8월 10일에는 입국 당시 아이였던 자들에게도 면제를 확대했습니다.
4.6. 종교 정책
덴무 천황은 일본의 전통적인 종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 도교를 모두 활용하여 천황의 권위를 강화하고 국가 통치 체제를 확립하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4.6.1. 신토와 국가 신도
덴무 천황은 일본 고유의 신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고, 지방적인 제사 중 일부를 국가 제사로 격상시켰습니다. 그의 신토 진흥 정책은 외래 문화의 침투에 맞서 일본의 민족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평가됩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각지의 전통적인 제사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조상신으로 하는 천황가와의 관계 속에 각지의 신을 위치시키고 체계화하여 편입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는 천황 권력의 강화를 목표로 했습니다. 각지에서 모셔지던 현지 신사와 여러 제의는 보호와 교환의 형태로 국가의 관리와 통제를 따랐으며, 고대 국가 신도가 형성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덴무 천황은 이세 신궁을 특별히 중시하여, 이 신사가 일본 최고의 신사로 자리매김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임진의 난 당시, 군사를 이끌고 이세국에 들어선 오아마노 미코토는 세키타가와(迹太川) 부근에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올렸는데, 이는 이세 신궁에서 모시는 아마테라스에게 승리를 기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난을 승리로 이끈 후, 천황은 딸인 오오쿠노 히메미코(大来皇女)를 이세 신궁에 보내 사이오(斎王)로서 신궁을 섬기게 했습니다. 덴무 4년(675년) 2월 13일에는 딸 도오치노 히메미코(十市皇女)와 조카(덴지 천황의 딸) 아베노 히메미코(阿閉皇女, 훗날의 겐메이 천황)가 이세 신궁에 참배했습니다. 이세 신궁의 모든 신전을 20년에 한 번씩 다시 짓는 시키넨센구(式年遷宮) 제도를 처음 발안한 것도 덴무 천황입니다. 시키넨센구가 처음 행해진 해에 대해서는 덴무 14년(685년)과 지토 2년(688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덴무 천황의 발의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세 신궁을 이스즈강(五十鈴川)가의 현 위치에 세운 것도 덴무 천황으로, 그 이전에는 미야강 상류의 다키하라 궁(滝原宮)에 원래의 이세 신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라는 신격을 처음으로 창조한 것이 덴무 천황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는 무(無)에서 창작했다기보다는, 이세 지방에서 모시던 태양신을 천황가가 모시던 신과 합체시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라는 신격을 완성했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사이오 제도 역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랴쿠 천황 때부터 스이코 천황 때까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덴무 천황의 딸인 오오쿠노 히메미코가 최초의 사이오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 밖에 덴무 3년(674년) 8월 3일에는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오사카베 황자(忍壁皇子)를 보내 신보(神宝)를 닦게 했습니다. 덴무 4년(675년) 4월 10일에는 다쓰타의 풍신(風神)을 모시기 위해 미노 왕 등을, 히로세의 대기신(大忌神)을 모시기 위해 하시히토노 오오카이(間人大蓋) 등을 사자로 파견했습니다. 이는 후세까지 두 신을 모시기 위해 칙사를 파견하는 제도의 시초로 여겨집니다. 이 해 1월 23일에 여러 신사에 제사를 지낸 것을 기년제(祈年祭)의 시작으로 보는 설도 있습니다.
4.6.2. 불교 진흥
덴무 천황은 불교에 대한 보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위 전에 출가하여 요시노에 은거했던 경력이 있습니다. 즉위 후 덴무 2년(673년) 3월에는 가와라데라(川原寺)에서 《일체경》(一切經) 필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덴무 5년(676년)에는 전국에 사자를 파견하여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인왕경》(仁王經)을 설법하게 했으며, 8년(679년)에는 야마토쿄(倭京)의 24개 사찰과 궁중에서 《금광명경》을 설법하게 했습니다. 《금광명경》은 국왕이 하늘의 자손이며 태어날 때부터 수호를 받아 인민을 통치할 자격을 얻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후예에 의한 아라히토가미 사상과 궤를 같이하며 천황의 군림과 통치를 정당화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업은 개인의 구제보다는 호국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사원 건립에 있어서는 덴무 2년(673년) 12월 17일에 미노 왕과 기노 가타마로(紀訶多麻呂)를 조다카이치오데라사(造高市大寺司)에 임명하고, 조메이 천황이 창건했던 백제대사(百濟大寺)를 다카이치(高市)로 옮겨 다카이치오데라(高市大寺)로 삼았습니다. 덴무 9년(680년) 11월 12일에는 황후의 병을 계기로 야쿠시지(藥師寺) 건립을 기원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의 병에 즈음해서도 여러 가지로 불교에 의지하여 쾌유를 빌었습니다.
덴무 14년(685년) 3월 27일에는 모든 가정에 불사(佛舍)를 짓고 예배·공양하라는 조를 내렸습니다. 여기서 '가정'이 어느 정도의 규모를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불교를 널리 보급하려는 목적이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이 시기까지 기나이를 제외한 지방에는 사찰이 적었으나, 덴무·지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씨사(氏寺)가 활발히 조영되었습니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기와를 통해 중앙의 소수 사찰들이 지역별 건설을 지도하며 정책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황의 이러한 불교 보호는 반대로 승려와 비구니들에게 사찰에 머물며 천황과 국가를 위한 기도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불교를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이는 국가 신도에 상응하는 '국가 불교'의 형태였습니다. 덴무 4년(675년)에는 여러 사찰에 주어졌던 산림과 연못을 거둬들이고, 8년(679년)에는 식봉(食封)을 재검토하여 사찰의 수입을 국가가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중앙 통제 기관으로는 스이코 천황 시대에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던 승정(僧正)과 승도(僧都)를 부활시켜 승강제(僧綱制)를 정비했습니다. 또한 덴무 조정은 승려와 비구니의 위의(威儀)와 복장까지 규제하는 등, 모든 사찰과 승려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를 강화했습니다.
천황의 불교 이해와 태도에 대해서는 현세 이익을 추구하는 피상적인 것이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천황이 명하여 설법하게 한 경전은 《금광명경》이나 《인왕경》과 같은 호국 불교적 경전으로, 개인의 구제나 불교적 깨달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천황 개인이 불교에 기대한 것은 황후와 자신의 병 치유였으며, 불교의 자아 부정이나 이타 사상을 실현하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4.6.3. 도교의 영향
덴무 천황의 종교관에는 도교의 요소가 짙게 나타납니다. 그가 제정한 팔색성의 최상위는 '마히토(真人마히토일본어)'이며, 천황 자신의 일본식 시호는 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天渟中原瀛真人天皇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일본어)입니다. 여기서 '오키(瀛오키일본어)'는 도교에서 동해 바다 위에 있다는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을, '마히토'는 선인의 상위 계급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시호를 통해 천황은 '하늘의 한가운데, 영주산에 살고 있는 진인(眞人)'으로서 도교의 최고위 신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일본서기》에 덴무 천황이 조예가 깊었다고 전하는 천문둔갑(天文遁甲) 또한 도교적인 기술입니다. 그가 안장된 팔각분(八角墳) 형태의 능묘는 동서남북의 사방에 북동, 북서, 남동, 남서를 더한 팔방(八紘핫코일본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역시 도교적인 방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도교에 대한 관심은 덴무 천황만의 것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에게서도 현저하게 나타났으며, 덴무 천황 사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덴무 천황과 그 이후의 일본 도교는 신토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고 융합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도교가 일본 고대 문화에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합니다.
4.7. 문화 정책
덴무 천황은 일본 고유의 전통적인 문예와 전승을 발굴하고 정비하는 데 힘썼습니다. 외래 문화를 배척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과 이후의 천황들과 비교할 때, 토착 문화의 발굴과 정돈을 향한 그의 노력은 두드러집니다. 일부 학자들은 임진의 난이 실패하여 덴무 천황이 즉위하지 못했다면, 《고사기》나 《만요슈》로 대표되는 토착적인 일본 문화가 《일본서기》나 《회풍조》로 대표되는 중국풍 문화에 침식되거나 아예 전해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평가합니다.
덴무 천황은 기존의 민간 습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를 국가 단위의 제사로 승격시켰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후술할 신도의 제사를 포함하여, 후대에 전통으로 전해진 주요 궁정 의식의 대부분이 덴무 천황에 의해 창시되거나 집대성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고세치노마이(五節舞)는 그 확실한 예로 꼽히며, 니이나메노마쓰리(新嘗祭)를 국가 제사로 승격시키고 특히 다이죠사이(大嘗祭)를 마련한 것도 덴무 천황이었습니다.
예술적으로도 덴무 천황 4년(675년) 2월 9일에는 기나이와 그 주변 지역에서 노래에 뛰어난 남녀, 난쟁이, 기인들을 궁정에 모으도록 명하고, 4월 23일에는 그들에게 녹을 주었습니다. 덴무 14년(685년) 9월 15일에는 뛰어난 노래와 피리 연주를 자손에게 전하도록 명했으며, 이듬해 15년(686년) 1월 18일에는 배우와 가인(歌人)들에게 포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4.7.1. 역사서 편찬 (일본서기, 고사기)
덴무 천황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문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덴무 10년(681년) 3월 17일, 그는 황태자와 여러 신하들에게 '제기(帝紀) 및 상고 제사(上古諸事)' 편찬을 명하는 조칙을 내렸습니다. 이는 훗날 완성되는 《일본서기》 편찬 사업의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히다노 아레(稗田阿礼)로 하여금 역대 천황의 계보인 제왕일계(帝皇日継)와 선대로부터 전해지는 구사(旧辞) 등의 기록을 암송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오노노 야스마로에 의해 성문화된 것이 바로 《고사기》입니다. 이 두 역사서는 모두 천황 사후에 완성되었지만, 오늘날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사서로 꼽힙니다.
두 역사서를 병행하여 편찬하게 한 의도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지만, 내용은 천황가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방대한 한문 문장으로, 일관성을 희생하고 다수의 설을 병기한 《일본서기》가 여러 편찬자들의 합의와 분담으로 이루어진 반면, 분량이 비교적 짧고 문체가 시종일관 변함없는 《고사기》에는 덴무 천황 개인의 의지가 많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됩니다.
4.7.2. 문학 및 예술 (만요슈)
덴무 천황은 일본 고유의 문학인 와카(和歌)를 장려하고 예술을 후원했습니다. 그의 치세에 편찬이 시작된 《만요슈》에는 덴무 천황 본인이 읊은 와카도 여러 수 실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모노 들판에서 누카타노 오키미와 주고받은 연애시, 후지와라 부인과 주고받은 익살스러운 노래, 요시노의 '요시'를 반복하는 노래, 그리고 요시노 길의 쓸쓸함을 노래하는 어두운 분위기의 노래 등이 전해집니다. 그가 한시를 지었다는 사료는 없지만, 이는 기록으로 전하지 않을 뿐이거나 천황의 취향이 한시보다는 와카에 더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덴무 천황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이들을 궁정으로 불러 모아 후원했습니다. 덴무 4년(675년) 2월 9일에는 기나이와 그 주변 지역에서 노래에 뛰어난 남녀, 난쟁이, 기인들을 궁정에 모으도록 명하고, 4월 23일에는 그들에게 녹을 주었습니다. 덴무 14년(685년) 9월 15일에는 뛰어난 노래와 피리 연주 기술을 자손에게 전하도록 명했으며, 이듬해 15년(686년) 1월 18일에는 배우와 가인(歌人)들에게 포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능인들에 대한 후대는 천황의 개인적인 기호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측면이 민중(특히 지방 호족층)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기여했을 수도 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4.7.3. 천문 및 역법
덴무 천황은 천문학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천문둔갑(天文遁甲)에 능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덴무 4년(675년) 1월 5일, 그는 일본 최초의 천문 관측 기구인 점성대(占星臺)를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관심뿐만 아니라, 도교적 사상과 결합하여 국가 통치에 천문학적 지식을 활용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4.8. 숙청과 통제
덴무 천황은 강력한 권력 집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이나 잠재적 위협에 대해 숙청과 통제를 단행했습니다.
그는 고위 황족과 신하들에게 유배 이하의 처분을 많이 내렸습니다. 이는 덴무 4년(675년) 4월 8일에 조참(朝参, 궁에 출근하는 것)이 금지된 다이마노 히로마로(當摩廣麻呂)와 구누노 마로(久努麻呂)를 시작으로, 4월 23일에 이나바국에 유배당한 3위 황족 오미 왕(麻続王) 같은 고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미 왕에 대해서는 《만요슈》에 그를 동정하는 사람과의 노래 교환이 채록되기도 했습니다. 11월 3일에는 궁의 동쪽 산에 올라가 '요망한 말'을 지껄이고 자살한 사람이 나왔는데, '요망한 말'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천황의 정치를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덴무 5년(676년) 9월 12일에는 지쿠시다자이(筑紫大宰)였던 황족 야가키 왕(屋垣王)이 도사국에 유배되었고, 6년(677년) 4월 11일에는 구이타노 나쿠라(杙田名倉)가 이즈오섬에 유배당했습니다. 구이타노 나쿠라는 천황을 비난했다는 죄목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의 처벌 이유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대군(大君)은 신이시기에'와 같은 천황 찬미 일색으로 물들어 있지 않았으며, 황친 정치의 핵심을 담당했던 황족을 포함하여 불만이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위협적인 조칙도 여러 차례 내려졌습니다. 덴무 4년(675년) 2월 19일, 천황은 군신, 백료, 천하의 인민을 향해 "모든 악을 하지 말라!"는 조를 내렸습니다. 덴무 6년(677년) 6월에는 도래인 씨족인 야마토노아야(東漢) 집안이 정치 모의에 참가했던 과거를 수십 년 전의 일까지 끄집어내 꾸짖으면서, "큰 은혜를 내려 용서하겠지만 앞으로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위협적인 언사를 던졌습니다. 덴무 8년(679년) 10월 2일에는 "왕경(王卿) 등이 태만하여 악인을 간과하고 있다!"며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처벌은 천황에게로의 권력 집중과 그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 해석되기도 하며, 전제군주의 의심 많은 성격의 발현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처벌은 덴무 4년(675년)부터 6년(677년)에 집중되어 있으며, 위협적인 조칙도 이 시기와 겹칩니다. 이 무렵 천황은 부곡과 산택 등을 거둬들이는 조칙을 내리고 식봉 개혁을 진행 중이었는데, 이러한 정책이 기존 기득권층의 반발을 낳았고, 그에 대한 처벌이 이어진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임진의 난의 전후 처리를 제외하고는 고위 관료에게 사형을 선고한 기록은 없습니다. 은사(恩赦)도 자주 내려서 덴무 8년(679년) 12월 2일의 은사에 의해 그때까지 유배된 사람들도 사면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5. 인물상과 평가
덴무 천황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독특한 성격을 지닌 군주로, 후대에 일본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5.1. 성격과 관심사
덴무 천황은 종교와 초자연적인 힘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신불에 대한 믿음도 두터웠습니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천문둔갑(天文遁甲)에 능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의 난에서는 스스로 점을 쳐서 장차 천하가 양분될 징조를 예측했다거나 여러 신들에게 기도하여 뇌성폭우를 그치게 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습니다. 《고사기》에는 덴무 천황이 꿈속에서 들은 노래의 내용을 풀이하여 한밤중의 물에 던져, 자신이 황위에 오를 것을 알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자적 능력은 후대에 천황이 사람들 사이에서 신이나 다름없는 카리스마를 지니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즉위 후에도 그의 종교 및 의식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운세의 활용이나 신불에 대한 기원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모습이 자주 나타났습니다.
덴무 천황의 와카(和歌)로는 가모노 들판에서 누카타노 오키미와 주고받은 연애시, 후지와라 부인과 주고받은 익살스러운 노래, 요시노의 '요시'를 반복하는 노래, 그리고 요시노 길의 쓸쓸함을 노래하는 어두운 분위기의 노래 등이 전해집니다. 그가 한시를 지었다는 사료는 없지만, 이는 기록으로 전하지 않을 뿐이거나 천황의 취향이 한시보다는 와카에 더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천황의 취미는 수수께끼 내기와 같은 서민적인 모습도 있었는데, 덴무 14년(674년) 9월 18일에는 황궁 대안전에서 바쿠치(博戯, 도박) 대회를 열기도 하는 등 유협적인 면모도 지녔습니다. 앞에서 언급된 각종 예능인에 대한 후대도 천황의 기호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측면이 민중(특히 지방 호족층)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기여했을 수도 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분랴쿠 2년(1235년)에 덴무·지토 합장릉이 도굴당했을 때의 조사 기록인 《아후노야마료우키》(阿不之山陵記)에는 생전 덴무 천황의 체격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도굴 시 외부에 노출된 덴무 천황의 유골은 머리가 보통 사람보다 조금 크고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으며, 정강이뼈는 48 cm, 팔꿈치 길이는 42 cm)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추정한 천황의 키는 약 175 cm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고 보입니다. 당시 구교(公卿)였던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일기 《메이게쓰키》(明月記)에는 무덤의 유골에 뼈와 흰 머리카락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는 덴무 천황 사망 후 약 70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5.2. 역사적 평가
덴무 천황은 임진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전을 통해 황위에 올랐으며, 그의 치세는 일본 고대 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중요한 시기로 평가됩니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으며, 이는 후대 일본 율령 체제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황친 정치(皇親政治고신 세이지일본어)를 통해 황족을 요직에 등용하고, 팔색성을 제정하여 기존의 씨성 제도를 재편했습니다. 또한 일본 최초의 율령인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의 제정을 시작했으며, 새로운 수도인 후지와라쿄의 건설을 계획했습니다. 이러한 제도 개혁은 일본 사회의 질서를 재정비하고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부본전 발행과 토지 및 조세 정책을 통해 국가의 재정을 안정화하고 호족의 사적 지배를 제한했습니다. 675년에 내려진 육식 금지령은 농업 진흥과 동물 보호라는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신라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여 일본의 자주성을 확립하려 했습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는 신토를 국가 신도로 확립하고 이세 신궁의 위상을 높였으며, 불교를 보호하고 통제하여 국가 불교를 추진했습니다. 또한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의 칭호나 능묘 형태에도 도교적 요소가 반영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편찬 사업을 시작하여 일본 역사 기록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만요슈》에 실린 와카를 통해 문학을 진흥하고 점성대를 설치하여 천문학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덴무 천황의 통치는 강력한 전제군주적 성격을 띠었으며,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과 통제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새로운 국가 질서를 구축하려는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정책들은 후대의 지토 천황에게 계승되어 일본 고대 율령 국가 체제를 완성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6. 죽음과 능묘
덴무 천황은 덴무 15년(686년) 5월 24일에 병을 얻었습니다. 그는 불교의 영험을 빌어 쾌유를 빌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고, 7월 15일에 황후와 황태자에게 정무를 위임했습니다. 7월 20일에는 새로운 연호가 슈초(朱鳥)로 정해졌습니다. '슈초'는 도교 사상에서 생명을 충만하게 하고 쇠약해진 생명을 소생시키는 존재로 여겨지며, 궁전의 이름도 '아스카 기요미하라 궁'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이는 천황의 병세 회복을 기원하는 응급 조치적인 발상으로 여겨집니다. 그 후로도 신불에 쾌유를 비는 기도가 이어졌지만, 9월 9일(양력 10월 1일)에 덴무 천황은 결국 사망했습니다.
덴무 천황이 사망하고 한 달이 지난 10월 2일, 그의 아들 오쓰 황자가 모반 혐의로 붙잡혀 바로 다음 날인 10월 3일에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덴무 천황의 시신은 오랫동안 매장되지 않고 빈소에 모셔졌습니다. 황태자가 백관을 인솔하여 여러 차례 의식을 반복한 뒤, 지토 천황 2년(688년) 11월 21일에야 오우치 능(大内陵)에 묻혔습니다. 지토 천황 3년(689년) 3월 13일에 구사카베 황자가 사망하자, 황후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가 천황으로 즉위했습니다(지토 천황).

덴무 천황의 능묘는 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촌 오오치노구치에 위치한 히노쿠마노오오우치노미사사기(檜隈大内陵히노쿠마노오오우치노미사사기일본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토 천황과의 합장릉으로, 궁내청에 의해 상원하방분(上円下方, 팔각) 형태로 분류됩니다. 유적명은 '노구치 오오하카 고분(野口王墓古墳)'입니다.
고대 천황릉으로서는 드물게 그 능묘 비정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인 분랴쿠 2년(1235년)에 도굴당하여 대부분의 부장품을 도난당했습니다. 관도 외부 공기에 노출되었지만 유해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천황의 두개골에는 당시까지도 흰 머리카락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지토 천황의 유골은 화장되어 은으로 만든 유골함에 담겨 있었으나, 유골함만 도굴범이 훔쳐가고 유골은 근처에 아무렇게나 버려졌습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일기 《메이게쓰키》(明月記)에 도굴의 전말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도굴 당시 작성된 《아후노야마료우키》(阿不幾乃山陵記)에는 석실의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위 능묘 외에도, 나라현 가시하라시 고조노초에 있는 궁내청의 '우네비 능묘 참고지(畝傍陵墓参考地우네비 료보 산코치일본어)'에서는 덴무 천황과 지토 천황이 피장 후보자로 상정되고 있습니다. 이 유적은 미세마루야마 고분(丸山古墳, 고조노마루야마 고분)입니다. 또한 황거 내 황령전(皇霊殿, 궁중삼전 중 하나)에서는 다른 역대 천황 및 황족들과 함께 덴무 천황의 영혼이 모셔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