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 및 배경
1.1. 출생과 가족
프랜시스 모건 아요델레 톰프슨(Francis Morgan Ayodélé Thompson)은 1958년 7월 30일 런던 노팅힐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이지리아계 영국인 아버지 프랭크 톰프슨(미니캡 회사를 운영)과 스코틀랜드 던디 출신인 어머니 리디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톰프슨이 여섯 살 때 아버지는 가정을 떠났고, 톰프슨이 열한두 살 무렵에는 아버지가 스트리트햄에서 총격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의 이름 '아요델레'(Ayodélé아요델레요루바어)는 요루바어로 '기쁨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q=Notting Hill, London|position=right
1.2. 학창 시절
톰프슨은 일곱 살 때 서식스 주 볼니에 있는 파니 클로즈 기숙학교에 보내졌는데, 그는 그곳을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곳"이라고 묘사했다. 어린 시절 그의 첫 꿈은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으나, 이후 육상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2. 육상 경력
2.1. 초기 경력
톰프슨은 처음에는 헤이워즈 히스 해리어스 클럽의 멤버였으나, 1975년 런던으로 돌아온 후에는 뉴햄 앤 에식스 비글스 육상 클럽에 합류하여 스프린터 훈련을 받았다. 이후 밥 모티머 코치의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모티머 코치는 톰프슨의 동료 십종경기 선수가 수두에 걸린 상황에서 그에게 십종경기를 시도해보라고 제안했다. 같은 해 웨일스 컴브랜에서 첫 십종경기에 출전하여 우승했으며, 다음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1976년에는 아마추어 육상 협회 타이틀을 획득했고, 18세의 나이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하여 18위에 그쳤다. 이듬해인 1977년 유럽 주니어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1978년 코먼웰스 게임에서 첫 금메달을 따내며 세 번의 코먼웰스 대회 우승 중 첫걸음을 내디뎠다. 1979년에는 그해 유일한 십종경기 대회에서 완주하지 못했지만, 영국 선수권 대회 멀리뛰기에서 우승했다.
2.2. 최전성기 및 세계 기록 갱신
톰프슨은 1980년 올림픽 시즌을 앞두고 5월 오스트리아 괴치스에서 열린 대회에서 십종경기 세계 기록인 8648점을 수립하며 활약을 시작했다. 이어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1년은 비교적 조용했지만, 1982년에는 다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5월 괴치스에서 세계 기록을 8730점으로 경신했고, 9월 아테네에서 열린 1982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는 기록을 8774점까지 끌어올렸다. 다음 달 브리즈번에서 그는 두 번째 코먼웰스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3년 헬싱키에서 열린 제1회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동시에 유럽 챔피언, 세계 챔피언, 올림픽 챔피언 타이틀을 보유한 최초의 십종경기 선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세계 타이틀 획득을 통해 단일 종목에서 올림픽, 세계, 대륙, 코먼웰스 게임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한 최초의 육상 선수가 되었다.
1984년 여름, 톰프슨은 올림픽 타이틀 방어를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훈련에 매진했다. 당시 세계 기록을 톰프슨으로부터 빼앗은 서독의 위르겐 힝센이 강력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톰프슨은 첫 종목부터 선두를 잡았고, 대회 내내 그 리드를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1500미터에서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세계 기록과 단 1점 차이로 아쉽게 동률을 이루지 못하는 듯했으나, 사진 판독 결과 110미터 허들에서 1점이 추가되어 힝센의 기록과 동률을 이룬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새로운 채점 방식이 도입되면서 톰프슨은 재계산된 8847점으로 다시 단독 세계 기록 보유자가 되었고, 이 기록은 1992년 미국의 댄 오브라이언이 8891점으로 경신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톰프슨은 올림픽 십종경기에서 두 번의 우승을 차지한 선수로, 이는 미국의 밥 머사이어스와 애슈턴 이턴만이 공유하는 위업이다. 그의 1984년 올림픽 기록은 현재까지도 영국의 국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2002년, 채널 4에서 실시한 '위대한 스포츠 순간 100' 설문조사에서 톰프슨의 올림픽 타이틀 방어는 34위에 선정되었다.
2.3. 위르겐 힝센과의 라이벌리
1980년대 내내 톰프슨과 서독 육상 선수 위르겐 힝센의 라이벌 관계는 스포츠계에서 전설적이었다. 두 선수는 끊임없이 세계 기록을 주고받았지만, 톰프슨은 항상 주요 대회에서 우위를 점하며 1978년부터 1987년까지 9년간 모든 대회에서 무패를 기록했다.
2.4. 부상 및 은퇴
1986년 세 번째 코먼웰스 타이틀과 또 다른 유럽 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 이후 그는 전성기 시절의 뛰어난 기량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다. 1987년에는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9위를 기록하며 9년 만에 십종경기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4위에 머물며 3연속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90년에는 네 번째로 코먼웰스 게임 팀에 합류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기권해야 했다. 결국 지속적인 햄스트링 부상으로 1992년 육상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2.5. 개인 최고 기록
종목 | 기록 | 장소 | 날짜 | 점수 |
---|---|---|---|---|
십종경기 | 8798점 |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 1984년 8월 9일 | 8798점 |
100m | 10.26초 (+2.0m/s) | 슈투트가르트 | 1986년 8월 28일 | 1,032점 |
멀리뛰기 | 8.01 m (+0.4m/s) |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 1984년 8월 8일 | 1,063점 |
포환던지기 | 15.73 m | 슈투트가르트 | 1986년 8월 27일 | 835점 |
높이뛰기 | 2.11 m | 괴치스 | 1980년 5월 17일 | 906점 |
400m | 46.86초 | 괴치스 | 1982년 5월 22일 | 965점 |
110m 허들 | 14.04초 | 슈투트가르트 | 1986년 8월 28일 | 969점 |
원반던지기 | 47.62 m | 아를 | 1986년 5월 18일 | 821점 |
장대높이뛰기 | 5.1 m | 토론토 센테니얼 파크 스타디움 | 1983년 6월 8일 | 941점 |
창던지기 | 64.04 m |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 | 1988년 9월 29일 | 799점 |
1500m | 4분 22.8초 | 프라하 스타디온 에브제나 로시츠케호 | 1978년 8월 31일 | 797점 |
가상 최고 기록 | 9128점 |
3. 은퇴 후 활동
3.1. 축구 경력 및 코칭
톰프슨은 1992년 육상에서 은퇴한 후 1990년대에 잠시 맨스필드 타운 FC의 리저브 팀에서 축구 선수로 뛰었다. 또한 스티브니지 FC에서 한 경기를 치렀고, 이후 일케스턴 FC에서도 짧게 활동했다. 그는 윔블던 FC와 루턴 타운 FC 축구 클럽의 피트니스 코치로도 일했다. 1994년에는 레딩 FC와 훈련하며 레더헤드 FC와의 친선 경기에서 득점하기도 했다.
3.2. 사업 및 미디어 활동
톰프슨은 1994년 포드 크레딧 피에스타 챌린지 챔피언십에 참가하며 모터스포츠에도 발을 들였다. 그는 피트니스 트레이너이자 동기 부여 강사로 활동하며 기업 행사에도 참여했다. 2015년에는 런던 어퍼 리치먼드 로드에 자신의 헬스장 '데일리 피트니스'를 열었다. 2018년에는 마스터셰프 게리 반쇼와 함께 DT10 스포츠를 공동 설립하여 저당 단백질 셰이크 및 스포츠 바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했다. 1980년대 음료 브랜드 루코자데의 광고에 출연하여 유명세를 떨쳤으며, 그의 이름은 오션 소프트웨어에서 공식 라이선스를 받아 출시된 세 편의 홈 컴퓨터 게임, 『데일리 톰프슨의 십종경기』, 『데일리 톰프슨의 슈퍼테스트』, 『데일리 톰프슨의 올림픽 챌린지』에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낫 저스트 트래블'이라는 여행사 네트워크의 브랜드 홍보대사로도 활동 중이다. 2024년에는 그의 자서전 『데일리: 올림픽 슈퍼스타』가 출판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데일리: 올림픽 슈퍼스타』가 BBC를 통해 공개되었다.
3.3. 홍보 및 공익 활동
톰프슨은 2012년 런던 올림픽 유치 대사로 활동하며 입찰 단계에서 올림픽 개최가 학교 교육과 스포츠에 가져올 이점을 강조하는 데 집중했다. 2015년에는 콜린 머레이와 함께 주 1회 토크스포츠의 오전 프로그램을 공동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2011년 TV 시리즈인 『제이미의 드림 스쿨』에 출연했다.

4. 대중적 이미지 및 인정
4.1. 대중적 이미지
톰프슨은 타고난 쇼맨으로, 그의 불손한 성격과 반권위주의적인 태도로 영국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4.2. 주요 수상 및 참여 활동
그는 1982년 BBC 올해의 스포츠인상을 수상했다. 2014년 8월에는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와 관련하여 스코틀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기를 바라는 의사를 표명하는 더 가디언 지의 공개 서한에 서명한 200명의 유명 인사 중 한 명이었다.
5. 서훈

데일리 톰프슨은 영국 정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공식 훈장을 수여받았다.
- 1983년 신년 서훈에서 대영 제국 훈장 5등급(MBE)에 임명되었다.
- 2000년 신년 서훈에서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으로 승격되었다.
6. 유산과 평가
6.1. 긍정적 평가
톰프슨은 4번의 세계 기록, 2개의 올림픽 금메달, 3개의 코먼웰스 타이틀, 세계 및 유럽 선수권 대회 우승 경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십종경기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로버트 찰머스는 그를 "이 나라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올라운드 운동선수"라고 평했다. 일본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투척, 도약, 트랙 종목에서 균형 잡힌 강점을 가지고 있어 이상적인 십종경기 선수로 불렸다. 그의 자서전과 다큐멘터리는 그의 유산을 더욱 공고히 한다. 톰프슨의 아들인 엘리엇 톰프슨과 알렉스 또한 스포츠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엘리엇은 2022년 영국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십종경기 국가 챔피언이 되어 데일리 톰프슨이 첫 국가 타이틀을 획득한 지 46년 만에 같은 영예를 안았다. 알렉스는 바스 대학교와 잉글랜드 세븐스 럭비 국가대표팀에서 럭비를 한다. 이는 그의 유산이 후대에까지 미친 긍정적인 영향으로 볼 수 있다.
6.2. 비판 및 논란
데일리 톰프슨의 선수 시절 일부 행동과 발언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두 번째 십종경기 금메달을 딴 직후, 그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선수는 게이인가?"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 당시 동성애 루머에 시달리던 미국 스프린터 칼 루이스를 겨냥한 잔인한 발언으로 여겨졌으나, 톰프슨은 "두 번째 선수는 칼 루이스든 누구든 될 수 있다"고 해명했다.
- 2012년에는 BBC 라이브 TV에서 한 문신 예술가의 오타가 있는 문신을 보고 "아일랜드인임에 틀림없다"고 발언하여 아일랜드인 혐오 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해당 문신 예술가는 실제로는 미국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