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로버트 데니스 "대니" 블랜치플라워(Robert Dennis "Danny" Blanchflower영어, 1926년 2월 10일 ~ 1993년 12월 9일)는 북아일랜드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 감독, 그리고 저널리스트이다. 그는 주로 토트넘 홋스퍼에서 주장으로 활약하며, 1960-61 시즌 팀의 리그와 FA컵 동시 우승이라는 위업을 이끌었다. 뛰어난 전술적 지능과 정확한 패스 능력으로 "영광과 스타일을 추구하는 경기"라는 자신만의 축구 철학을 구현했던 그는, 1958년과 1961년에 두 차례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선수 은퇴 후에는 북아일랜드 대표팀과 첼시의 감독을 역임했으며, 신랄하고 통찰력 있는 축구 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로도 명성을 떨쳤다. 또한, 스포츠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이다. 말년에는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으로 투병하다 1993년 사망했으나, 그의 이름은 여전히 토트넘 홋스퍼의 역사와 북아일랜드 축구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2. 어린 시절과 배경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공군에 입대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의 가족 배경은 축구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2.1. 출생과 가족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1926년 2월 10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블룸필드(Bloomfield) 지구에 있는 던레이븐 파크(Dunraven Park)에서 존과 셀리나 블랜치플라워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첫째였다. 그의 어머니 셀리나는 여자 축구팀에서 센터 포워드로 뛰었던 경험이 있어, 대니 블랜치플라워의 축구 인생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의 남동생 재키 블랜치플라워(Jackie Blanchflower영어, 1933년 ~ 1998년) 또한 북아일랜드 국가대표 축구 선수였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다. 재키는 1958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형과 함께 북아일랜드의 본선 진출에 기여했지만, 1958년 2월에 발생한 뮌헨 비행기 참사로 인해 선수 경력을 조기에 마감해야 했다.
2.2. 학력과 초기 직업
블랜치플라워는 래번스크로프트 공립 초등학교(Ravenscroft public elementary school)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벨파스트 공과대학(Belfast College of Technology영어)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벨파스트에 위치한 갤러허 그룹(Gallaher's) 담배 공장에서 견습 전기 기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뛰어난 축구 선수로 명성을 쌓아나갔다.
2.3. 군 복무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블랜치플라워는 실제 나이를 속이고 영국 공군(RAF)에 입대했다. 훈련 항해사로 복무하면서 그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St Andrews University영어)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이 시기에 골프에 대한 평생의 사랑을 키웠다. 1945년 봄에는 추가 훈련을 위해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6년, 그는 20세의 나이로 벨파스트의 갤러허 공장으로 돌아왔으며, 동시에 뛰어난 축구 선수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3. 선수 경력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여러 클럽을 거쳐 토트넘 홋스퍼의 전설이 되었으며,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3.1. 클럽 경력
블랜치플라워는 잉글랜드 축구 리그에서 주목할 만한 경력을 쌓았으며, 특히 토트넘 홋스퍼에서 정점을 찍었다.
3.1.1. 초기 클럽 경력
블랜치플라워는 1946년 자신의 고향 팀인 글렌토런에 입단하며 프로 축구 선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이 아일랜드 축구 리그에서 124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했다. 1949년 23세의 나이에 그는 아일랜드해를 건너 잉글랜드의 반즐리로 6000 GBP의 이적료로 이적했다. 반즐리에서 68경기 2골을 기록한 후, 1951년 3월에는 1.50 만 GBP에 애스턴 빌라로 이적했다. 그는 애스턴 빌라에서 155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했으며, 이 중 148경기가 리그 경기였다. 1954-55 시즌 중 팀을 떠나기 전까지 애스턴 빌라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3.1.2. 토트넘 홋스퍼

1954년, 블랜치플라워는 토트넘 홋스퍼로 3.00 만 GBP의 이적료로 이적하며 그의 경력에 전환점을 맞았다.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보낸 10년 동안 그는 리그 337경기를 포함하여 총 382경기에 출전해 21골을 기록했다. 그의 토트넘 시절 중 가장 빛났던 시기는 1960-61 시즌이었다. 당시 블랜치플라워는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며 잉글랜드 톱 리그 역사상 최다 기록인 개막 11연승을 달성했다. 시즌 최종적으로 토트넘은 승점 8점 차이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서 1961년 FA컵 결승전에서 레스터 시티를 꺾고 리그와 FA컵 동시 우승을 차지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는 1897년 애스턴 빌라 이후 20세기 최초의 기록이었다.
블랜치플라워는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58년과 1961년에 FWA 올해의 선수상을 두 차례 수상했는데, 이는 소수의 선수만이 달성한 영예로운 기록이다. 1962년에는 1962년 FA컵 결승전에서 번리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FA컵 우승을 이끌었고, 이는 토트넘의 FA컵 2연패를 의미했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UEFA 컵위너스컵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승리하며 토트넘의 유럽 대항전 첫 우승을 이끌었다. 블랜치플라워가 뛰었던 이 시기는 토트넘 홋스퍼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2009년 더 타임스는 그를 토트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선정하며 그의 업적을 다시 한번 조명했다.
3.1.3. 해외 리그 임시 활동 및 은퇴
토트넘에서 활약하던 중 블랜치플라워는 1961년 동료 풋볼 리그 선수인 스탠리 매슈스와 조니 헤인즈와 함께 캐나다의 토론토 시티에서 잠시 뛰기도 했다.
1964년 4월 5일, 38세의 나이로 블랜치플라워는 선수 생활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토트넘에서 약 400경기에 출전하며 네 번의 주요 트로피를 들어 올린 바 있다. 하지만 1965년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내셔널 풋볼 리그(NFL)에 소속된 더반 시티에서 잠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3경기에 출전했다.
3.2. 플레이 스타일
블랜치플라워는 1960년대 위대한 토트넘 팀의 두뇌로 평가받았다. 그는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와 라이트 하프 포지션에서 뛰었으며, 특히 그의 정확한 패스, 경기 템포 조절 능력, 그리고 고무적인 리더십으로 유명했다. 그는 단순히 개인 기량이 뛰어난 것을 넘어, 경기를 읽는 뛰어난 전술적 시야를 바탕으로 중원에서 팀의 플레이를 지휘하는 사령관 역할을 했다.
그의 축구 철학은 "승리가 전부라는 것은 큰 오산이다. 경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경기는 영광이고, 스타일과 멋을 내는 것이며, 상대가 지루함으로 죽어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완전히 이기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인용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그가 결과뿐 아니라 과정과 예술적인 플레이를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3.3. 국제 경력
블랜치플라워는 1949년에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으며, 총 56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다.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그는 북아일랜드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팀을 8강에 진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약체로 평가받던 북아일랜드가 이 대회에서 거둔 성과는 블랜치플라워의 리더십과 지능적인 플레이 덕분이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 FIFA 월드컵 올스타 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1957년 12월 4일, 블랜치플라워는 벨파스트에서 열린 이탈리아와의 경기에 북아일랜드 팀의 주장으로 출전했다. 이 경기는 분위기가 험악해져 결국 '벨파스트 전투'로 알려진 난투극으로 번졌는데, 블랜치플라워는 격앙된 상황 속에서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2년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그는 북아일랜드 선수로는 최초로 A매치 50경기 출전 기록을 달성했다. 그는 1963년 대표팀 은퇴 전까지 북아일랜드 축구의 상징적인 인물로 활약했다.
4. 선수 은퇴 후
선수 생활 은퇴 후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축구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감독과 저널리스트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4.1.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블랜치플라워는 몇 년간 토트넘 홋스퍼의 코치로 활동했다. 더블 우승을 이끈 감독 빌 니콜슨은 블랜치플라워를 자신의 장기적인 후임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1974년 니콜슨이 클럽에서 사임했을 때, 블랜치플라워는 테리 닐에게 밀려 감독직을 맡지 못했고, 그 자신도 클럽을 떠났다.
1978년 그는 잠시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다. 그 후 첼시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32경기에서 단 5승만을 거두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1979년 9월에 팀을 떠났다.
4.2. 저널리즘 및 방송 활동
감독직 외에 블랜치플라워는 축구 저널리스트이자 방송인으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1956년 1월 3일 ITV의 사우던 주니어 플러드릿 컵 결승전(웨스트햄 대 첼시) 해설을 맡았을 정도로 일찍이 방송계에 발을 들였다. 1959년에는 BBC의 '주니어 스포츠뷰'를 진행했으며, 1960년대 중반에는 ITV의 '주니어 크리스 크로스 퀴즈'를 진행하기도 했다.
1967년에는 미국의 CBS 방송 네트워크에서 내셔널 프로페셔널 사커 리그(NPSL) 경기의 컬러 해설자로 활동했다. 그는 이 신생 리그의 단점에 대해 솔직하게 비판했고, 이는 방송국 관계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1968년 6월 10일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고문에서 그는 이러한 경험을 자세히 풀어냈다. 1968-69 시즌에는 요크셔 텔레비전의 정규 해설자로 활동했다. 1988년에는 선데이 익스프레스의 작가직에서 은퇴했다.
5. 개인 생활과 철학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그라운드 안팎에서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진 인물로 유명했다.
5.1. 개인적인 일화와 신념
그의 축구 철학은 "승리가 전부라는 것은 큰 오산이다. 경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경기는 영광이고, 스타일과 멋을 내는 것이며, 상대가 지루함으로 죽어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완전히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그가 결과만큼이나 과정과 미학을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블랜치플라워는 자신의 사생활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1961년 2월 6일, 그는 '디스 이스 유어 라이프'(This Is Your Life) 프로그램 출연 제의를 거절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당시 녹화 중이던 방송에서 그는 진행자 이먼 앤드루스를 뿌리치고 단순히 자리를 떠났다. 그는 "이 프로그램은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나를 강제로 어떤 일에 억지로 끌고 갈 수 없다"고 설명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1985년 채널 4 다큐멘터리 영화 '켈러 본능'에서는 고인이 된 친구이자 음악학자인 한스 켈러가 독창적이고 전술적으로 창의적인 축구를 옹호했던 것에 대해 블랜치플라워가 지지하는 모습이 담겼다.
5.2. 가족 관계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남동생 재키 블랜치플라워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재키 역시 북아일랜드 국가대표 축구 선수이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으나,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로 선수 경력이 중단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 사건은 대니 블랜치플라워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5.3. 사회 운동
블랜치플라워는 사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58년 7월 17일, 그는 더 타임스지에 보낸 서한에 서명한 여러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이 서한은 국제 스포츠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하고, '올림픽 정신에 구현된 인종 평등 원칙'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단순히 축구 선수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는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준다.
6. 말년과 사망
축구계에서 은퇴한 후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으며,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6.1. 건강 문제와 마지막 몇 년
1990년 5월 1일, 토트넘 홋스퍼는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블랜치플라워를 위한 추모 경기를 개최했다. 그러나 이 무렵 그는 이미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으로 진단될 초기 단계에 있었다.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고, 결국 스테인스에 위치한 우드랜즈 요양원(Woodlands Nursing Home, Staines영어)에 입원하게 되었다.
6.2. 사망과 매장
블랜치플라워는 1993년 12월 9일, 67세의 나이로 우드랜즈 요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근처 잉글필드 그린(Englefield Green)에 있는 세인트 주드 공동묘지(St. Jude's Cemetery)에 안장되었다.
7. 유산과 영예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그의 고향 벨파스트와 토트넘 홋스퍼 팬들 사이에서 영원히 기억될 축구 영웅으로 남아 있다.
7.1. 유산과 기념
블랜치플라워의 고향인 벨파스트에서는 그가 스포츠계에서 이룬 뛰어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얼스터 역사 서클(Ulster History Circle) 명판이 설치되었다. 이 파란색 명판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레이스 애비뉴(Grace Avenue) 49번지에 위치해 있다.
벨파스트 시의회가 소유한 동벨파스트의 대니 블랜치플라워 플레이잉 필즈(Danny Blanchflower Playing Fields영어)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이곳을 더 전문적인 축구 시설로 재개발하려는 계획이 여러 차례 수정되었으며, 2020년에는 할랜드 & 울프 용접공 FC를 위한 새로운 경기장과 부지 건설이 진행되었고, 이어서 자연 산책로와 커뮤니티 프로젝트가 뒤따랐다.
7.2. 수상 경력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선수 경력 동안 클럽과 개인 차원에서 수많은 영예를 얻었다.
토트넘 홋스퍼
- 풋볼 리그 1부: 1960-61
- FA컵: 1960-61, 1961-62
- FA 채리티 실드: 1961, 1962
- UEFA 컵위너스컵: 1962-63
개인 수상
- FWA 올해의 선수상: 1958, 1961
- 1958년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1958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3년 헌액
- 월드 XI: 1961년 (에릭 배티 선정)
8. 대중문화에서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축구계에서의 영향력 외에도 대중문화에 여러 차례 등장하며 그의 명성을 입증했다.
8.1. 영화 출연
그는 1983년 영화 그 영광의 날들(Those Glory Glory Days영어)에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그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또한 1985년 채널 4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켈러 본능(The Keller Instinct영어)에도 출연하여 고인이 된 친구이자 음악학자인 한스 켈러의 독창적이고 전술적으로 창의적인 축구 옹호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