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다이호 고키(大鵬 幸喜, 본명: 나야 고키, 출생명: 이반 마르키야노비치 보리슈코)는 제48대 요코즈나로서, 스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1960년대 일본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61년 21세 3개월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요코즈나에 등극했으며, 1960년부터 1971년 은퇴까지 총 32회의 우승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다. 특히 두 차례에 걸쳐 6연속 우승을 달성하고, 1968년부터 1969년까지 45연승을 기록하는 등 그의 전성기는 스모의 황금기를 상징했다. 은퇴 후에는 오야카타로서 다이호베야를 운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으나, 뇌졸중으로 인한 건강 문제와 사위의 도박 스캔들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스모 경력은 전후 일본 스모의 정점이었으며, 사회적으로도 "거인, 다이호, 계란말이"라는 유행어로 대중문화의 상징이 될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 2013년 1월 19일 심실빈맥으로 사망한 뒤, 일본 정부로부터 국민영예상을 추서받는 등 사후에도 그의 업적과 영향력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2. Early life and background
다이호 고키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태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스모에 대한 열정으로 이 위대한 길에 들어섰다.
2.1. Birth and childhood
다이호 고키는 1940년 5월 29일, 당시 일본령이었던 가라후토청(사할린섬) 시스카정(현재의 러시아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일본어로는 納谷 幸喜나야 고키일본어이며, 출생명은 Іван Маркіянович Боришко이반 마르키야노비치 보리슈코우크라이나어이다. 그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인 코사크 기병 장교였던 Маркіян Боришко마르키얀 보리슈코우크라이나어로, 러시아 혁명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이었다. 어머니는 일본인 나야 기요(納谷キヨ)였다. 남사할린이 일본령이었기 때문에, 다이호는 후에 외국 출신 요코즈나로 간주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소련군이 남사할린을 침공하면서, 다이호는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 히키아게 선박인 오가사와라 마루를 타고 홋카이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원래 오타루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어머니의 선상 멀미와 피로로 인해 왓카나이에서 중간 하선하면서 기적적으로 침몰을 면했다. 오가사와라 마루는 이후 루모이 앞바다에서 소련 잠수함 L-12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삼선조난사건을 겪었으나, 다이호 가족은 이미 하선한 뒤였다. 홋카이도에서의 생활은 모자 가정이었던 탓에 매우 빈곤했으며, 생계를 돕기 위해 직접 낫토를 팔러 다녔던 일화는 유명하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한때 스미요시(住吉) 성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10세 때 재혼 상대와 이혼하면서 다시 나야(納谷) 성으로 돌아왔다.
2.2. Entry into sumo
다이호 고키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1956년 스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중학교 졸업 후 홋카이도 데시카가 고등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임야청 관련 일을 하던 그는, 1956년 니쇼노세키 일행이 훈넷푸정으로 순회 공연을 왔을 때 소개를 받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스모에 입문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반대가 있었으나, 스모 도장을 방문하여 선수들의 예의 바른 모습을 본 삼촌이 어머니를 설득하여 입문이 성사되었다. 후일 그는 순회 공연에서 대접받은 찬코나베에 감명을 받은 것도 입문 동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스모 라이터 사토 쇼코의 저서에 따르면, 입문은 삼촌의 사전 조율에 의한 것이었으며, 나야 본인도 스모 입문을 막연히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홋카이도 순회에 나야를 남겨둔 삼촌의 소식을 듣고 당황했다고 전해진다. 홋카이도의 시골에서 자라 라면조차 먹어본 적이 없고 어머니로부터 군것질이나 외식을 금지당했던 나야에게는, 스모계 입문이 맛있는 음식에 끌린 것과 같았다고 한다.
1956년 9월 하쓰도효를 밟았으며, 당시 동기로는 훗날의 오제키 기요쿠니, 고무스비 사와미쓰, 마에가시라 다이신 등이 있다. 입문 초부터 그는 가시와도와 함께 요코즈나가 될 대기로 평가받으며 "니쇼노세키베야의 프린스", "골든 보이" 등의 애칭을 얻었다. 조노구치 시절부터 꾸준히 승패를 거두며 순조롭게 반즈케를 올렸고, 1958년 3월 산단메에서 우승했다. 주료 승진 직전인 같은 해 9월 마쿠시타 2위에서 3승 5패로 패월(負け越し)했으나, 현역 시절 그의 유일한 하위 계급 패월 기록이었다. 1959년 3월 동막시타 필두에서 6승 2패로 승월하며 주료 승진을 확정했다. 하쓰도효부터 마쿠시타 시절까지는 본명인 나야로 씨름판에 올랐다. 산단메 시절, 술집에 나갔을 때(당시 스모계에서는 20세 미만 음주가 흔했다) 료고쿠 일대 술집에서 "이세노우미베야의 도가시(훗날의 가시와도)는 좋은 스모 선수다, 그는 분명 요코즈나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가시와도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훈련에 매진했다. 격렬한 훈련은 10대였던 다이호의 몸에 큰 부담을 주어, 산단메 시절 이미 요추를 다쳤다. 그러나 다이호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부상이 아닌 한, 훈련에서도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1959년 주료 승진이 확정되자마자 시코나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는 고향 홋카이도와 관련된 이름이 붙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니쇼노세키 오야카타는 "더 좋은 이름이 있다. '다이호'다"라고 말했다. 다이호가 "어떻게 쓰는 글자입니까? 쏘는 대포(大砲)입니까?"라고 묻자, "그것은 '오쓰쓰'라고 읽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다이호 만에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때 니쇼노세키는 '다이호'(大鵬)라는 한자와 그 의미도 가르쳐주었다. 다이호는 중국 고전 《장자 소요유》에 나오는 "곤지대불지기천리야, 화이위조, 기명위대붕(鯤之大不知其千里也、化而為鳥、其名為大鵬)"(곤(鯤, 전설 속 거대한 물고기)은 매우 크고, 그 천리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새로 변하는데, 그 이름은 대붕이라 한다)에서 유래하며, "날개를 펼치면 삼천 리, 한 번에 구만 리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전설 속 거대한 새를 의미한다. 한문을 좋아했던 니쇼노세키 오야카타가 가장 유망한 제자에게 붙여주기 위해 아껴두었던 이름이었으며, 그 점에서 다이호는 니쇼노세키의 기대 이상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3. Professional sumo career
다이호 고키의 프로 스모 선수로서의 경력은 그의 압도적인 기량과 불굴의 정신으로 점철된 위대한 여정이었다.
3.1. Early career progression
1960년 1월 마쿠우치에 데뷔한 다이호는 첫날부터 11연승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신마쿠우치 선수의 첫날부터 11연승은 치요노야마 마사노부의 13연승에 이어 쇼와 시대 이후 2위의 기록이며, 한 장소에서 달성한 기록으로는 쇼와 시대 이후 최다이다. 12일째에는 고무스비 가시와도와의 대결이 성사되며 훗날 스모계를 양분할 두 라이벌의 첫 대결이 일찍이 성사되었다. 다이호는 이 경기에서 가시와도의 出し投げ다시나게일본어에 굴복하며 마쿠우치 첫 패배를 기록했다. 이후 14일째와 마지막 날에도 연패했지만, 12승 3패의 호성적으로 첫 마쿠우치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간토쇼를 수상했다. 특히 이 대회에서는 3명의 산야쿠 선수와 대결했는데, 당시에는 그를 "고무스비나 세키와케에게는 상대가 안 되고, 오제키나 요코즈나와도 호각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다이호의 기량이 뛰어났다.
같은 해 3월 대회에서는 동마에가시라 4위까지 반즈케가 올랐으나, 초반부터 요코즈나 및 산야쿠 선수들에게 연패를 기록했다. 2일째 아사시오전에서 첫 요코즈나 도전에 나섰으나, 아사시오가 늦게 서자 잠시 힘을 빼는 순간을 틈타 밀어붙여 패했다. 모노이가 붙었으나 교지의 판정대로였다. 4일째에는 직전 대회 우승자인 도치니시키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패했고, 이는 도치니시키와의 유일한 대결이 되었다(도치니시키는 다음 대회에서 은퇴했다). 당시 기자들은 도치니시키에게 "요코즈나, 다이호에게 잘 이겼네요"라고 질문할 정도였으니, 그 당시 다이호의 평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후반 평마쿠전에서 다시 살아났으나, 13일째 후쿠다야마전에서 아슬아슬한 경기를 패배하며, 결국 7승 8패로 이 대회가 그의 현역 생활 중 유일한 전 경기 출전 패월 기록이 되었다.
이후 5월 대회에서는 마에가시라 6위로 내려가 재기를 노렸고, 첫날 아사시오를 꺾고 요코즈나 도전 3번째 만에 첫 승리를 거두며 생애 유일한 긴보시를 획득하는 등 11승 4패로 두 번째 간토쇼를 수상했다. 7월 대회에서 신 고무스비로 승진했고, 9월 대회에서는 20세 3개월로 당시 역대 최연소 세키와케에 올랐다. 11월 대회에서 13승 2패의 성적으로 당시 역대 최연소(20세 5개월)로 마쿠우치 최고 우승을 달성하며, 대회 후 역대 최연소 오제키로 승진했다. 신마쿠우치 데뷔 연도에 오제키로 승진한 선수는 2019년 현재까지도 다이호가 유일하며(마쿠우치 데뷔 6경기 만의 오제키 승진 또한 연 6경기 제도 도입 이후 최단 기록이다), 같은 해인 1960년에 연간 최다승을 기록하여 이 상이 제정된 이래 유일하게 데뷔 연도에 이를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고무스비 및 세키와케 시절 36승 9패라는 압도적인 강세를 보이며 총 3개 대회 만에 통과했다. 또한, 신마쿠우치 데뷔 6경기 만의 첫 우승은 연 6경기 제도 도입 이후 당시 최단 기록이었다. 이 대회에서 TBS 아나운서 코사카 슈지가 "가쿠호 시대"(柏鵬時代)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계기로 이 용어가 빠르게 정착되었다.
3.2. Rise to Yokozuna
신오제키가 된 1961년 1월 대회에서 10승 5패에 그치며 13승 2패로 첫 우승을 차지한 가시와도에게 주역 자리를 내주며 요코즈나 등극 경쟁에서 한 발 뒤처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어진 3월 대회부터 거의 매 대회 우승 경쟁에 참여했고, 7월 대회에서는 가시와도와 아사시오(당시 아사시오)를 연이어 꺾고 13승 2패로 오제키로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아사시오와의 상대 전적을 4승 4패로 동률로 만들었으며,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결이 되었다. 9월 대회에서는 14일째 가시와도에게 패하며 3패를 기록했지만, 가시와도와 평마쿠의 아케보노와의 우승 결정전에 진출하여 도모에센을 제패하고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후 일본 스모 협회는 요코즈나 심의회에 다이호와 가시와도 두 선수의 요코즈나 승진을 문의했고, 두 선수 모두 만장일치로 요코즈나에 추천되었다. 다이호는 21세 3개월, 가시와도는 22세 9개월로, 이들은 종전 최연소 기록인 테루쿠니 만조의 23세 3개월을 모두 경신했다. 또한 요코즈나 심의회가 내규를 제정한 이후, 오제키로서 2회 연속 우승을 달성하고 요코즈나에 승진한 것은 다이호가 처음이었다. 승진 당시 그의 공식 연설은 "요코즈나의 지위를 더럽히지 않도록 앞으로도 정진하겠습니다"였다.
3.3. Dominance as Yokozuna

신마쿠우치 시절 처음 패배했던 가시와도와 경쟁하며, 전후 복구 시기를 거쳐 고도 경제 성장기의 스모 황금기를 이끌었다. 1961년 두 사람이 동시에 요코즈나로 추대되면서 "하쿠호(柏鵬) 시대"라 불리는 황금기를 열었다. 훗날 제69대 요코즈나가 된 하쿠호 쇼의 시코나는 이 두 요코즈나에서 유래했다. 신요코즈나 자격으로 출전한 1961년 11월 대회와 1962년 1월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으며, 같은 해 7월 대회부터 1963년 5월 대회까지 첫 번째 6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형태 있는 스모'로 평가받던 가시와도가 잦은 휴장을 반복하면서, '형태 없는 스모'로 평가받던 다이호가 독주하는 상황이 이어지며 관객 수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다이호의 전성기는 스모 인기 침체기와 겹쳤다. 일본TV와 TBS는 1965년 1월을 끝으로 스모 중계에서 철수했으며, 스모 중계의 기세가 꺾인 것도 다이호의 잦은 우승으로 인한 씨름판의 매너리즘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이 연승 직후부터 가미카제 쇼이치 등으로부터 "다이호의 스모에는 형태가 없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으나, 니쇼노세키 오야카타는 "형태 없는 것이 다이호의 형태"라고 반박했다. 다이호 본인은 당시 도키카제 이사장이 말했던 "이것은 다이호만이 할 수 있는 스모의 내용을 보여주면 된다. 후세에 이르러서도 어떤 씨름꾼도 흉내낼 수 없는 것, 그것이 다이호의 형태이다"라는 말에 자신의 스모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Rivalry with Kashiwado ####
다이호와 가시와도는 요코즈나로 동시 승진하며 '하쿠호 시대'를 열었다. 가시와도는 비록 5회 우승에 그쳤지만, 다이호는 "가시와도가 있었기에 다이호가 있었고, 다이호가 있었기에 가시와도가 있었다"고 말하며 서로의 존재가 스모 인생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강조했다. 그들은 경기장 밖에서도 진정한 우정을 나누었으며, 이는 가시와도가 1996년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가시와도와의 주요 결승전 대결은 다음과 같다:
장소 | 대결일 | 가시와도 성적 | |||
---|---|---|---|---|---|
1960년 1월 | 12일째 | 승(1) | 패(0) | 도치니시키 | 첫 대결 |
1960년 5월 | 12일째 | 패(1) | 승(1) | 와카미쓰루 | |
1960년 7월 | 8일째 | 승(2) | 패(1) | 와카노하나 | |
1960년 9월 | 9일째 | 승(3) | 패(1) | 와카노하나 | 가시와도 신 오제키 |
1960년 11월 | 14일째 | 패(3) | 승(2) | 다이호(1) | |
1961년 1월 | 11일째 | 승(4) | 패(2) | 가시와도(1) | 다이호 신 오제키 |
1961년 3월 | 11일째 | 승(5) | 패(2) | 아사시오 | |
1961년 5월 | 14일째 | 승(6) | 패(2) | 사다노야마 | |
1961년 7월 | 14일째 | 패(6) | 승(3) | 다이호(2) | |
1961년 9월 | 14일째 | 승(7) | 패(3) | 다이호(3) | |
1961년 11월 | 14일째 | 패(7) | 승(4) | 다이호(4) | 가시와도, 다이호 신 요코즈나 |
1962년 1월 | 마지막 날 | 패(7) | 승(5) | 다이호(5) | |
1962년 3월 | 마지막 날 | 승(8) | 패(5) | 도치노우미 | |
1962년 5월 | 마지막 날 | 패(8) | 승(6) | 사다노야마 | |
1962년 7월 | 마지막 날 | 패(8) | 승(7) | 다이호(6) | |
1962년 9월 | 마지막 날 | 패(8) | 승(8) | 다이호(7) | |
1962년 11월 | 마지막 날 | 승(9) | 패(8) | 다이호(8) | |
1963년 9월 | 마지막 날 | 승(10) | 패(8) | 가시와도(2) | 마지막 날 전승 맞대결 |
1963년 11월 | 마지막 날 | 패(10) | 승(9) | 도치노우미 | |
1964년 1월 | 마지막 날 | 패(10) | 승(10) | 다이호(12) | |
1964년 3월 | 마지막 날 | 패(10) | 승(11) | 다이호(13) | 두 번째 마지막 날 전승 맞대결 |
1965년 5월 | 13일째 | 승(11) | 패(11) | 사다노야마 | |
1965년 7월 | 11일째 | 승(12) | 패(11) | 다이호(17) | |
1965년 9월 | 12일째 | 승(13) | 패(11) | 가시와도(3) | |
1966년 3월 | 마지막 날 | 패(13) | 승(12) | 다이호(19) | |
1966년 5월 | 마지막 날 | 패(13) | 승(13) | 다이호(20) | 마지막 날 가시와도 2패, 다이호 1패로 대결 |
1966년 7월 | 마지막 날 | 패(13) | 승(14) | 다이호(21) | 마지막 날 가시와도 2패, 다이호 1패로 대결 |
1966년 9월 | 마지막 날 | 승(14) | 패(14) | 다이호(22) | 마지막 날 가시와도 2패, 다이호 1패로 대결 우승 결정전은 다이호 승리. |
1966년 11월 | 마지막 날 | 패(14) | 승(15) | 다이호(23) | |
1967년 1월 | 마지막 날 | 패(14) | 승(16) | 다이호(24) | |
1967년 3월 | 14일째 | 승(15) | 패(16) | 기타노후지 | |
1967년 5월 | 마지막 날 | 승(16) | 패(16) | 다이호(25) | |
1967년 9월 | 14일째 | 패(16) | 승(17) | 다이호(26) | |
1968년 9월 | 마지막 날 | 패(16) | 승(18) | 다이호(27) | |
1968년 11월 | 마지막 날 | 패(16) | 승(19) | 다이호(28) | |
1969년 1월 | 마지막 날 | 패(16) | 승(20) | 다이호(29) | |
1969년 5월 | 마지막 날 | 패(16) | 승(21) | 다이호(30) |
- 두 선수 요코즈나 승진 이전의 대결 성적(1961년 9월 대회까지)은 가시와도 7승 3패였다.
- 두 선수 요코즈나 대결 성적(1961년 11월 대회 이후)은 다이호 18승 9패였다(우승 횟수 또한 1961년 11월 대회 이후 가시와도 4회, 다이호 29회).
다이호는 가시와도를 빠르게 능가하며 요코즈나 재임 기간 동안 특히 경력 초기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2005년 제68대 요코즈나 아사쇼류가 그의 기록을 갱신하기 전까지, 다이호는 전후 요코즈나 중 유일하게 6회 연속 대회 우승을 두 차례나 달성한 선수였다. 그의 우승 횟수 중 8회는 15승 무패의 완벽한 기록(젠쇼 유쇼)으로 달성했는데, 이 기록은 2013년 하쿠호가 갱신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1968년 9월 대회에서 14승 1패로 우승하며 45연승을 시작했다. 이 연승은 1969년 3월 대회 첫날까지 이어졌는데, 이는 후타바야마의 69연승에 이어 당시 역대 2위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1969년 3월 대회 2일째 도다 도모지로에게 밀어내기로 패하며 중단되었으나, 비디오 영상과 사진 판독 결과 도다의 발이 먼저 나갔음이 드러나 "세기의 오심"으로 큰 논란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다음 대회부터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이호는 오심 판정에 대해 불만을 표하지 않고, 오히려 오심을 유발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며 "그런 스모를 한 제가 나쁜 겁니다"라고만 말했다. 이 발언은 다이호의 고결한 스모 철학을 상징하는 말로 회자되며, 요코즈나로서 다이호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한편, 스모 기자 와카바야시 데쓰지에 따르면 이 오심에 다이호는 격분했으며, 당시 신문에도 "나는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그의 발언과 함께 얼굴이 굳어있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의 마지막 우승은 1971년 1월 대회에서 다마노우미와의 결정전에서 나왔는데, 이로써 그는 톱 디비전 경력 매년 최소 1회 우승이라는 기록을 유지했다. 다음 대회에서 12승 3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1971년 5월 대회 5일째에 유망한 젊은 스모 선수 다카노하나에게 두 번째로 패배한 후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 요코즈나로 재임했으며, 그의 통산 승률은 80%를 넘어섰는데, 이 또한 전후 기록으로는 최고치였다. 그는 위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주식 구매 없이 일본 스모 협회의 회원 자격(이치다이 도시요리)을 제안받아 수락한 최초의 전 리키시가 되었다.
3.4. Retirement from active competition
1971년 5월 대회에서 도치후지 가쓰켄에게 패했을 때 엉덩이부터 떨어지면서 체력의 한계를 느꼈고, 이어서 5일째에는 신예 다카노하나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패배했다. 다카노하나와의 경기를 자세히 설명하면, 다이호는 왼쪽 손으로 치고 들어가고 오른쪽 손으로 상대방을 밀어붙였으나, 다카노하나가 오른쪽 손으로 다이호의 왼쪽 허리띠를 잡는 절묘한 자세를 잡았다. 다이호는 밀어내기 등으로 맞섰지만 다카노하나에게 몸을 맡겨 엉덩이부터 떨어져 나갔다. 이후 다이호는 이듬해 6일째 후쿠노하나 고이치전이 자신의 마지막 스모 경기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일본 스모 협회로부터 "죽은 상태로 씨름판에 오를 수 없다"며 거부당했다. 결국 후쿠노하나전은 부전패가 되었고, 다카노하나와의 경기가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은퇴 결정은 쉽지 않았으나, 당시 두 살이던 장녀의 응원에 힘입어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은퇴를 발표한 다음 날 아침, NHK의 아침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가장 자랑스러운 자신의 기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6회 연속 우승 2회"라고 답했다. 은퇴 스모는 1971년 10월 2일 구라마에 국기관에서 열렸으며, 다치모치에는 다마노우미, 쓰유하라이에는 기타노후지라는 두 요코즈나를 거느리고 마지막 요코즈나 도효이리를 선보였다. 그러나 불과 9일 후인 10월 11일 다마노우미가 급사했고, 다이호 또한 다마노우미의 비보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다마노우미는 충수염을 앓고 있었으나, 책임감이 강해 다이호의 은퇴 스모가 끝날 때까지 입원을 거부하여 증상이 악화되어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다이호의 은퇴 스모가 다마노우미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4. Post-retirement activities
현역에서 은퇴한 다이호 고키는 스모계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으로 후학 양성과 공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4.1. Sumo stable management
다이호는 1971년 12월 자신의 옛 헤야에서 분리하여 다이호베야를 설립했다. 그는 세키와케 오쓰쓰와 마쿠우치 시고호 등을 육성했으나, 자신만큼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정년 은퇴 후, 그는 자신의 방을 사위이자 전 세키와케인 다카토리키에게 넘겨주었으나, 방 이름은 다이호가 이치다이 도시요리였기 때문에 원래 소유했던 "오타케"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다카토리키는 도박 문제로 2010년 7월 4일 해고되었고, 이후 다이호의 직계 제자인 다이류 다다히로(최고 계급은 주료)가 방을 계승하게 되었다.
4.2. Public roles and health issues
다이호는 일본 스모 협회 내에서 다양한 공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그의 심각한 건강 문제는 그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6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협회 임원 대우이자 심판부 부부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97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좌반신 마비 등의 후유증이 남았으며, 이로 인해 이사장 등의 주요 요직에 취임할 가능성이 사라졌다. 그는 집중적인 재활 치료를 통해 좌측 몸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1980년에는 이사로 취임했다. 지방 순회 대회(나고야 대회 담당) 부장을 역임하고, 이후 스모 교습소 소장 등을 거쳐 8년간의 임기를 마친 1996년 임원 대우로 물러났다. '거인, 다이호, 계란말이' 시대를 함께 이끌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도 특별한 감정이 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재활 노력은 결실을 맺어, 2000년에는 자신과 더불어 '쇼와 시대의 대요코즈나'로 평가받는 기타노우미(다치모치)와 구코노에 미쓰구(전 치요노후지, 쓰유하라이)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간레키 도효이리(환갑 기념 링 입장식)를 선보였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시코를 밟을 수 없었기에, 실제 도효이리는 수행하지 못하고 붉은 쓰나를 맨 채 운류가타의 자세를 취하고 박수를 치는 등 일부 동작만을 선보였다.
2005년 5월, 65세의 정년 퇴직 나이에 도달한 다이호는 9년 가까이 공석이었던 료고쿠 고쿠기관 내 스모 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협회 재직 중 이사장이나 집행부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뇌졸중으로 물러난 심판부 부부장직 1회 외에는 지방 대회 부장직이 길었다), 이미 정년 퇴직한 이사장 경험자들인 사다노야마와 도요야마가 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장직에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발탁으로 평가받는다. 2008년 11월 16일 협회 이사회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스모 박물관장직 사임이 승인되었으며, 12월 26일 협회의 업무 마감일에 관장직에서 물러났다.
4.3. Honors and awards
다이호 고키는 스모와 일본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생전과 사후에 걸쳐 여러 권위 있는 표창과 상들을 받았다.
- 2004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수포장을 수훈했다.
- 2009년 11월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자로 선정된 15인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스모 선수로는 최초로 이 영예를 안았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여러분이 도와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큰 상을 받게 되어 정말 감사하다"며 기쁨을 표했다. 그는 니쇼노세키 문파의 분열과 열세 상황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문화공로자 선정 후에는 8대 니쇼노세키와 6대 니쇼노세키의 묘소를 찾아 머리를 숙였다.
- 2013년 2월에는 사후에 국민영예상을 추서받았으며, 스가 요시히데는 그를 "국민적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그는 이 상을 받은 두 번째 스모 선수가 되었다.
- 2013년 1월 19일 사망 후, 같은 날짜로 정4위 및 욱일중광장이 추서되었다.
- 2014년 8월 15일, 그의 고향인 사할린에 다이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다이호의 어머니와 아내가 아키타현 출신이었던 인연으로, 오가타촌에 거주하는 조각가가 제작을 맡았으며, 아키타현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모금 활동이 이루어졌다.
5. Personal life and character
다이호 고키는 엄격한 승부의 세계를 살아가는 동시에, 친밀한 가족 관계와 다양한 개인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5.1. Family and relationships
다이호는 1966년 그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결혼했다(공교롭게도 그가 우승한 그 해 5월 대회 마지막 날은 그의 26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그의 아내는 료칸 주인의 딸이었다. 제국호텔 도쿄에서 열린 이들의 화려한 결혼식에는 1,000명의 하객과 200명 이상의 기자들이 참석했다. 그는 결혼 후 기자회견을 연 최초의 스모 선수였으며, 이는 오늘날 스모 선수들의 결혼식에서 흔한 일이 되었다.
다이호의 막내딸은 전 세키와케 다카토리키와 결혼했으며, 다카토리키는 다이호의 은퇴 후 다이호베야(오타케베야로 개명)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오타케가 도박 스캔들로 스모계에서 해고되자, 그는 다이호의 딸과 이혼했다. 다이호의 막내 손주인 나야 고노스케 (2000년생)는 2018년 1월 오타케베야에 프로 스모 선수로 입문하여 '오호'라는 시코나를 사용했다. 그의 동생인 고세이는 2019년 11월, 다카모리는 2020년 3월에 스모에 입문했다. 다이호의 넷째이자 큰 손주인 나야 유키오(1994년생)는 프로레슬러이다.
셋째 딸의 증언에 따르면, 다이호는 딸들 중 누구도 씨름꾼과 결혼하여 방을 이어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셋째 딸의 뜻에 따라 결혼한 것을 기뻐했지만, 셋째 딸과의 교제가 알려진 때부터 다카토리키의 도박 버릇을 걱정했다고 한다. 다이호는 '의지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고, 다카토리키가 도박으로 생긴 빚을 여러 번 대신 갚아주었다고 전해진다. 다카토리키는 다이호에게 도박을 끊겠다고 맹세했으나, 다이호 몰래 빚을 내어 공영 갬블을 시작했고, 야구 도박에도 손을 댔다가 2010년 7월 스모 협회에서 해고되었다. 이는 다이호가 네 손주가 후계자로서 입문하기를 꿈꾸며 오타케베야 개조에 착수하던 중 일어난 일이었다.
다이호는 다카토리키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셋째 딸과 다카토리키는 이혼했다. 그때 다이호는 셋째 딸에게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 당당하게 지내라"고 말했고, 이후로도 자주 당부했다. 셋째 딸은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다이호와 떨어져 살게 되었지만, 다이호는 그 후에도 두 사람을 걱정하며 "언제든 돌아와라"고 말했다고 한다. 셋째 딸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줄곧 걱정하고 있었다"였다고 한다. 다카토리키는 2013년 다이호의 임종을 지켰지만, 장례식 참석은 허락되지 않았다.
네 아들을 모두 씨름꾼으로 만들려고 장남에게 스모를 강요했던 다카토리키와 달리, 다이호는 "그렇게 할 필요 없다. 좋아하는 것을 하게 내버려 둬라"라고 늘 말해왔다. 자신의 의지로 장남은 프로레슬러의 길을, 차남, 삼남, 사남은 스모의 길을 걷고 있다. 다이호가 사망했을 때 차남(나야 고린)은 중학생이었고, 다이호가 손주들에게 스모를 직접 지도할 기회는 없었다.
5.2. Hobbies and interests
다이호 고키는 현역 시절 야구와 마작을 취미로 삼았다. 마쿠우치 입문 초에는 방에서 하는 캐치볼 정도에만 참여하며 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1966년 무렵부터는 훈련 중간에도 캐치볼을 하는 등 야구 실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마작은 서툴렀지만 즐겼으며, 4인 마작에서 혼자 크게 잃은 적도 있었다.
어디를 가든 항상 쓰케비토(도제)를 위한 선물을 잊지 않았으며, 한 번은 쓰케비토들이 많이 먹고 몸이 커지도록 초밥 도시락을 사 온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그는 스즈란 꽃을 좋아했으며, 선물 받은 스즈란은 꽃이 시들 때까지 소중히 가꾸었다. 그의 게쇼마와시에도 스즈란 꽃이 디자인되어 있었다.
6. Fighting style
다이호는 상대방의 마와시를 잡고 힘과 기술을 사용하는 `요쓰즈모` 스타일에 능했다. 특히 `히다리요쓰`(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띠 바깥쪽을 잡고 왼손으로 안쪽을 잡는 자세)를 선호했다. 그의 가장 흔한 승리 기술은 `요리키리`(밀어내기)였으며, 전체 승리의 약 30%를 차지했다. 자주 사용한 던지기 기술로는 `스쿠이나게`(허리띠를 잡지 않고 밀어 던지기)와 `우와테나게`(상대방의 팔을 위에서 감아 던지기)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모로자시`(양팔을 상대의 팔을 감싸듯 안으로 파고드는 기술)를 사용하여 가시와도와 같이 돌진력이 있는 상대에게 방어하는 스모를 잘했다. 마쿠우치에 갓 입문했을 때는 다치아이(시작 자세에서의 첫 충돌)의 충격이나 밀어붙이는 힘이 그리 강하거나 날카롭지 않았지만, 이는 `사시미`(상대 팔 밑으로 파고드는 기술)로 잘 이어졌다. 자신보다 `사시미`가 좋은 상대에게는 밀어붙인 다음 `사시미`를 시도했고, `사시미`가 약한 상대에게는 곧바로 `사시미`를 시도하는 스모를 구사했다.
그는 매우 견고하고, 가슴을 맞대지 않고 몸을 앞으로 숙여 허리를 뒤로 빼는 `역 구자형`(逆くの字) 자세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며, 옆으로 돌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자세를 잡은 후 던지기 기술로 균형을 무너뜨리거나 밀어붙였다. `사시미`를 성공시키면 반드시 `사시테`를 되돌리고, 한 번 `스쿠이`로 상대의 전진을 막은 후에는 허리를 낮추고 밀어붙였으나, `히다리요쓰` 자세에서는 상대방을 내보낸 후 `미기우와테나게`(오른손으로 위팔을 감아 던지기)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특히 그의 품이 깊은 몸과 솜이나 스펀지에 비유될 정도로 유연한 신체는 어떤 충격도 받아내어 흐트러지지 않는 스모를 가능하게 했다. 전성기의 고토자쿠라가 연습 경기에서 날린 `부치카마시`(온몸으로 강하게 부딪치는 기술)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다이호 혼자였다고 전해진다.
다이호는 거구에도 불구하고 앞 공간을 활용하는 능력과 회전 능력이 뛰어나 냉철하고 치밀한 스모를 구사했다. 던지기 기술 중에서는 `우와테나게`도 강했지만, 특히 왼쪽으로 `사시테`를 충분히 되돌린 후 날리는 `스쿠이나게`의 능력이 뛰어났으며, 이는 그의 필살기로 불렸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허리를 뒤로 빼는 자세는 상대방이 `마와시`를 잡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자신도 `마와시`를 잡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스쿠이나게`를 많이 사용했다. 1970년 5월 대회 마지막 날, 기타노후지의 `우와테나게`를 `스쿠이나게`로 되받아치며 전승 우승을 저지했는데, 기타노후지는 "유연함에 졌다"고 탄식했다. 일반적으로 `마와시`를 잡지 않고 아래에서 던지는 `스쿠이나게`는 `우와테나게`보다 효과가 적다고 알려져 있지만, 다이호의 경우 깊은 품과 유연한 장신 덕분에 상체 회전이 크게 가능하여 `스쿠이나게`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밀어붙이는 힘도 강했으며, 밀어붙인 후의 `하타키코미`(쳐서 넘어뜨리기)도 품이 깊어 잘 통했다.
한편 다이호는 `소리고시`(허리를 뒤로 젖히는 자세)를 할 줄 몰라 상체가 뒤로 젖혀지면 버틸 수 없었다. 이 약점은 평소 `역 구자형` 자세, 유연한 신체, 깊은 품으로 보완했지만, 가슴을 맞대고 정면으로 맞붙으면 좀처럼 승부를 걸지 못했고, `다치아이`에서 상체가 들려 밀리면 일방적으로 밀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러한 약점이 자주 노출되는 경우는 대전 경험이 적은 평마쿠나 밀어붙이기 스타일의 상대와 경기할 때, 그리고 그들과의 경기가 많은 초반전이었다. 따라서 '초반, 평마쿠, 밀어붙이기'가 다이호의 난점이라고 불렸다. 밀어붙이기 스모에 고전했던 것은 은퇴 후 본인도 인정했으며, "`밀려서는 안 된다`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사시미`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노리던 곳에서 밀려나 당황하는 사이에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상대방을 끌어들여 움직임을 멈춘 후 요리하는` 다이호만의 밀어붙이기 스모 대책이 확립된 것은 "요코즈나 2년째 무렵"이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는 `히다리요쓰`로 잡고 밀어내기와 던지기가 주된 스타일이었지만, 밀어붙이기 스모나 `미기요쓰`(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띠 안쪽을 잡는 자세) 스모도 구사할 수 있었다. 좋게 말하면 올라운더였고, 나쁘게 말하면 절대적인 형태가 없었다. 이 점은 `미기요쓰`의 완성된 형태를 가졌던 후타바야마와는 대조적이었다. 다이호 이전에는 이러한 스모는 작은 체격의 선수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져 요코즈나·오제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또한 `역 구자형` 자세를 '엉덩이 빼는 자세'라고 비아냥거리는 경우도 있었고, 허리의 힘으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는 스모를 정통으로 보는 평론가들(예: 코사카 슈지)로부터 '작은 스모'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에 따라 싸움 방식을 바꾸는 유연성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니쇼노세키 오야카타는 "형태 없는 것이 다이호의 형태", "명인에게는 형태가 없다"며 비판에 반박했다. 다이호가 계속 승리하며 쇼와 시대의 대요코즈나로 성장하자, '형태 없는' 다이호의 스모는 상황에 따라 스모를 바꾸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의 강함과 빠른 출세 때문에 스모의 '천재'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본인은 "남보다 노력했기 때문에 강해졌다"며 이를 싫어했다. 다이호의 자질에 반한 니쇼노세키 오야카타의 철저한 지도로 단련되었는데, 그 지도 내용은 `시코` 500회, `데포` 2,000회, 다키미야마의 격렬한 `부쓰카리게이코`(맞부딪치는 훈련) 등 스파르타식이었다. 전성기에는 1시간 동안 `부쓰카리게이코`를 소화할 정도의 지구력을 가졌으며, 훈련시킬수록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본 니쇼노세키는 다이호에게 잡일이나 찬코 당번을 시키지 않았다. 본인은 막내 사제인 오키린이 '천재'라고 부르기에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
7. Major records and achievements
다이호 고키는 스모 역사에 길이 남을 통계적 기록과 독보적인 업적들을 달성했다.
7.1. Overall career statistics
- 총 성적: 872승 182패 136휴 (승률 .827)
- 마쿠우치 성적: 746승 144패 136휴 (마쿠우치 승수는 역대 5위) (승률 .838)
- 요코즈나 성적: 622승 103패 136휴 (요코즈나 승수는 역대 4위) (승률 .858)
- 오제키 성적: 58승 17패 (승률 .773)
- 마쿠우치 성적: 746승 144패 136휴 (마쿠우치 승수는 역대 5위) (승률 .838)
- 총 재임 기간: 87대회
- 마쿠우치 재임 기간: 69대회
- 요코즈나 재임 기간: 58대회 (역대 4위)
- 오제키 재임 기간: 5대회
- 산야쿠 재임 기간: 3대회 (세키와케 2대회, 고무스비 1대회)
- 마쿠우치 재임 기간: 69대회
- 대요코즈나전 승리: 43승 (와카노하나 간지와 함께 역대 1위 타이, 승률 60% 이상)
- 연간 최다승: 6회 (하쿠호 쇼의 10회, 기타노우미의 7회에 이어 역대 3위. 1960년부터 1964년까지 5년 연속 최다승은 하쿠호 쇼의 9년 연속에 이어 역대 2위 타이)
- 1960년 (66승 24패)
- 1961년 (71승 19패)
- 1962년 (77승 13패)
- 1963년 (81승 9패)
- 1964년 (69승 11패 10휴)
- 1967년 (70승 6패 14휴, 가시와도와 동률)
- 6회 연속 대회 승리: 84승 (1966년 3월 대회 ~ 1967년 1월 대회, 1966년 5월 대회 ~ 1967년 3월 대회, 1966년 7월 대회 ~ 1967년 5월 대회)
- 통산 (마쿠우치) 연속 승월 기록: 25대회 (역대 10위 타이, 1960년 5월 대회 ~ 1964년 5월 대회)
- 마쿠우치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 25대회 (하쿠호 51대회, 기타노우미 37대회에 이어 역대 3위, 1960년 5월 대회 ~ 1964년 5월 대회)
- 마쿠우치 연속 12승 이상 승리: 11대회 (역대 5위, 1962년 7월 대회 ~ 1964년 3월 대회)
마쿠우치 최고 우승 32회는 하쿠호에 이어 역대 2위 기록이지만, 은퇴 당시에는 최다 우승 기록이었다. 그는 다양한 금자탑을 쌓았지만, 특히 마쿠우치 데뷔(1960년)부터 은퇴(1971년)까지 12년간 매년 최소 1회 우승을 차지한 기록은 '가장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 불렸다(현재는 하쿠호의 16년 연속에 이어 역대 2위이지만, 하쿠호도 '마쿠우치 데뷔 연도 우승'은 달성하지 못했다).
7.2. Notable winning streaks
다이호의 최다 연승 기록은 45연승이다 (1968년 9월 대회 2일째 ~ 1969년 3월 대회 첫날. 1926년 동서 스모 합병 이후 역대 4위).
다이호의 기타 연승 기록(20연승 이상 대상)은 다음과 같다:
횟수 | 연승 수 | 기간 | 연승을 멈춘 선수 | 비고 | 연승을 멈춘 선수의 기마리테 | 연승이 멈춘 장소의 멈춘 선수의 반즈케 |
---|---|---|---|---|---|---|
1 | 25 | 1962년 7월 대회 3일째 - 1962년 9월 대회 12일째 | 기타바야마 | 웃차리 | 서오제키 2위 하다시 | |
2 | 30 | 1963년 3월 대회 5일째 - 1963년 7월 대회 4일째 | 아오노사토 | 1963년 5월 대회 전승 우승 | 요리키리 | 동마에가시라 3위 |
3 | 34 | 1963년 11월 대회 마지막 날 - 1964년 5월 대회 3일째 | 마에다카와 | 1964년 1월 대회 - 3월 대회 2회 연속 전승 우승 | 히키오토시 | 서마에가시라 2위 |
4 | 20 | 1964년 9월 대회 5일째 - 1964년 11월 대회 9일째 | 아케보노 | 쓰키다시 | 동세키와케 | |
5 | 26 | 1966년 5월 대회 2일째 - 1966년 7월 대회 12일째 | 도요야마 | 시타테나게 | 동오제키 | |
6 | 34 | 1966년 11월 대회 첫날 - 1967년 3월 대회 4일째 | 아사세카와 | 1966년 11월 대회 - 1967년 1월 대회 2회 연속 전승 우승 | 요리키리 | 동마에가시라 3위 |
7 | 25 | 1967년 9월 대회 첫날 - 1967년 11월 대회 10일째 | 우미노야마 | 1967년 9월 대회 전승 우승 | 게타구리 | 서세키와케 |
8 | 45 | 1968년 9월 대회 2일째 - 1969년 3월 대회 첫날 | 도다 | 1968년 11월 대회 - 1969년 1월 대회 2회 연속 전승 우승 | 오시다시 | 동마에가시라 필두 |
9 | 20 | 1970년 11월 대회 6일째 - 1971년 1월 대회 10일째 | 고토자쿠라 | 오시다시 | 동오제키 2위 하다시 |
- 위 표와 같이, 20연승 이상 9회, 30연승 이상 4회를 기록했다.
7.3. Division championships
- 마쿠우치 최고 우승: 32회 (은퇴 당시 역대 1위, 사망 당시 역대 1위, 현재 역대 2위)
- 1960년 11월 대회
- 1961년 7월 대회, 9월 대회, 11월 대회
- 1962년 1월 대회, 7월 대회, 9월 대회, 11월 대회
- 1963년 1월 대회, 3월 대회, 5월 대회
- 1964년 1월 대회, 3월 대회, 9월 대회, 11월 대회
- 1965년 3월 대회, 7월 대회, 11월 대회
- 1966년 3월 대회, 5월 대회, 7월 대회, 9월 대회, 11월 대회
- 1967년 1월 대회, 5월 대회, 9월 대회
- 1968년 9월 대회, 11월 대회
- 1969년 1월 대회, 5월 대회
- 1970년 3월 대회
- 1971년 1월 대회
- 전승 우승: 8회 (은퇴 당시 역대 1위 타이, 현재 역대 2위 타이)
- 연속 우승: 6연패 (1962년 7월 대회 ~ 1963년 5월 대회, 1966년 3월 대회 ~ 1967년 1월 대회, 두 차례 달성)
- 주료 우승: 1회 (1959년 11월 대회)
- 산단메 우승: 1회 (1958년 3월 대회)
7.4. Special awards and Kinboshi
- 산쇼: 3회
- 간토쇼: 2회 (1960년 1월 대회, 1960년 5월 대회)
- 기노쇼: 1회 (1960년 9월 대회)
- 라이덴쇼: 3회 (1960년 1월 대회, 1960년 9월 대회, 1960년 11월 대회)
- 긴보시: 1개 (아사시오 1개)
8. Death
다이호 고키는 2013년 1월 19일, 도쿄도 신주쿠구에 위치한 게이오기주쿠 대학 병원에서 심실빈맥으로 인해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는 휠체어를 사용하며 생의 마지막 단계를 보내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2012년 같은 병원에 경수손상으로 입원 중이던 오토루마 히사아키(전 오제키 고토카제)를 병문안하여, "이봐, 뭐하는 거야. 빨리 제자들한테 돌아가야지. 나도 옛날에 이 병원에서 재활했어"라며 격려하기도 했다.
다이호의 부고가 전해지자, 그의 간레키 도효이리에도 참여했던 기타노우미 이사장과 구코노에 미쓰구 사업부장 등이 애도의 뜻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또한 동시대 일본 스포츠계의 영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 파이팅 하라다, 그리고 다이호와 절친한 친구였던 오 사다하루는 "같은 시대에 세상에 나와 영광이었다"고 고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담화를 각각 발표했다. 장례식은 1월 30일 영결식, 1월 31일 영결식 및 고별식 모두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거행되었으며, 오 사다하루, 구로야나기 데쓰코, 하쿠호 쇼 등이 조사를 낭독했다.
다이호가 사망하기 불과 16일 전인 1월 3일에는 그의 고향인 데시카가정에서 살던 친형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동생인 다이호는 건강 문제로 형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또한 다이호는 70세가 넘어서부터 산소통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9. Legacy and reception
다이호 고키는 스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되며, 일본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9.1. Historical evaluation and influence
다이호 고키는 전후 일본 스모의 최고봉으로 평가받으며, 일본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 미쳤다. 그는 역대 가장 위대한 요코즈나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후대 스모 선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스모 경력을 통해 현대 스모에 큰 흔적을 남겼다. 스모계에서 그의 전설적인 지위는 그를 스모의 '고지라'로 불리게 할 정도였다. 다이호는 요코즈나에 승진할 때부터 20대 젊은 나이로 스모계를 장악하며, 가시와도와 함께 "하쿠호 시대"를 열었다. 그의 압도적인 우승 기록과 연승 기록은 당시 일본 국민들에게 큰 희망과 활력을 주었다.
그의 강함과 빠른 성공 때문에 '스모의 천재'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다이호는 스스로를 '천재'라기보다는 '노력가'로 생각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해서 강해졌다"고 자주 말했다. 그의 이러한 겸손함과 노력은 후대 스모 선수들에게도 귀감이 되었으며, 그의 훈련 방식과 정신력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일본 스포츠계의 영웅인 나가시마 시게오와 오 사다하루와 함께 '거인, 다이호, 계란말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 이는 그가 단순한 스모 선수를 넘어선 국민적 영웅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은퇴 후에도 스모계에서의 영향력은 지속되었으며, 스모 박물관 관장으로서 스모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2013년 사망 당시, 닛칸 스포츠는 그를 "역사상 최강의 요코즈나"라고 칭했으며, 이는 그의 역사적 위상을 잘 보여준다.
9.2. Criticisms and controversies
다이호 고키의 경력과 개인 생활에는 긍정적인 평가 외에 몇 가지 비판과 논란이 되는 사건들도 있었다.
- 1964년부터 본태성 고혈압으로 인해 마쿠우치에서 처음으로 도중 휴장을 하는 등 건강 문제가 시작되었다.
- 1965년에는 가시와도와 기타노후지와 함께 미국에서 권총을 밀수입한 사실이 발각되어 서류송치되었고, 벌금 3.00 만 JPY의 약식 기소 처분을 받았다. 일본 스모 협회에서는 견책 처분에 그쳤다.
- 1968년 이후 왼쪽 무릎 인대파열 등의 중상으로 인해 `하타키코미`와 같은 밀어내기 기술에 의존하는 스모가 늘어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
- 1969년 3월 대회 2일째 도다 도모지로에게 패하며 45연승 기록이 중단되었을 때, 비디오 판독 결과 도다의 발이 먼저 나갔음이 드러나 '세기의 오심'으로 논란이 되었다. 다이호는 오심에 대해 직접적인 불만을 표하지 않고 "그런 스모를 한 자신이 나쁜 것"이라고 말해 고결한 인품을 드러냈으나, 당시 기자들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는 격분하여 "나는 남아있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 은퇴 후 오야카타로서 다이호베야를 운영했으나, 1977년 36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좌반신 마비 등의 후유증을 겪었다. 이로 인해 이사장 등 스모 협회의 중요한 요직에 오르지 못했다.
- 그가 양성한 러시아 출신 씨름꾼 로호가 2008년 도핑 테스트에서 대마초 양성 반응이 나와 동생인 하쿠로잔과 함께 일본 스모 협회에서 해고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다이호는 자신의 사위인 다카토리키가 책임을 지고 위원직에서 평년노로 두 단계 강등되는 상황을 겪었고, 자신 또한 스모 박물관장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 특히 사위인 다카토리키의 도박 스캔들은 다이호의 개인적인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카토리키의 도박 빚을 여러 번 대신 갚아주었으나, 결국 다카토리키가 야구 도박에 손을 대어 해고되면서 다이호는 그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이 사건은 다이호가 손주들의 스모 입문을 꿈꾸며 방 개조에 착수하던 중에 벌어져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다이호의 셋째 딸은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떨어져 살았지만, 다이호는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 당당하게 지내라"고 위로하며 죽는 순간까지 딸을 걱정했다고 한다.
9.3. Tributes and memorials
다이호 고키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추모가 이루어지고 있다.
- 1984년, 그가 소년 시절을 보낸 홋카이도 데시카가정 가와유 온천 온천 거리에는 다이호 스모 기념관(설립 당시 명칭은 데시카가정 가와유 스모 기념관)이 개관했다. 기념관에는 다이호가 실제로 사용했던 게쇼마와시와 트로피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명승부와 명장면, 그리고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이 상영되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기념관 앞에는 다이호의 동상도 건립되어 있다.
- 2014년 8월 15일, 그의 고향인 사할린에 다이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 그는 생전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다이호 자선 유카타' 등을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1967년부터 1968년까지 양로원과 보호 시설에 텔레비전을 기증했고, 1969년부터 2009년까지 일본 적십자사에 '다이호호'라고 명명된 혈액 운반차를 기증했다. 총 70대의 혈액 운반차를 기증했으며, 이는 그의 나이와 같은 숫자였다.
- 2013년 3월 24일, 스모 2013년 3월 대회 마지막 날 우승자 인터뷰에서 하쿠호의 제안으로 관객 전원이 1분간 묵념을 하며 다이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하쿠호는 다이호가 정기적으로 조언을 해주었고,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하쿠호는 다이호 사망 2년 후인 2015년 1월, 자신의 33번째 유쇼를 차지하며 다이호의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을 넘어섰다.
- 그의 묘소는 도쿄도 고토구의 묘큐지에 위치한 나야 가문의 보리사이다. 그의 계명은 '대도원전인수연성일붕대거사'(大道院殿忍受錬成日鵬大居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