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다이테쓰 다다미쓰(大徹 忠晃다이테쓰 다다미쓰일본어, 1956년 10월 29일 출생, 본명: 南 忠晃미나미 다다미쓰일본어)는 일본 후쿠이현 오노시 출신의 전 스모 선수이다. 그는 1971년 7월 프로 스모에 입문하여 1983년 11월 스모 최고 등급인 마쿠우치에 진입했고, 최고 직위는 고무스비(小結)였다. 현역 시절 두꺼운 구레나룻과 황토색 마와시(廻し)로 독특한 외모를 자랑하며 많은 팬들에게 사랑받았으며, 특히 음악가 데몬 코구레의 라디오 프로그램 '데몬 코구레의 올 나이트 닛폰'에 출연하며 '다이테쓰 코너'를 통해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다이테쓰는 1990년 9월 은퇴한 후 일본 스모 협회의 연장자(年寄)인 미나토가와(湊川)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니쇼노세키(二所ノ関) 및 마츠가네(松ヶ根) 등 여러 스모 헤야(相撲部屋)에서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심판부와 이사회 구성원으로서도 협회에 기여했다. 특히 현역 시절 한 번도 결장하지 않고 1,199경기에 연속 출장한 철인으로서의 면모와, 2012년 심판 오심 사건 이후 스모 심판 규정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의 중심인물로도 기억된다. 은퇴 후에도 지역 사회에서 스모 교실을 운영하며 스모 보급에 기여하는 등 반세기 넘게 스모에 헌신한 인물이다.
2. 유년기 및 스모 입문
다이테쓰 다다미쓰는 어린 시절부터 스모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였으며, 그의 프로 스모 경력은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모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초기 프로 경력은 하위 등급에서의 꾸준한 승진과 난관 극복을 통해 최고 등급인 마쿠우치에 도달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다이테쓰 다다미쓰는 1956년 10월 29일 후쿠이현 오노시에서 南 忠晃미나미 다다미쓰일본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시절 검도를 배웠으며, 그의 긴 신장은 스모 선수로서의 잠재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중학교 재학 중이던 1971년(쇼와 46년) 7월, 다이테쓰는 니쇼노세키 헤야(二所ノ関部屋)에 입문하며 초도효(初土俵, 첫 출장)를 밟았다. 그는 도쿄에서 이름을 떨치겠다는 포부를 안고 스모에 입문했으며, 어머니의 간절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눈물로 이를 뿌리치고 도쿄로 향했다. 1975년 9월 3일 오시오가와 헤야(押尾川部屋) 독립 소동이 있었을 때, 그는 大麒麟將能오오키린 마사요시일본어와 함께 오시오가와 측에 섰으나, 이적이 허용되지 않아 니쇼노세키 헤야에 잔류하게 되었다.
2.1. 초기 스모 경력
다이테쓰는 1971년 7월 프로 스모에 데뷔한 이후 꾸준히 승진을 거듭했다. 1979년 7월에는 마쿠시타(幕下) 등급에서 7전 전승을 기록했으나, 사다노우미 고지(佐田の海 鴻嗣)와의 유쇼(優勝, 우승) 결정전에서 패배하며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1980년 1월에는 주료(十両) 등급으로 승진했으나, 한 바쇼(場所, 스모 대회) 만에 다시 마쿠시타로 강등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그는 스모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으나, 후쿠이현의 후원회 관계자들이 매 대회마다 "그것이 한계냐?"며 그를 격려했고, 이에 힘입어 다시 도전할 수 있었다. 후원회 관계자들은 만약 그가 최선을 다하고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회사에서 그를 돌볼 의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지원과 그의 노력 덕분에 1982년 7월 주료로 복귀했고, 마침내 1983년 11월 마쿠우치(幕内) 등급에 신입막(新入幕)하며 꿈을 이루었다.
3. 현역 스모 선수 시절
다이테쓰 다다미쓰는 현역 스모 선수로서 인상 깊은 업적을 남겼다. 스모 최고 등급인 마쿠우치에서의 활약과 역사적인 산야쿠(三役) 승진은 물론, 당시 최강의 요코즈나(横綱)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3.1. 마쿠우치 및 산야쿠 승진
1983년 11월에 마쿠우치에 진입한 다이테쓰는 점차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7년 3월 바쇼에서 스모의 세 번째 높은 직위인 고무스비(小結)로 승진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후쿠이현 출신 스모 선수로서는 쇼와 시대 이후 최초의 산야쿠(三役) 승진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비록 그는 고무스비 등급을 단 한 바쇼만 유지했지만, 그의 산야쿠 진입은 당시 스모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1988년 9월 키린지 카즈하루(騏ノ嵐 和敏)가 은퇴한 후, 다이테쓰는 니쇼노세키 헤야(二所ノ関部屋)에서 마쿠우치 등급에 남은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그는 1989년 1월 다시 주료(十両) 등급으로 강등되었으며, 남은 현역 생활을 주료에서 보냈다. 같은 해 5월과 7월 바쇼에서는 주료 우승 결정전에 두 차례 출전했지만, 각각 駒不動코마후도일본어와 龍興山류코잔일본어에게 패배하며 아쉽게도 모든 등급에서 유쇼(優勝, 우승)를 차지하지 못했다.
3.2. 주요 승리 및 대결
다이테쓰의 현역 시절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1985년 7월 바쇼에서 당시 막강한 요코즈나(横綱)였던 지요노후지 미쓰구(千代の富士貢)를 상대로 거둔 승리이다. 2일차 경기에서 그는 지요노후지를 うっちゃり웃차리일본어(뒤집어 던지기) 기술로 꺾으며 생애 첫 킨보시(金星, 요코즈나에 대한 평막 선수의 승리)를 획득했다. 이 경기는 지요노후지가 빠르게 양쪽 샅바를 잡아당겨 강하게 밀어붙이려 했으나, 다이테쓰가 무의식적으로 왼쪽 샅바를 잡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기세가 붙어있던 지요노후지의 왼쪽 발이 크게 도효(土俵) 밖으로 나가는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이 승리는 당시 큰 화제가 되었고, 그의 고향인 후쿠이현의 福井新聞후쿠이 신문일본어은 이 소식을 1면에 대서특필하고 특집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는 이 킨보시를 포함하여 총 1개의 킨보시를 획득했다.
3.3. 스모 스타일
다이테쓰는 요쓰즈모(四つ相撲, 샅바 싸움을 선호하는 스타일) 선수였으며, 특히 히다리요쓰(左四つ, 오른손은 상대의 바깥쪽, 왼손은 상대의 안쪽 샅바를 잡는 자세)를 선호했다. 그의 가장 흔한 승리 기술은 요리키리(寄り切り, 밀어내기)였다. 그는 평균 이상의 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쓰리다시(吊り出し, 들어 올리기) 기술도 자주 사용했다. 또한 우와테나게(上手投げ, 덧배지기)도 그의 특기 기술 중 하나였다. 그는 오른쪽 샅바를 잡으면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고시다카(腰高, 허리가 높은 자세)로 인해 다치아이(立合い, 시작 자세)가 다소 미숙했으며, 이로 인해 쓰키오시(突き押し, 밀치기) 스타일의 선수들에게는 약점을 보였다.
4. 개성 및 대중적 인기
다이테쓰 다다미쓰는 그의 독특한 외모와 친근한 성격으로 스모 팬들뿐만 아니라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개성은 스모계에서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다이테쓰의 가장 두드러진 외모적 특징은 극단적으로 두껍고 긴 구레나룻이었다. 이는 나중에 闘牙進도가 스스무일본어나 隆の鶴伸一다카노쓰루 신이치일본어 같은 다른 스모 선수들에게서도 유사한 스타일이 나타났을 정도로 그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일반적인 검정색이나 파란색 마와시(廻し) 대신, 희귀한 황토색 마와시를 착용하여 깊이 있는 개성을 드러냈다. (본인은 황토색이 아닌 금색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성격은 매우 기사적이고 쾌활하여 지방 순회(巡業)에서 팬들에게 기꺼이 사인이나 사진 촬영에 응해주었다. 이러한 친근한 태도 덕분에 그의 팬층은 꾸준히 확장되었다. 전국에서 그에게 사인이나 사진을 요청하는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니쇼노세키 헤야(二所ノ関部屋)의 훈련장은 보통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다이테쓰의 경우 사인이나 사진 촬영을 위해 예외적으로 허용될 정도였다.
다이테쓰의 대중적 인기는 음악가 데몬 코구레(デーモン閣下)와의 인연을 통해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데몬 코구레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데몬 코구레의 올 나이트 닛폰'에 '다이테쓰 코너'가 개설되면서, 많은 청취자들이 그를 알게 되었다. 특히 슈에이샤의 '주간 소년 점프'에 실린 'ジャンプ放送局점프 방송국일본어'의 '마와시 리뉴얼 투고' 코너를 통해 다이테쓰를 처음 접한 팬들도 많았으며, 이로 인해 젊은 층의 팬들도 대거 유입되었다. 그의 친근하고 유쾌한 성격은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5. 은퇴 및 연장자 활동
다이테쓰 다다미쓰는 1990년 9월 스모 선수로서의 현역 생활을 마감한 후, 일본 스모 협회의 연장자(年寄)로 전환하여 스모계에 계속 기여했다. 그는 여러 스모 헤야(相撲部屋)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협회 내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며 스모 발전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5.1. 연장자로의 전환
다이테쓰는 1990년 9월 바쇼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며 연장자 '미나토가와(湊川)'를 습명했다. 그는 초도효(初土俵, 첫 출장)를 밟은 이래 은퇴할 때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도효(土俵)에 오르는 놀라운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그는 뼈에 금이 가거나 손가락 밑동이 찢어져도 훈련으로 치료한다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한 번도 결장하지 않았다. 은퇴 후 그는 니쇼노세키 헤야(二所ノ関部屋)의 헤야(部屋) 부속 오야카타(親方, 스모 스승)로서 후배들을 지도했다.
5.2. 일본 스모 협회에서의 역할
다이테쓰는 연장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2013년 1월 바쇼 이후 니쇼노세키 헤야가 폐쇄되면서 그는 같은 니쇼노세키 일문(一門) 소속의 마츠가네 헤야(松ヶ根部屋)로 이적했다. 그러나 2014년 11월 바쇼 이후 마츠가네 헤야가 다시 니쇼노세키 헤야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그는 다시 니쇼노세키 헤야 소속으로 돌아왔다. 2021년 12월 24일 니쇼노세키 헤야가 다시 이름을 바꾸면서 그는 이후 하네코마 헤야(放駒部屋)에 소속되었다.
그는 2006년 1월 바쇼까지 심판부(審判部)에 소속되어 심판 활동을 했으며, 2010년 7월 바쇼에서는 오즈모 야구 도박 문제(大相撲野球賭博問題)로 근신 처분을 받은 佐渡ヶ嶽사도가타케일본어 친방(親方)의 대리로서 4년 반 만에 심판으로 복귀했다. 이후 9월 바쇼부터는 정식으로 심판부에 복귀하여 활동했다.
또한 그는 2014년 3월 바쇼부터 2018년 3월 바쇼까지 일본 스모 협회가 공익 법인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선임된 세 명의 평의원(評議員)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공식 직책은 본명인 南 忠晃미나미 다다미쓰일본어 명의로 등재되었다. 2018년 3월 26일 평의원직에서 퇴임했으며, 2018년 5월부터는 임원 외의 친방들로 구성된 연장자회(年寄会)의 부회장을 맡았다.
5.3. 최종 은퇴 및 연장자 명의 계승
다이테쓰는 2021년 10월 65세 생일을 맞아 일본 스모 협회에서 정년 퇴직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재고용되어 참여(参与)로서 5년간 더 협회에 재직했다. 2024년 6월 30일부로 그는 참여직에서 조기 퇴직했다. 정년 퇴직 당시 그의 체중은 현역 시절을 넘어선 140 kg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퇴직한 후, 그의 연장자 명의인 '미나토가와'는 같은 일문(一門) 소속의 오제키 다카케이쇼(貴景勝)가 습명했다. 다카케이쇼는 당시 오제키 자격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은퇴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이테쓰가 일문 소속 후배를 위해 '미나토가와' 명의를 양보한 것으로 풀이된다.
6. 데몬 코구레와의 관계
다이테쓰 다다미쓰는 호각가(好角家, 스모 팬)로 알려진 음악가 데몬 코구레(デーモン閣下)와의 독특하고 깊은 우정을 이어왔다. 이들의 인연은 데몬 코구레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데몬 코구레의 올 나이트 닛폰'에서 시작되었다.
1987년 4월부터 1990년 5월까지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시작 당시 세이키마츠(聖飢魔II)의 노래 가사가 일본방송협회(NHK)에서 '방송에 적합하지 않은 곡'으로 지정되면서 데몬 코구레가 이를 '박해'라고 비판하는 분위기였다. 이때, 프로그램의 한 코너인 '스모를 666배 즐기는 방법'에 "세이키마츠와 마찬가지로 NHK로부터 박해받는 스모 선수"로 다이테쓰가 언급된 사연이 투고되었다. 당시 마쿠우치 중위권에 안착해 있던 다이테쓰가 등장할 때마다 '5시 뉴스', '내일의 대결', '오늘까지의 결과' 등 다양한 방송으로 인해 경기가 제대로 중계되지 못한다는 내용의 투고에 데몬 코구레는 크게 웃으며 "너희들 다이테쓰를 응원해라!"고 외쳤다.
이 발언 이후, 다음 주부터 다이테쓰에 대한 투고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급기야 '다이테쓰 코너'가 독립적으로 개설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소년대의 노래 'stripe blue영어'의 한 구절 "♪다이테 쓰요쿠(抱いて強く)~"(안아줘 강하게)가 "다이테쓰, 쓰요쿠(大徹、強く)~"(다이테쓰, 강하게)로 들린다는 이유로, 다이테쓰가 패배를 거듭할 때마다 이 곡이 자주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후 '다이테쓰 코너'는 더욱 활기를 띠며, 미나미노 요코(南野陽子)가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다이테쓰 씨 힘내세요!"라고 말한 대사를 샘플링하여 랩 스타일의 전용 징글('다이테쓰 랩'으로 통칭)을 제작하기도 했다. 1987년 6월 29일, 나고야 바쇼(名古屋場所)를 앞두고 마침내 다이테쓰 본인이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다이테쓰는 팬의 투고에서 "화장실 변기 뚜껑을 닮았다"는 이야기에 마치 남의 일처럼 크게 웃었으며, "젊은 사람들의 응원이 늘어서 기쁘다"며 자신을 소재로 한 유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데몬 코구레에게도 "많은 분들이 스모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진심을 전했다. 이때의 자기소개 "다이테쓰입니다"는 앞서 언급된 다이테쓰 랩에 추가되어, "다다다다 다이테쓰 다다다다 다이테쓰 다이테쓰 다이테쓰 '힘내세요!' '다이테쓰입니다'"라는 완성형에 이르렀다.
프로그램 출연 이후에도 다이테쓰는 데몬 코구레의 목욕 타월을 몸에 두르고 하나미치(花道, 스모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에 등장하거나, 세이키마츠의 '黒ミサ쿠로미사일본어'(콘서트)에 참석하여 환영받는 등 교류를 이어갔다. 은퇴 후에도 단발식(断髪式, 은퇴식)에서 데몬 코구레가 직접 가위질을 해주거나, 잡지 'VAN VAN 스모계'에서 대담을 나누는 등 이들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나중에 데몬 코구레가 NHK 스모 중계에 출연하게 되었을 때, 심판(審判)으로서 도효(土俵) 아래에 앉아있는 미나토가와(다이테쓰)가 카메라에 잡히자 "다다다다 다이테쓰..."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7. 일화 및 사건
다이테쓰의 생애와 스모 경력에는 그의 독특한 개성과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여러 기억에 남는 일화와 중요한 사건들이 존재한다.
7.1. 주요 일화
- 마와시 색깔: 다이테쓰가 착용했던 황토색 마와시(廻し)는 보는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본인은 금색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마와시 색깔이 녹색으로 바뀐 적이 있었는데, 당시 슈에이샤의 '주간 소년 점프' 투고 코너 'ジャンプ放送局점프 방송국일본어'에는 이를 크게 알리는 투고 기사가 한 페이지 가득 실릴 정도였다. 이 투고 코너는 다이테쓰의 인기를 더욱 높이고 새로운 팬들을 끌어모으는 데 기여했다. 지방 라디오 방송국의 개사곡 투고 코너에서도 다이테쓰를 소재로 한 곡이 투고되어 채택된 적이 있다.
- 오자와 쇼이치(小沢昭一)의 평가: NHK 종합 텔레비전의 오즈모(大相撲) 중계에 오자와 쇼이치(小沢昭一)가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아나운서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스모 선수는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오자와는 "다이테쓰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나운서가 씨익 웃으며 "호오, 왜 그렇습니까?"라고 묻자, 오자와는 매우 진지하게 "승리하려는 의욕이 전혀 보이지 않는 무욕의 경기가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 킨보시 포상금 이야기: 지요노후지(千代の富士)를 꺾은 경기 전, 니쇼노세키(二所ノ関) 친방(親方)은 다이테쓰에게 "이기면 100.00 만 JPY를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다이테쓰는 "이길 리가 없으니 괜찮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이 이야기는 원래 다이테쓰가 지면 10.00 만 JPY를 내야 하는 조건이었지만, 최종적으로는 1.00 만 JPY마저 거절했다는 내용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막상 이기고 나자 그는 "절반이라도 주세요"라고 말했고, 니쇼노세키 친방은 어이없어하며 화를 냈다고 한다.
- 인터뷰 일화: 지요노후지를 꺾은 다음 날, NHK 인터뷰실에 도착했을 때 그가 받은 첫 질문은 "여기 오는 길은 아셨습니까?"였다. 이는 그가 워낙 평범한 순위의 선수였기 때문에 인터뷰실 방문이 드물었음을 시사하는 유머러스한 일화이다.
- 주량: 술을 즐기는 사람이 많은 스모계에서, 다이테쓰는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지독한 하객(下戸, 술을 못 마시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현역 시절부터 은퇴 후까지 그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다고 한다.
7.2. 심판 오심 사건
심판부(審判部) 소속이던 다이테쓰는 2012년 11월 바쇼(규슈 바쇼) 9일차(2012년 11월 19일) 고에이도 고타로(豪栄道豪太郎) 대 하루마후지 고헤이(日馬富士公平)의 경기에서 오심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그는 하루마후지의 발이 도효(土俵) 밖으로 나갔다고 판단하여 경기를 중단시키고 '승부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음이 판명되어 오심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스모 역사상 전례 없는 '재경기' 사태가 발생했으며 (재경기 결과는 하루마후지의 승리), 며칠 후 다이테쓰는 심판부장인 鏡山카가미야마일본어 친방과 함께 이사장인 기타노우미 도시미쓰(北の湖敏満)에게 찾아가 사죄했다. 이 사건 이후, 미묘한 판정이 발생할 경우 즉시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고 교지(行司, 스모 심판)가 어느 한쪽에게 군바이(軍配, 심판이 드는 부채)를 들어 올린 후에 협의(協議)를 진행하도록 스모 심판 규정이 변경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8. 경력 통계 및 기록
다이테쓰 다다미쓰의 프로 스모 경력은 꾸준함과 투지로 특징지어진다. 다음은 그의 주요 기록과 바쇼(대회)별 성적, 그리고 마쿠우치 등급에서의 주요 대전 기록이다.
8.1. 주요 기록 요약
- 총 전적: 587승 612패 (승률 0.490%)
- 마쿠우치 전적: 209승 256패 (승률 0.449%)
- 현역 재위 기간: 115바쇼
- 마쿠우치 재위 기간: 31바쇼
- 산야쿠 재위 기간: 1바쇼 (고무스비 1바쇼)
- 통산 연속 출장: 1,199회 (조노구치 등급 이래, 1971년 9월 ~ 1990년 9월)
- 킨보시 (金星) 획득 횟수: 1회 (지요노후지, 1985년 7월 바쇼 2일차)
8.2. 바쇼별(場所別) 성적
연도 | 1월 (하쓰) | 3월 (하루) | 5월 (나쓰) | 7월 (나고야) | 9월 (아키) | 11월 (규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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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마에즈모(前相撲) | 조노구치(序ノ口) 동9위 4승3패 | 조니단(序二段) 동75위 2승2패 | |||
1972 | 조니단 동63위 0승3패 | 조니단 서87위 5승2패 | 조니단 서28위 3승4패 | 조니단 동36위 4승3패 | 조니단 동22위 3승4패 | 조니단 동32위 5승2패 |
1973 | 산단메(三段目) 동71위 2승5패 | 조니단 서10위 3승4패 | 조니단 서22위 5승2패 | 산단메 서66위 4승3패 | 산단메 동51위 3승4패 | 산단메 동64위 5승2패 |
1974 | 산단메 동38위 4승3패 | 산단메 동29위 3승4패 | 산단메 동39위 3승4패 | 산단메 동47위 4승3패 | 산단메 서35위 3승4패 | 산단메 동44위 2승5패 |
1975 | 산단메 동62위 4승3패 | 산단메 서48위 5승2패 | 산단메 서21위 3승4패 | 산단메 서32위 5승2패 | 산단메 서4위 4승3패 | 마쿠시타(幕下) 동53위 4승3패 |
1976 | 마쿠시타 서45위 3승4패 | 마쿠시타 서57위 3승4패 | 산단메 서9위 5승2패 | 마쿠시타 서45위 4승3패 | 마쿠시타 서32위 2승5패 | 마쿠시타 동55위 4승3패 |
1977 | 마쿠시타 서43위 4승3패 | 마쿠시타 서31위 5승2패 | 마쿠시타 동16위 3승4패 | 마쿠시타 동23위 5승2패 | 마쿠시타 동11위 3승4패 | 마쿠시타 서16위 3승4패 |
1978 | 마쿠시타 서23위 4승3패 | 마쿠시타 동18위 3승4패 | 마쿠시타 서26위 3승4패 | 마쿠시타 서35위 4승3패 | 마쿠시타 동28위 4승3패 | 마쿠시타 동22위 6승1패 |
1979 | 마쿠시타 서4위 2승5패 | 마쿠시타 동22위 2승5패 | 마쿠시타 서41위 7승0패P | 마쿠시타 동5위 4승3패 | 마쿠시타 서3위 4승3패 | 주료(十両) 서12위 2승13패 |
1980 | 마쿠시타 서11위 3승4패 | 마쿠시타 동18위 2승5패 | 마쿠시타 서37위 3승4패 | 마쿠시타 동46위 6승1패 | 마쿠시타 동22위 5승2패 | 마쿠시타 동10위 4승3패 |
1981 | 마쿠시타 동7위 2승5패 | 마쿠시타 서19위 4승3패 | 마쿠시타 서11위 4승3패 | 마쿠시타 서8위 1승6패 | 마쿠시타 서32위 6승1패 | 마쿠시타 동10위 4승3패 |
1982 | 마쿠시타 동7위 4승3패 | 마쿠시타 서4위 5승2패 | 주료 서13위 8승7패 | 주료 동9위 10승5패 | 주료 서3위 6승9패 | 주료 동8위 9승6패 |
1983 | 주료 서4위 9승6패 | 주료 동1위 5승10패 | 주료 동7위 9승6패 | 주료 서4위 11승4패 | 마쿠우치(幕内) 서11위 8승7패 | 마쿠우치 동9위 8승7패 |
1984 | 마쿠우치 서4위 5승10패 | 마쿠우치 서9위 8승7패 | 마쿠우치 서6위 6승9패 | 마쿠우치 동11위 8승7패 | 마쿠우치 서7위 8승7패 | 마쿠우치 서3위 4승11패 |
1985 | 마쿠우치 동12위 8승7패 | 마쿠우치 동8위 8승7패 | 마쿠우치 동4위 4승11패 * | 마쿠우치 동12위 9승6패 | 마쿠우치 서3위 5승10패 | 마쿠우치 서10위 8승7패 |
1986 | 마쿠우치 서7위 7승8패 | 마쿠우치 동10위 7승8패 | 마쿠우치 서11위 8승7패 | 마쿠우치 동7위 8승7패 | 마쿠우치 서1위 5승10패 | 마쿠우치 동6위 9승6패 |
1987 | 고무스비(小結) 서1위 3승12패 | 마쿠우치 서7위 6승9패 | 마쿠우치 서11위 9승6패 | 마쿠우치 동4위 4승11패 | 마쿠우치 서10위 8승7패 | 마쿠우치 동5위 5승10패 |
1988 | 마쿠우치 서11위 9승6패 | 마쿠우치 동6위 5승10패 | 마쿠우치 서13위 8승7패 | 마쿠우치 서8위 6승9패 | 마쿠우치 서11위 5승10패 | 주료 동2위 6승9패 |
1989 | 주료 서5위 6승9패 | 주료 동10위 10승5패P | 주료 서3위 5승10패 | 주료 서9위 10승5패P | 주료 동5위 5승10패 | 주료 동11위 9승6패 |
1990 | 주료 서5위 7승8패 | 주료 동7위 8승7패 | 주료 동4위 5승10패 | 주료 서10위 6승9패 | 은퇴 |
각 란의 숫자는, '승-패-휴장'을 나타낸다. (휴장 없음)
산쇼(三賞) 표기: 'P'=플레이오프, '*'=킨보시(金星)
등급: 마쿠우치 - 주료 - 마쿠시타 - 산단메 - 조니단 - 조노구치
마쿠우치 등급: 요코즈나 - 오제키 - 세키와케 - 고무스비 - 마에가시라 (숫자는 등급 내 순위)
- 1971년 11월부터 1972년 3월까지는 중학생 신분으로 특별 대우를 받았다.
8.3. 마쿠우치 대전 성적
스모 선수명 | 승수 | 패수 | 스모 선수명 | 승수 | 패수 | 스모 선수명 | 승수 | 패수 | 스모 선수명 | 승수 | 패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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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바조 유키오(青葉城) | 5 | 5 | 아키노시마 가쓰미(安芸乃島) | 0 | 1 | 아사시오 다로(朝潮) | 0 | 5 | 아사히후지 세이야(旭富士) | 2 | 1 |
아마노야마 시즈오(天ノ山) | 0 | 1 | 이타이 게이스케(板井) | 8 | 5 | 에나자쿠라 도루(恵那櫻) | 5 | 1 | 오시오 겐지(大潮) | 1 | 1 |
교호 다케시(巨砲) | 7 | 6 | 오니시키 잇테쓰(大錦) | 6 | 9 | 오노쿠니 야스시(大乃国) | 1 | 2 | 오노하나 다케토라(大乃花) | 1 | 0 |
오토요 마사히로(大豊) | 1 | 0 | 가이키 가오루히데(魁輝) | 6 | 3 | 기노아라시 가즈토시(騏ノ嵐) | 0 | 1 | 기리시마 가즈히로(霧島) | 5 | 10 |
기리니시키 리로(起利錦) | 4 | 6 | 쿠라마 다쓰야(蔵間) | 9 | 6 | 다카미야마 다이조(高望山) | 7 | 9 | 미나토류 야스히로(港龍) | 1 | 3 |
고토이나즈마 요시히로(琴稲妻) | 2 | 3 | 고토가우메 고시(琴ヶ梅) | 3 | 2 | 고토치토세 고세이(琴千歳) | 1 | 0 | 고토후지 다카야(琴富士) | 1 | 0 |
고니시키 야소키치(小錦) | 0 | 4 | 사이슈 미노루(斉須) | 1 | 1 | 사카호코 노부시게(逆鉾) | 4 | 5 | 사다노우미 고지(佐田の海) | 6 | 8 |
삿슈나다 야스키(薩洲洋) | 2 | 6 | 시시오 야스아키(嗣子鵬) | 0 | 1 | 진가쿠 다카시(陣岳) | 6 | 7 | 다이주야마 다다아키(太寿山) | 7 | 7 |
다카노사토 도시히데(隆の里) | 0 | 2 | 다카노후지 다다오(孝乃富士) | 4 | 5 | 류자쿠미 다이치(隆三杉) | 6 | 12 | 다카미야마 다이고로(高見山) | 0 | 1 |
다가류 쇼지(多賀竜) | 14 | 7 | 다마류 다이조(玉龍) | 4 | 8 | 지쿠바야마 마사쿠니(竹葉山) | 1 | 0 | 지요노후지 미쓰구(千代の富士) | 1 | 5 |
데라오 쓰네히사(寺尾) | 5 | 5 | 데와노하나 요시키(出羽の花) | 4 | 3 | 도류 겐지(闘竜) | 6 | 8 | 도치아카기 다카노리(栃赤城) | 1 | 1 |
도치쓰카사 데쓰시(栃司) | 3 | 8 | 도치즈루 노부히데(栃剣) | 8 | 5 | 도치노와카 기요타카(栃乃和歌) | 1 | 1 | 도치미쓰 고후쿠(栃光) | 3 | 1 |
도치마토이 유미쓰(栃纒) | 1 | 0 | 도요노우미 신지(豊ノ海) | 0 | 1 | 난카이류 타로(南海龍) | 1 | 2 | 하나노코 다케시(花乃湖) | 2 | 9 |
하나노쿠니 아키히로(花ノ国) | 2 | 0 | 히다노하나 시게히데(飛騨乃花) | 5 | 3 | 후지노카와 유시(藤ノ川) | 4 | 2 | 후지노마 신지(富士乃真) | 2 | 4 |
후타하구로 고지(双羽黒) | 0 | 2 | 호쿠텐유 가쓰히코(北天佑) | 0 | 4 | 호쿠토우미 노부요시(北勝海) | 0 | 3 | 마에노신 야스오(前乃臻) | 3 | 2 |
마스다야마 야스히토(舛田山) | 5 | 2 | 마스라오 히로오(益荒雄) | 1 | 5 | 미스기이소 다쿠야(三杉磯) | 2 | 1 | 미스기사토 고지(三杉里) | 0 | 1 |
미토이즈미 마사유키(水戸泉) | 3 | 4 | 료고쿠 가지노스케(両国) | 0 | 3 | 와카시마즈 무쓰오(若嶋津) | 0 | 5 | 와카세가와 다케미쓰(若瀬川) | 2 | 2 |
와카노후지 쇼이치(若の富士) | 2 | 1 | 와시바야마 요시카즈(鷲羽山) | 1 | 1 |
9. 유산과 영향
다이테쓰 다다미쓰는 그의 스모 경력, 독특한 개성, 그리고 은퇴 후의 활동을 통해 일본 스모계와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스모 팬층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데몬 코구레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젊은 세대와 스모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까지 스모의 재미와 매력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친근하고 유쾌한 성격, 그리고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은 스모 선수가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 두꺼운 구레나룻과 황토색 마와시(廻し)와 같은 독특한 외모는 그를 기억하기 쉬운 아이콘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스모의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부각시키는 데 일조했다.
현역 시절 그는 한 번도 결장하지 않고 경기를 치러낸 '철인'으로서의 이미지를 확립했으며, 이는 후배 스모 선수들에게 투지와 끈기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1985년 요코즈나 지요노후지를 꺾고 킨보시를 획득한 그의 경기는 오랜 기간 회자되며 스모 팬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은퇴 후에는 일본 스모 협회의 연장자(年寄)로서 심판(審判) 및 이사회 구성원으로 활동하며 스모의 발전과 운영에 기여했다. 특히 2012년의 오심 사건 이후 심판 규정의 변화를 이끌어낸 중심 인물로서, 그의 경험은 스모 경기의 공정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고향인 후쿠이현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스모 교실을 운영하는 등 지역 사회 활동을 통해 스모의 저변을 확대하고 미래 세대에게 스모를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의 반세기 넘는 스모 인생은 선수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스모 문화의 대중화와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10. 관련 항목
- 소결 목록
- 연장자 목록
- 스모 선수 목록
- 니쇼노세키 헤야
- 마쓰가네 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