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즈키 다이치(鈴木 大地스즈키 다이치일본어, 1967년 3월 10일 출생)는 일본의 저명한 전 배영 수영 선수이자 현재는 스포츠과학 분야의 학자, 그리고 스포츠 행정가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치바현나라시노시에서 태어난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100m 배영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스즈키는 수중 잠영 기술인 '바사로 영법'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 기술은 당시 수영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관련 규칙 변화를 이끌어냈다.
선수 은퇴 후, 그는 순천당대학에서 스포츠과학 분야의 교수로 재직하며 학술 활동을 이어갔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 수영 연맹 회장, 일본 올림픽 위원회 위원, 세계반도핑기구 선수 위원 등 국내외 주요 스포츠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015년에는 일본 스포츠청의 초대 장관으로 임명되어 5년간 재임하며 일본 스포츠 정책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2021년에는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아시아 대학 스포츠 연맹 이사 및 국제 대학 스포츠 연맹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은퇴 후에도 일본 및 국제 스포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 어린 시절 및 교육
스즈키 다이치는 치바현 나라시노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수영에 재능을 보이며 선수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2.1. 출생과 유년 시절
스즈키 다이치는 1967년 3월 10일 일본치바현나라시노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지역의 치바 아슬레틱 센터 수영 스쿨(CAC)에서 수영을 시작했으며, 전국 SC 대회 100m 배영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교 시절에는 스포츠 클럽인 센트럴 스포츠에서 스즈키 요지 코치를 만나 은퇴할 때까지 그의 지도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스모를 좋아했으며, 할아버지와 함께 와지마 다이시나 키타노우미 토시미츠와 같은 역도 선수들의 경기를 TV로 보면서 그들의 거대한 체격에 감탄했다고 한다.
2.2. 학업 및 전문 교육
스즈키는 후나바시 시립 후나바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재학 중이던 시기에, 나중에 아리모리 유코와 타카하시 나오코 같은 육상 선수들을 길러낸 육상 지도자 코이데 요시오가 시립 후나바시 고등학교에서 보건체육 교사로 재직하여 스즈키에게 수업을 가르치기도 했다. 1985년 시립 후나바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순천당대학 체육학부(현 스포츠 건강과학부)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1989년 순천당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체육학 연구과 체육학 전공에 진학했으며, 1993년에 체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업을 마쳤다。
학업을 마친 후에도 그의 학구열은 이어졌다. 1994년부터는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 캠퍼스의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1998년에는 일본 올림픽 위원회의 파견으로 하버드 대학교 수영부의 초청 코치로 경험을 쌓았다. 2007년에는 순천당대학 의학부에서 건강 관련 행사 참여자의 생활 습관과 건강 상태에 대한 연구를 주제로 시라이시 야스오 교수와 공동 집필한 논문으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52kg급 금메달리스트인 사토 미츠루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사례이다.
3. 수영 선수 경력
스즈키 다이치는 혁신적인 영법과 꾸준한 노력으로 국제 무대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며 일본 수영계에 큰 획을 그었다.
3.1. 바사로 영법 개발
스즈키 다이치는 수중 돌핀 킥, 즉 '바사로 영법'이라고 불리는 선구적인 수영 기술을 개발한 선수로 유명하다. 이 영법은 데이비드 버코프 또는 제시 바살로가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즈키가 이 기술을 완성하여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수중 25 m를 잠영하는 데 성공했다. 스즈키의 바사로 영법은 "황금 발"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했는데,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 결승에서는 수중 30 m까지 잠영하며 27번의 킥을 사용했다.
스즈키의 이러한 혁신적인 시도와 성공은 수영 규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제 수영 연맹(FINA)은 수영 선수가 잠영하는 거리에 대한 제한을 두게 되었는데, 스즈키의 은퇴 후에는 잠영 거리가 12.5 m (출발 및 턴 포함 총 25 m)로 제한되었다. 현재는 이 규칙이 더욱 완화되어 수중 잠영 거리가 15 m (출발 및 턴 포함 총 30 m)까지 허용되고 있다. 또한, 이 영법의 영향으로 배영에서 퀵턴이 허용되는 규칙 변화도 뒤따랐는데, 이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 100m 종목에서 약 1.5초, 200m 종목에서 약 3초가량 기록이 단축되는 등 전체적인 경기 기록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3.2. 주요 대회 성적
스즈키 다이치는 여러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00m 배영 11위, 200m 배영 16위, 400m 혼계영 결승 실격.
-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100m 배영과 400m 혼계영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 1987년 제14회 유니버시아드(자그레브): 100m 배영과 200m 배영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400m 혼계영의 첫 번째 영자로서 100m에서 1987년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 스즈키는 현역 시절 공식적인 세계 기록을 수립하지는 못했지만, FINA 수영 월드컵 50m 배영(단수로는 당시 공식 종목이 아니었음)에서 단수로 세계 최고 기록을 두 차례 경신한 이력이 있다.
- 1988년 일본 수영 선수권 대회 (겸 올림픽 선발전) 100m 자유형에 출전하여 52초 35의 기록으로 우승하기도 했다.
- 또한, 단수로 50m 접영과 200m 개인혼영에서도 일본 기록을 세우는 등 다양한 종목에 능통했다.
3.3. 19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
스즈키 다이치의 선수 경력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은 단연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100m 배영 결승전이었다. 당시 그는 세계 기록 보유자이자 예선 1위 통과자인 미국의 데이비드 버코프, 200m 금메달리스트이자 전 세계 기록 보유자인 소련의 이고르 폴랸스키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이 세 선수 모두 바사로 영법을 사용하며 경기에 임했다. 스즈키는 마지막까지 곡선을 그리지 않고 수면을 스치듯이 리커버리하며 터치패드를 찍었고, 버코프를 0.13초 차이로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일본 남자 100m 배영에서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키요카와 쇼지 이후 두 번째 금메달이자, 일본 수영 전체로는 16년 만의 금메달 획득이라는 쾌거였다. 특히 시상식에서는 당시 IOC 위원이었던 키요카와 쇼지가 직접 스즈키에게 메달을 수여하여 더욱 의미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 결승전에서 스즈키가 세운 55초 05의 일본 기록은 이후 여러 차례의 규칙 개정에도 불구하고 15년 동안 깨지지 않는 국내 최고 기록으로 남아 일본 선수들에게 큰 도전 과제가 되었다. 서울 올림픽에서 그는 200m 배영에서는 15위, 400m 혼계영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3.4. 일본 수영계에 미친 영향
스즈키 다이치의 서울 올림픽 금메달은 당시 침체기였던 일본 수영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 수영은 외국 선수들이 기록을 비약적으로 경신하는 동안, 수중 잠영 영법 금지 등 국제 규칙의 벽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었다. 히라이 야스오나 나가사키 히로코와 같은 세계 정상급 선수들도 있었지만, 올림픽 메달 획득에는 실패하며 한때 수영 강국이었던 일본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올림픽에서는 결승 진출은 물론이고 순위 결정전(현재의 준결승에 해당) 진출조차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면서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즈키가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1972년 뮌헨 올림픽의 아오키 마유미와 타구치 노부타카 이후 16년 만의 금메달이자, 일본 수영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일본 수영 연맹 회장이었던 후루하시 히로노신은 스즈키의 금메달 소식에 "다시 한번 일본 수영을 부활시키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의 우승은 일본 스포츠계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아 일본 스포츠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 은퇴 후 활동
선수 은퇴 후 스즈키 다이치는 학자, 교육자, 그리고 스포츠 행정가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일본 스포츠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4.1. 학술 및 지도자 활동
스즈키는 1992년 4월 현역 은퇴 후 1993년 순천당대학 대학원 체육학 전공을 수료했다. 이후 1994년부터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 캠퍼스 객원 연구원, 1998년부터 일본 올림픽 위원회 파견 하버드 대학교 수영부 객원 코치로 활동했다.
2000년 3월 일본으로 귀국하여 모교인 순천당대학 강사이자 수영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해 재팬 오픈 워터 스윔에서 순천당대학의 아즈마 쇼가 우승하면서 그는 일본 최고의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2006년에는 순천당대학 스포츠 건강 과학부 조교수로 승진했으며, 2007년에는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3년에는 순천당대학 스포츠 건강 과학부 스포츠 과학과 코칭 과학 코스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스포츠청 장관직을 마친 후인 2020년, 순천당대학 대학원 스포츠 건강 과학 연구과 특임 교수를 거쳐 스포츠 건강 학부 부학장 겸 교수로 재취임했다. 2021년에는 순천당대학 스포츠 건강 의과학 추진 기구 기구장에 취임하여 학술 및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2022년에는 AICJ 중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도 취임했다.
4.2. 스포츠 행정가 경력
스즈키 다이치는 학술 및 지도자 활동 외에도 일본과 국제 스포츠계의 주요 행정가로 활약했다. 2009년 일본 수영 연맹 이사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4월부터 경협 위원회 위원뿐만 아니라 오픈 워터, 생활 스포츠, 그리고 일본 영법의 총괄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2010년 1월에는 세계반도핑기구 선수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일본 수영 연맹 회장을 역임했으며, 동시에 일본 올림피언스 협회 회장직도 맡았다. 이 외에도 세계 올림피언 협회(WOA) 이사, 일본 반도핑 기구 이사로 활동했다. 공직 외적으로도 올림픽이나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등에서 해설자, 강연자, 작가로서 활동했으며, 수영 교실에서 지도자로도 활약했다. 2014년에는 일본 수영 선수권 대회 (경영)의 대회 포스터에 등장하기도 했다.
2016년 10월에는 아시아 수영 연맹 부회장에 취임했고, 2017년 7월에는 세계 수영 연맹 이사로 선출되는 등 국제 스포츠 외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스포츠청 장관 퇴임 후인 2021년 6월에는 다시 일본 수영 연맹 회장에 취임하며 일본 수영계의 리더십을 이어가고 있다. 2023년 5월에는 아시아 대학 스포츠 연맹 이사로 취임하여 2027년까지 4년간 활동하며, 같은 해 11월에는 국제 대학 스포츠 연맹(FISU)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어 다시 4년간 임기를 수행하게 되었다.
4.3. 초대 스포츠청 장관
2015년 스즈키 다이치는 일본 스포츠청의 초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2015년 10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업무를 시작했으며, 동시에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경기 대회 조직 위원회 이사로도 선출되었다. 스포츠청 장관직은 부업이 금지된 국가 공무원 직책이었기 때문에, 그는 기존에 맡고 있던 모든 다른 직책에서 사임했다.
일본 스포츠청은 문부과학성 산하의 통합 행정 기관으로, 다양한 정부 부처가 수행하는 스포츠 관련 기능과 프로젝트를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121명의 인력으로 구성된 이 기관은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목표로 했다.
스즈키 장관은 5년의 임기를 마치고 2020년 9월 30일 퇴임하는 것이 9월 11일 각의에서 결정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해머 던지기 금메달리스트이자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대회 조직 위원회 스포츠 디렉터인 무로후시 코지가 임명되었다. 그는 퇴임을 앞둔 9월 25일 기자회견에서 "5년, 10년 후에 스포츠청을 만들어 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고 소회를 밝혔으며, 본래 2020년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종료 후 퇴임할 예정이었으나 대회가 연기되어 그렇게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표현했다. 최종 근무일인 9월 30일에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전하며, 올림픽을 보지 못하고 퇴임하는 것에 대해 "이 또한 인생이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퇴임 전후로 그의 고향인 치바현에서 2021년 3월에 열릴 2021년 치바현 지사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자유민주당 치바현 연합회는 스즈키를 후보로 고려했으며, 스즈키 본인도 한때 출마에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지역 선출 의원인 이시이 준이치를 비롯해, 그가 스포츠청 장관으로 임명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모리 요시로 등으로부터 반대와 난색을 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따라 스즈키는 2020년 10월 해당 선거 출마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2021년 3월 21일 치러진 치바현 지사 선거에도 출마가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사퇴했다.
4.4.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 헌액 및 기타 활동
스즈키 다이치는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2021년 4월 5일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에 '명예 수영 선수' 부문으로 헌액될 것이 발표되었다. 사실 그는 2019년에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 2020년 헌액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020년 헌액식이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 명예의 전당 측은 그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스즈키는 어렵다고 여겨졌던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계속해서 국제 스포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2023년 5월 9일, 아시아 대학 스포츠 연맹은 스즈키 다이치를 평가관 중 한 명으로 선임했다.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국제 대학 스포츠 연맹(FISU)이 스즈키 다이치를 집행 위원으로 선출했다.
5. 저서 및 출판물
스즈키 다이치는 수영 교육 및 스포츠 과학 분야에서 다수의 저서와 번역서를 출판했다.
- 저서
- 『스위밍 엑서사이즈 -스위밍을 과학하는 엑서사이즈 북』(大泉書店, 1997)
- 『스위밍 입문』(大泉書店, 1998)
-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수영할 수 있게 되는 책』(중경출판, 2000) - 후지모토 히데키와 공저
- 『스위밍 Q&A 교실 (배영편) 고민 해결』(베이스볼 매거진 샤, 2004)
- 『누구나 술술 헤엄치는 책』(중경출판, 2007) - 후지모토 히데키와 공저
- 『보건 위생과 건강 스포츠 과학』(篠原出版新社, 2006) - 이나바 유, 시라이시 야스오, 마루야마 카츠토시, 타카하시 타쿠야, 마츠바 츠요시, 스케토모 유코, 타카이 시게루, 모토나가 타쿠로, 야스마츠 미키노부와 공저
- 『스즈키 다이치 메소드』(마이니치 신문사, 2014)
- 『내가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남과 다른 일을 해왔기 때문』(매거진 하우스, 2014)
- 번역서
- E.W. 매글리시오 『스위밍 패스티스트』(베이스볼 매거진 샤, 2005) - 타카하시 시게히로와 공동 번역
6. 개인 생활 및 일화
스즈키 다이치의 개인 생활과 관련된 몇 가지 흥미로운 일화들이 전해진다. 그는 사생활에서 이혼과 재혼을 경험했으며, 두 아이의 아버지이다.
2016년 7월 31일 실시된 2016년 도쿄 도지사 선거를 앞두고 한때 출마설이 돌았으나, 그는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고,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다"며 출마를 부인했다。특히 그는 서울 올림픽에서의 자신의 우승 기록인 55초 05를 언급하며 "출마는 5505%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모를 좋아하여 와지마 다이시나 키타노우미 토시미츠와 같은 거구의 스모 선수들의 치열한 경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TV로 보며 "어떻게 하면 저런 거대한 몸을 가질 수 있을까"라며 스모 선수들과 자신이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느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까지 수영 선수였던 타카노하나 토시미츠와 교류가 있었는데, 그가 후타고야마(相撲部屋) 시절에 함께 식사할 때 타카노하나에게 "당신은 사업가가 되는 것이 좋다. 수영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2017년에 경영 컨설턴트이자 스모 기사 작가인 사이토 마스미와의 대담에서는 "스모가 아이들의 따돌림 방지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견에 대해 "얼굴을 맞고 코피를 흘리며 씨름판을 내려오는 스모 선수들의 모습이 폭력적으로 보여서 솔직히 아이들에게 스모를 권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어렵다"고 답했다.
스즈키는 야구 시구에서 왼손 투구(2016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주최 경기)와 오른손 투구(2018년 제90회 기념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 개막 경기)를 모두 경험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근시이기 때문에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전광판에 가까이 다가가서야 자신이 우승했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렸다고 한다.
7. 같이 보기
- 1988년 서울 올림픽
- 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