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다이도지 마사시(大道寺将司다이도지 마사시일본어, 1948년 6월 5일 ~ 2017년 5월 24일)는 일본의 극좌 테러리스트이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창립자이자 주요 사상가이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적 "악행"에 대한 급진적인 반일주의 이념을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에 일본의 주요 기업들을 대상으로 일련의 폭파 사건을 주도했다. 특히 1974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폭파 사건을 통해 8명의 사망자와 약 400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키는 등 막대한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2017년 수감 중 사망할 때까지 재심을 청구하며 옥중 생활을 이어갔다. 그의 폭력적인 활동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사상과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극단주의와 인권 침해에 대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다이도지 마사시는 1948년 6월 5일 홋카이도 구시로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만주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신문을 꼼꼼히 읽고 스크랩북을 만드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이도지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다이도지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 학군에 아이누 거주 지역이 포함되어 있어 많은 아이누 동급생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이누 동급생들의 어려운 생활상과 중학교 3학년 때 목격한 아이누에 대한 취업 차별을 보며 사회 문제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다양한 시위에 참여하며 사회 운동에 발을 들였다.
2.2. 초기 영향
그의 정치적 세계관 형성에는 아버지 외에도 홋카이도 의회 의원이었던 의붓외삼촌과, 1960년대 안보 투쟁 반대 운동의 선두에 섰던 의붓외사촌 오타 마사쿠니의 영향이 컸다. 이러한 가족 및 주변 인물들의 영향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3. 대학 시절 및 초기 활동
고등학교 졸업 후 다이도지는 오사카외국어대학에 지원했으나 불합격했고, 이후 약 1년간 오사카 가마가사키 인근에서 생활했다. 이후 와세다대학 입학을 구실로 도쿄로 상경했으나 실제로는 시험을 보지 않고 재수생 생활을 하며 고등학교 동창들과 여러 시위에 참여했다.
3.1. 대학 생활과 학생 운동
도쿄에서 그는 고등학교 선배들이 주도하던 사회주의 연구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연구회의 지시에 따라 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호세이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초기에는 당시 문학부 학생회를 장악하고 있던 사회주의청년동맹 해방파와 함께 활동했으나, 정파 운동 특유의 상명하복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그는 대학 동기인 가타오카 도시야키 등과 함께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는 "호세이대학 L반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위원회는 한때 백수십 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규모를 키웠으나, 전공투 운동과 70년 안보 투쟁의 "패배" 이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다이도지는 대학을 중퇴했다.
3.2. 사상 형성 및 연구회 조직
대학 중퇴 후에도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다이도지는 가타오카 등 소수의 L반 투쟁위원회 멤버들과 함께 새로운 연구회를 결성했다. 이 시기에 그는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재회한 다이도지 아야코를 운동에 영입하여 교제 끝에 결혼했다. 1970년 7월 7일 화교청년투쟁위원회가 신좌파 각 파에 대해 발표한 "결별 선언"에 큰 충격을 받은 다이도지와 연구회 멤버들은 이를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각지에서 저지른 "악행"에 대해 집중적으로 학습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극단적인 반일주의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다이도지 자신은 홋카이도 출신으로서 아이누족에 대한 깊은 속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4.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EAAJAF)
다이도지 마사시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EAAJAF)의 창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조직의 이념인 '반일주의'를 정립했다. 이들은 연구회를 도시 유격대로 전환하기로 결의하고 본격적인 폭력 투쟁을 시작했다.
4.1. 반일주의 (Anti-Japaneseism)
다이도지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핵심 이념인 '반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사상은 모든 일본인이 일본 제국주의에 공모했다고 주장하며, 일본인 전체를 제국주의의 가해자로 규정한다. 다이도지는 "일본인은 모두 일본 제국주의의 본국 국민이다. 우리는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고 권력에 억압받는 이들조차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피억압 민중에 대한 침략자라는 구조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한다.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했던 일본인이 사실은 침략자였음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반일'의 근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연구회 활동 중 미쓰비시와 같은 일본 기업들이 일본이 점령했던 한국에서 강제 노동을 통해 이득을 취한 방식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며 반일주의 사상을 강화했다.
4.2. 주요 활동 및 사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정식으로 결성되기 전인 1971년에 "흥아관음·순국칠사지비 폭파사건"과 "풍설의 군상·북방문화연구시설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1972년 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 부대를 정식으로 결성한 후에는 "무지개 작전"이라고 불리는 쇼와 천황 암살 미수 사건을 계획했으며,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폭파 사건을 포함한 총 9건의 연속 기업 폭파 사건을 실행에 옮겼다.
4.2.1. 연속 기업 폭파 사건
1974년 8월 30일 낮 12시 10분, 다이도지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동료인 가타오카 도시야키와 함께 마루노우치에 위치한 미쓰비시중공업 본사로 향하는 택시를 탔다. 건물에 도착한 다이도지는 총 40 kg의 폭발물이 담긴 두 개의 용기를 건물 앞에 설치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멤버인 사사키 노리오가 미쓰비시 본사 직원들에게 전화로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 주변은 제때 대피되지 못했다. 결국 12시 45분에 폭탄이 폭발하여 8명이 사망하고 약 400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다이도지는 이 폭파 사건에서 시한폭탄이 담긴 양동이를 직접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5. 체포, 재판 및 유죄 판결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폭파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폭파 사건 이후, 다이도지 마사시는 다른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멤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5.1. 체포 및 법적 절차
1975년 5월 19일, 다이도지 마사시는 다이도지 아야코, 사사키 노리오, 가타오카 도시야키(이후 마스나가 도시야키로 개명), 사이토 가즈, 에키다 유키코, 구로카와 요시마사 및 한 명의 협력자와 함께 일제히 체포되었다. 그는 이후 9건의 폭파 사건 주범으로 기소되었다. 재판 초기에는 순순히 자백했으나, 사사키 노리오의 형을 비롯한 지원자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고 반성하며 이후 끈질긴 옥중 투쟁과 법정 투쟁을 전개했다.
5.2. 사형 선고 및 수감 생활
1987년 3월 24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다이도지 마사시와 마스나가 도시야키에게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폭파 사건 등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다이도지는 사형 선고 이후 여러 차례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8년 최고재판소에서 재심 청구가 기각되면서 사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이는 과거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멤버였던 사사키 노리오와 다이도지 아야코가 일본적군이 일으킨 쿠알라룸푸르 사건과 다카 사건 당시 일본 정부의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어 해외로 출국한 뒤 일본적군에 합류하면서, 이들에 대한 재판이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다이도지 마사시는 이 초법규적 석방 요구에 응하지 않고 감옥에 남았다.
6. 문예 활동 및 사망
다이도지 마사시는 사형수로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문예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는 그의 삶의 후반부를 특징짓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6.1. 옥중 문예 활동
수감 생활 중 다이도지는 마쓰시타 류이치, 나카야마 지나쓰, 헨미 요 등 일본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문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특히 하이쿠 시인으로 등단하여 옥중에서 지은 하이쿠 시집 『관 한 짝』(棺一基)으로 2013년 일본일행시대상 하이쿠 부문을 수상하는 등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6.2. 사망
다이도지 마사시는 재심 청구가 진행 중이던 2017년 5월 24일, 다발성 골수종으로 인해 수감 중이던 도쿄 구치소에서 향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일본 사회에 그의 과거 행적과 사형 제도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7. 평가 및 영향
다이도지 마사시의 사상과 활동은 일본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극심한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7.1. 비판 및 논란
다이도지 마사시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주도한 폭파 테러는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수많은 부상자를 발생시킨 명백한 테러 행위로 규탄받는다. 그들의 '반일주의' 이념은 일본인 전체를 제국주의의 공범으로 규정하며, 이는 인권 침해와 집단적 책임론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 아래 자행된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는 윤리적, 법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의 행동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인 법치주의와 비폭력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7.2. 역사적 영향
다이도지 마사시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활동은 1970년대 일본의 신좌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극단적인 폭력 노선이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인 결과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의 테러는 일본 사회에 깊은 불안감을 조성했고, 반테러 법규 강화 및 사회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들의 '반일주의' 사상은 일본의 역사 인식과 제국주의 과거사에 대한 논의에 영향을 미쳤으나, 그들의 폭력적 방법론은 광범위한 비판을 받으며 주류 사회 운동과는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그의 사상이나 활동은 후대의 급진주의 운동에 일부 영향을 미쳤을 수 있으나, 그들의 폭력적 방식은 사회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고립되었다.
8. 저서
- 腹腹時計하하도케이일본어
- 明けの星を見上げて-大道寺将司獄中書簡集아케노 호시오 미아게테 - 다이도지 마사시 옥중 서간집일본어 (1984)
- 死刑確定中사형확정중일본어 (1997)
- 友へ-大道寺将司句集도모에 - 다이도지 마사시 구집일본어 (2001)
- 鴉の目-大道寺将司句集가라스노 메 - 다이도지 마사시 구집일본어 (2007)
- 棺一基 大道寺将司全句集간 잇키 다이도지 마사시 전구집일본어 (2012)
- 残の月 大道寺将司全句集잔노 쓰키 다이도지 마사시 전구집일본어 (2015)
- 最終獄中通信사이슈 고쿠추 쓰신일본어 (2018)
- 최종옥중통신최종옥중통신한국어 (2022년 에디투스 출판)
9. 관련 매체
-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헨미 요 어느 사형수와의 대화』 (ETV영어, 2012년 4월 15일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