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니지마 야에는 격동의 막말부터 근대화 시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1. 어린 시절과 배경
야마모토 야에는 홍화弘化일본어 2년 음력 11월 3일(1845년 12월 1일) 아이즈번 포술 사범이자 22석 4인부치(쌀 22석과 4인분의 식량을 제공받는 녹봉)의 녹봉을 받던 야마모토 곤파치와 그의 아내 사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야마모토 가문은 다케다 신겐의 가신이었던 야마모토 간스케의 후손이라 전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포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총 다루는 기술을 익혔는데, 이는 당시 여성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1.2. 아이즈 시대와 보신 전쟁
게이오慶応일본어 원년(1865년), 야에는 다지마 이즈시번 출신의 난학 학자이자 번교인 닛신칸의 교수를 지낸 가와사키 쇼노스케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3년 만인 慶応 4년/明治 원년(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야에의 삶은 격변했다.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남장한 채 집안의 가업이었던 포술을 활용하여 아이즈번 방어에 참여했다. 특히 쓰루가성 농성전에서는 직접 스펜서 총과 칼을 들고 맹렬히 싸웠다. 당시 아이즈번에는 스펜서 총이 야에가 소지한 1정뿐이었고, 전용 총알도 100발밖에 없었으나, 야에는 이를 활용하여 뛰어난 사격술을 보여주었다. 야에의 사격으로 사쓰마번 제2포병대 대장이었던 오야마 이와오가 부상을 입고 전선에서 이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이즈번의 패전 후, 남편 쇼노스케는 포로가 되어 생이별하게 되었고, 이혼 절차는 메이지 4년(1871년) 12월에 마무리되었다. 한때 아이즈 농성전 이전에 이혼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 이혼은 전쟁 이후였다. 메이지 3년(1870년), 야에는 남편 쇼노스케에게 포술을 배웠던 요네자와번 사무라이 나이토 신이치로의 도움으로 약 1년간 요네자와에서 지냈다.
1.3. 교토에서의 삶과 교육 활동
메이지 4년(1871년), 야에는 교토부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던 오빠 야마모토 가쿠마를 의지하여 교토로 이주했다. 이듬해 오빠의 추천으로 교토부립 오키 고등학교의 전신인 교토 여홍장의 권사장이자 교도 시보(시험보조)로 채용되었다. 여홍장에서 근무하면서 우라센케 13대 센소시쓰 엔노사이의 어머니로부터 차도를 배우게 되었고, 1894년에는 원노사이로부터 다도 교수 자격을 취득하며 '니지마 소치쿠'라는 다명(茶名)을 받았다. 또한 이케노보 센쇼로부터 화도를 배웠으며, 1896년에는 이케노보류 화도 면장을 받으며 화도의 조예도 깊었다.
1870년대 초, 야에는 교토에 머물며 오빠 가쿠마의 집을 드나들던 아메리칸 보드의 준선교사 니지마 조를 만나게 된다. 니지마 조는 1864년부터 1874년까지 10년간 미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전직 사무라이였다. 그는 1874년에 일본으로 돌아와 기독교를 전파하는 서양식 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교토의 불교 및 신도 사찰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다.
야에와 니지마는 그가 일본으로 돌아온 직후인 1875년 10월에 약혼했다. 약혼 직후, 교토부는 니지마의 기독교주의 학교 설립에 대한 사회적 압력으로 야에를 여홍장에서 해고했다. 야에는 니지마, 그리고 오빠 가쿠마와 함께 니지마가 설립한 새로운 학교인 도시샤 영어학교의 운영을 돕는 데 자원했고, 학교 설립과 이후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4. 니지마 조와의 결혼 및 도시샤에서의 역할

야에와 니지마 조는 1876년 1월 3일에 아메리칸 보드 선교사 제롬 데이비스의 주례로 재혼했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니지마는 여성 인권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야에는 미국인 선교사 앨리스 스타크웨더의 도움을 받아 옛 야나기하라 가문의 저택에 작은 여학교인 조시주쿠를 개설했다. 이 여학교는 이후 도시샤 여학교의 분교로, 1877년에는 도시샤 여학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당시 에도 시대의 사회적 규범에 비추어 볼 때, 니지마 부부의 모습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남편인 니지마 조가 야에에게 보여준 서양식 레이디 퍼스트 태도는 야에의 안하무인한 행동으로 비춰졌고, 이로 인해 그녀는 결혼 생활 내내 일본 사회로부터 '악처'라는 비난을 받았다. 특히 니지마 조의 제자였던 도쿠토미 소호는 야에를 일본 설화 속 괴물인 '누에'에 비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니지마 부부의 관계는 매우 좋았으며, 니지마 조는 미국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야에의 생활 방식이 '핸섬하다(handsome)'고 칭찬하기도 했다. 니지마 조는 자신의 사망 이후 야에의 생활을 걱정하여 1888년 5월 자신의 심장병을 언급하며 지인이었던 도쿠라 쇼자부로에게 야에와 학교의 운영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5. 니지마 조 사후 활동과 간호사로서의 봉사

1890년 1월 23일 니지마 조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야에는 도시샤 대학의 동료들과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아이즈 전쟁 당시 아이즈를 공격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 도시샤 학생들을 그녀가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임종을 지켰던 도쿠토미 소호는 야에가 사망할 때까지 그녀를 지원했고, 자신이 귀족원 의원이 되어 받은 세비를 봉투째 야에에게 보내어 그녀의 생활을 도왔다.
남편의 죽음 이후, 야에는 간호 활동으로 눈을 돌려 1890년 4월 26일 일본 적십자사 정회원이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히로시마의 육군 예비 병원에서 4개월 동안 자원 간호사로 종군했다. 당시 40명의 간호사를 이끌며 부상병들을 간호했을 뿐만 아니라 간호사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도 힘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1896년 첫 번째 보관장 훈장을 수여받았다.

청일전쟁 이후 야에는 간호학교 강사로도 활동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녀는 다시 군에 합류하여 오사카 육군 예비 병원에서 두 달간 자원 간호사로 봉사했다. 이때 아군인 일본군뿐만 아니라 적군인 청나라와 러시아의 군인들도 차별 없이 치료하여 '일본의 나이팅게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공로로 두 번째 보관장 훈장을 받았다. 1907년 11월에는 니지마 조와 함께 살던 신지마 옛 저택을 도시샤에 기증했다.
2. 평가 및 명예
니지마 야에는 전통적인 여성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개척한 인물로, 일본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1. 수상 및 사회적 인정
그녀는 수많은 공로로 국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수여받았다.
- 보관장 7등
- 보관장 6등
1928년 쇼와 천황의 즉위 대례 때에는 국가에 대한 헌신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은배를 하사받았다. 야에는 일본 황족 이외의 여성으로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로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녀는 '막말의 잔 다르크', '아이즈의 도모에 고젠', '원조 핸섬 우먼', '일본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며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2.2. 사회적 평가와 비판
야에는 전통적인 사회 규범에 도전하며 여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남편 니지마 조가 서양식으로 그녀를 배려하는 태도가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여성이 남편을 억압하는 '악처'의 모습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특히 도쿠토미 소호는 그녀를 '누에'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당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대변했다.
그러나 남편 니지마 조는 그녀의 자유롭고 당당한 삶의 방식을 '핸섬하다'고 표현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핸섬 우먼'이라는 표현은 훗날 니지마 야에의 독립적이고 용감한 성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수식어가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사회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간호와 교육 활동에 헌신하며 여성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했다.
3. 개인적인 삶
야에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친자녀는 두지 않았다. 그러나 니지마 조 사후 니지마 가문을 잇기 위해 양자를 들였는데, 양자 고기(公義)와는 관계가 소원했다고 알려졌다. 이 외에도 요네자와번 출신 세 명의 양자를 더 맞이했지만, 그녀의 까다로운 성격으로 인해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1896년 요네자와번 사무라이 야마구치 겐노스케의 딸 사다를 양녀로 맞았으나 2년 만에 파양했다. 1900년에는 요네자와번 사무라이 아마카스 사부로의 딸 하쓰(하쓰코)를 양녀로 들였다. 1902년에는 오쓰카 고이치로를 양자로 들였으나 3개월 만에 파양했다.
양녀 하쓰(하쓰코)는 1901년 5월 도시샤 교장 대리를 지낸 히로쓰 도모노부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도시샤를 퇴임했던 히로쓰는 9월에 제6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오카야마에 부임했고, 1920년까지 기숙사 사감 등을 겸했다. 같은 해 신설된 야마가타 고등학교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이듬해 정년 퇴임했다. 이후 1927년부터 1932년까지 쓰가오 가정 학교의 간사를 지냈다.
야에는 양녀 하쓰와의 교류를 계속했으며, 오카야마와 쓰가오에 자주 방문했다. 최만년 병상에서도 히로쓰 가문의 가족들이 그녀를 간호했다. 그녀는 의손(義孫) 중 특히 우수했던 히로쓰 가문의 니지마 조지에게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 했으나, 니지마 조지는 1925년 6월 2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4. 사망

야마모토 야에는 1932년 6월 14일, 향년 86세로 교토의 데라마치 거리 마루타마치 북쪽에 위치한 자신의 자택(현 신지마 옛 저택)에서 사망했다. 장례식은 도시샤 대학의 주관으로 거행되었으며, 약 4,000명의 조문객이 참석하여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녀의 유해는 교토시 사쿄구 시시가타니 와카오지 산초에 있는 교토시립 와카오지 묘지 내 도시샤 묘지에 남편 니지마 조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야에의 유언에 따라 묘비명은 평생 그녀를 지지했던 도쿠토미 소호가 직접 썼다.


5. 유산 및 영향력
니지마 야에는 간호 및 교육 활동을 통해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간호사라는 직업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했으며, 도시샤 여학교의 설립과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녀의 독특하고 강인한 삶은 '막말의 잔 다르크', '아이즈의 도모에 고젠', '원조 핸섬 우먼', '일본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며 일본 대중문화 속에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당당하고 독립적인 모습은 현대에도 많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 만화,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조명되며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다도와 화도 분야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니지마 소치쿠'라는 다명을 받을 정도로 전문가였으며, 여성들에게 다도를 가르치며 일본 전통문화의 확산에도 기여했다.
6. 관련 작품
니지마 야에는 일본에서 인기 있는 역사적 인물로, 다양한 이야기, 만화, TV 프로그램 등에 등장했다.
- 소설
- 후쿠모토 다케히사 「소설 니지마 야에」 시리즈
- 『아이즈 온나 센키』(会津おんな戦記), 치쿠마쇼보, 1978년
- 『니지마 조와 그의 아내』(新島襄とその妻), 신초샤, 1978년
- 『용부(핸섬 우먼), 최후의 기도』(勇婦(ハンサムウーマン)、最後の祈り), 치쿠마쇼보, 2012년
- 사오토메 미쓰구 『메이지의 오누이』(明治の兄妹), 신진부쓰오라이샤, 1990년
- 나카무라 아키히코 『남겨진 달 그림자』(残す月影), 소설신초 1995년 9월호 (단편집 『수리님 눈은』 수록), 주오코론신샤, 2005년
- 후지모토 히토미
- 『막말총희전』(幕末銃姫伝), 주오코론신샤, 2010년
- 『유신총희전』(維新銃姫伝), 주오코론신샤, 2012년
- 『니지마 야에 이야기 -막말・유신의 총희-』(新島八重物語 -幕末・維新の銃姫-), 고단샤 아오이토리 문고 역사발견! 드라마 시리즈, 2012년
- 하치야 료 『달 그림자의 길 -소설・니지마 야에』(月影の道 -小説・新島八重), 분게이슌주 분슌 문고, 2012년
- 구니마쓰 슌에이 『니지마 야에 아이즈와 교토에 핀 큰 꽃』(新島八重 会津と京都に咲いた大輪の花), 이와사키쇼텐 포아 문고, 2012년
- 구스노키 세이이치로 『니지마 야에 유신의 벚꽃』(新島八重 維新の桜), 포플라샤 포플라 포켓 문고, 2012년
- 야마모토 무쓰미 작・이가라시 요시코 노벨라이즈 『야에의 벚꽃』, NHK 출판, 2012년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 노벨라이즈)
- 시라이시 마미 『니지마 야에 격동의 시대를 곧게 살아간 여성의 이야기』(新島八重 激動の時代をまっすぐに生きた女性의 이야기), 학연교육출판, 2012년
- 후지사키 아유나 『니지마 야에 이야기 -벚꽃 춤추는 바람처럼-』(新島八重ものがたり -桜舞う風のように-), 슈에이샤 미라이 문고, 2013년
- 만화
- 마쓰오 시오리
- 『맑고 높게 ~핸섬 걸~』(清らにたかく ~ハンサム・ガール~), 후타바샤 주르 코믹스, 2012년 (전 2권)
- 『야에 ~아이즈의 꽃~』(八重 ~会津の花~), 아키타쇼텐 A.L.C.・DX, 2013년
- 후지이 미쓰루 『핸섬 레이디 -니지마 야에 이야기-』(ハンサム・レディ -新島八重物語-), 다이토샤 다이토 코믹스, 2012년
- 에자키 고로스케 『야에코 란쇼!』(八重子らんしょ!), 고이케쇼인, 2012년
- 히이라기 유타카・미카미 슈헤이 시나리오・모토이 야스히로 감수해설 『학습만화 세계의 전기가 NEXT 니지마 야에』, 슈에이샤, 2012년
-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 코미컬라이즈 (야마모토 무쓰미 원안)
- 다케무라 요헤이 『야에의 벚꽃』, 슈에이샤 점프 코믹스, 2013년 (전 3권)
- 리쓰키 시 『야에의 벚꽃』, 쇼가쿠칸 Cheese! 플라워 코믹스, 2013년 (전 3권)
- 구기 유즈루 『늠름하게 피다 -야에의 벚꽃-』(凛々と咲く -八重の桜-), 가도카와쇼텐, 2013년 (전 2권)
- 테이오테이 테이오・아이즈 사키치 감수 『야마모토 씨네 건 걸』(山本さんち의 ガン・ガール), 후타바샤, 2016년
- 소니시 겐지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ねこねこ日本史) 6권, 지쓰교노니혼샤, 2019년
- TV 드라마
- 니지마 야에가 주인공인 TV 드라마
- 아사히 방송 창립 35주년 드라마 스페셜 『여자의 싸움 아이즈 그리고 교토』(女のたたかい 会津そして京都)(1985년 11월 1일, 아사히 방송, 주연: 구리하라 고마키) - 『니지마 조와 그 아내』 원작
- 『야에의 벚꽃』(2013년, NHK 대하드라마, 주연: 아야세 하루카)
- 니지마 야에가 등장하는 TV 드라마
- 『뱌코타이』(1986년 12월 30일・31일, 닛폰 TV, 주연: 다나카 요시코)
- 『뱌코타이』(2007년 1월 6일・7일, TV 아사히, 주연: 나카고시 노리코)
- 역사 버라이어티 (재현 드라마)
- 『일본사 서스펜스 극장』(2009년 3월 11일, 닛폰 TV, 주연: 오시마 미유키)
- TV 애니메이션
-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2019년 9월 18일, E테레, 성우: 고바야시 유)
- 게임
- 테크모 코에이 『토키덴』(2013년)
- 세가 페이브 『에이케쓰 다이센』(2024년, 성우: 오와다 히토미)
- 무대
- 낭독극 『오늘, 이곳에 피어나다.』(今日、ここのへに咲く。) 재연 (2019년 2월 1일~3일, 주연: 다카노 아이・다나카 레이코)
- 지역 캐릭터
- 야에탄 (후쿠시마현 관광교류과, 주식회사 야마카와 인쇄소 「야에를 더 알고 싶대」) - 후쿠시마현이 NHK 『야에의 벚꽃』 홍보를 위해 야에를 마스코트화한 유루캬라. 드라마 종영 후에도 후쿠시마현 홍보 캐릭터로 활동 중.
- 모에노 사쿠라 - 야마모토 야에 (성우: 사쿠라 아야네) 캐릭터로 기용. 아이즈와카마쓰시의 합동회사 알렉이 『야에의 벚꽃』을 계기로 기획한 지역 모에 캐릭터 상품군. 아라이 체리의 일러스트 사용.
- 사쿠라 야에 - 하나하루 주조가 야에를 이미지하여 제작한 "모에슈". 모에노 사쿠라와 마찬가지로 아라이 체리 일러스트 사용.
- 니지마 야에가 주인공인 TV 드라마
- 마쓰오 시오리
- 후쿠모토 다케히사 「소설 니지마 야에」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