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니시자와 히로요시의 어린 시절과 교육, 그리고 해군 조종사로서의 훈련 과정 및 초기 복무 부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1.1. 어린 시절 및 교육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1920년 1월 27일 나가노현 가미스이치군 미나미오가와촌의 산간 마을에서 미키지 니시자와와 미요시 니시자와 부부의 넷째 아들(일본어 자료에서는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퇴역 군인이자 사케 양조장의 관리인이었으며, 집안은 농업과 양잠업을 겸했다. 그는 1934년 3월 미나미오가와 초등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같은 해 4월 아버지의 권유로 오카야시의 섬유 공장에 취직하여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1.2. 해군 조종사 훈련
1936년 6월, 니시자와는 해군 비행예과연습생 모집 포스터를 보고 지원하여 합격했다. 그는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의 을종 비행예과연습생 제7기(총 204명)로 임명되어 해군 4등 항공병으로 임관했다. 1938년 8월 15일 가스미가우라 항공대에 배치되었으며, 1939년 3월 비행 연습생 육상기반 과정을 71명 중 16위로 졸업했다. 전투기 전문 교육을 받은 20명 중 한 명으로서 오이타 해군 항공대에서 교육을 받았다. 오이타 항공대에서는 중일전쟁의 격추왕이었던 무토 가네요시 1등 항공병조로부터 95식 함상전투기와 96식 함상전투기를 이용한 훈련을 받았다. 1940년 12월에는 스즈카 해군 항공대 (정찰 전문 연습 항공대)에 배속되었는데, 이때는 조종 교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조종을 가르치기보다는 정찰 연습생을 태우는 90식 기상작업연습기를 조종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1.3. 초기 복무 및 부대
태평양 전쟁 발발 전, 니시자와는 오이타, 오무라, 스즈카 항공대에서 복무했다. 1941년 10월 1일, 그는 치토세 해군 항공대에 배속되어 1등 항공병조 계급으로 미일 전쟁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다. 이후 사이판과 루오트를 거쳐 1942년 2월 트럭 제도를 통해 라바울로 진출했다. 1942년 2월 3일 밤, 시야가 좋지 않은 신월의 밤에 96식 함상전투기를 조종하여 쌍발 비행정을 요격하며 전쟁 중 첫 격추를 보고했다. 그러나 호주 공군 기록에 따르면 이 PBY 카탈리나 비행정은 피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지로 귀환하는 데 성공하여 격추가 아닌 손상으로 확인되었다.
1942년 2월 10일, 니시자와의 비행대는 새로 편성된 제4항공대로 전속되었다. 그는 전투를 거듭하며 단독 격추 7기, 협동 격추 5기를 보고했다. 1942년 4월 1일, 그의 비행대는 라에의 타이난 항공대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사부로 사카이와 오타 도시로와 함께 사사이 준이치 중위가 이끄는 중대에서 비행했다. 니시자와의 첫 번째 공식 확인된 단독 격추는 4월 11일 미국 육군 항공대의 P-39 에어라코브라였다. 5월 1일부터 3일까지 72시간 동안 6기를 추가로 격추했다고 주장하며 공식적인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니시자와 히로요시가 태평양 전쟁에서 보여준 뛰어난 전투 기량과 그로 인해 얻은 '라바울의 악마'라는 별명, 그리고 주요 부대에서의 활동 및 교관 임무와 재배치 과정을 다룬다.
2.1. 태평양 전역에서의 전투

연합군과의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니시자와의 치토세 항공대 소속 비행대는 구형 미쓰비시 A5M을 조종하며 새로 점령된 뉴브리튼섬의 부나카나우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같은 주에 비행대는 첫 미쓰비시 A6M 제로 전투기(A6M2, 21형)를 수령했다. 1942년 8월 초, 그의 항공대는 라바울로 이동하여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군에 맞서 즉시 작전을 수행했다. 8월 7일 첫 교전에서 니시자와는 F4F 와일드캣 6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으나, 역사학자들은 2기만 확인했다.
2.2. "라바울의 악마"라는 별명과 기량
니시자와는 동료들 사이에서 '악마'로 불렸는데, 이는 그의 숨 막히고, 뛰어나며, 예측 불가능한 곡예 비행과 전투 중 항공기에 대한 탁월한 제어 능력 때문이었다. 사카이 사부로는 니시자와의 비행 기량에 대해 "니시자와가 자신의 제로기로 하는 것을 다른 전투기 조종사가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의 곡예 비행은 동시에 숨 막히고, 뛰어나며, 완전히 예측 불가능하고, 불가능하며, 목격하기에 가슴 벅찬 것이었다"고 묘사했다.
니시자와는 사카이 사부로, 오타 도시로와 함께 유명한 '청소 트리오'의 일원이었다. 1942년 5월 16일 밤, 니시자와, 사카이, 오타는 휴게실에서 호주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있었다. 이때 니시자와는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의 섬뜩한 죽음의 무도를 알아차렸다. 이 신비로운 해골 춤을 생각하던 니시자와는 갑자기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내일 포트모르즈비 임무 말이야? 우리만의 작은 쇼, 우리만의 '죽음의 춤'을 추는 건 어때? 적 비행장 바로 위에서 시범 루프 몇 번 해보는 거야. 그럼 지상에 있는 놈들이 미쳐버릴 걸."
1942년 5월 17일, 나카지마 다다시 중령이 타이난 항공대를 이끌고 포트모르즈비 임무에 나섰고, 사카이와 니시자와가 그의 윙맨으로 참여했다. 일본군 편대가 귀환 비행을 위해 재편성될 때, 사카이는 나카지마에게 적기를 추격하겠다고 신호한 뒤 편대에서 이탈했다. 몇 분 후, 사카이는 니시자와와 오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포트모르즈비 상공에 나타났다. 세 명의 조종사는 이제 곡예 비행을 시작하여, 밀집 대형으로 세 번의 꽉 조인 루프를 수행했다. 그 후, 환호하는 니시자와는 다시 한번 이 공연을 반복하고 싶다고 신호했다. 세 대의 제로기는 1829 m (6000 ft)까지 하강하여 지상으로부터의 대공포 사격 없이 세 번의 루프를 더 수행했다. 그들은 이후 라에로 돌아왔고, 나머지 항공대보다 20분 늦게 도착했다.
약 21시경, 사사이 준이치 중위는 그들을 즉시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들이 도착하자 사사이는 한 통의 편지를 들고 있었다. "이걸 어디서 얻었는지 아느냐?" 그는 소리쳤다. "모른다고? 이 바보들아, 몇 분 전에 적의 침입자가 이 기지에 떨어뜨린 거다!" 영어로 쓰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라에 사령관께: 오늘 우리를 방문했던 세 명의 조종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우리 비행장 상공에서 보여준 루프가 정말 좋았습니다. 훌륭한 시범이었습니다. 같은 조종사들이 녹색 목도리를 두르고 다시 한번 이곳을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번 방문 시 더 나은 환대를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다음번에는 저희가 전면적인 환영을 해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니시자와, 사카이, 오타는 뻣뻣하게 차렷 자세로 서서 웃음을 참으려 애썼고, 사사이 중위는 그들의 "바보 같은 행동"에 대해 질책하며 적 비행장 상공에서 더 이상 곡예 비행 쇼를 벌이는 것을 금지했다. 타이난 항공대의 세 명의 선두 에이스들은 비밀리에 그 공중 안무가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동의했다. 다만, 일본 측 전투 행동 조서에는 1942년 5월 27일 사카이가 주장한 모레스비 상공에서의 무단 편대 곡예 비행 기록이 없으며, 다른 날짜에도 이와 같은 별도 행동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2.3. 주요 부대에서의 활동
니시자와는 제4항공대, 타이난 항공대, 그리고 1942년 11월 1일 타이난 항공대가 개칭된 제251해군항공대 등에서 복무했다. 그는 사부로 사카이, 오타 도시로와 함께 '청소 트리오'로 불리며 활약했다. 1942년 8월 8일, 니시자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사카이 사부로가 미 해군 항공모함 기반 폭격기와의 전투에서 심하게 부상당했다. 니시자와는 사카이가 실종된 것을 알아채고 격분했다. 그는 사카이의 흔적과 싸울 미국군을 찾아 지역을 수색했다. 결국 그는 진정하고 라쿠나이로 돌아왔다. 나중에 모두의 놀라움 속에 심하게 부상당한 사카이가 도착했다. 머리에 총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한쪽 눈이 먼 상태로, 560 nmi가 넘는 4시간 47분의 비행 끝에 손상된 제로기를 타고 기지로 돌아왔다. 니시자와는 사사이 중위, 오타 도시로와 함께 고집스럽지만 거의 의식이 없는 사카이를 병원으로 옮겼다. 좌절감과 걱정 속에 니시자와는 기다리던 운전사를 직접 내쫓고, 가능한 한 빠르고 부드럽게 사카이를 외과 의사에게 직접 데려갔다. 사카이는 8월 12일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과달카날 상공에서의 장기적인 분쟁은 니시자와의 항공대(11월에 251항공대로 개칭)에 큰 손실을 입혔다. 미군 항공기와 전술이 개선되면서 사사이 중위(27기 격추)는 1942년 8월 26일 매리언 E. 칼 대위에게 격추되어 전사했고, 오타(34기 격추)는 1942년 10월 21일 전사했다.
2.4. 교관 임무 및 재배치

1942년 11월 중순, 제251항공대는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의 도요하시 해군 항공대 기지로 소환되었고, 니시자와를 포함한 10명의 생존 조종사들은 모두 교관이 되었다. 이때 니시자와는 약 40기(일부 자료에서는 54기)의 완전 또는 부분 공중 격추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니시자와는 요코스카 해군 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사카이 사부로를 방문했다. 니시자와는 사카이에게 새로운 교관 임무에 대해 불평하며 "사부로, 내가 낡은 복엽기를 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리석은 젊은이에게 선회하는 법과 바지를 적시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교관으로서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엄격했지만,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니시자와는 또한 대부분의 동료 조종사들의 손실이 연합군의 끊임없이 증가하는 물량적 우위와 개선된 미군 항공기 및 전술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사부로, 네가 기억하는 것과는 달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적기가 너무 많았어, 너무 많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시자와는 전투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다시 내 손에 전투기가 필요해. 나는 다시 전투에 참여해야만 해. 일본에 머무는 것은 나를 죽이고 있어"라고 말했다.
니시자와는 일본에서의 수개월간의 무활동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그와 제251항공대는 1943년 5월 라바울로 돌아왔다. 1943년 6월, 니시자와의 업적은 제11항공함대 사령장관 쿠사카 진이치 중장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니시자와는 '무공발군(武功抜群)'("현저한 군사적 용맹에 대하여")이라고 새겨진 군도를 수여받았으며, 이는 그가 100기 이상을 격추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후 9월에 뉴브리튼섬의 제253해군항공대로 전속되었다. 11월에는 준위로 진급하여 일본의 오이타 항공대에서 훈련 임무에 재배치되었다.
1944년 2월, 그는 쿠릴 열도에서 활동하는 제203해군항공대에 합류하여 격렬한 전투에서 벗어나 있었다. 베테랑 조종사들이 연이어 전사하는 상황에서 그는 경험이 부족한 지휘관들의 군기 문제를 우려하여 이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9월 하순, 치바현 모바라 기지에서 이와모토 테츠조, 나가타 노부요시, 오제키 유키하루, 사이토 사부로 등 남동부 전선의 격전을 경험한 에이스 파일럿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때 니시자와는 자신의 격추 수를 120기 이상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와모토 테츠조가 "적이 올 때는 물러났다가 적이 물러날 때 격추하는 거야. 즉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탈하여 돌아가려는 놈들을 일격필추하는 거지. 이미 고향 생각에 빠진 적은 반격 의지가 없으니 쉽게 격추할 수 있어. 한 번의 공중전에서 다섯 기까지 격추한 적도 있어", "적의 수가 너무 많아 승산이 없을 때는 눈을 감고 정면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조종간을 마구 돌리면서 돌진했다가 이탈할 때도 있어"라고 말하자, 니시자와는 "도중에 돌아가는 놈은 피탄했거나 겁쟁이겠지. 그러면 (다른 기체와의) 협동 격추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반박하며 자신의 전투 철학을 드러냈다.
2.5. 필리핀 전역에서의 마지막 비행

1944년 10월, 제203항공대는 레이테만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루손섬으로 전속되었다. 니시자와와 4명의 다른 조종사들은 세부섬의 작은 비행장으로 파견되었다.
1944년 10월 25일, 니시자와는 클리프턴 스프라그 소장의 '태피 3' 기동 부대(레이테만 전투에서 상륙 작전을 보호하던 부대)를 목표로 한 전쟁 최초의 대규모 가미카제 공격을 위한 전투기 호위(A6M5 4기)를 이끌었다. 이 가미카제 임무를 호위하는 동안 니시자와는 최소 86번째와 87번째 격추(두 기 모두 그루먼 F6F 헬캣)를 기록했으며, 이는 그의 경력에서 마지막 공중 격추였다.

니시자와는 비행 중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기지로 돌아온 후 나카지마 사령관에게 출격의 성공을 보고했다. 그리고 다음 날의 특공대 가미카제 임무에 자원했지만, 그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대신 니시자와의 A6M5 제로기는 250 kg 폭탄을 장착하고 해군 항공 조종사 1등병 가쓰마타 도미사쿠(富坂勝正)가 조종했다. 경험이 부족한 조종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리가오 해역의 호위 항공모함 USS 수와니에 돌진했다. 가쓰마타는 수와니의 비행갑판에 충돌하여 막 회수된 뇌격기와 부딪혔다. 두 비행기는 충돌과 동시에 폭발했으며, 비행갑판에 있던 다른 9대의 비행기도 폭발했다. 비록 함선은 침몰하지 않았지만, 몇 시간 동안 불에 탔고, 승무원 85명이 사망하고 58명이 실종되었으며 102명이 부상당했다.


3. 격추 기록 및 평가
니시자와 히로요시의 공중 격추 수는 여러 출처에서 다양하게 보고되어 왔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지휘관에게 86기 또는 87기의 공중 격추를 달성했다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후에는 147기 또는 103기의 격추 기록과 연관되었으나, 이 두 기록 모두 부정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틴 케이딘의 저서에서는 102기를 격추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 해군 공식 기록으로는 120기 내외로 인정되었다고 한국어 자료에 명시되어 있다. 1942년 10월 21일에는 30기 격추가 전군에 포고되었다. 라바울을 떠날 때 오카모토 하루토시에게 "86기 격추"라고 말했으며, 1944년 9월 하순에는 동료들에게 120기 이상이라고 언급했다.
그의 첫 번째 공식 확인 가능한 단독 격추는 1942년 4월 11일 미국 육군 항공대의 P-39 에어라코브라였다. 5월 1일 모레스비 공격에서 전투기 1기를 격추했고, 5월 7일에는 전투기 2기를 격추했다고 보고했다. 5월 1일부터 3일까지 72시간 동안 6기를 추가로 격추했다고 주장하며 에이스가 되었다.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 상공에서 F4F 와일드캣 6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으나, 역사학자들은 2기만 확인했다. 1943년 8월 1일 렌도바섬 상공에서 두 차례의 공중전에서 8기를 공동 격추했다고 보고했으며, 니시자와가 소대장으로 이끈 4기의 편대는 F4U 코르세어 4기와 교전하여 니시자와 단독으로 3기, 부하가 1기를 격추했다고 보고했다. 1942년 11월 중순에는 약 40기(일부 자료에서는 54기)의 완전 또는 부분 공중 격추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마지막 공중 격추는 1944년 10월 25일 가미카제 임무 호위 중 기록한 86번째와 87번째 격추(두 기 모두 F6F 헬캣)였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전시 상황의 혼란, 과장된 보고, 그리고 전후 자료 분석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 해군 항공대의 최상위 에이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1945년 8월 15일 종전 시, 연합함대 고시 172호에서는 그를 "전투기대의 중견 간부로서 시종 용감하게 싸워 적기 429기 격추, 49기 격파 (이 중 단독 격추 36기, 격파 2기)라는 희귀한 무훈을 세웠다"고 전군에 포고했다.
4. 개인적 삶과 특성
사카이 사부로의 묘사에 따르면,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키가 약 173 cm (일본어 자료에서는 180 cm 이상, 동기생 이자와 야스케에 따르면 178.8 cm), 몸무게는 63 kg 정도였으며, 창백하고 여윈 모습이었다. 그는 항상 말라리아와 열대성 피부 질환에 시달렸다고 한다. 유도에 능했으며, 동료 조종사들은 그를 '악마'라고 불렀지만, 동시에 과묵하고 내성적인 외톨이로 여겼다. 예과련 시절에는 항상 창백한 얼굴 때문에 '아오뵤탄(青びょうたん, 파란 표주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서의 교관 임무에 대해 불평하며 "사부로, 내가 낡은 복엽기를 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리석은 젊은이에게 선회하는 법과 바지를 적시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또한 일본에서의 무활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며 "다시 내 손에 전투기가 필요해. 나는 다시 전투에 참여해야만 해. 일본에 머무는 것은 나를 죽이고 있어"라고 말할 정도로 전투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의 전술 논쟁에서도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드러냈다. 1944년 9월, 그는 이와모토 테츠조와의 대화에서 "도중에 돌아가는 놈은 피탄했거나 겁쟁이겠지. 그러면 (다른 기체와의) 협동 격추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반박하며, 전투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5. 사망 및 유산
니시자와 히로요시의 전사 경위와 사후 일본 해군으로부터 받은 추서, 그리고 그가 남긴 역사적 유산과 평가에 대해 설명한다.
5.1. 사망 경위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1944년 10월 26일, 자신의 제로기가 전날 가미카제 임무에 사용되어 파괴된 다음 날 사망했다. 그는 그날 아침 나카지마 Ki-49 돈류("헬렌") 수송기에 탑승하여 루손섬의 클라크 비행장 (마바라캇, 팜팡가주)으로 이동 중이었다. 이는 세부섬의 비행장으로 가져갈 교체용 제로기를 수령하기 위함이었다.
미도로섬의 칼라판 상공에서, 그가 탑승한 Ki-49 수송기는 항공모함 USS 와스프 소속 VF-14 비행대대의 F6F 헬캣 두 기의 공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인 채 격추되었다. 니시자와는 승객으로서 사망했으며, 아마도 해롤드 P. 뉴웰 중위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뉴웰 중위는 그날 아침 미도로 북동쪽에서 "헬렌"을 격추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일본 측 기록에서는 뉴웰 중위가 격추했다고 주장한 기체가 100식 중폭격기 (육군기)였다는 설, 1식 육상공격기였다는 설, 또는 0식 수송기였다는 설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5.2. 사후 추서 및 기념
니시자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은 모든 부대에 배포되는 공보에서 니시자와를 언급하며 그를 기렸고, 사후 해군 중위로 2계급 특진시켰다. 니시자와는 또한 '부카이인 코한 기코 교시(武功院功範義光居士)'라는 선불교식 법명을 받았다. 이 법명은 "군사적 바다에서 모든 뛰어난 조종사들을 반영하는, 존경받는 불교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의 혼란으로 인해 공보 발행이 지연되었고, 장례식은 1947년 12월 2일이 되어서야 치러졌다. 니시자와의 유해는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종전 후,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과 일본 양군을 통틀어 최고의 에이스 중 한 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미국 국방부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스기타 쇼이치와 나란히 전시되어 그의 역사적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6. 역사적 평가 및 비판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의 최상위 에이스 파일럿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뛰어난 비행 기술과 전투 능력은 동료들로부터 '라바울의 악마'라는 별명을 얻게 할 정도로 전설적이었다. 특히 사부로 사카이와 오타 도시로와 함께 '청소 트리오'로 불리며 보여준 팀워크와 대담한 곡예 비행은 그의 탁월한 기량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의 격추 기록은 출처마다 큰 차이를 보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공식적으로 87기로 인정되기도 하지만, 본인의 주장이나 당시 언론 보도에서는 100~150기 이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러한 격추 수의 불일치는 전시 상황의 혼란과 선전 목적의 과장, 그리고 전후 자료 분석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니시자와는 전투에 대한 강한 열망과 엄격한 직업 의식을 지닌 군인이었다. 교관 임무에 대한 불평이나 동료와의 전술 논쟁에서 드러난 그의 단호한 태도는 그가 단순한 조종사를 넘어선 확고한 전투 철학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의 죽음은 일본군이 가미카제 특공 작전을 본격화하던 시기와 맞물려, 전쟁 말기 일본군의 절박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후 니시자와는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에이스 파일럿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국방부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그의 초상화가 전시된 것은 그의 군사적 업적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의 영웅화는 전쟁 영웅 미화라는 비판적 관점에서 재조명될 여지도 있다. 이는 그의 개인적 업적을 넘어 전쟁이라는 비극적 맥락 속에서 그의 역할과 유산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평가할 필요성을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