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노회찬(魯會燦, Roh Hoe-chan영어, 1956년 8월 31일 ~ 2018년 7월 23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제17대, 제19대, 제2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진보정당의 건설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을 거쳐 사망 당시에는 정의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노회찬은 1980년대 용접공으로 위장취업하여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결성을 주도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기도 했다. 출소 후에는 진보정당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창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국회의원 재임 중에는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삼성 X파일 사건을 폭로하여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특검 수사 중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진보 정치의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2. 생애 및 배경
노회찬은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고려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그의 초기 생애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노회찬은 1956년 8월 31일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원태순은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한국 전쟁 중 1.4 후퇴 때 거제도로 피난하여 같은 함경남도 출신인 아버지 노인모를 만났다. 유년 시절 집안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문화적으로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첼로를 배웠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축제에 초청받아 첼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또한 고등학생 때 한 해 개봉 영화를 모두 볼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으며, 중학 시절부터 펜싱과 육상에 뛰어났지만 구기 종목은 잘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무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퍼져 노지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2. 학력
노회찬은 1969년 초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부산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부산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으며, 1973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73년,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하고 배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시기 그는 《씨알의 소리》, 《다리》와 같은 잡지를 읽고 함석헌, 백기완, 선우휘 등 저항적 지식인들을 만났다. 당시 경기고에서 함께 운동했던 동기 중에는 정광필, 이종걸 등이 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대학 입시에 떨어져 재수 대신 군대에 지원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1983년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3. 노동운동 및 초기 활동
노회찬은 대학 재학 중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으며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는 노동 현장에서 직접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진보적 노동자 연맹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1. 노동운동에 투신
대학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전념하던 노회찬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으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군사 독재에 항거하여 거리로 나온 민중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노회찬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1982년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했다. 그 뒤 서울특별시, 부천시, 인천광역시 등지에서 용접공으로 위장취업하며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첫 직장은 기아자동차였으나, 대학생 신분임이 탄로나 해고당했다. 이후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노동자들과 모임을 가졌고, 이러한 모임은 정치적인 서클로 발전했다. 1982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 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수배되어 긴 수배 생활을 시작했다.
3.2.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활동 및 수감
1987년 6월 항쟁과 뒤이은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 노동운동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회찬은 1987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창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인민노련은 당시 운동권의 주류였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교조주의로 인식하고, 현장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하며 독자적인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인민노련은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 후보를 추대하기도 했으나, 백기완이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면서 좌절되었다. 이후 인민노련은 <노동계급>, <삼민동맹>, <안산노련> 등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 노회찬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및 격주간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1989년 12월 24일 체포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1992년 만기 출소했다. 수감 중에는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원고를 구상하기도 했다.
노회찬은 체포 1년 전인 1988년 12월,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 김지선과 결혼했다. 김지선은 훗날 여성의 전화 연합 조직위원장 및 사단법인 서울강서양천여성의전화 소장을 역임했다. 노회찬과 함께 인민노련 활동을 했던 동지로는 송영길, 신지호, 주대환, 조승수 등이 있다.
4. 정치 경력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마친 노회찬은 진보정당 건설에 힘쓰며 정치인으로 변모했다. 그는 여러 진보 정당의 창당에 참여하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정치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4.1. 진보정당 건설 노력
노회찬이 복역 중이던 1991년, 인민노련은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합법 정당으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1992년에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개편된 뒤 민중당과 통합했으나, 통합민중당은 1992년 총선에서 참패하고 해산되었다. 민중당 당권파였던 김문수, 이재오 등은 진보정당 운동을 포기하고 김영삼의 영입으로 민주자유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노회찬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진보정당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92년 4월 15일 <진보정당추진위원회>(약칭 진정추)를 결성했다.
노회찬은 진정추 1기(1992년 4월 ~ 1993년 3월) 사무총장을 거쳐 2~4기 대표를 역임(1995년 9월)하며 진정추를 "창당에 이르는 안정된 중간 단계로서 준정당적 조직"으로 규정했다. 1995년 9월 25일 진정추는 민중정치연합과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으로 거듭났고, 노회찬은 진보정치연합이 국민승리21에 통합되기까지 대표를 역임했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을 역임하며 부채를 많이 지기도 했고, IMF 외환 위기 때는 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다.
1996년 총파업 이후 민주노총은 독자적인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도 이에 동의했다. 노회찬의 진보정치연합은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진보정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으며, 논의 끝에 1997년 대선 기구로서 국민승리21이 출범했다. 노회찬은 국민승리21에서 정책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권영길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워 대선을 치렀다. 비록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국민승리21은 포기하지 않고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여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23명의 당선자를 내며 반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국민승리21은 1999년 8월 29일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초대 부대표를 맡았으며,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당의 대부분의 선거를 지휘했다. 2002년 3월에는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에 선출되어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전까지 재직했다.
4.2. 제17대 국회의원 (민주노동당)
2004년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비례대표 순위를 뽑는 당내 선거에서 일반명부 4위를 기록하여 8번째 비례대표 후보가 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약진하고 자유민주연합이 정당득표율 3% 미달로 비례대표 의석을 얻지 못하면서, 10선에 도전한 김종필을 물리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3김 시대의 막을 내렸다.
노회찬은 17대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배치되어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쳤다. 그는 2004년 국정감사에서 피감기관이 뽑은 베스트 의원에 선정되었으며, 2007년 12월 9일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선정한 백봉신사상에서 신사적인 의원 베스트 10에 뽑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2005년 여성이 뽑은 여성 친화적인 남성 의원 1위, 2006년 카드포인트 정치후원금 1위, 2006년 진보 지식인 대상 설문조사 대권 후보 2위, 2005년 시민운동가가 뽑은 최우수 의정 활동 1위, 2005년 PD들이 뽑은 베스트 의원 1위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는 여성단체로부터 호주제 폐지 감사패, 한글을 빛낸 큰 별, 무지개 인권상, 장애인 차별 금지법 감사패, 동남아 쓰나미 국회의원 우수 외교상, 조선왕조실록 환수 추진으로 불교계 감사패 등을 수상했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으로서 삼성 X파일 사건을 폭로하여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또한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 운동,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 학교 급식 직영화, 6세 미만 어린이 예방접종 무료 확대, 아토피 걱정 제로 프로젝트, 지역 복지 재정 확충을 위한 법 개정 추진,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 추진, 장애인 차별 금지법 제정, 전월세 세입자 보호법 추진 등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다양한 정책 활동을 펼쳤다. 17대 국회 4년 임기 동안 총 467건의 의안을 발의했으며, 이 중 31건이 본회의에서 가결되었다.
4.3. 당 분열과 신당 창당
2007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으나, 자주파가 다수인 당내에서 조직력이 약해 권영길, 심상정에 이어 3위로 탈락했다.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 내 정파 간 갈등이 심화되었고, 2008년 2월 3일 대의원대회에서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가 제시한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당내 갈등이 폭발했다. 결국 노회찬은 심상정과 함께 2008년 2월 5일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 창당을 준비했다. 2008년 3월 16일 진보신당이 창당되었고, 노회찬은 심상정, 이덕우, 박김영희, 김석준과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진보신당 창당 직후인 2008년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회찬은 서울 노원구 병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의 홍정욱 후보에게 앞섰으나, 민주당 김성환 후보에게 표가 분산되면서 3.05%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다. 하지만 노회찬의 선전은 진보정당 후보로서 서울에서 상당한 득표를 했다는 점에서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8대 총선 이후 노회찬의 패배를 아쉬워하는 이른바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당원의 증가가 크게 이어져, 노회찬은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더 많은 지지자와 당세를 확보하게 되었다.
총선 이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인한 촛불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노회찬은 촛불 시위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진보신당 칼라TV' 리포터로 활동했다. 그는 촛불 시위의 배후에 대한 보수 진영의 공격에 대해 "촛불 시위의 배후가 있다면 이명박 정부"라며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협상 때문에 건강을 걱정하는 국민들이 순수하게 모여서 시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진보신당의 촛불 시위 지원 활동은 당원 수 증가로 이어졌다.
2009년 3월 29일, 노회찬은 진보신당 2차 당대회에서 심상정의 불출마로 단독 출마하여 전 당원을 대상으로 한 직접 투표에서 97.9%의 찬성을 받아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서민 복지 동맹"을 제안하고 진보신당의 정책 상품을 개발하여 정책 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2009년 4월 29일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울산광역시 북구의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면서 진보신당은 원외 정당에서 원내 정당으로 진입했다.
2010년 6월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노회찬은 진보신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서울"을 모토로 콘크리트 서울이 아닌 보편적 복지 정책을 펼치는 도시를 만들 것을 주장했으나, 3.3% 득표에 그쳐 낙선했다. 선거 후 민주당 지지자들은 노회찬이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했다면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으나, 노회찬은 팟캐스트 '나꼼수'에서 한명숙 측에서 단일화에 대한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고 밝혔다. 2010년 10월 15일, 조승수 의원이 3대 대표로 선출되면서 노회찬은 진보신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011년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이 논의되었으나, 이른바 종북주의 문제로 인해 결렬되었다. 진보신당 대의원대회에서도 통합 안건이 부결되자, 노회찬은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당을 탈당하여 '새진보정치연대'를 만들었다. 이후 새진보연대와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이 3당 합당을 통해 2011년 12월 5일 통합진보당이 창당되었고, 노회찬은 통합진보당의 공동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4.4. 제19대 국회의원 (통합진보당, 정의당)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회찬은 서울 노원구 병 선거구에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여 57.21%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4년 만에 국회에 재입성했다.
그러나 총선 후 통합진보당 내에서는 비례대표 후보 예비선거 부정 사건이 불거지면서 당내 항쟁이 발생했다. 노회찬은 심상정, 강기갑 등과 함께 당내 쇄신을 요구하는 비당권파의 일원으로 나섰으나, 부정 선거를 주도한 당권파의 방해로 당내 개혁이 좌절되었다. 이에 노회찬은 2012년 9월 13일 통합진보당을 탈당하고 새로운 진보 정당에 참여할 것을 밝혔다. 9월 16일에는 신당 결성을 위한 '신진보정당추진회의'의 공동 대표로 추대되었고, 10월 7일에는 새로운 신당인 진보정의당 창당준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공동위원장에 취임했다. 10월 21일 공식 발족한 진보정의당의 공동 대표에 취임했다.
2013년 2월 14일, 노회찬은 후술할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인해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징역 4개월,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이 확정되면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는 판결 직후 기자회견에서 "국민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1인 미디어 시대에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배포하면 면책 특권이 적용되고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면 의원직 박탈이라는 시대착오적 궤변으로 대법원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는가"라며 대법원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는 "뇌물을 줄 것을 지시한 재벌그룹 회장, 뇌물수수를 모의한 간부들, 뇌물을 전달한 사람, 뇌물을 받은 떡값 검사들이 모두 억울한 피해자들이고 이들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 저는 의원직을 상실할 만한 죄를 저지른 가해자라는 판결"이라며 "이는 폐암 환자를 수술한다더니 암 걸린 폐는 그냥 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 사고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비판했다.
2013년 7월 21일 진보정의당이 정의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노회찬은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014년 2월, 6월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출마설에 대해 "인간적 도리가 없다"며 일축하고, 박원순의 재선을 위해 안철수가 추진하던 새정치연합과의 연대에 나설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2014년 7월 30일 치러진 2014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 중 서울 동작구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정의당 후보로 출마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와 단일화하여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섰으나, 48.69%의 득표율로 2위에 그쳐 나경원에게 928표 차이로 패배했다.
4.5. 제20대 국회의원 (정의당)
2016년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노회찬은 서울 노원구 병과 경남 창원 성산 중 어느 지역구에 출마할지 고민했다. 노원병은 자신의 옛 지역구이자 안철수 의원의 지역구였으며, 창원 성산은 제조업이 발달하고 노조 조직률이 높은 지역이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권유로 창원 성산 출마를 결정했고,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를 이기고 야권 단일 후보로 선출되었다. 노회찬은 이 선거에서 51.50%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에 성공했다.
2016년 5월 30일부터 정의당 원내대표를 맡았으며, 2018년 6월 재선출되어 3연임을 하게 되었다. 그는 20대 국회에서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내년 예산 편성 때 국회 특수활동비를 제외해야 하고, 올해 예산에서 남은 특수활동비는 각 정당이 매달 사용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고 발언하며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를 골자로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정의당은 노회찬의 기조에 따라 현재까지도 특활비 폐지를 추진하고 있으며, 노 전 원내대표 몫으로 지급된 2018년 7월 특활비는 사용하지 않았다. 2018년 7월부터는 JTBC 시사 프로그램 <썰전>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4.6. 주요 의정 활동 및 정책
노회찬은 국회의원으로서 다양한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정책과 법안 발의에 힘썼다.
- 삼성 X파일 폭로**: 2005년 삼성그룹의 불법 로비 의혹이 담긴 안기부 X파일을 공개하며 떡값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을 폭로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사법 정의와 재벌 개혁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 경제 민주화 및 서민 복지**: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 운동을 주도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법안 마련에 노력했다. 또한 학교 급식 직영화, 6세 미만 어린이 예방접종 무료 확대, 아토피 걱정 제로 프로젝트 등 보편적 복지 정책을 제안했다.
- 주거 안정**: 지역 복지 재정 확충을 위한 법 개정을 추진하고,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를 주장하여 주거 안정에 기여하고자 했다.
- 사회적 약자 인권**: 장애인 차별 금지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전월세 세입자 보호법 추진 등 사회적 약자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 국회 개혁**: 20대 국회에서는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를 주장하며 관련 국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는 등 국회 운영의 투명성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5. 주요 사건 및 논란
노회찬의 정치 경력에는 그의 이상과 현실 정치의 충돌이 드러나는 여러 주요 사건과 논란이 있었다.
5.1. 삼성 X파일 사건
MBC 이상호 기자가 2005년 7월 22일 방송을 통해 삼성 X파일을 공개했다. X파일은 1997년 대선 과정에서 국가안전기획부가 당시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테이프와 이를 분석한 안기부의 보고서를 말한다. X파일에는 1997년 4월부터 10월까지 시시각각 변해가는 당시 정국을 반영한 삼성 측의 전방위 로비 실태가 담겨 있었으며, 삼성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넸고, 최고위급 검찰 간부들에게 명절마다 1천만원에서 5백만원의 떡값을 뿌리며 검찰 인맥을 관리했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방송에서는 뇌물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이 공개되지 않았다. 노회찬은 안기부 X파일을 입수 한 뒤, 2005년 8월 1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에 앞서 배포한 '안기부 X파일' 관련 보도자료를 통해 옛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에서 삼성그룹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불법으로 금품을 수수한 고위 검사들을 처벌하지 않고 노회찬 의원과 MBC 이상호 기자를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노회찬은 1심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09년 12월 4일 열린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8부(부장판사 이민영) 2심 선고 공판에서는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난 느낌"이라며 "사필귀정"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오늘 판결은 삼성 X파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며 "이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삼성 관계자, 중앙일보 관계자, 전·현직 검찰, 검경언권 모든 주체들이 삼성 X파일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사건의 나머지 280여 개의 녹취 테이프가 아직 서울중앙지검에 남아 있다"면서 "이 문제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경우 유사한 사건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3년 2월 14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2심 판결을 파기하고 1심의 유죄 판결이 확정되면서 노회찬은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대법원의 유죄 선고 논리는 'X파일'에 실린 검사들의 이름을 보도자료를 통해 기자들에게 배포하는 것은 면책 특권에 해당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 알게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규정하는 통신비밀보호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노회찬은 이에 대해 "국민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1인 미디어 시대에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배포하면 면책 특권이 적용되고 인터넷을 통해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면 의원직 박탈이라는 시대착오적 궤변으로 대법원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는가"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황교안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 특별 수사팀의 지휘를 맡았던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었으며, 노회찬과 경기고 72회 동기(1976년 졸업)였다. 노회찬은 "과거 안기부 X파일 사건을 덮는 걸 주도한 사람이 지금 검찰 개혁을 지휘해야 할 법무부 수장으로 지명이 됐다. 같은 시각, 검찰 개혁을 촉구하면서 검찰을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한 나는 국회를 떠나게 됐다"며 부당한 현실을 꼬집었다. 황교안이 지휘한 수사팀은 '삼성·떡값 검사 전원 무죄(불기소), 이상호 <문화방송> 기자와 김연광 <월간조선> 편집장, 노회찬 의원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5.2. 드루킹 정치자금 수수 의혹 및 사망
2018년 7월, 노회찬은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던 중, 노회찬은 2018년 7월 23일 오전 9시 38분경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 아파트 17층과 18층 사이에서 투신하여 사망했다.
경찰에 따르면, 투신 장소로 보이는 아파트 계단에서는 노회찬의 외투, 신분증이 든 지갑, 정의당 명함, 그리고 유서 3통이 발견되었다. 유서에는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경제적 공진화 모임)로부터 모두 4000.00 만 KRW을 받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적었다. 또한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며,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유서 3통 중 가족에게 보낸 2통은 유가족의 의사에 따라 공개되지 않았으며, 정의당에 보낸 1통만 공개되었다.
노회찬은 사망 직전까지도 KTX 승무원 노동자들의 복직 소식에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등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의 사망은 정치권과 시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과 관련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는 선택을 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5.3. 전직 비서의 법무부 취업 특혜 의혹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와 김진태 의원 등이 노회찬 의원실의 전직 비서의 법무부 취업에 특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노 의원은 "1%라도 채용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면 의원직을 내놓겠다"며 "강원랜드 부정채용 의혹 등 자유한국당 전·현직 의원들이 연관된 채용 부정청탁에 대한 물타기"라고 대응했다. 노 의원의 전 비서 역시 "노 원내대표 본인 또는 의원실 관계자 그 누구도 제가 법무부에 원서를 낸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적어도 채용비리 의혹을 받을 만큼 불성실한 경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고 대응했다.
6. 개인사
노회찬은 1988년 동료 노동운동가인 김지선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첼로를 연주했으며, 모든 시민이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기도 했다. 또한 고등학생 시절 한 해 개봉 영화를 모두 볼 정도로 영화를 좋아한 영화광이었다.
7. 사망 및 유산
노회찬의 사망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죽음 이후 정치권과 시민 사회에서는 애도와 함께 그의 삶과 정치적 유산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이어졌다.
7.1. 사망 경위
노회찬은 2018년 7월 23일 오전 9시 38분경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사망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사망 당시 그는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으로 특검의 수사를 받고 있었다.
투신 장소인 아파트 17층과 18층 사이 계단에서는 노회찬의 외투, 신분증이 든 지갑, 정의당 명함, 그리고 유서 3통이 발견되었다. 유서에는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경제적 공진화 모임)로부터 모두 4000.00 만 KRW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적었다. 또한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며,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국민들에게는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린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사망 직전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KTX 승무원 노동자들의 복직 소식에 대한 축하의 말이었다.
7.2. 사회적 반응 및 평가


노회찬의 사망 소식에 한국 사회는 큰 충격과 애도에 잠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회찬의 사망 당일 예정된 SNS 생방송을 취소했으며, "정말 가슴 아프고 비통한 마음이다. 노회찬 의원과는 같은 당에 소속된 적은 없었지만, 같은 시대에 정치를 하면서 우리 사회를 더 진보적인 사회로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 왔다"며 "우리 한국의 진보 정치를 이끌고 우리 정치의 폭을 넓히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매우 쓸쓸한 우리 정계에서도 말의 품격을 높이는 면에서도 많은 역할을 했다"고 애도했다.
자유한국당도 "진보 정치의 상징으로서 서민과 노동자를 위한 의정 활동에 모범을 보였고, 정치 개혁에도 선두에 섰다. 급소를 찌르는 발언으로 국민에게 사랑받았던 고 노회찬 의원의 죽음은 한국 정치의 비극"이라는 논평을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대변인은 "노회찬 의원이 지향했던 진보와 민주주의 가치들은 후배 정치인들이 그 뜻을 이어받을 것"이라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은 "노회찬은 죽어도 살아있다. (반대로) 박근혜와 이명박은 살아있지만 죽어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빈소가 마련된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여야 정치인들과 그가 출연했던 <썰전> 출연자들, 그리고 수많은 일반 시민들이 조문 행렬을 이었다.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8천여 명의 조문객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조문객들은 "서민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말을 많이 해줬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정치인 중에)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삼성과 싸우던 모습, 그 당당한 모습이 멋있었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건강한 정치인이 먼저 가야 하는 현실이 억울하다" 등 그의 서민적이고 강직한 면모를 기억하며 애도했다.
반면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잘못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또 다른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고 말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정의당은 유가족과 상의하여 노회찬의 장례를 5일간 정의당장(葬)으로 치르기로 했으며, 이정미 대표가 장례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문희상 국회의장의 제안으로 7월 23일부터 25일까지는 정의당장으로, 26일부터 27일까지는 국회장으로 승격하여 치러졌다.
7월 27일 오전 9시 세브란스병원에서 발인이 치러졌으며, 이정미 정의당 대표, 심상정 의원, 유시민 작가, 강기갑, 천호선 전 의원 등이 참석했다. 발인식에서 이정미 대표와 심상정 의원은 오열했고, 유시민 작가는 마지막 목례를 올렸다. 영정은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져 오전 10시부터 영결식이 진행되었다. 이정미 대표는 "노회찬의 정신은 정의당의 정신이 될 것"이라며 당의 미래를 결의했고, 심상정 의원은 "노회찬 나의 사랑하는 동지, 영원한 동지여"라고 부르짖으며 오열했다. 노회찬의 조카 노선덕은 유족 인사말에서 "무슨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른다면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는 큰아버지의 뜻을 받들겠다고 밝혔다. 영결식 후 영정은 노회찬의 사무실인 국회의원회관 510호와 정의당 당사, 국회 건물 등을 둘러본 뒤 오전 11시 30분 국회의사당을 떠났다. 국회의원회관 밖에는 시민들이 모여 "잘가세요"라고 외치며 노란 꽃과 비행기를 던졌다. 이날 국회는 조기를 게양했다.
오후 1시 노회찬의 영정은 서울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 도착하여 화장이 진행되었고, 오후 4시부터 장지인 마석모란공원에서 하관식이 진행되었다. 하관과 헌화 등의 순서가 이어진 뒤 참석자 전체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며 국회장의 모든 일정이 끝났고, 노회찬은 영면에 들었다.
7.3. 노회찬재단 설립
노회찬 사망 이후, 그의 정신과 활동을 계승하기 위한 노회찬재단 설립이 추진되었다. 2018년 9월 9일 정의당은 노회찬재단 설립이 제안되었다고 밝혔다. 제안자로는 권영길, 심상정, 이정미 등 전·현직 진보정당 대표들, 이종걸,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유시민 작가 등 18명이 참여했다.
2019년 4월 3일, 그의 지역구인 창원 성산구에서 보궐선거가 치러졌고, 여영국 정의당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선거 다음 날 여영국 당선인은 당선증을 가지고 노회찬의 묘소를 찾아 그의 유지를 잇겠다는 뜻을 밝혔다.
8. 저서 및 저술 활동
노회찬은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사상을 담은 여러 저서와 저술 활동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8.1. 주요 저서
- 《우리가 꿈꾸는 나라》(창비, 2018년)
- 《진보의 재탄생》(꾸리에, 2010년)
- 《나를 기소하라》(정보와사람, 2008년)
- 《법은 만명한테만 평등하다》(정보와사람, 2007년)
- 《힘내라 진달래》(사회평론, 2004년)
-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 실록》(일빛, 2004년)
-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랜덤하우스중앙, 2004년)
- 《지역감정과 정치발전》(고려대 심포지움, 1995년)
- 《산업별 노동조합과 한국노동조합운동》(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 1994년)
- 《민주노조운동과 전노협》(거름, 1990년)
- 《87, 88 정치위기와 노동운동》(거름, 1989년)
- 《노동자와 노동절》(석탑, 1983년)
8.2. 공저
- 《당신은 바보 아니면 도둑》(해피스토리, 2009년)
-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2》(리더스북, 2009년)
- 《10살에 꼭 만나야 할 100명의 직업인》(조선북스, 2008년)
- 《열정 바이러스》(바른지식, 2008년)
- 《어머니》(매일경제신문사, 2006년)
- 《신영복 함께 읽기》(돌베개, 2006년)
- 《대한민국 50대의 힘》(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년)
- 《나의 고전 읽기》(북섬, 2006년)
- 《벌거벗은 이력서》(휘즈프레스, 2007년)
- 《7인 7색, 일곱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곱 개의 세상》(북라인, 2005년)
-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 93통》(랜덤하우스중앙, 2005년)
- 《우리가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시와 사회, 2004년)
-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년.
-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생각해봤어?》. 웅진지식하우스. 2015년.
9. 평가 및 영향
노회찬은 한국 진보 정치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활동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노동 인권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9.1. 긍정적 평가
노회찬은 평생을 노동자와 서민,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헌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노동자 조직화를 이끌었고, 국가보안법으로 수감되는 고난 속에서도 진보정당 건설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으로서 삼성 X파일 사건을 폭로하며 거대 권력의 비리에 맞섰고, 비정규직 처우 개선, 복지 확대 등 사회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을 제안하며 진보 정치의 의제를 확장했다.
그의 날카로운 논리와 유머러스한 화법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촌철살인'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의 품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보수와 진보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정치인이었다. 특히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 등 국회 개혁에 대한 그의 일관된 주장은 정치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대변했다.
노회찬은 한글 전용론자로서 17대 국회 당시 국회의원 배지가 '國'의 한자 표기였기 때문에 한글 표기로 바뀔 때까지 착용을 거부했다. 또한 법률 용어의 어려운 한자어를 순화하고, 국회의원 선서문의 한글화, 한글날의 재 공휴일화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4년 10월에는 한글학회에 의해 '한글나라 큰별'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7년에는 정의당 원내대표로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82년생 김지영을 선물하며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9.2. 비판 및 논란
노회찬은 그의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몇 가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가장 큰 논란은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드루킹으로부터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었다. 그는 유서에서 자금 수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청탁과는 무관하다고 밝혔으나, 현행 정치자금법상 불법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통합진보당 시절 당내 비례대표 부정 경선 사건과 관련하여 당내 갈등에 개입하고 결국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일부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2013년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후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자신의 지역구였던 노원병에 출마하려 하자, "가난한 집 가장이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올 생각을 해야지 왜 집안 식구들 먹는 걸 뺏으려고 합니까?"라고 비판하며 야권 내 경쟁 구도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18년에는 전직 비서의 법무부 취업 특혜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노회찬은 "1%라도 채용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면 의원직을 내놓겠다"며 강하게 반박했다.
9.3. 진보 정치에 미친 영향
노회찬은 한국 진보 정치의 역사에서 독자적인 진보 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여러 진보 정당의 창당과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한국 정치에서 진보 의제가 설 자리를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사망 이후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정의당의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자유한국당을 넘어 15%를 기록하며 제1야당이 된 것은,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과 대중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노회찬은 단순히 이념적 주장을 넘어, 구체적인 정책과 입법 활동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실천적인 진보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죽음은 한국 진보 정치에 큰 상실감을 안겼지만, 동시에 그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하려는 움직임(노회찬재단 설립)으로 이어지며 한국 진보 정치의 미래에 대한 숙제를 남겼다. 그는 한국 사회에 '정의로운 진보'의 이미지를 각인시켰으며, 그의 삶과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사회 참여와 변화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10. 상훈
- 201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1. 전과
- 국가보안법위반(기타):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3년 - 1990년 6월 23일 선고, 1991년 5월 25일 특별감형, 1998년 8월 15일 특별복권
- 도로교통법위반(음주운전): 벌금 100만원 - 2001년 4월 6일 선고
- 통신비밀보호법위반, 명예훼손: 징역4월 집행유예1년, 자격정지1년 - 2011년 10월 28일 선고
12. 가족
- 아버지: 노인모
- 어머니: 원태순
- 아내: 김지선
13. 역대 선거 결과
| 연도 | 선거 | 대수 | 직책 | 출마 지역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결과 | 비고 |
|---|---|---|---|---|---|---|---|---|---|---|
| 2004년 | 총선 | 17대 | 국회의원 | 비례대표 | 민주노동당 | 2,774,061 표 | 13.03% | 비례대표 8번 | 당선 | 초선 |
| 2008년 | 총선 | 18대 | 국회의원 | 서울 노원구 병 | 진보신당 | 32,111 표 | 40.05% | 2위 | 낙선 | |
| 2010년 | 지방 선거 | 34대 | 시장 | 서울특별시 | 진보신당 | 143,459 표 | 3.26% | 3위 | 낙선 | 민선 5기 |
| 2012년 | 총선 | 19대 | 국회의원 | 서울 노원구 병 | 통합진보당 | 52,270 표 | 57.21% | 1위 | 당선 | 재선 |
| 2014년 | 7·30 재보선 | 19대 | 국회의원 | 서울 동작구 을 | 정의당 | 37,382 표 | 48.69% | 2위 | 낙선 | |
| 2016년 | 총선 | 20대 | 국회의원 | 경남 창원시 성산구 | 정의당 | 61,897 표 | 51.50% | 1위 | 당선 | 3선 |
14. 같이 보기
- 진보정당
- 민중당
- 국민승리 21
- 민주노동당
- 진보신당
- 통합진보당
- 정의당
- 심상정
- 권영길
- 단병호
- 유시민
- 진중권
- 독수독과이론
- 노원구 병
- 서울 노원구의 국회의원
- 창원시 성산구 (선거구)
- 창원시 성산구의 국회의원
15. 외부 링크
- [http://omychans.tistory.com/ 노회찬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