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나카하라 주야는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엄격한 아버지의 교육 방침 아래 반항적인 유년기를 보냈다.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문학에 눈을 뜨고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학업을 등한시한 채 문학 활동에 몰두했다. 교토와 도쿄를 오가며 다수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1.1. 어린 시절과 성장 배경
1.1.1. 출생과 가족
나카하라 주야는 1907년 4월 29일 야마구치현 요시키군 야마구치정 오아자 시모우노료(현재의 야마구치시 유다온천)에 위치한 나카하라 의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가시무라 주야였고, 아버지는 유능한 군의관이자 개업의였던 가시무라 겐스케(柏村謙助)이며, 어머니는 후쿠(フク)이다. 겐스케와 후쿠는 결혼 후 6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으며, 나카하라 가문의 당주였던 마사쿠마(政熊)에게도 친자식이 없었기에, 장남인 주야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며 사흘 밤낮으로 축하 잔치를 벌였다.
주야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군의관으로서 뤼순(旅順)에 주둔 중이었으며, 편지로 "주야"라는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주야가 생후 6개월 되던 해인 10월, 어머니 후쿠와 할머니 스에(スヱ)와 함께 뤼순으로 건너갔다. 이는 주야를 직접 돌보고 싶다는 아버지 겐스케의 바람 때문이었다. 이듬해 여름, 겐스케가 야마구치로 전근 명령을 받으면서 가족은 야마구치 나카하라가로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히로시마로, 1912년에는 가나자와로 이사하는 등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이사를 다녔다. 1914년 아버지가 조선의 용산 연대 군의관으로 영전했으나, 학령기에 접어든 주야는 어머니 후쿠와 함께 나카하라 본가로 돌아와 시모우노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15년 8월, 겐스케가 야마구치로 복귀하면서 나카하라 가문과 양자 결연을 맺었고, 주야의 성도 가시무라에서 나카하라로 바뀌었다. 1917년, 겐스케는 예비역 편입을 신청하여 나카하라 의원을 물려받았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나카하라 주야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1.1.2. 유년기와 성장 과정
주야는 명문 의사의 장남으로서 자신도 의사가 되리라 기대받았다. 아버지 겐스케의 높은 기대 때문에 주야는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겐스케는 마을의 공공 풍기를 걱정하여 아들이 자신들과 다른 계층의 아이들과 밖에서 노는 것을 금했다. 또한, 어린 시절 동생들과 달리 강에서 물놀이하는 것을 금했는데, 이는 물에 빠질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성장하면서 주야는 심한 체벌을 자주 받았는데, 흔히 벽을 보고 똑바로 서 있으라는 벌을 받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담뱃불로 발꿈치를 지지는 벌을 받기도 했다. 가장 큰 벌은 헛간에 갇혀 잠을 자는 것이었는데, 주야는 동생들에 비해 이 벌을 수십 차례 받았다. 이는 그를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되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주야의 어머니 후쿠는 아들의 예습과 복습을 직접 맡으며 교육열을 보였다.
초등학교 시절, 주야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신동"이라 불렸다. 1918년, 야마구치 사범 부속 초등학교(현 야마구치 대학 교육학부 부속 야마구치 초등학교)로 전학 가서도 성적이 우수했으며, 전투적이면서도 익살스러운 면모로 반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1.3. 문학에 눈뜨다
주야가 8세 되던 해인 1915년에 뇌막염으로 동생 쓰구로(亜郎)가 병사한 것이 그가 문학에 눈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 깊은 슬픔에 잠긴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주야는 나중에 『시적 이력서』에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돌아가신 동생을 노래한 것이 시초이다"라고 기록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1920년에는 첫 세 편의 시를 여성 잡지와 지역 신문에 투고했다. 같은 해, 야마구치 중학교 입학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엄격함에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았고, 문학에 점점 더 몰두하면서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겐스케는 문학이 아들에게 미칠 영향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한번은 주야가 숨겨놓은 소설을 발견하고는 심하게 꾸짖으며 다시 헛간에 가두었다. 이 무렵 주야는 술과 담배도 시작하여 성적이 더욱 낮아졌다.
1923년, 주야는 3학년 유급이 결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겐스케는 크게 실망하여 며칠간 왕진을 나가지 않았다. 반면 주야는 급우들을 공부방에 모아 놓고 만세를 부르며 답안지를 찢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할머니 스에는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방을 청소했다고 한다. 유급은 사실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유급하지 않는 한 그는 엄격한 부모의 감시 아래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2. 교육 및 초기 문학 활동
1.2.1. 학업과 진로
유급 결정으로 주야가 야마구치 중학교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겐스케도 주야를 전학시키기로 결정했다. 1923년 4월, 교토의 리쓰메이칸 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고, 주야는 홀로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이로써 그는 가족의 감시에서 벗어났지만, 죽는 날까지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1925년, 중학교를 4학년으로 중퇴한 주야는 대학 예과 시험을 이유로 야스코와 함께 도쿄로 상경했다. 당초 니혼대학이나 와세다대학을 희망했으나, 서류 미비나 지각으로 시험을 보지 못했고, 예비학교에 다니는 조건으로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도쿄 생활을 시작했다. 1926년,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고 예비학교 과정을 중퇴한 후,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31년 4월, 도쿄 외국어 학교(현 도쿄 외국어 대학) 전수과 프랑스어부에 입학하여 1933년 3월까지 재학했다. 그는 외무 서기생 시험을 치르고 프랑스 유학을 계획하기도 했다.
1.2.2. 교토에서의 만남
교토에서 주야는 시인으로서 자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많은 인물들을 만났다. 그는 다카하시 신키치의 다다이스트 시를 읽고 충격을 받아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 예술 운동은 그의 시적인 삶의 일부가 되었고, 나중에 그에게 "다다 씨"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겨울에는 자신보다 세 살 연상인 여배우 하세가와 야스코를 만났고, 1924년 4월부터 동거를 시작했다. 같은 해, 주야는 시인 도미나가 타로와도 친분을 맺었다. 도미나가는 매일 주야의 하숙을 찾아와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1.2.3. 도쿄 상경과 문학계 진입
1925년, 중학교를 중퇴한 주야는 야스코와 함께 도쿄로 상경했다. 도미나가 타로의 소개로 고바야시 히데오를 알게 되었으며, 도쿄에서 주야가 쓴 작품이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은 도미나가 타로가 참여했던 동인지 『야마마유』(山繭)에 기고한 「요절한 도미나가」(夭折した富永)였다. 그는 또한 가와카미 데쓰타로, 오오카 쇼헤이 등과 함께 시 전문 동인지 『바보들』(白痴群)을 1929년 4월 창간하여 이듬해 4월 6호로 폐간되기 전까지 자신의 시와 번역 작품을 매호 발표했다. 폐간 이후에는 시 창작이 중단되는 "웅비"의 시기를 보냈다.

1933년 12월, 주야는 먼 친척인 여섯 살 아래의 우에노 다카코(上野孝子)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중매로 이루어졌으며, 야마구치현의 유다온천에 있는 여관 니시무라야에서 가족들만 참석한 결혼식과 성대한 피로연을 올렸다. 『랭보 시집 <학교 시절의 노래>』 번역본을 삼笠서점에서 출간했는데, 이는 그의 첫 상업 출판물이었다. 이 번역서는 그를 랭보의 대표적인 번역가로 이름을 알리게 했으며, 이로 인해 받은 인세는 없었으나, 주야는 이 번역 시집을 먼 친척들에게까지 보냈다.
2. 문학 세계
나카하라 주야의 문학 세계는 다다이즘과 프랑스 상징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전통적인 시 형식과 자유시를 결합하여 멜랑콜리와 고통,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을 담아냈다.
2.1. 문학적 영향
나카하라 주야는 다카하시 신키치의 다다이즘 시에서 큰 충격을 받고 시 쓰기를 다시 시작했으며, 다다이즘은 그의 시적 삶의 일부가 되어 그에게 "다다 씨"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도쿄로 상경한 후 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의 소개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폴 베를렌의 작품을 접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랭보의 영향은 그의 시뿐만 아니라 그의 보헤미안적 생활 양식에도 미쳐, 그를 "일본의 랭보"라 부르게 했다.
또한 미야자와 겐지의 시집 『봄과 수라』에 깊이 매료되어 그의 시에 나타난 불가사의한 우주관과 구어적인 울림에 감명받았다. 나카하라는 겐지의 사후에 출판된 『미야자와 겐지 전집』에 대한 추천문에서 "나는 그의 시집 『봄과 수라』를 10년간 애독하고 있다"며, "우리들의 감성에 가까운, 오히려 민요조의 순정시가, 이 순정적인 나라에서 지금까지 읽히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2.2. 시풍과 주제
나카하라 주야의 시는 다소 난해하고 고백적인 성향을 띠며, 시인의 삶 내내 지속되었던 고통과 멜랑콜리라는 감정을 전반적으로 드러낸다. 초기에는 일본 전통 시 형식인 단가를 선호했으나, 십대 후반부터는 다카하시 신키치와 도미나가 타로가 주창한 현대적인 자유시 형식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일본의 하이쿠와 단가에서 사용되는 전통적인 5음절과 7음절의 운율을 차용하되, 여기에 변형을 주어 리듬감 있고 음악적인 효과를 얻으려 했다. 그의 여러 시는 노래 가사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음악적 효과는 처음부터 신중하게 계산된 것일 수 있다.
나카하라의 시는 종종 혼란, 권태, 분노, 우울, 무관심 등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다. 그는 시에서 홀로 있음과 삶이 어둠으로 가득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한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경이로움을 자주 표현했으며, 기독교가 우세한 지역에서 자란 배경으로 인해 그의 시에서는 신앙에 대한 질문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는 시를 통해 영적인 세계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2.3. 주요 작품
나카하라 주야의 작품은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만 출판되었으나, 사후 그의 유고가 정리되면서 여러 작품집이 세상에 나왔다.
- 『산양의 노래』(山羊の歌Yagi no Uta일본어): 1934년 자비 출판으로 200부 한정으로 간행된 그의 유일한 생전 시집이다.
- 『지난날의 노래』(在りし日の歌Arishi Hi no Uta일본어): 죽기 직전 직접 편집하여 고바야시 히데오에게 맡긴 두 번째 시집으로, 그의 사후인 1938년 창원사에서 출판되었다.
- 번역 작품: 그는 아르튀르 랭보의 시에 심취하여 『랭보 시집』을 번역 출간했으며, 앙드레 지드의 작품 일부도 번역했다.
2.4. 동인지 활동 및 음악적 접목
나카하라 주야는 여러 문학 동인 활동에 참여했다. 가와카미 데쓰타로, 오오카 쇼헤이 등과 함께 동인 잡지 『바보들』(白痴群)을 창간하여 자신의 시와 번역 작품을 발표했으며, 도미나가 타로가 참여했던 동인 잡지 『야마마유』(山繭)에도 기고했다. 그의 작품은 많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했지만, 『시기』(四季)와 『분가쿠카이』(文學界)와 같은 작은 문학 잡지에서 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분가쿠카이』의 편집 책임자가 된 고바야시 히데오의 도움으로 1935년 4월 이후 매호 신작 시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의 시는 음악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27년 12월,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를 만나 그의 시에 곡이 붙여지기 시작했다. 모로이는 생전에 「아침의 노래」(朝の歌), 「임종」(臨終), 「공허한 가을」(空しき秋), 「누이야」(妹よ), 「봄과 아기」(春と赤ん坊) 등에 곡을 붙였으며, 이 중 「아침의 노래」와 「임종」은 1928년 전위 음악 그룹 '수르야'의 연주회에서 노래 가사로 발표되어 그의 시가 활자화된 첫 사례가 되었다. 『누이야』는 NHK 오사카 방송국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수르야' 동인이었던 우쓰미 세이치로(内海誓一郎)도 1930년에 「귀향」(帰郷), 「잃어버린 희망」(失せし希望)에 작곡했다.
나카하라 사후에도 이시와타리 히데오, 시미즈 오사무, 타다 다케히코 등 많은 작곡가들이 그의 시에 곡을 붙였다. 클래식 계통의 가곡과 합창곡이 많지만, 엔카와 포크송으로도 만들어졌다. 특히 토모카와 가즈키는 「내 안에서 울음을 멈추지 않는 시」(俺の裡で鳴り止まない詩)를 비롯한 여러 앨범에서 나카하라의 시를 가사로 사용했다. 가이엔타이의 곡 「멀리 왔다고 생각하니」(思えば遠くへ来たもんだ)는 나카하라 주야의 「어리석은 노래」(頑是ない歌)와 유사점이 많아 표절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다케다 데쓰야는 TV 프로그램에서 "20대 후반에 무아지경으로 읽어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나카하라의 시에서 '멀리 왔다고 생각하니'라는 구절이 떠올랐다"고 언급했다.
그의 대표작인 「더럽혀진 슬픔에...」(汚れつちまつた悲しみに......)는 오오타카 시즈루에 의해 곡이 붙여져 NHK의 『일본어 놀이』(にほんごであそぼ)에서 불렸다. 가수 쿠와타 케이스케도 이 시에 곡을 붙였으며, 글레이의 곡 「검게 칠해라!」(黒く塗れ!)와 그랑로데오의 곡 「SUGAR」에도 이 시의 구절이 등장한다. 「달빛」(月の光)은 이시카와 고지에 의해 곡이 붙여져 타마의 앨범에 수록되었다. 최근에는 다쓰노시 출신 작곡가 야부타 쇼이치(薮田翔一)가 나카하라의 시에 의한 가곡을 다수 작곡하고 있다.
3. 개인적인 삶
나카하라 주야의 개인적인 삶은 문학적 관계와 복잡한 인간관계, 그리고 가족사가 얽혀 있었다. 그의 예술적 기질과 더불어 알코올 중독 및 정신적 불안정 등 건강 문제로 인한 고뇌가 많았다.
3.1. 인간관계

나카하라 주야는 평생 여러 문학가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은 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였다. 1925년 11월, 주야의 동거인이었던 하세가와 야스코가 나카하라를 떠나 고바야시 히데오와 동거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카하라와 고바야시는 평생 가까운 친구로 남았다. 하세가와 야스코는 마키노 프로덕션의 여배우로 월급을 받았지만, 해고된 후에는 주야의 하숙생 신세가 되기도 했다. 1930년 12월, 고바야시와 헤어진 야스코가 쓰키지 소극장 연출가 야마카와 유키요(山川幸世)의 아이를 낳자, 주야는 그 아이에게 '시게키(茂樹)'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는 예방접종을 권하거나 땀띠와 작은 상처를 걱정하는 편지를 쓰는 등 각별히 아꼈으며, 때로는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기도 했다.
주야는 1927년 12월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를 만났고, 1928년 5월 4일에는 전위 음악 그룹 '수르야'의 제2회 발표 연주회에서 모로이가 나카하라의 시 「임종」과 「아침의 노래」에 곡을 붙여 노래했다. 그 외에도 가와카미 데쓰타로, 오오카 쇼헤이, 후루야 쓰나타케, 야스하라 요시히로, 다카타 히로아쓰, 우에다 도시히데, 마사오카 주사부로, 나카무라 미노루, 아키야마 순, 히구치 사토루, 사사키 미키로, 기타가와 토루 등 다양한 문학인들과 교류했다.
3.2. 가족과 자녀

나카하라 주야는 1933년 12월 먼 친척인 우에노 다카코(上野孝子)와 결혼했다. 그의 첫 아들 후미야(文也)는 1934년 10월에 태어났다. 그러나 1936년 11월, 2세였던 후미야가 소아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신경쇠약에 빠졌다. 주야는 사흘간 한숨도 자지 않고 아들을 간호했으나 결국 아들을 잃었고, 장례식에서 아들의 유체를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그는 49재 동안 매일 승려를 불러 독경을 부탁하며 아들의 위패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록 12월에 둘째 아들 요시마사(愛雅)가 태어났지만, 그는 이 상실감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많은 그의 후기 시들은 이 거대한 고통을 완화하려는 기억과 시도처럼 보인다. 주야의 죽음 이후 약 3개월 뒤인 1938년 1월, 둘째 아들 요시마사도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아내 다카코는 나카하라 사후, 그의 아버지 쪽 친척인 군인과 재혼했다. 그녀는 나카하라와 문사들과의 교류에서 고생이 많았던 듯, "나는 그런 패거리들에게는 더 이상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카하라 가문은 대대로 요시키 모리 가문의 가신이었으며, '신인가(新家中原家)'로 불렸다. 중야의 실조부인 스케유키(助之)는 학문에 뜻을 두어 상경하여 영어를 배우고 철도국에서 통역, 번역 등의 일을 맡았으나, 1886년 병으로 37세에 요절했다. 나카하라의 어머니 후쿠는 그의 외동딸이었다. 양조부 마사쿠마는 나카하라 의원을 개업했으며, 아내 코마와 함께 기독교인이었다. 마사쿠마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형의 유자였던 후쿠를 양녀로 삼았다. 나카하라 주야에게는 네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아쓰로(亜郎, 1910~1915)는 4세에 병사했으며, 고조(恰三, 1911~1931)는 20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시로(思郎, 1913~1982)는 교토 제국 대학을 졸업하고 우베 흥산에 근무했으며, 전후에는 야마구치로 돌아와 나카하라 주야 연구에 몰두했다. 고로(呉郎, 1916~1975)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유일하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어, 폐쇄되었던 나카하라 의원을 쇼와 20년경에 재개업했다. 주야의 남동생들 중 가장 장수했던 주로(拾郎, 1918~2003)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1950년 먼 친척인 이토(伊藤) 가문과 양자 결연을 맺어 이토 주로로 개성했다. 그는 광고 회사에서 정년퇴직한 후 하모니카 연주자로 활동하며 일본 하모니카 예술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3.3. 건강 및 개인적 고뇌
나카하라 주야는 알코올 중독과 정신적 불안정으로 인해 많은 고뇌를 겪었다. 22세 때, 동인 『바보들』의 동료인 무라이 야스오(村井康男), 아베 로쿠로(阿部六郎)와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길가의 가로등을 우산으로 부수는 사건이 있었다. 집주인이자 마을 의원이었던 그는 세 사람의 뒤를 쫓아 파출소에 신고했고, 무라이와 아베는 교사였기 때문에 5일 만에 풀려났지만, 신분이 불확실했던 나카하라는 15일간이나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경찰에 대한 공포로 오랫동안 남았다.
아오야마 지로는 세상을 떠난 부인의 동생에게 바 '윈저'를 개점시켰는데, 고바야시 히데오, 이부세 마스지, 오오카 쇼헤이 등 젊은 문인들이 단골이었으나, 나카하라가 매일 들러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 1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사카구치 안고는 '윈저'에서 나카하라와 알게 되었는데, 나카하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급이 안고와 친한 것을 못마땅해하며 갑자기 달려들어 때리려 했으나, 덩치 큰 안고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먹을 휘두를 뿐이어서 안고는 크게 웃었다고 한다. 오오카 쇼헤이는 『바보들』 동인회에서 술 취한 나카하라에게 맞은 적이 있었고, 나카무라 미쓰오는 "너를 죽이겠다"는 말을 들으며 맥주병으로 맞은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요시다 히데카즈는 자신의 저서에서 레코드를 구입한 후 남은 돈으로 술을 마시려던 나카하라를 억지로 집에 데려와 함께 음악을 들었던 에피소드를 기록했다. 다자이 오사무는 동인지 『푸른 꽃』을 창간하면서 단 가즈오(檀一雄)와 나카하라를 초대했다. 히가시나카노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 나카하라가 "푸른 고등어가 하늘에 떠오른 듯한 얼굴을 하고선", "너는 어떤 꽃을 좋아하냐"고 시비를 걸었고, 다자이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모, 모, 노, 하, 나"라고 답하자, 나카하라는 "쳇, 그러니까 너는"이라며 비하했다. 『푸른 꽃』은 1호로 끝나고 다자이는 나카하라를 "군침 흘리는 민달팽이 같은 놈이라서 도저히 어울릴 수 없다"며 거부하게 되었지만, 나카하라의 죽음에 대해 다자이는 "죽고 보니 역시 나카하라다, 안 그래? 차원이 달라. 다치하라 미치조는 죽어서 천재가 되었다고 하지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전혀 시시하다"며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
그는 1932년경 노이로제를 겪으며 강박 관념과 환청을 경험하기도 했다. 1937년 1월 9일,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정신적 불안정으로 어머니 후쿠에 의해 지바시 지바데라 마을에 위치한 나카무라 고쿄 요양소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작업 요법과 일기 쓰기 지도를 받았으며, 2월 15일 퇴원했다. 하지만 속아서 입원했다며 아내에게 난폭하게 굴었기 때문에 다시 어머니 후쿠가 불려왔다. 아들 후미야의 기억이 담긴 도쿄를 떠나기 위해 가마쿠라의 센가야(扇ガ谷)에 있는 주후쿠지(寿福寺) 경내의 셋집으로 이사했다.
4. 죽음
나카하라 주야는 1937년 10월 22일, 30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성 뇌막염으로 가나가와현 가마쿠라 요조인 병원(현재 도쿠슈카이 기요카와 병원)에서 영면했다.
그해 여름부터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으며, 9월에는 왼쪽 중지 통증을 호소하며 통풍 진단을 받았다. 9월 15일, 노다 서점으로부터 번역 시집 『랭보 시집』이 출간되어 호평을 받았다. 9월 23일에는 『지난날의 노래』 원고 정서를 마친 뒤 이튿날 고바야시 히데오에게 건넸다. 10월 4일에는 요코하마의 야스하라 요시히로를 방문했을 때 두통과 전선이 두 개로 보이는 시력 장애를 호소했으며, 보행이 어려워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10월 5일, 가마쿠라역 앞 광장에서 쓰러져 이튿날 병원에 입원했다. 처음에는 뇌종양이 의심되었으나, 후에 급성 뇌막염으로 진단받았다(현재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여겨진다). 10월 15일, 어머니 후쿠와 동생 시로(思郎)가 급히 달려왔을 때는 이미 의식이 혼탁한 상태였다. 메이지 대학에서 강의하던 고바야시는 일주일간 휴강하며 병실을 지켰고, 가와카미 데쓰타로도 매일 도쿄에서 병원으로 통원했다. 그는 고통 없이 평화로운 죽음을 맞았다.
장례식은 10월 22일과 23일 이틀에 걸쳐 자택에서 영결식이 치러졌고, 24일 주후쿠지 본당에서의 고별식을 거쳐 즈시시 고쓰보(小坪)의 세이코샤(誠行社)에서 다비(火葬)에 부쳐졌다. 장례식 후 거의 한 달 뒤, 유골은 그의 시 「매미」(蟬)에서 노래된 기시키 강(吉敷川) 근처의 경총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 요시마사도 그로부터 약 3개월 뒤인 1938년 1월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5. 문학적 유산과 평가
나카하라 주야는 생전에는 주류 시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에 작품들이 재조명되면서 일본 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5.1. 사후 조명
생전에 출판된 그의 시집은 1934년 자비 출판된 『산양의 노래』 단 한 권뿐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 두 번째 시집인 『지난날의 노래』를 편집하여 고바야시 히데오에게 맡겼는데, 고바야시는 그의 유작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오오카 쇼헤이는 나카하라의 미수록 시와 일기, 편지 등을 모아 『나카하라 주야 전집』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출간했다.
나카하라 주야는 생전에는 주류 시인으로 분류되지 않았지만, 그의 정서적이고 서정적인 시들은 오늘날까지도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폭넓고 지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현재 그의 작품은 일본 학교에서 교과 과정의 일부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모자를 쓴 채 멍하니 응시하는 그의 초상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사후에는 『분가쿠카이』(文學界), 『기원』(紀元), 『시기』(四季) 등 여러 문학 잡지들이 잇달아 추모 특집호를 기획하며 나카하라에 대한 재평가를 이어갔다. 전후에는 오오카 쇼헤이가 편집 및 해설한 『나카하라 주야 시집』이 1947년 창원사에서 간행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그의 시는 각종 문고본이나 시가 전집에 수록되면서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게 되었다.
5.2. 나카하라 주야 문학상
나카하라 주야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야마구치 시는 1996년 출판사 세이도시야와 가도카와 쇼텐의 지원을 받아 나카하라 주야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신선한 감수성"을 특징으로 하는 뛰어난 현대 시집에 매년 수여된다. 수상자에게는 100.00 만 JPY의 상금이 주어지며, 초기에는 수상작이 영어 번역본으로도 출판되었으나, 최근에는 이러한 번역 지원이 중단되었다. 나카하라의 동거인이었던 하세가와 야스코의 발안으로 나카하라의 사후에 『시기』지상에서 시인에게 주어지던 동명의 상이 있었으나, 이는 3회 만에 종료되었으며 현재 야마구치 시가 주최하는 나카하라 주야상과는 별개의 상이다.
5.3. 문화적 영향
나카하라 주야의 시는 오늘날 대중문화에도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음악**: 산성 포크 가수 토모카와 가즈키는 나카하라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내 안에서 울음을 멈추지 않는 시』와 『나카하라 주야 작품집』 등 두 개의 앨범을 녹음했다.
- 애니메이션 및 게임**:
- 애니메이션 『우주전함 야마토 2199』에서 사나다 시로(真田志郎) 장교는 종종 나카하라의 시집을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 『문호 스트레이독스』와 『문호와 연금술사』라는 애니메이션 및 게임에서 나카하라 주야는 동명의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특히 『문호 스트레이독스』에서는 그의 시 「더럽혀진 슬픔에...」를 모티브로 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로 나온다. 이 캐릭터의 성우인 다니야마 기쇼는 그랑로데오의 보컬이기도 하다.
- 락 밴드 글레이의 곡 「검게 칠해라!」(黒く塗れ!)와 그랑로데오의 곡 「SUGAR」 가사에도 그의 시 「더럽혀진 슬픔에...」의 구절이 등장한다.
5.4. 평가와 비평
나카하라 주야는 생전에 고바야시 히데오, 가와카미 데쓰타로 등의 친구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았으며, 무로 사이세이, 쿠사노 신페이, 하기와라 사쿠타로 등도 그의 독특한 시 세계를 귀중하게 여겼다. 그의 사후 『문학계』, 『기원』, 『시기』 등 여러 문학 잡지들이 잇달아 추모 특집을 기획하며 나카하라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다. 전후에는 오오카 쇼헤이가 편집 해설한 『나카하라 주야 시집』이 1947년 간행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49년 『랭보 시집』, 그리고 1951년 『나카하라 주야 전집』 전3권이 간행되면서 그의 시는 각종 문고본이나 시가 전집에 수록되어 광범위한 독자층을 얻었다.
오오카 쇼헤이는 나카하라의 성격에 대해 "농가 출신으로 입신양명한 아버지의 '거친 피'와 봉건시대 무사 가문의 정제된 어머니 쪽의 '정적인 피'가 섞인 것"이라 해석했다. 또한 나카하라의 '광대'스러운 모습은 일종의 저항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듯했으며, 누군가를 독설할 때 꽤나 즐거워 보였다고 회고했다. 오오카는 나카하라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는 영혼의 아름다움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사악한 면도 있었다"고 언급했다.
나카하라는 자신의 이름이 모리 오가이가 지어준 것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모리 오가이는 나카하라의 아버지 겐스케가 군의학교에 재학할 당시 교장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후쿠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뤼순의 군의관 '나카무라 로쿠야'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나카하라는 자신의 이름이 흔치 않은 독특한 발음 때문에 주변에서 놀림을 받기도 하여 자신의 이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널리 알려진 그의 검은 모자 사진은 복사 및 리터칭을 반복하여 실제 나카하라 본인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는 의견도 있다. 오오카 쇼헤이에 따르면 "주름 많고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 얼굴"이었다고 한다.
나카하라의 아버지 겐스케가 사망한 해, 어머니 후쿠는 나카하라가 대학에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친척들에게서 알게 되어 편지로 추궁했다. 그러자 나카하라는 가명을 써서 다른 사람인 척하며, 계속 송금을 보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후쿠에게 보냈다. 후쿠는 필적을 통해 나카하라 본인임을 의심하면서도 송금을 계속했다고 한다.
6. 연표
- 1907년 (메이지 40년) 4월 29일 - 야마구치현 요시키군 시모우노료촌(현 야마구치시 유다온천)에서 아버지 가시무라 겐스케와 어머니 후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 1909년 (메이지 42년) - 아버지 겐스케의 전근에 따라 히로시마로 이주했다.
- 1912년 (메이지 45년/다이쇼 원년) - 가나자와로 이주했다.
- 1914년 (다이쇼 3년) 3월 - 아버지 겐스케가 조선 용산 연대 군의관이 되어 가족은 야마구치로 돌아왔다.
- 1914년 (다이쇼 3년) 4월 - 시모우노료 보통소학교에 입학했다.
- 1915년 (다이쇼 4년) 1월 - 동생 쓰구로(亜郎)가 병사했다. 나카하라는 훗날 동생의 죽음을 노래한 것이 첫 시였다고 기록했다.
- 1915년 (다이쇼 4년) 8월 - 아버지 겐스케가 야마구치로 복귀했다.
- 1915년 (다이쇼 4년) 10월 - 나카하라 가문과 양자 결연을 맺어 온 가족이 나카하라 성을 쓰게 되었다.
- 1917년 (다이쇼 6년) 4월 - 아버지 겐스케가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나카하라 의원을 물려받았다.
- 1918년 (다이쇼 7년) 5월 - 야마구치 사범 부속 초등학교(현 야마구치 대학 교육학부 부속 야마구치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 1920년 (다이쇼 9년) 2월 - 잡지 『婦人画報』와 『防長新聞』에 투고한 단가가 입선했다.
- 1920년 (다이쇼 9년) 4월 - 현립 야마구치 중학교(현 야마구치 현립 야마구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 1922년 (다이쇼 11년) 5월 - 두 친구와 함께 가집 『末黒野』를 간행했다.
- 1923년 (다이쇼 12년) 3월 - 유급이 결정되어 교토의 리쓰메이칸 중학교 3학년으로 전학했다.
- 1923년 (다이쇼 12년) 늦가을 - 다카하시 신키치의 『다다이스트 신키치의 시』를 만나 다다이즘에 심취하게 되었다.
- 1923년 (다이쇼 12년) 겨울 - 극단 배우(표현좌)인 하세가와 야스코를 알게 되었고, 이듬해부터 동거했다.
- 1924년 (다이쇼 13년) - 도미나가 타로를 만나 프랑스 시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 1925년 (다이쇼 14년) - 고바야시 히데오를 만났다.
- 1925년 (다이쇼 14년) 3월 - 야스코와 함께 도쿄로 상경했다.
- 1925년 (다이쇼 14년) 11월 - 야스코가 고바야시의 곁으로 떠났고, 도미나가 타로가 병사했다.
- 1926년 (다이쇼 15년/쇼와 원년) 4월 - 니혼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했으나 9월에 퇴학했다.
- 1926년 (다이쇼 15년/쇼와 원년) 11월경 - 아테네 프랑세에 다니기 시작했다. 『야마마유』(山繭)에 「요절한 도미나가」(夭折した富永)를 기고했다.
- 1927년 (쇼와 2년) 12월 -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를 만나 음악 단체 '수르야'에 드나들게 되었다.
- 1928년 (쇼와 3년) 5월 - '수르야' 제2회 발표회에서 모로이 사부로가 나카하라의 시에 작곡한 「아침의 노래」, 「임종」이 불렸다. 아버지 겐스케가 사망했다. 고바야시 후미타케의 소개로 다카타 히로아쓰를 알게 되었다.
- 1929년 (쇼와 4년) 4월 - 가와카미 데쓰타로, 오오카 쇼헤이 등과 함께 동인 잡지 『바보들』(白痴群)을 창간하여 이듬해 폐간되기 전까지 6호를 간행했다.
- 1930년 (쇼와 5년) 9월 - 주오대학 예과에 편입학하여 외무 서기생을 지망했다.
- 1931년 (쇼와 6년) 2월 - 다카타 히로아쓰가 프랑스로 건너갈 때 나카하라와 야스코가 도쿄역까지 배웅했다.
- 1931년 (쇼와 6년) 4월 - 도쿄 외국어 학교 전수과 프랑스어부에 입학했으며, 우에다 도시히데를 만났다.
- 1933년 (쇼와 8년) - 『랭보 시집(학교 시절의 시)』을 삼笠서점에서 간행했다.
- 1933년 (쇼와 8년) 3월 - 도쿄 외국어 학교를 수료했다.
- 1933년 (쇼와 8년) 5월 - 동인 잡지 『기원』(紀元)에 참여했다.
- 1933년 (쇼와 8년) 12월 - 먼 친척인 우에노 다카코와 결혼했다.
- 1934년 (쇼와 9년) 8월 - 지드(Gide)의 「달력」(暦)을 『지드 전집 3권』(건설사)에 번역하여 실었다.
- 1934년 (쇼와 9년) 10월 - 장남 후미야(文也)가 태어났다. 연말에는 시집 『산양의 노래』를 간행했다.
- 1935년 (쇼와 10년) 5월 - 『역정』(歴程)이 창간되어 동인이 되었다. 12월에는 「푸른 눈동자」(青い瞳)를 『시기』(四季)에 발표했다.
- 1936년 (쇼와 11년) 가을 - 일본방송협회 초대 이사였던 친척 나카하라 이와사부로의 주선으로 방송국 입사 면접을 봤으나 불합격했다.
- 1936년 (쇼와 11년) 11월 - 아들 후미야가 사망했다. 자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정신이 불안정해졌다. 차남 요시마사(愛雅)가 태어났다.
- 1937년 (쇼와 12년) 1월 - 지바시의 나카무라 고쿄 요양소에 입원했다.
- 1937년 (쇼와 12년) 2월 - 퇴원 후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의 센가야(扇ガ谷)로 이사했다.
- 1937년 (쇼와 12년) 여름 - 도쿄 방송국(현 NHK 라디오 제1방송) 라디오 방송에서 쿠사노 신페이가 나카하라의 「여름」을 낭독했다.
- 1937년 (쇼와 12년) 9월 - 『랭보 시집』(노다 서점)을 간행했다. 『지난날의 노래』 원고를 정서하여 고바야시 히데오에게 맡겼다.
- 1937년 (쇼와 12년) 10월 22일 - 고향으로 이주할 예정이었으나, 결핵성 뇌막염을 발병하여 사망했다. 법명은 방광원현공문심거사(放光院賢空文心居士)이며, 묘소는 야마구치시 기시키(吉敷)에 있다.
- 1938년 (쇼와 13년) 1월 - 요시마사(愛雅)가 사망했다.
- 1938년 (쇼와 13년) 4월 - 창원사에서 『지난날의 노래』를 간행했다.
- 1972년 (쇼와 47년) - 유다의 생가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 1994년 (헤이세이 6년) - 야마구치 시 유다온천의 생가 터에 나카하라 주야 기념관이 개관했다.
- 1996년 (헤이세이 8년) - 야마구치 시 등이 새롭게 나카하라 주야상을 창설했다. 정식 상은 나카하라 주야의 두상 청동상(다카타 히로아쓰 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