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나라사키 료는 사카모토 료마와의 극적인 만남과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의 사후에는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살았다.
1.1. 출생 및 성장 배경

나라사키 료는 덴포 12년 음력 6월 6일(1841년 7월 23일) 교토의 후시미 토미노코지 로쿠카쿠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의사 나라사키 쇼사쿠(楢崎将作일본어)와 사다(貞일본어, 또는 나쓰(夏일본어))의 맏딸이었다. 이설로는 그녀의 친아버지가 니시진오리 상인이었고 쇼사쿠의 양녀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녀에게는 여동생인 미쓰에(光枝일본어, 후의 나카자와 미쓰에(中沢光枝일본어))와 기미(起美일본어, 후의 스게노 기미(菅野起美일본어)), 그리고 남동생인 다이이치로(太一郎일본어)와 겐키치(健吉일본어)가 있었다.
나라사키 가문은 본래 조슈번의 사무라이 계급이었으나, 료의 증조부 대에 주군의 노여움을 사 낭인이 되었다. 료의 아버지 쇼사쿠는 쇼렌인노미야의 시의(侍医)였기 때문에, 료는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화도, 향도, 다도 등을 배웠지만, 요리에는 서툴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근왕가였던 아버지가 안세이 대옥으로 체포되어 투옥된 후, 사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큐 2년(1862년)에 병사하면서 남겨진 가족은 순식간에 곤궁에 처하게 되었다. 가구와 의류를 팔아 연명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어려워졌다.
어머니가 악인에게 속아 여동생 기미가 시마바라의 마이코로, 미쓰에가 오사카의 조로로 팔려갈 위기에 처하자, 료는 자신의 기모노를 팔아 돈을 마련했다. 오사카로 내려간 료는 칼을 품에 안고 죽음을 각오한 채 두 남자를 상대하며 "죽여라, 죽여라, 죽으러 여기까지 오사카에 왔다. 이거 재미있으니 죽여라"라고 호통을 쳐서 여동생을 구해냈다는 무용담이 전해진다. 사카모토 료마는 훗날 그녀의 이러한 용기 있는 행동과 곤궁한 삶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참으로 재미있는 여자"라고 평했다.
이후 료는 시치조 신치(七条新地일본어)의 여관 '오기이와(扇岩일본어)'에서 일했고, 어머니 사다는 호코지 대불전 근처에 위치한 덴추구미 잔당을 포함한 도사 번 출신 존왕양이가들의 은신처에서 식사를 준비하며 생계를 이었다.
1.2. 사카모토 료마와의 만남

사카모토 료마와 료는 겐지 원년(1864년)경에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료의 회고에 따르면, 료마와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을 물었고,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써 주자 료마가 자신과 이름이 같다며 웃었다고 한다. 료에게 반한 료마는 어머니 사다에게 료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요청했고, 사다도 이를 허락했다.
같은 해 6월, 이케다야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호코지 근처에서도 아이즈번의 수색이 이루어져 료마 일가는 가재도구를 몰수당하고 곤궁에 처했다. 료마는 이때의 료 일가에 대해 "매일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하는, 실로 가련한 생활이었다"고 언급했다. 료마는 료의 이러한 처지에 대해 게이오 원년(1865년) 9월 9일 자 편지에서 누나 오토메에게 상세히 적어 보냈고, 그녀를 "참으로 재미있는 여자"라고 평가했다. 료의 훗날 회상에 따르면, 같은 해 8월 1일에 료마와 료는 간략한 혼례('우치이와고토')를 올렸다.
1.3. 데라다야 사건과 신혼여행

여러 지역을 분주히 오가던 료마는 평소 친분이 깊던 후시미 테라다야 여관의 여주인 오토세(お登勢일본어)에게 료를 맡겼다. 료는 '오하루(お春일본어)'라는 가명으로 오토세의 양녀 행세를 했다. 이 시기에 료는 료마와 함께 걷다가 신선조와 마주쳐 료마가 황급히 숨었던 이야기나, 기리노 도시야키에게 침실을 습격당했던 이야기 등을 훗날 회고했다. 또한, 신선조 국장 곤도 이사미가 료에게 반해 빗과 비녀를 사다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게이오 2년(1866년) 1월 22일, 료마의 중개로 삿초 동맹이 성립되었다. 그 다음 날인 1월 23일, 료마는 경호원인 조슈번 사무라이 미요시 신조와 함께 테라다야에 묵고 있었다. 그날 저녁, 목욕 중이던 료는 창밖에서 다수의 포졸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기지를 발휘하여 급히 겹옷 한 벌을 걸치고 재빨리 욕조에서 뛰쳐나와 노끈도 매지 않은 채 정원으로 달려 나갔고, 여관 2층에 있던 료마와 미요시에게 암살자들의 접근을 알렸다. 료의 기지 덕분에 료마와 미요시는 불시에 습격당하지 않고 응전할 수 있었고, 부상을 입었지만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료는 료마 일행을 가옥의 뒷문으로 도망치게 했는데, 뒷문에는 큰 돌이 얹힌 쯔께모노 통이 있어 그것들을 치우고 도망갈 길을 만들었다. 훗날 료가 확인해보니 그 통과 돌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무게였다고 한다. 료마는 이 사건의 전말을 게이오 2년 12월 4일 자 편지에서 형 사카모토 곤페이에게 상세히 보고하며, 이때 료를 "이름은 료, 지금은 아내입니다"라고 소개했다. 또한,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 료 여인이 있었기에 료마의 목숨이 살았습니다"라며 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테라다야 사건으로 료마는 양손가락에 중상을 입었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권유로 칼자국 치료를 위해 사쓰마로 떠나게 되었다. 료마와 료는 3월 4일에 사쓰마번 선박 '미쿠니마루(三国丸일본어)'를 타고 오사카를 출항했다. 배 위에서 료마는 "천하가 평정되면 기선을 만들어 일본을 순회하고 싶다"고 말했고, 료가 "집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배만 있으면 충분해요. 외국까지 돌아보고 싶습니다"라고 되받아치자, 료마는 "별난 여자다"라며 웃었다. 훗날 이 이야기를 들은 사이고도 "별난 여자였기에 그대의 목숨이 살았다"며 크게 웃었다고 료는 회고했다.
배는 3월 10일에 가고시마에 도착했고, 료마와 료는 사쓰마번 사무라이 요시이 코스케(吉井幸輔일본어)와 동행하여 온천 요양에 나섰다. 일행은 히나타야마 온천(日当山温泉일본어)과 시오미즈 온천(塩浸温泉일본어)에 가서 이누카이 폭포를 구경하거나 산에 들어가 권총으로 새를 쏘며 시간을 보냈다. 또한, 기리시마산 정상에 있는 아마노사카보코를 보기 위해 다카치호봉을 올랐는데, 료마와 료는 동행했던 다나카 기치베에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사카보코를 뽑아내는 장난까지 쳤다. 료마는 이 사쓰마 여행의 모습을 게이오 2년 12월 4일 자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 그림을 곁들여 상세히 기록했다. 또한,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도 료는 이 여행에 대한 회고담을 남겼다.
료마를 처음 세상에 소개한 사카자키 시란의 『간케쓰센리코마』에서는 이 여행을 서양인들이 하는 '허니 문'(Honeymoon영어)과 연결하여 설명했고, 현재는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고마쓰 기요카도가 더 먼저였다는 이설도 존재한다.
1.4. 료마 사후의 삶
사카모토 료마는 게이오 3년(1867년) 11월 15일, 교토 오미야(近江屋일본어)에서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오미야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죽음은 료에게 큰 고통과 함께 긴 방랑의 시작을 알렸다.
1.4.1. 초기 방랑과 지원
료마의 사망 소식은 12월 2일에 시모노세키에 전해졌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료는 머리카락을 잘라 불단에 올리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료마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훗날 료는 료마가 사망하던 밤에 피투성이가 된 료마가 꿈에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료마 사후, 한동안은 (테라다야 사건 때도 료마와 함께 행동했던) 미요시 신조가 료를 보살폈다. 또한 생전 료마의 뜻에 따라 여동생 기미가 해원대 대원 스게노 가쿠베에(菅野覚兵衛일본어, 치야 도라노스케)와 결혼했다.
게이오 4년(1868년) 3월, 료는 료마의 미망인으로서 도사의 사카모토 가문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사카모토 가문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약 3개월 만에 그곳을 떠나게 된다. 료마의 누나 오토메와의 불화가 이유라는 설도 있지만, 료 본인은 훗날 "오토메 씨는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불화가 있었던 것은 의형인 곤페이 부부였는데, 료는 훗날의 회고담에서 료마에게 내려질 포상금을 탐내 자신을 괴롭히고 쫓아냈다고 원망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후 료는 여동생 기미의 시댁인 고치현 아키군 게이세이촌 와시키(和食일본어)의 치야(千屋일본어) 가문(스게노 가쿠베에의 본가)의 신세를 졌다. 그러나 가쿠베에가 해군성에 출사하여 미국으로 유학 가게 되면서 치야 가문에도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었고, 메이지 2년(1869년) 중반에 도사를 떠나게 되었다. 도사를 떠날 때 료는 료마로부터 받은 수많은 편지들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둘만의 것이라며 모두 태워달라고 부탁했고, 이 때문에 료에게 보낸 료마의 편지는 단 1통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료가 한때 머물렀던 게이세이촌에는 '오료와 기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도사를 떠난 료는 테라다야의 오토세에게 의지해 교토로 갔고, 료마의 묘소 근처에 암자를 짓고 묘지기로서 생활했다. 그러나 교토에서도 머물기 어려워져 결국 도쿄로 향했다. 료는 도쿄에서 지인인 가쓰 가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의지했다. 사이고는 동정하여 20 JPY를 원조했지만, 때마침 정한론에 패배하여 하야하던 시기였기에 돌아오면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이후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후에는 전 사쓰마번 사무라이 요시이 도모자네와 전 해원대 대원 하시모토 규타유의 보살핌을 받았다. 한편 료마의 가독을 이은 사카모토 나오 (다카마쓰 다로, 오노 준스케)는 찾아온 료를 냉정하게 돌려보냈다. 전 해원대 대원들 사이에서는 료의 평판이 좋지 않아, 유신 후에 출세한 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녀를 원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다나카 미쓰아키 (전 육원대 대원이며 훗날 궁내대신에까지 출세)의 회고담에 따르면, 스이잔카이 (다케치 한페이타 등 도사 순난자를 현창하는 모임) 회합에서 료의 처우가 화제에 올랐을 때도 여동생 사위인 스게노 가쿠베에마저 "품행이 나빠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니 돌봐줄 수 없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료는 진심으로 친절했던 사람은 사이고와 가쓰, 그리고 오토세뿐이었다고 말했다.
1.4.2. 재혼과 말년

메이지 7년(1874년), 가쓰 가이슈 또는 스게노 가쿠베에의 소개로 가나가와 숙의 요정 '다나카야(田中家일본어)'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다나카야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녀가 고집이 세어 다루기 힘들었다고 하지만, 이 일화의 진위는 불분명하다.
이듬해 메이지 8년(1875년), 노점상 니시무라 마쓰베에와 재혼하여 니시무라 쓰루(西村ツル일본어)가 되었고, 요코스카시에서 살았다. 야스오카 히데호와 나카조 나카코(가쿠베에의 조카)의 증언에 따르면 니시무라 마쓰베에는 원래 포목점의 젊은 사장이었으며, 테라다야 시절 료와 아는 사이였다. 유신 동란기에 가업이 기울어 요코스카로 이주하여 노점상으로 생계를 꾸렸고, 가쿠베에의 집에도 출입했기에 가쿠베에(또는 오토세)의 도움으로 료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요정 다나카야에서 종업원으로 일할 때 마쓰베에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진위는 불분명하다.
마쓰베에와의 혼인 신고 후에는 어머니 사다를 모셔오고, 여동생 미쓰에의 아들 마쓰노스케(松之助일본어)를 양자로 삼았다. 메이지 24년(1891년)에는 어머니 사다와 양자 마쓰노스케를 연이어 잃었다.
메이지 16년(1883년), 도요 신문에 게재된 사카자키 시란의 『간케쓰센리코마』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동안 잊혔던 료마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전기(傳記)로서 사실 오류와 창작이 많은 내용이었기에, 료도 "오류가 많아서 분하다"고 말했다.
이에 야스오카 히데호와 가와다 세쓰잔이 료의 집을 방문하여 그녀의 구술을 기록한 작품들을 저술했다. 야스오카의 저작은 메이지 32년(1899년)부터 이듬해 메이지 33년(1900년)까지 잡지 『분코(文庫일본어)』에 게재된 『항혼향(反魂香일본어)』, 『속항혼혼향(続反魂香일본어)』, 『유신의 잔몽(維新の残夢일본어)』이며, 가와다의 저작은 메이지 32년에 도요 신문에 게재된 『천리마 후일담(千里駒後日譚일본어)』, 『천리마 후일담 습유(千里駒後日譚拾遺일본어)』이다. 료는 『천리마 후일담』 마지막에서 "료마가 살아있었더라면, 또 뭔가 재미있는 일도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메이지 30년(1897년)에 야스오카 히데호가 방문했을 때 료는 요코스카의 좁고 가난한 나가야에서 살고 있었다. 만년에는 알코올 의존증 상태였으며, 술에 취하면 "나는 료마의 아내다"라며 마쓰베에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남편을 잃은 여동생 미쓰에가 료에게 의지하게 되어 세 사람이 함께 살게 되었으나, 이내 마쓰베에와 미쓰에가 내연 관계가 되어 둘이 료의 곁을 떠나 따로 살게 되었다. 료는 퇴역 군인 구도 가이타로의 보호를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러일 전쟁 발발 직전인 메이지 37년(1904년), 미쓰코 황후의 꿈에 사카모토 료마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료마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고, 료의 존재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메이지 39년(1906년) 1월, 료가 위독해지자 황후궁대부 가와바타 게이조 (전 육원대 대원)로부터 위문 전보가 도착했고, 이노우에 요시카 대장이 구호 모금 운동을 벌였다.
1.5. 죽음
료는 메이지 39년(1906년) 1월 15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요코스카시 오쓰(大津일본어)의 신락사에 안장되었다. 오랫동안 묘비를 세울 수 없었으나, 다나카 미쓰아키와 가와바타 게이조의 원조를 받아 사망 8년 후인 다이쇼 3년(1914년) 8월, 여동생 나카자와 미쓰에가 시주가 되고 니시무라 마쓰베에 등이 찬조인이 되어 묘를 건립했다. 묘비에는 남편 마쓰베에의 이름 대신 "정4위 사카모토 료마의 아내 료코(贈正四位阪本龍馬之妻龍子之墓일본어)"라고 새겨져 있다. 마쓰베에는 이로부터 반년 뒤 70세로 사망했다. 또한, 료마가 잠든 교토 료젠 고코쿠 신사에도 그녀의 유골이 일부 분골되어 안치되었다. 2010년 1월 15일, 신락사에서는 료마 사망 143년 만에 합동 위령제가 거행되기도 했다.
고마쓰 여주인이었던 야마모토 나오에(山本直枝일본어)는 "오료는 저보다 10살 정도 연상이었습니다. 메이지 중년 무렵 몰락하여 요코스카로 흘러와 가난하게 살다가 러일전쟁이 발발한 해에 68세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품격 있는, 단정하고 늠름한 용모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사카모토 료마라면 해군의 창시자이자 막부 말기의 준걸로 유명하지만, 그 시절에는 돌아보는 사람도 없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인물 좋고 교육받은 사람이었기에 이곳저곳에서 재혼을 끊임없이 권했지만, 료마 씨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절개를 지켰기에 결국 인연이 끊어지고 다시 혼자가 되어 여전히 머리 손질을 도우며 술에 취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랬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 힘쓴 사람이기도 했고, 그 반생은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라고 회고했다.
2. 사후 평가와 유산
나라사키 료는 사카모토 료마의 아내로서 그의 생명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료마 사후에는 철저히 잊혀진 존재로 살아갔다. 그녀의 삶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과 알코올 의존증으로 점철되었으며, 료마의 명성이 사후에 점차 높아졌음에도 그녀는 그 빛을 보지 못했다. 료마의 동지들조차 그녀를 냉대했고, 재혼 후에도 빈곤과 고독 속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료마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료의 희생과 료마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 그리고 그녀가 겪었던 비극적인 삶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특히 데라다야 사건에서의 그녀의 기지와 용기, 그리고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을 함께한 동반자로서의 이미지는 현대에 이르러 재조명되며 그녀가 단순한 '료마의 아내'가 아닌, 격동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낸 한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녀의 쓸쓸한 말년과 묘비명에 '료마의 아내'라는 이름이 새겨진 사실은 그녀가 끝까지 료마의 그림자 속에 살았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녀의 존재가 료마의 역사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지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유산이 되었다.
3. 오료의 사진을 둘러싼 논란

현존하는 오료의 사진은 메이지 37년(1904년) 12월 15일 자 도쿄 니로쿠 신문에 게재된 만년의 사진이 유일하다. 이 사진은 오료의 집을 방문하여 구술을 기록한 야스오카 히데호가 촬영한 것으로, 메이지 33년(1900년)에 잡지 『분코』에 게재된 『속항혼향』의 말미에서 게재를 예고했던 사진이다. 야스오카는 『속항혼향』 말미에서 "현 오료 부인은 이번에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으니, 이는 아마도 천하의 절품일 것이다"라고 언급하여,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오료의 젊은 시절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쇼와 54년(1979년)에 오미야 이구치 신스케 가문의 앨범(나카이 히로시 소장 사진 앨범)에서 한 여성의 서 있는 모습의 사진이 발견되었고, 또한 『세피아색의 초상 막부 말 메이지 명함 사진 컬렉션』(이사이 나오미 저, 아사히 소노라마, 2000년)에 게재된 의자에 앉은 여성의 사진도 오료의 사진으로 여겨졌다. 이 두 장의 사진은 얼핏 보기에 동일 인물이며, 아사쿠사 오지로쿠의 우치다 큐이치 사진관에서 촬영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새로 발견된 사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많아 진위 여부는 불분명했다. 헤이세이 20년(2008년)에 고치현립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이 경찰청 과학경찰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앉은 자세의 사진과 만년의 사진을 슈퍼 임포즈 기법으로 비교한 결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감정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는 헤이세이 8년(1996년) 10월 10일 "소니 사카모토 료마 연구회"의 가마야 나오키(釜谷直樹일본어)가 『오료 두 장의 사진』으로서 이미지 분석했을 때의 방법과 완전히 동일하며, 당시에도 "컴퓨터에 의한 이미지 처리와 그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작가이자 료마 연구가인 미야치 사이이치로에게 제공된 바 있다. 이 당시에도 전신 사진을 좌우 반전하여 확대하고 얼굴의 기울기 등을 만년의 진짜 오료 사진과 동일하게 수정하여 두 장의 사진을 비교 검토했는데, 이는 과학경찰연구소와 완전히 같은 방법이었다.
과학경찰연구소는 "얼굴 윤곽과 귀, 눈, 입 등의 배치가 두 장의 사진에서 매우 유사하다. 이 사진들로 미루어 볼 때, 동일 인물의 젊은 시절과 만년의 모습이라고 해도 특별히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며 "두 사진은 동일 인물이라고 판정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이는 전 게이오기주쿠 대학 이공학부 준교수 다카하시 신이치의 연구에 의해 감정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러한 경위로 인해 한때 앉은 자세의 사진이 "젊은 시절 오료의 사진"으로 취급되었으나, 과학경찰연구소의 인물 비정(比定) 방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진은 오료의 사진이 아니라고 결론 내려졌다. 또한, 기도 다카요시나 이토 히로부미의 애인인 에라 가요가 아니냐는 설도 있었으나, 이 역시 오인된 것이다.
헤이세이 25년(2013년), 일본 군장 연구회(日本軍装研究会)의 히라야마 신(平山晋일본어)이 도내의 고서점에서 젊은 시절 오료로 알려진 여성과 동일 인물이 찍힌 명함판 사진을 발견했다. 히라야마가 발견한 사진 속 여성은 앉은 자세의 사진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한 손의 위치만 다를 뿐 동일 인물인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 오료의 사진"이 오료와 다른 인물의 사진임이 판명되었다. 나아가 전신 사진에 대해서도 다른 여러 여성과 콜라주된 명함판 사진이 존재하며, 이 사진의 뒷면에는 이 여성에 대해 "도이 오쿠가타(土井奥方일본어)"라고 기재되어 있어, 훗날 도이 자작가의 첩이 된 여성인 것까지 판명되었다. 또한, 이 외에도 이 여성의 사진과 동일한 사진이 여러 장 발견되었다.
4. 대중문화 속의 오료
나라사키 료는 사카모토 료마와의 관계와 극적인 일화 덕분에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꾸준히 묘사되고 있다. 그녀는 주로 료마를 지지하고 그의 위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그려지며, 때로는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상으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 영화**
- 『해원대』(1939년, 연: 이치카와 하루요)
- 『유신의 곡』(1942년, 연: 이치카와 하루요)
- 『막말』(1970년, 연: 요시나가 사유리)
- 『막말 청춘 그래피티 Ronin 사카모토 료마』(1986년, 연: 하라다 미에코)
- 『료마를 벤 남자』(1987년, 연: 히사토 료코)
- 『골프 새벽 전』(1987년, 연: 다카하시 게이코)
- 『료마의 아내와 그 남편과 애인』(2002년, 연: 스즈키 교카)
- 드라마**
- 『료마가 간다』(1965년, MBS, 연: 야마다 히로코)
- 『료마가 간다』(1968년, NHK 대하드라마, 연: 아사오카 루리코)
- 『가쓰 가이슈』(1974년, NHK 대하드라마, 연: 가와구치 아키라)
- 『하나진』(1977년, NHK 대하드라마, 연: 시마모토 스미)
- 『나뭇잎 그림자의 이슬』(1979년, 아사히 방송, 연: 기시 게이코)
- 『료마가 간다』(1982년, TV 도쿄, 연: 오타니 나오코)
- 『막말 청춘 그래피티 사카모토 료마』(1982년, 니혼 테레비, 연: 나쓰메 마사코)
- 『그림자 군단・막말편』(1985년, 간사이 테레비, 연: 아사노 유코)
- 『사카모토 료마』(1989년, TBS 테레비, 연: 나토리 유코)
- 『하늘을 나는 것처럼』(1990년, NHK 대하드라마, 연: 도구치 요시코)
- 『료마가 간다』(1997년, TBS 테레비, 연: 사와구치 야스코)
- 『료마가 간다』(2004년, TV 도쿄, 연: 우치야마 리나)
- 『신선조!』(2004년, NHK 대하드라마, 연: 아소 구미코)
- 『아쓰히메』(2008년, NHK 대하드라마, 연: 이치카와 미카코)
- 『료마전』(2010년, NHK 대하드라마, 연: 마키 요코)
- 『시대극 법정 스페셜 피고인은 사카모토 료마』(2015년, 시대극 전문 채널, 연: 오카모토 레이)
- 『JIN-仁- 완결편』(2011년, TBS 테레비, 연: 고치 마치코)
- 『FNS27시간 테레비 일본의 역사』(2017년, 후지 테레비, 연: 고리키 아야메)
- 『사이고돈』(2018년, NHK 대하드라마, 연: 미즈카와 아사미)
- 기타 TV 프로그램**
- 『역사 비화 히스토리아 료마가 사랑한 여자~오료 알려지지 않은 진짜 얼굴~』(2013년, NHK 종합, 연: 나와타 도모코)
- 『후루타치 토킹 히스토리 ~막부 말 최대의 수수께끼 사카모토 료마 암살, 완전 중계~』(2019년, 테레비 아사히, 연: 하시모토 마나미)
- 무대**
- 『내 동생이여 -누나 오토메로부터 사카모토 료마에게 전하는 메시지』(1990년, 목동사 공연, 작·연출: 시미즈 구니오) 예술선장 문부대신상 수상, 테아트로 연극상 수상
- 애니메이션**
-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2016년, E테레)
- 『용 -RYO-』(2013년)
- 게임**
- 『용과 같이 유신!』(2015년, 세가, 연: 사쿠라바 나나미)
- 『용과 같이 유신! 극』 (2023년, 세가, 목소리: 스기히라 마나미)
- 만화**
- 『오~이! 료마』(1986년-1996년, 쇼가쿠칸, 원작: 다케다 데쓰야, 작화: 고야마 유)
- 『사무라이 선생』(2013년-2020년, 리브레 출판, 구로에 S 스케)
- 소설**
- 『오료』(2008년, 신진물왕래사, 저: 우에마쓰 미소리)
- 『월금을 연주하는 여자 오료가 간다』(2010년, 겐토샤, 저: 가가미가와 이치로)
- 『가라, 오료』(2016년, 분게이슌주, 저: 가도이 게이키)
- 『사나토료』(2017년, 오타 출판, 저: 타니지 아키히로)
5. 같이 보기
- 사카모토 료마
- 신락사
6. 외부 링크
- [https://ja.wikisource.org/wiki/%E6%A5%A0%E5%B4%8E%E9%BE%8D%E9%96%A2%E4%BF%82%E6%96%87%E6%9B%B8 위키문헌: 나라사키 료 관계 문서 (일본어)]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Narasaki_Ryo 위키미디어 공용: 나라사키 료]
- [https://www.aozora.gr.jp/index_pages/person1587.html 아오조라 문고: 나라사키 료 관계 문서 (일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