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한수(金翰秀, Kim Han-soo영어; 1971년 10월 30일~)는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이자 현 야구 지도자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KBO 리그의 삼성 라이온즈에서 내야수로 활약했으며, 은퇴 후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을 역임했고, 현재는 두산 베어스의 타격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현역 시절 기복 없이 꾸준하고 안정된 수비력과 정교한 타격 실력을 바탕으로 3루수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록 연고지인 대구 출신은 아니었지만, 삼성 라이온즈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경기 내외에서 튀지 않는 모습을 보여 '소리 없이 강한 남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국가대표 선수로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는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대회에서도 큰 공헌을 했다. 또한 1994년부터 2007년까지 14년간 삼성 라이온즈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과 2005년, 2006년 통합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KBO 골든글러브를 6차례 수상하는 등 개인적인 영예도 안았다.
2. 유년기 및 아마추어 경력
김한수 선수의 어린 시절부터 프로 입단 전까지의 배경과 야구 경력을 다룹니다.
2.1. 유년기 및 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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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는 1971년 10월 3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영복은 전 실업 야구 선수였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당시 한창 인기를 누리던 프로 야구를 접하며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고, 그 해부터 야구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서울화곡초등학교를 다니다 서울강남초등학교로 전학했으며, 신월중학교를 거쳐 광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1학년 때 자신의 우상이었던 당시 빙그레 이글스 (현 한화 이글스)의 장종훈 선수를 만나 실질적인 조언을 많이 들었고, 이를 통해 프로 입단을 목표로 더욱 열심히 준비하게 되었다.
2.2. 아마추어 야구 경력
김한수는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재학 중 아마추어 야구 선수로 활동하며 프로 데뷔를 위한 기량을 다졌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는 크게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으며, 199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높은 지명 순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낮은 지명 순위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예상외로 다른 팀의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으며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3. 프로 선수 경력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선수 생활을 중심으로 김한수 선수의 주요 프로 경력을 설명합니다.
3.1. 삼성 라이온즈 입단 및 초기
1994년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김한수는 당시 팀의 강력한 내야진에 밀려 초반에는 주전 경쟁이 쉽지 않았다. 당시 삼성은 1루수 김성래, 2루수 강기웅, 유격수 류중일, 3루수 김용국으로 이어지는 KBO 리그 최고 수준의 내야 수비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용국이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면서 김한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감독이었던 우용득은 신인이었던 김한수를 과감하게 주전으로 기용했다. 입단 첫 해인 1994년, 그는 2할대 타율과 10홈런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이후 방위병으로 복무를 시작했는데,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무릎 부상을 당하며 방위 복무 기간 동안 힘든 재활 훈련을 거쳐야 했다. 1996년 5월 방위 복무를 마치고 부상에서 회복한 그는 1군 주전 자리를 꿰차기 위해 노력했고, 1997년부터는 이승엽과 함께 팀의 신예 스타로 떠오르며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방위 복무 기간이었던 1995년과 1996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100경기 이상 꾸준히 출장했다.
3.2. 전성기 및 우승 기여
김한수는 1998년부터 1999년, 그리고 2001년부터 2002년까지 3할 이상의 타율과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뛰어난 수비력을 인정받아 1998년과 1999년을 시작으로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무려 6차례에 걸쳐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 중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회 연속 수상 기록은 해당 포지션에서 한대화의 6회 수상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2002년에는 팀의 주장으로서 선수단을 이끌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정규 시즌 우승과 더불어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주장 자리를 후배 진갑용에게 물려준 이후에도 팀의 대선배로서 어린 후배들과 함께 2005년과 2006년 연속으로 정규 시즌 및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로써 그는 2002년, 2005년, 2006년 삼성 라이온즈의 세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006년에는 한국 리그를 제패한 삼성 라이온즈의 일원으로 2006년 아시아 시리즈에도 참가했다.
3.3. 말년 및 은퇴
2004년 시즌 후 체력 저하를 감지한 코칭스태프는 2005년부터 김한수의 주 포지션을 3루수에서 1루수로 변경했다. 포지션 변경 후 2005년에는 2할 9푼대의 타율을 기록했으나, 이후 점차 타율이 하락하기 시작하여 2007년에는 2할 3푼대까지 떨어졌다. 2007년 후반기에는 그 해 특별 지명으로 입단한 채태인에게 1루수 자리마저 위협받았고, 한때 2군으로 강등되는 등 힘든 선수 생활을 보냈다. 그는 현역 생활에 미련이 있었지만, 구단의 권유에 따라 2007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공식 은퇴식은 2008년 3월 30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앞서 거행되었다. 은퇴 후 그의 등번호 5번은 당시 내야수였던 조동찬에게 물려주었다.
4. 국가대표 경력
김한수 선수의 국가대표팀 활동 및 주요 국제 대회에서의 성과를 설명합니다.
4.1. 올림픽 및 아시안 게임
김한수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주요 국제 대회에 참가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종목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팀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이 대회에서도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며 대한민국의 우승에 공헌했다.
- 2003년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 이 대회에도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활약했다.
5. 코치 및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야구 지도자로서의 활동과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설명합니다.
5.1. 코치 활동
김한수는 선수 은퇴 후 곧바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2008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2군 타격코치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 3월 1일에는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군 타격코치 연수를 받으며 1년간 일본 야구를 경험했고, 때때로 1군 벤치 코치로 나서기도 했으며, 이승엽 선수의 고민 상담역으로도 활동했다. 같은 해 9월 귀국했다.
2010년부터는 다시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로 복귀했으며, 2011년부터는 1군 타격코치로 자리를 옮겨 팀의 타선을 지도했다.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타격코치로 참여하기도 했다.
5.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2016년 10월 15일, 류중일 감독의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제14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의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팀 성적은 부진했고,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결국 2019년 시즌을 마친 후 계약이 만료되면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임으로는 당시 전력분석 팀장이자 향토 출신인 허삼영이 선임되었다.
5.3. 이후 코치 활동
삼성 라이온즈 감독직에서 퇴임한 후, 2023년부터 두산 베어스의 수석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는 이승엽이 두산 베어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함께하게 된 것으로, 두 선수의 깊은 인연을 보여준다. 2024년 시즌을 끝으로 두산 베어스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6. 플레이 스타일 및 특징
김한수 선수의 야구 플레이 스타일, 경기 내외에서의 개인적 특징,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등을 설명합니다.
6.1. 타격 및 수비 스타일
김한수는 현역 시절 기복 없이 꾸준하고 안정적인 수비 실력으로 정평이 났다. 3루수로서 견고한 수비를 바탕으로 팀의 수비 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정교한 타격 능력을 겸비하여, 타율과 장타력을 모두 갖춘 준수한 공격력을 선보였다. 특히 전성기에는 주로 6번 타자로 출전하여 팀의 클린업 트리오를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공수 양면에서 굳건한 모습을 보였다.
6.2. 대인 관계 및 성격
김한수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경기 내외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성격 때문에 '소리 없이 강한 남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이승엽 선수와 1995년부터 9년간 함께 뛰며 깊은 인연을 맺었다. 시드니 올림픽과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의 활약으로 '국민 타자'가 된 이승엽 역시 김한수를 '형님'처럼 따랐으며, 이승엽이 2023년 두산 베어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김한수를 코치로 영입하며 그들의 특별한 관계를 이어갔다.
또한 김한수의 아버지는 전 실업 야구 선수인 김영복으로, 어린 시절 김한수가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그의 꿈을 묵묵히 지원하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는 직접적인 조언보다는 행동으로 아들을 뒷받침하며 김한수가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7. 주요 기록 및 수상
선수로서 달성한 주요 개인 기록과 수상 경력을 종합적으로 다룹니다.
7.1. 개인 수상
- 골든글러브상: 6회 (1998, 1999, 2001, 2002, 2003, 2004)
- 특히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수상이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 페어 플레이상: 2002년
7.2. 팀 기여 및 통산 기록
- 팀 우승 기여**:
-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 2005년, 2006년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
- 국가대표 메달**: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 통산 기록**:
- 프로 야구 선수로서 14시즌 동안 통산 1,514안타를 기록했다.
- 통산 10개의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여, 이 부문 KBO 리그 역대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8. 통산 성적
김한수 선수의 연도별 및 통산 야구 성적을 표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연도 | 소속 | 나이 | 출장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도실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루타 | 병살타 | 몸맞 | 희타 | 희플 | 고4 |
---|---|---|---|---|---|---|---|---|---|---|---|---|---|---|---|---|---|---|---|---|---|---|---|---|---|
1994 | 삼성 | 24 | 103 | 309 | 279 | 41 | 76 | 13 | 2 | 10 | 31 | 6 | 3 | 15 | 52 | .272 | .313 | .441 | .754 | 123 | 5 | 2 | 12 | 1 | 2 |
1995 | 25 | 34 | 100 | 92 | 17 | 28 | 4 | 0 | 2 | 13 | 3 | 0 | 2 | 12 | .304 | .330 | .413 | .743 | 38 | 2 | 2 | 3 | 1 | 0 | |
1996 | 26 | 30 | 59 | 54 | 7 | 10 | 0 | 0 | 0 | 1 | 1 | 0 | 3 | 21 | .185 | .241 | .185 | .427 | 10 | 2 | 1 | 1 | 0 | 0 | |
1997 | 27 | 124 | 524 | 466 | 57 | 136 | 27 | 1 | 9 | 68 | 9 | 9 | 36 | 79 | .292 | .350 | .412 | .762 | 192 | 6 | 7 | 13 | 2 | 4 | |
1998 | 28 | 126 | 503 | 463 | 65 | 139 | 24 | 1 | 15 | 80 | 5 | 3 | 19 | 70 | .300 | .332 | .454 | .786 | 210 | 19 | 6 | 9 | 6 | 1 | |
1999 | 29 | 128 | 551 | 497 | 87 | 169 | 36 | 1 | 18 | 88 | 7 | 6 | 33 | 73 | .340 | .391 | .525 | .916 | 261 | 12 | 13 | 1 | 7 | 4 | |
2000 | 30 | 126 | 519 | 464 | 54 | 122 | 26 | 1 | 7 | 57 | 8 | 5 | 30 | 73 | .263 | .322 | .369 | .690 | 171 | 7 | 13 | 6 | 6 | 0 | |
2001 | 31 | 117 | 478 | 427 | 59 | 133 | 29 | 2 | 13 | 61 | 3 | 2 | 28 | 57 | .311 | .366 | .480 | .846 | 205 | 11 | 13 | 2 | 8 | 3 | |
2002 | 32 | 127 | 541 | 486 | 69 | 151 | 23 | 1 | 17 | 76 | 4 | 2 | 35 | 61 | .311 | .371 | .467 | .838 | 227 | 15 | 14 | 2 | 4 | 2 | |
2003 | 33 | 131 | 532 | 478 | 67 | 141 | 23 | 1 | 17 | 70 | 5 | 2 | 29 | 57 | .295 | .354 | .454 | .808 | 217 | 20 | 17 | 4 | 4 | 0 | |
2004 | 34 | 133 | 558 | 498 | 60 | 135 | 30 | 1 | 16 | 84 | 1 | 2 | 30 | 79 | .271 | .335 | .432 | .767 | 215 | 23 | 20 | 6 | 4 | 2 | |
2005 | 35 | 114 | 465 | 406 | 55 | 119 | 18 | 0 | 15 | 73 | 1 | 0 | 35 | 68 | .293 | .372 | .448 | .821 | 182 | 9 | 18 | 3 | 3 | 3 | |
2006 | 36 | 103 | 396 | 343 | 41 | 87 | 15 | 0 | 7 | 54 | 6 | 3 | 32 | 54 | .254 | .340 | .359 | .699 | 123 | 12 | 15 | 2 | 4 | 0 | |
2007 | 37 | 101 | 317 | 289 | 25 | 68 | 11 | 1 | 3 | 26 | 0 | 2 | 14 | 44 | .235 | .283 | .311 | .594 | 90 | 6 | 7 | 2 | 5 | 0 | |
KBO 리그 통산 : 14년 | 1497 | 5582 | 5242 | 704 | 1514 | 279 | 12 | 149 | 782 | 59 | 39 | 341 | 800 | .289 | .346 | .432 | .778 | 2264 | 149 | 148 | 66 | 55 | 21 |
9. 등번호
김한수 선수가 프로 선수 및 지도자 경력 동안 사용했던 등번호 목록을 제공합니다.
- 50 (1994년 - 1995년)
- 25 (1996년)
- 5 (1997년 - 2008년)
- 130 (2009년)
- 86 (2010년 - 2019년)
- 75 (2023년 - 2024년)
10. 평가 및 유산
김한수 선수의 선수 및 지도자 경력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그가 남긴 영향을 다룹니다.
10.1. 선수로서의 평가
김한수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14년간 활약하며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불릴 만큼 팀에 대한 깊은 기여와 상징성을 가진 선수로 평가된다. 그는 뛰어난 수비력과 정교한 타격 실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팀의 핵심 전력으로 활약했으며, 3루수로서 공수 겸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6차례의 KBO 골든글러브 수상은 그의 탁월한 기량을 증명한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소리 없이 강한 남자'로 불렸던 그의 존재감은 팀의 안정적인 운영과 승리에 중요한 요소였다.
10.2. 감독으로서의 평가 및 논란
삼성 라이온즈의 제14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던 김한수는 2016년 10월부터 2019년 시즌 종료까지 감독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팀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그의 감독으로서의 역량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2019년 시즌을 끝으로 재계약에 실패하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는 그의 선수 시절의 화려한 성적과 팬들의 기대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 결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