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김은배는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부 (현 서울특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김은배는 1928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육상부에서 장거리 달리기 선수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3학년 때부터 육상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조선과 일본 본토에서 열린 각종 육상 경기 대회 및 역전 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특히,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가 명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일본인 교사 미네기시 쇼타로의 헌신적인 지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김은배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2. 선수 경력
김은배는 학창 시절부터 해방 이전까지 마라톤을 비롯한 장거리 달리기 종목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당대 최고의 육상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2.1. 초기 활동 및 성과
김은배는 1931년 10월에 개최된 제7회 조선 메이지 신궁 대회 마라톤에 출전하여 2시간 26분 12초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 기록은 당시 세계 최고 기록을 크게 앞서는 것이었으나, 코스가 공식적으로 인증되지 않아 정식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은 김은배가 마라톤 선수로서의 잠재력을 보여준 중요한 성과였다. 같은 해 11월, 일본에서 공인된 마라톤 코스에서 열린 메이지 신궁 체육대회 (현재의 국민체육대회 전신) 마라톤에서는 시오아키 타마오에 이어 2시간 34분 58초로 2위를 기록하며 일본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이로써 그는 마라톤 선수로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같은 달, 경성부와 영등포 사이에서 열린 경영 마라톤 (단축 코스)에서도 우승했다. 이때 다른 경기 참가를 위해 경성부에 와 있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은 김은배의 우승 소식을 접하고 처음으로 '마라톤'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손기정은 이듬해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김은배의 팀 동료가 되었다.
2.2.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932년 5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 최종 예선회에서 김은배는 권태하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는 권태하 및 복싱 선수 황을수와 함께 조선 민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다. 8월에 열린 올림픽 본선 마라톤 경기에서 김은배는 2시간 37분 28초의 기록으로 6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김은배는 '긴 온바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일본 대표 자격으로 출전해야 했다. 이는 개인의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이름으로 경기에 나설 수 없었던 식민지 지배의 아픔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3. 하코네 역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재학 중이던 김은배는 일본의 권위 있는 대학 역전 대회인 하코네 역전에 1934년과 1935년에 출전했다. 특히 1934년 대회에서는 7구간을 달려 구간상을 수상하며 와세다대학의 종합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3. 해방 이후 활동
광복 이후 김은배는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한국 체육계 발전에 헌신했다. 그는 1947년 권태하, 손기정, 남승룡 등 당대 한국 마라톤의 전설적인 선수들과 함께 '마라톤 보급회'를 조직하여 한국 마라톤의 저변 확대와 발전에 기여했다. 이후 한국 육상 연맹의 이사장직을 역임하며 한국 육상 행정의 기틀을 다졌으며,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육상 선수단의 감독을 맡아 후학 양성과 한국 스포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4. 사망
김은배는 1980년 3월 6일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5. 평가 및 영향
김은배는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기량으로 마라톤 분야에서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의 선수 경력과 해방 이후 한국 체육계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5.1. 일장기 말소 사건과의 연관성
김은배 선수의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 6위 입상 소식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에서 김은배의 사진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사건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언론의 보도 행위를 넘어,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에 대한 한국인의 침묵하지 않는 저항과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김은배는 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됨으로써, 식민지 시대 한국인의 민족적 저항 의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5.2. 체육계에 미친 영향
김은배는 선수로서의 뛰어난 성과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 체육계의 기틀을 다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권태하, 손기정, 남승룡 등과 함께 '마라톤 보급회'를 조직하여 한국 마라톤의 대중화와 발전에 앞장섰다. 또한 한국 육상 연맹의 이사장 및 올림픽 감독을 역임하며 행정가로서 한국 육상 스포츠의 체계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그의 활동은 한국 육상 선수들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후대의 많은 스포츠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