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진흡(靳歙근흡중국어, ? ~ 기원전 183년)은 중국 진나라 말기부터 전한 초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유방의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그는 진나라 멸망기의 혼란과 초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한나라 건국 후에도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며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평생에 걸쳐 `중연`(中涓중국어)부터 `거기장군`(車騎將軍중국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직과 함께 `임평군`(臨平君중국어), `건무후`(建武侯중국어), `신무후`(信武侯중국어) 등의 작위를 받았다. 기원전 183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숙후`(肅侯중국어)라는 시호가 추서되었다.
2. 생애 및 군사 경력
진흡은 유방의 주요 장수 중 한 명으로, 진나라 멸망과 초한 전쟁을 거쳐 한나라 건국 후의 반란 진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2.1. 유방 합류 및 초기 활동
진흡은 `중연`(中涓중국어)으로 유방의 군대에 합류하여 `원구`(冤句중국어)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기원전 208년에는 하후영(夏侯嬰중국어)과 함께 제양(濟陽중국어)을 공격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유방 군의 주력 부대 일원으로 삼천군의 `군수`(郡守중국어) 이유(李由중국어)의 군사를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공로로 `임평군`(臨平君중국어)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기원전 207년 3월에는 `양원구`(梁園區중국어)의 `亳`(亳중국어) 남쪽과 개봉(啓封중국어)의 북동쪽에서 진나라 군대와 싸워 `기천인`(騎千人중국어) 장수 한 명의 목을 베고, 57개의 목을 획득하며 73명을 포로로 잡았다. 같은 해 9월에는 남전(藍田중국어)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거사마`(車司馬중국어) 두 명, `기장`(騎長중국어) 한 명의 목을 베고, 28개의 목을 획득하며 57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패상`(覇上중국어)까지 진군했다.
2.2. 진나라 멸망 시기의 전역
기원전 206년 정월, 유방이 `한왕`으로 봉해지자 진흡은 `건무후`(建武侯중국어) 작위와 함께 `기도위`(騎都尉중국어)에 임명되었다. 그는 유방을 따라 `삼진`(三秦중국어) 평정에 기여했다. 특히 옹나라 공격 시 별도로 `옹왕` 장한(章邯중국어)의 동생 혹은 아들인 `장평`(章平중국어)을 농서(隴西중국어)에서 무찔렀고, 농서의 여섯 개 현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그의 휘하 병사들은 `거사마` 4명, `척후`(斥候중국어) 4명, `기장` 12명의 목을 베었다.
2.3. 초한 전쟁 시기의 주요 활동
진흡은 유방과 항우의 초한 전쟁 기간 동안 중요한 전략적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205년 4월, 진흡은 유방을 따라 동진하여 초나라와 싸워 팽성(彭城중국어)에 이르렀으나, 팽성 전투에서 한군이 대패하자 `옹구`(雍丘중국어)로 돌아와 주둔했다. 이후 옹구를 떠나 반란을 일으킨 `왕무`(王武중국어) 등을 무찔렀고 `량`(梁중국어) 지역을 공략했다. 그는 별도로 `형열`(邢説중국어)의 군대를 `치남`(菑南중국어)에서 격파했으며, `형열`의 `도위`(都尉중국어) 두 명과 `사마후`(司馬候중국어) 열두 명을 사로잡고 4180명의 `이졸`(吏卒중국어)을 항복시켰다. 또한 `형양`(滎陽중국어) 동쪽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식읍`(食邑중국어) 4200호를 하사받았다.
기원전 204년 8월에는 한왕으로부터 별도로 `하내`(河内중국어)로 파견되어, 조나라의 장군 `분학`(賁郝중국어)의 군대를 `조가`(朝歌중국어)에서 격파했다. 그의 휘하 병사들은 `기장` 두 명을 사로잡고 말 250필을 노획했다. 진흡은 유방을 따라 `안양`(安陽중국어)에서 동쪽으로 `극포`(棘蒲중국어)까지 공격하여 일곱 개 현을 함락시켰다. 또한 별도로 조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사마` 두 명, `후`(候중국어) 네 명을 사로잡았으며, 2400명의 `이졸`(吏卒중국어)을 항복시켰다. 그는 한단(邯鄲중국어)을 점령하고, 별도로 평양(平陽중국어)을 함락시키며 직접 `수상`(守相중국어)을 베었다. 또한 `병수`(兵守중국어) 한 명과 `군수`(郡守중국어) 한 명을 베었다. `업`(鄴중국어)을 함락시키고 유방을 따라 조가와 한단 공격에 참여하여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한단군의 여섯 개 현을 함락시켰다.
군대를 `오창`(敖倉중국어)으로 되돌려 `성고`(成皋중국어) 남쪽에서 항우 군대를 격파하고 초나라의 `량도`(糧道중국어, 보급로)를 차단했다. 형양에서 군대를 이끌고 `양읍`(襄邑중국어)에 이르러 `항관`(項冠중국어)의 군대를 `노`(魯중국어) 근처에서 격파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동쪽으로 `증`(繒중국어), `담`(郯중국어), `하비`(下邳중국어)까지, 남쪽으로는 `기`(蘄중국어), `죽읍`(竹邑중국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공략했다. 제양(濟陽중국어) 근처에서 `항감`(項悍중국어)을 격파했다.
군대를 `진`(陳중국어)으로 되돌려 항우를 격파했다. 별도로 강릉(江陵중국어)을 평정하고 `주국`(柱国중국어)과 `대사마`(大司馬중국어)를 포함한 여덟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진흡은 직접 `임강왕`(臨江王중국어) 공위(共尉중국어)를 사로잡아 산 채로 낙양(洛陽중국어)으로 보냈으며, 남군(南郡중국어)을 평정했다. 진흡은 한왕과 함께 `진`(陳중국어)에 가서 `초왕` 한신(韓信중국어)을 사로잡는 데 참여했다.
기원전 201년, 진흡은 `할부`(割符중국어)를 받아 자손 대대로 세습을 허락받았으며, `식읍` 4600호를 하사받고 `신무후`(信武侯중국어)에 봉해졌다.

2.4. 한나라 건국 이후의 진압 활동
한나라 건국 이후 진흡은 여러 반란 진압에 참여하여 국가 안정에 기여했다. 그는 `기도위`로서 흉노(匈奴중국어)에 투항한 한왕 신(韓王信중국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대나라 공격에 참여했으며, 백등산 포위전(白登山之圍중국어)에서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거기장군`(車騎將軍중국어)에 임명되어 량, 조, 제, 연, 초 다섯 제후국의 전차와 기병을 총괄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별도로 진희(陳豨중국어)의 `승상` `후창`(候敞중국어)을 격파하고 `곡역`(曲逆중국어)을 항복시켰다. 이어서 영포(黥布중국어)의 난 진압에도 공적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식읍`은 5300호로 증가했다.
2.5. 종합적인 군사적 성과
진흡은 평생에 걸쳐 다음과 같은 군사적 업적을 달성했다.
- 베어진 적의 수: 90급
- 포로로 잡은 인원: 142명
- 별도로 적군을 격파한 횟수: 14회
- 함락시킨 성의 수: 59개
- 평정한 `군`(郡중국어) 및 `국`(國중국어)의 수: 각 1개
- 평정한 `현`(縣중국어)의 수: 23개
- 사로잡거나 귀순시킨 인물: 왕 1명, `주국` 1명, `이천석`(二千石중국어) 이하 `오백석`(五百石중국어)에 이르는 관리 39명.
3. 관직 및 봉작
진흡이 생전에 받았던 주요 관직과 작위는 다음과 같다.
- `중연`(中涓중국어): 유방을 따르기 시작할 때의 초기 직책.
- `임평군`(臨平君중국어):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이유를 격파한 공로로 받은 작위.
- `건무후`(建武侯중국어): 유방이 한왕에 봉해진 후 받은 작위.
- `기도위`(騎都尉중국어): `건무후`와 함께 받은 직책.
- `신무후`(信武侯중국어): 초한 전쟁에서 강릉을 평정하고 공위 등을 사로잡는 등 큰 공을 세운 후 받은 작위로, 초기에 `식읍` 4600호를 하사받았고 이후 5300호로 증가했다. 이는 자손 대대로 세습되었다.
- `거기장군`(車騎將軍중국어): 한나라 건국 후 한왕 신, 진희, 영포 등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후 받은 최고 군직으로, 량, 조, 제, 연, 초 다섯 제후국의 전차와 기병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4. 사망
진흡은 고후 5년인 기원전 183년에 사망했다. 사후에는 `숙`(肅중국어)이라는 `시호`(諡號중국어)가 추서되어 `숙후`(肅侯중국어)로 불리게 되었다.
5. 평가 및 유산
진흡은 탁월한 군사적 능력으로 전한 건국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한때 봉작을 잃었으나 가문을 재건하였다.
5.1. 역사적 평가
사마천(司馬遷중국어)은 그의 저서 《사기》(史記중국어)의 열전에서 진흡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부관(傅寛중국어)과 진흡을 함께 언급하며 "이 두 사람은 고조 유방을 따라 산동에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 군사를 공격하고 장수를 베고 군사를 격파하며 성을 함락시킨 것이 수십 차례에 이르렀음에도 위험이나 치욕을 겪지 않았으니, 이는 하늘이 내린 재능이다"라고 찬사했다. 이는 진흡이 유방의 중요한 군사적 동반자였으며, 탁월한 전투 능력과 함께 위험한 전장에서도 능숙하게 자신을 지켜냈던 인물임을 시사한다.
5.2. 가문 및 후사
진흡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근정`(靳亭중국어)이 `신무이후`(信武夷侯중국어)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18년 뒤인 기원전 161년 (문제가 다스리던 시기), 근정은 봉국에서 법규를 초과하여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했다는 죄를 물어 작위를 박탈당하고 영지가 몰수되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기원전 62년 (원강(元康중국어) 4년), 진흡의 `현손의 아들`인 `장안상조`(長安上造중국어) `근안한`(靳安漢중국어)이 황제의 조서를 받아 가문을 재건하며 진흡의 후손으로서 다시 명맥을 잇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