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ife
그레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나 자킨토스에서 청년기를 보냈으며, 아테네로 이주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생애는 개인적인 변화와 함께 다양한 언론 및 출판 활동으로 점철되었다.
1.1. Birth and early life
크세노풀로스는 1867년 12월 9일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디오니시오스는 자킨토스 출신이었고, 어머니 에블랄리아는 콘스탄티노플 출신이었다. 가족은 크세노풀로스가 태어난 직후 자킨토스로 이주했으며, 그는 1883년까지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2. Education and early career
1883년, 크세노풀로스는 아테네 대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이미 입학 첫 해부터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며, 당시 문학은 그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이러한 초기 경험은 그가 전업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3. Personal life
1892년, 크세노풀로스는 아테네로 영구 이주했다. 1894년에는 에프로시니 디오게니디스와 결혼했지만, 결혼 1년 반 만에 이혼했다. 이 결혼에서 그는 딸 한 명을 두었다. 이후 1901년에 크리스틴 카넬로풀로스와 재혼하여 두 딸을 더 두었다.
1.4. Journalistic and publishing activities
크세노풀로스는 수많은 신문과 잡지에서 폭넓게 활동하며 많은 연구, 기사, 단편 소설, 소설을 발표했다. 1894년에는 『일러스트레이티드 에스티아』(Illustrated Estia) 신문의 책임자가 되었고, 1896년에는 『아이들의 교육』(The Education of the Children)의 편집장이 되었다. 1901년부터 1912년까지는 『파나티나이아』(Panathinaia)에 문학 작품과 연구를 게재했으며, 1912년부터는 『에트노스』(Ethnos) 신문과 협력하여 연재 소설을 썼다. 1927년에는 잡지 『네아 에스티아』(Nea Estia)를 창간하여 1934년까지 책임자로 활동하며 그리스 언론 및 출판 분야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2. Major Works
그레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는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으며, 이는 소설, 희곡, 문학 비평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그리스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며 비판적 시각과 문학적 깊이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2.1. Novels and prose
크세노풀로스는 80편 이상의 소설과 수많은 단편 소설을 쓴 다작 작가였다. 그는 첫 소설 『세상 사람』(Ο Άνθρωπος του Κόσμου, O anthropos tou kosmou)을 통해 문학계에 이름을 알렸지만, 이 작품과 다음 작품인 『니콜라스 시갈로스』(Nikolas Sigalos, 1890)는 신아테네 학파 양식으로 쓰였음에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후 그는 영감을 얻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자킨토스로 시선을 돌렸고, 그 결과 『마가렛 스테파』(Magaret Stefa, 1893)와 『붉은 바위』(Κόκκινος Βράχος, Kokkinos Vrachos, 1905)와 같은 그의 최고 소설들을 집필했다.
뒤이어 그는 『전쟁』(Ο πόλεμος, O polemos, 1914), 『비밀 약혼』(Οι Μυστικοί Αρραβώνες, I mystikoi aravones, 1915) 등 신아테네 학파 양식의 소설들을 발표했다. 또한 이오니아 학파 소설인 『라우라』(Laura, 1915)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 중 하나이다. 그의 가장 야심 찬 작품은 3부작 소설로, 『부자와 가난한 자』(Πλούσιοι και φτωχοί, plousioi kai ftochoi, 1919), 『정직한 자와 불명예스러운 자』(Τίμιοι και άτιμοι, Timioi kai atimoi, 1921), 『운 좋은 자와 불운한 자』(Τυχεροί και άτυχοι, Tycheroi kai atychoi, 1924)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 소설로는 『아나디오메니』(Αναδυομένη, Anadyomeni, 1923), 『이사벨라』(Ισαβέλλα, Isabella, 1923), 『테레사 바르마-다코스타』(Τερέζα Βάρμα-Δακόστα, Teresa Varma-Dakosta, 1925) 등이 있다.
2.2. Plays and theatrical works
크세노풀로스는 총 46편의 희곡을 썼다. 그의 첫 희곡은 1895년 초연된 『양아버지』(Ο ψυχοπατέρας, O Psychopateras)였다. 그는 콘스탄티노스 크리스토마노스의 "네아 스키니"(Nea Skini) 극단과 협력했으며, 이 극단은 크세노풀로스극의 상연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희곡으로는 『발레레나 백작부인의 비밀』(Το μυστικό της Κοντέσσας Βαλέραινας, To mystiko tis kontessas Valerainas, 1904), 『스텔라 비오란티』(Στέλλα Βιολάντη, Stella Violanti, 1909, 마리카 코토풀리와 협업), 『학생』(Φοιτηταί, Foititai), 『포티니 사라티』(Fotini Saranti, 1908), 『포포라로스』(O popolaros, 1933) 등이 있다.
1901년, 그는 코스티스 파라마스와 함께 극단 "네아 스키니"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그는 당시 유럽 주요 국가들의 중요한 지적 발전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는 헨리크 입센의 작품에 대한 서문을 여러 차례 썼으며, 그의 작품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희곡 『원더 삼촌』(Ο θείος Όνειρος, O theios Oneiros)은 아테네 왕립극장(1932년 개조 후 그리스 국립극장으로 개명)에서 공연된 그의 첫 작품이었다.
2.3. Literary criticism
크세노풀로스는 문학 비평가로서도 주목할 만한 활동을 했다. 그는 잡지 『파나티나이아』(Παναθήναια)에 알렉산드로스 파파디아만티스,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 등 유명한 그리스 작가들에 대한 많은 비평을 발표했다. 특히 1903년에는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를 아테네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4. Characteristics and themes of works
크세노풀로스의 소설은 주로 아테네와 자킨토스를 배경으로 하며, 그는 "도시 소설"의 주창자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는 사랑, 특히 다른 계층 간의 사랑이었다. 그는 희곡에서도 드라마와 코미디를 넘나들며 사랑을 공통된 주제로 다루었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 그리스 사회, 특히 계층과 사회 관계와 같은 문제들을 조명하고 반영하는 창으로서 기능한다. 그의 작품은 이오니아 학파와 신아테네 학파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크세노풀로스의 작품은 배경 지역에 따라 크게 자킨토스 작품과 아테네 작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
- 자킨토스 작품: 『스텔라 비오란티』(Stella Violanti), 『라힐』(Rachil), 『포티니 사라티』(Fotini Saranti), 『포포라로스』(O popolaros), 『발레리아나 백작부인의 비밀』(The secret of Contessa Valeriana).
- 아테네 작품: 『학생』(Foititai), 『프시코사바토』(Psychosavvato), 『토 안트로피노』(To anthropino).
3. Later Life and Death
그레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는 말년에 개인적인 큰 손실을 겪었으며, 아테네에서 생을 마감했다.
1944년 아테네에서 발생한 12월 항쟁(Dekemvriana) 중 그의 집과 서재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1951년 1월 14일 아테네에서 사망했으며, 국비로 장례가 치러졌다.
4. Legacy and Reception
그레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와 그의 작품은 그리스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긍정적인 평가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4.1. Positive reception
크세노풀로스는 그리스 문학계의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그는 1931년에 아테네 학술원의 회원이 되었고, 코스티스 파라마스,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함께 그리스 작가 협회(Εταιρεία Ελλήνων Λο고테크논)를 설립하는 데 기여하며 그리스 문학의 제도적 기반을 강화했다. 그의 작품은 서사적 힘과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는 능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4.2. Criticism and controversies
그의 작품은 양이 질을 앞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많은 속편들을 발표하고, 당시 기준으로 성적으로 자극적인 장면들을 통해 독자들의 취향에 영합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5. Influence
그레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는 헨리크 입센의 작품이 유럽 각국 극단에 강한 영향을 미쳤던 시기에, 같은 시대의 그리스 극작가들에게도 입센 극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선구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젊어서 세상을 떠난 야니스 캄비시스(1872-1901)의 『쿠르드족』(1847)과 더불어 크세노풀로스는 그러한 경향의 제1인자로 평가된다. 20세기 초에 발족한 '왕립극단'과 '네아 스키니'(신무대)는 크세노풀로스 극의 상연에 힘썼다. 후자는 또한 코스티스 파라마스(1859-1943)의 중요 작품인 『토리세우게니』(1903)를 초연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비참한 아테네 서민층을 그린 판테리스 호른(1881-1941)의 『펜타나키』(1921)나 심각한 사회극 작가 스피로스 메라스(1882-1965) 역시 크세노풀로스가 속했던 이 계통과 연결되어 있다.
6. Tributes and memorials
그레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를 기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의 고향 자킨토스에는 그레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 박물관이 설립되어 그의 삶과 작품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