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그랜빌 리브슨-고어는 1721년 8월 4일 존 리브슨-고어 초대 고어 백작(1694년~1754년)과 그의 첫 번째 부인 에블린 피어폰트 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모는 이벨린 피어폰트 초대 킹스턴어폰헐 공작과 그의 첫 번째 부인 메리 필딩 여사였다. 메리 여사는 윌리엄 필딩 제3대 덴비 백작과 그의 부인 메리 킹의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 존 리브슨-고어는 저명한 토리당 정치인으로, 조지 1세 즉위 이후 정부에 참여한 최초의 주요 토리당 인물 중 한 명으로, 1742년 존 카터렛 제2대 그랜빌 백작 행정부에 합류했다.
1.1. 교육
리브슨-고어는 웨스트민스터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처치에 진학하여 학업을 마쳤다.
2. 초기 경력 및 활동
그랜빌 리브슨-고어는 1744년 영국 의회에 처음 진출했다.
2.1. 의회 진출
그는 1744년 비숍스 캐슬 선거구의 보궐선거에서 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다. 이어서 1747년 총선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선거구로 옮겨 당선되었고, 1754년 4월 총선에서는 리치필드 선거구로 다시 옮겨 당선되었다. 같은 해 12월 25일 아버지가 사망하자 고어 백작 작위를 계승하고 영국 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2.2. 초기 정치적 연대
1746년 형의 사망으로 그는 트렌텀 자작이라는 예우 칭호로 불리게 되었으며, 175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어 백작이 되었다. 그는 1750년대 후반 릴리셜 마을에 있던 17세기 건물을 개조하여 릴리셜 홀을 지었다.
그는 처남인 존 러셀 제4대 베드포드 공작의 파벌인 '블룸즈버리 갱'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이 파벌의 일원으로서 많은 정부 직책을 맡았다. 베드포드 공작이 1771년 사망한 후, 리브슨-고어는 이 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3. 주요 업적 및 공직
그랜빌 리브슨-고어는 영국 내각에서 다양한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영향력 있는 정치 경력을 쌓았다.
3.1. 내각 및 주요 공직
그는 1755년 1월 스태퍼드셔 주지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왕실 봉인관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다. 이후 1757년 6월 주마두, 1760년 11월 왕실 의복 보관 장관, 1763년 4월 궁내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1765년 7월 찰스 왓슨-웬트워스 제2대 로킹엄 후작이 총리가 되면서 직책에서 물러났다.
1766년 8월 윌리엄 피트 초대 채텀 백작으로부터 해군 장관으로 입각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1767년 12월 오거스터스 피츠로이 제3대 그래프턴 공작의 요청으로 추밀원 의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10년 이상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1783년 12월 윌리엄 피트 더 영거 내각이 출범하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입각했다. 1784년 11월에는 왕실 봉인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794년 7월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 제3대 포틀랜드 공작이 내각에 합류하면서 왕실 봉인관 직에서 사임했다.
다음은 그가 역임한 주요 공직 목록이다.
직책 | 재임 기간 | 관련 내각 |
---|---|---|
왕실 봉인관 | 1755년 12월 ~ 1757년 6월 | 제1차 토머스 펠햄-홀스 초대 뉴캐슬 공작 내각, 윌리엄 캐번디시 제4대 데번셔 공작 내각 |
주마두 | 1757년 6월 ~ 1760년 11월 | |
왕실 의복 보관 장관 | 1760년 11월 ~ 1763년 4월 | |
궁내장관 | 1763년 4월 ~ 1765년 7월 | |
추밀원 의장 | 1767년 12월 22일 ~ 1779년 11월 24일 | 윌리엄 피트 초대 채텀 백작 내각, 오거스터스 피츠로이 제3대 그래프턴 공작 내각, 프레더릭 노스 제2대 길퍼드 백작 내각 |
추밀원 의장 | 1783년 12월 19일 ~ 1784년 12월 1일 | 윌리엄 피트 더 영거 내각 |
왕실 봉인관 | 1784년 11월 ~ 1794년 7월 | 윌리엄 피트 더 영거 내각 |
스태퍼드셔 주지사 및 스태퍼드셔 치안 판사 | 1755년 ~ 1799년 | |
추밀원 선임 고문관 | 1793년 ~ 1803년 |
3.2. 정치적 활동 및 정책
리브슨-고어는 노스 경 행정부에서 추밀원 의장으로서 미국 독립 전쟁에 대한 강경책을 지지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초기에는 전쟁 지속을 주장했으나, 노스 행정부의 무능한 전쟁 처리 방식에 좌절감을 느끼고 1779년 내각에서 사임했다.
1782년 3월 노스 내각이 붕괴되자 조지 3세는 그에게 내각 구성을 제안했으나, 그는 야당인 로킹엄 후작파의 협력이 필수적이며 자신이 이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거절했다. 1783년 3월 윌리엄 페티 제2대 셸번 백작 내각이 붕괴된 후에도 다시 조각 제안을 받았으나 역시 거절했다. 대신 그는 폭스-노스 연합 내각의 붕괴를 주도하는 핵심 인물이 되었고, 그 공로로 윌리엄 피트 더 영거의 새로운 행정부에서 다시 추밀원 의장 직책을 맡았다. 비록 곧 왕실 봉인관으로 직책을 교환하고 점차 공무에서 물러났지만, 1794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해서 내각 장관으로 활동했다.
3.3. 재산 및 투자 활동
1799년 기준으로 그랜빌 리브슨-고어는 영국에서 다섯 번째로 부유한 소규모 가구로 평가되었으며, 약 210.00 만 GBP에 달하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자산은 토지, 광업, 그리고 투기적으로 투자했던 운하 통행료 권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은 스태퍼드셔의 블랙 컨트리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1775년부터 1778년 사이에 헨리 홀랜드의 설계에 따라 트렌텀 홀에 상당한 규모의 증축 및 개조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4. 개인 생활
그랜빌 리브슨-고어는 세 번 결혼했다.
4.1. 결혼 및 배우자
- 첫 번째 결혼:** 1744년 12월 23일 니콜라스 파자컬리의 딸 엘리자베스 파자컬리와 결혼했다. 그녀는 1.60 만 GBP의 지참금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 존을 낳은 다음 날인 1745년 5월 19일 천연두로 사망했으며, 아들 존 또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 두 번째 결혼:** 1748년 스크루프 에저턴 초대 브리지워터 공작의 딸 루이사 에저턴 여사와 재혼했다. 그녀는 1761년에 사망했다.
- 세 번째 결혼:** 1768년 5월 23일 알렉산더 스튜어트 제6대 갤러웨이 백작의 딸 수잔나 스튜어트 여사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는 1805년 8월에 사망했다.
4.2. 자녀 및 후손

두 번째 부인 루이사 에저턴과의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 루이사 리브슨-고어 여사 (1749년 10월 22일 ~ 1827년 7월 29일): 아치볼드 맥도널드 초대 준남작과 결혼했다.
- 마거릿 캐롤라인 리브슨-고어 여사 (1753년 11월 2일 ~ 1824년 1월 27일): 프레더릭 하워드 제5대 칼라일 백작과 결혼했으며, 조지 하워드 제6대 칼라일 백작의 어머니이다.
- 조지 리브슨-고어 초대 서덜랜드 공작 (1758년 1월 9일 ~ 1833년 7월 19일):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했으며, 훗날 서덜랜드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 앤 리브슨-고어 여사 (1761년 2월 22일 ~ 1832년 11월 16일): 에드워드 베너블스-버넌-하커트 주교이자 요크 대주교와 결혼했다.
세 번째 부인 수잔나 스튜어트와의 사이에서도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 조지아나 오거스타 리브슨-고어 여사 (1769년 4월 13일 ~ 1806년 3월 24일): 윌리엄 엘리엇 제2대 세인트 저먼스 백작과 결혼했다.
- 샬럿 소피아 리브슨-고어 여사 (1771년 2월 11일 ~ 1854년 8월 12일): 헨리 서머싯 제6대 보퍼트 공작과 결혼했으며, 헨리 서머싯 제7대 보퍼트 공작과 그랜빌 서머싯 경의 어머니이다.
- 수잔나 리브슨-고어 여사 (1772년 9월 15일 세례 ~ 1838년 5월 26일): 더들리 라이더 초대 해로비 백작과 결혼했다.
- 그랜빌 리브슨-고어 초대 그랜빌 백작 (1773년 10월 12일 ~ 1846년 1월 8일): 훗날 그랜빌 백작으로 승격되었다.
그랜빌 리브슨-고어 경이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의 작위는 장남 조지 경에게 계승되었고, 조지 경은 1833년 서덜랜드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5. 사망
그랜빌 리브슨-고어 초대 스태퍼드 후작은 1803년 10월 26일 스태퍼드셔의 트렌텀 홀에서 사망했다. 그는 '블룸즈버리 갱'의 마지막 생존 멤버였다.
6. 평가 및 영향
그랜빌 리브슨-고어는 18세기 후반 영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된다.
6.1. 역사적 평가
그는 25년 이상 내각에서 봉직하며 영국 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베드포드 공작 파벌의 핵심 인물이자 이후 리더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국왕의 친구'로 불리는 친국왕파 의원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당시 조지 3세의 왕권 강화 노력과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의 오랜 공직 생활과 주요 내각 직책 역임은 그가 당시 정치 체제 내에서 안정적이고 신뢰받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6.2. 비판 및 논란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 대한 강경책을 지지한 인물로, 이는 식민지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비록 그 자신이 노스 행정부의 무능한 전쟁 처리 방식에 불만을 품고 사임했지만, 초기 강경 노선 지지는 식민지 주민들의 인권과 자결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1782년과 1783년에 국왕으로부터 조각을 제안받았을 때 이를 거절한 행보는 그가 정치적 원칙보다는 현실적인 권력 관계와 자신의 파벌 이익을 우선시했다는 해석을 낳기도 한다.
6.3. 후대에 미친 영향
그의 자녀들은 영국 사회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남 조지 리브슨-고어는 서덜랜드 공작이 되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영국의 주요 귀족 가문을 형성했으며, 차남 그랜빌 리브슨-고어 또한 그랜빌 백작으로 승격되어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딸들 역시 유력 귀족 가문과 결혼하여 영국 상류층 사회에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하며 후대에 걸쳐 리브슨-고어 가문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
7. 작위 및 영예

그랜빌 리브슨-고어는 평생 동안 여러 작위와 영예를 받았다.
- 1746년: 트렌텀 자작 (예우 칭호)
- 1754년 12월 25일: 고어 백작 (제2대), 고어 남작 (제3대) 작위 계승
- 1755년 12월: 추밀고문관 (PC) 임명
- 1771년 2월: 가터 훈장 (KG) 수훈
- 1784년 4월 28일: 런던 고고학회 회원 (FSA) 선출
- 1786년 3월 1일: 스태퍼드 후작 (초대) 작위 수여
그의 사망 후, 스태퍼드 후작 및 고어 백작 작위는 그의 장남 조지 리브슨-고어에게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