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권인숙의 삶은 어린 시절의 사회 인식부터 학생 및 노동 운동, 그리고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거쳐 학문적 탐구와 정치 활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권인숙은 1964년에 태어났다. 중학생 시절, 당시 한국 정부에 의해 "속았다"고 느꼈으며,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삼키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이 시기부터 학생 운동에 참여했으며, 대학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의 학생 운동가로 활동했다. 1982년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의류학과에 입학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럿거스 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 학위를, 2000년 클라크 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2. 학생 및 노동 운동
서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85년, 권인숙은 노동 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신분을 위조하고 위장 취업을 감행했다. 그녀는 자신의 대학 학력을 숨기고 부천의 한 가스배출기 공장에 취업하여 공장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신분 위조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1.3.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1986년 6월, 권인숙은 위조된 신분증을 이용한 위장 취업 혐의와 '폭력 시위' 참여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당시 문귀동 경장으로부터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성고문을 당했다. 이는 노동 운동과는 무관하게 5·3 인천 민중 항쟁과의 연루 여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권인숙은 경찰의 불법 행위에 대해 성폭력 혐의로 고발했으며, 이는 당시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정부 당국은 초기에는 그녀의 주장을 '과장된 것'으로 치부했으나, 이미 정부는 그녀가 심문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상의를 벗도록 강요당하고 '가슴을 서너 차례 구타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정부 대변인은 그녀의 성폭력 주장을 '학생 운동권이 사용하는 상투적인 전술'이라고 폄하했다. 언론 보도 또한 정부에 의해 통제되어, 권인숙을 거짓말쟁이 또는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지침이 내려지기도 했다. 사건 초기에는 코리아 데일리 사회면 하단에 한 줄로 보도되는 데 그쳤다.
1986년 7월, 김영삼과 신한민주당은 권인숙에 대한 처우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최했으나,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저지되었다. 결국 경찰은 그녀가 심문 과정에서 성적 학대를 당했음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조영래 변호사와 박원순 변호사 등 다수의 인권 변호사들이 변론을 맡아 권인숙을 지원하며 사회적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1.4. 수감 및 석방
권인숙은 공문서 변조, 변조 공문서 행사, 사문서 위조, 위조 사문서 행사, 절도, 문서 손괴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마산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타인의 주민등록증을 훼손하여 사진을 붙이고 인적 사항을 위조한 이력서를 작성한 뒤 이를 공장에 위장 취업에 활용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지인의 주민등록증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는데, 이는 지인이 공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문귀동에 대한 형사 고발은 검찰이 '권인숙의 주장에서 일부 진실을 발견했지만' 재판을 진행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또한 검찰은 권인숙이 나체 상태에서 구타당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행위를 성적 학대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1980년대 중반 한국 사법 시스템의 정치적 중립성 은폐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면서 권인숙은 다른 수백 명의 정치범들과 함께 특사로 석방되었다. 문귀동은 이후 '광범위한 법적 공방' 끝에 민사 소송에서 4.50 만 USD의 배상금 지급 판결을 받았다.
2. 학문 및 사회 활동
권인숙은 학자이자 사회 운동가로서 여성학 연구와 사회적 옹호 활동에 깊이 기여하며, 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와 인권 신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1. 여성학 연구 및 교수 활동
권인숙은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여성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고 판단, 한국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여성학'의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1994년 미국으로 건너가 럿거스 대학교에서 여성학 석사 학위를, 2000년 클라크 대학교에서 여성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박사후 연구원, 컬럼비아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초청 연구원,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 여성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2003년부터는 명지대학교 교육학습개발원 및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여성학을 가르쳤다. 교수 재임 중에는 한국 사회의 성폭력, 젠더 평등 문제와 징병제로 인한 문제 등을 연구했다. 특히 군대 내 성폭력 실태를 조사하여 은폐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으며, 군대 문화와 징병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연구는 군사화된 지역에서 가부장제적 남성성이 여성, 아동, 민간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2007년 4월 24일에는 EBS 인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시대의 초상》에 출연하여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2017년 10월부터 2020년 3월까지 제15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2.2. 사회 운동 및 기관 활동
권인숙은 1989년 서울 구로동에 '노동인권회관'을 설립하여 상담 및 교육 활동을 펼쳤으며, 2001년부터는 대표 간사를 역임했다. 2014년 2월에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의 초대 소장을 맡아 성폭력 없는 사회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성인지적 관점에서 사회를 비판하고,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등 공적인 영역에서 목소리를 높여왔다.
3. 정치 경력
권인숙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활동했으며, 이후 국회에 진출하여 활발한 입법 및 위원회 활동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
3.1. 민주화 운동 기여
권인숙은 한국의 386세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1980년대 반독재 및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1980년대 한국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열정, 이상, 그리고 상충하는 열망을 구현했다"고 평가된다.
3.2. 국회의원 활동
권인숙은 2017년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문재인 후보 캠프에 합류하여 4월 7일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2020년 4월 15일 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후보 3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로써 그녀는 2020년 5월 30일부터 2024년 5월 29일까지 제21대 국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국회 의원으로서 그녀의 주요 의정 활동은 다음과 같다.
- 2020년 7월~2022년 5월: 제21대 국회 전반기 여성가족위원회 간사
- 2020년 7월~2021년 6월: 제21대 국회 전반기 교육위원회 위원
- 2020년 8월~2020년 9월: 제21대 국회 대법관 (이흥구) 임명동의에 관한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위원
- 2020년 9월~2022년 5월: 제21대 국회 전반기 여성가족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위원장
- 2021년 6월~2021년 6월: 제21대 국회 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
- 2021년 6월~2022년 5월: 제21대 국회 전반기 교육위원회 위원
- 2022년 7월~2024년 5월: 제21대 국회 후반기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
- 2022년 7월~2023년 6월: 제21대 국회 후반기 법제사법위원회 위원
- 2023년 6월~2024년 5월: 제21대 국회 후반기 행정안전위원회 위원
또한 그녀는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주요 직책을 맡았다.
- 2020년 9월~2022년 9월: 더불어민주당 인권위원회 위원장
- 2020년 9월~2021년 5월: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상임부의장
- 2022년 3월~2022년 9월: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제7정책조정위원장
2023년 12월부터 2024년 3월까지는 대한민국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용인시 갑 지역구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예비후보로 활동했다.
4. 영향 및 평가
권인숙은 한국 사회의 성폭력 담론을 재구성하고 페미니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일부 논란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4.1. 사회적 영향력
권인숙의 성폭력 고발 소식은 "몇 달 동안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당시에는 젊은 여성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할 가능성이 더 큰 혐의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충격적인 일로 여겨졌다. 전통적으로 성적 및 신체적 학대는 '말할 수 없는 경험'으로 간주되었으나, 권인숙의 공개적인 증언은 한국에서 성폭력 문제를 재구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그녀의 경험을 '피해자의 수치심'에서 '가해자의 범죄'로 재정의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녀의 사건은 1990년대 한국 정치에 영향을 미친 한국여성단체연합 (KWAU)의 창설로 이어졌다.
4.2. 논란 및 비판
권인숙은 위장 취업 과정에서 타인의 주민등록증을 훼손하여 사진을 갈아붙이고(공문서변조, 문서손괴) 기타 인적 사항을 위조한 이력서를 작성한 뒤(사문서위조) 이를 활용(변조공문서행사, 위조사문서행사)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86년 12월 4일 인천지방법원 형사2부는 그녀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녀가 타인의 주민등록증을 절도한 것이 아니라 지인의 신분증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하며, 이는 지인이 공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정치 활동 중에도 몇 가지 논란이 있었다. 2017년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안철수 후보의 사립유치원 관련 발언에 대해 "뒤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누군가 있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발상"이라며 "박근혜·최순실이 떠오른다"고 비판한 바 있다.
2022년 11월 10일 오후, 이태원 압사 사고 국정조사 요구서 보고 및 국회 부의장 선출 투표를 위한 국회 본회의 도중 스마트폰으로 체스 게임을 하는 모습이 언론 카메라에 포착되어 논란이 되었다. 권인숙은 당일 밤 문서로 "잘못된 일이다. 반성한다"며 사과했다.
2023년 2월 1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비동의간음죄에 대한 질의 도중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답변을 여러 차례 가로막아 정상적인 토론이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20년 이상 검사로 재직한 한 장관에게 "성폭력 수사를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5. 저서
- 《하나의 벽을 넘어서》. 거름. 1989년.
- 《선택》. 웅진닷컴. 2002년.
- 《대한민국은 군대다》. 청년사. 2005년.
- 《양성평등 이야기》. 청년사. 2007년.
- 《어린이 양성평등 이야기》. 청년사. 2008년.
- 곽병찬·강수돌·권인숙·김서령·오진희·김종휘·목수정·편해문·임혜지·김종락·달마·박금선 외 5명. 《결혼 전 물어야 할 한 가지》. 샨티. 2011년.
- 패멀라 D. 슐츠 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 역. 《괴물이 된 사람들》. 이후. 2014년.
- 장필화, 권인숙, 김현숙, 이상화, 신옥희, 신인령, 윤후정 공저; 니시무라 히로미 편역. 《한국 페미니즘의 흐름》. 아카시 서점. 2006년 4월.
- 권인숙 저; 야마시타 히데아이 역. 《한국의 군사문화와 젠더》. 오차노미즈 서방. 2006년 11월.
- 권인숙 저; 나카노 노리코 역; 오코시 교코 만화. 《어머니에서 딸에게-젠더 이야기를 하자》. 나시노키샤. 2011년 7월.
6. 개인사
권인숙의 아버지는 권영출로, 2023년 5월 23일에 별세했다. 형제자매로는 권인자, 권인경, 권오선이 있다.
7. 관련 항목
-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 386세대
- 노동 운동
- 여성 운동
- 페미니즘
- 성폭력
- 젠더폭력
- 인권
- 민주화 운동
- 한국여성단체연합
- 가부장제
- 군사주의
- 징병제
- 대한민국 국회
- 더불어민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