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군티스 울마니스(Guntis Ulmanis라트비아어)는 1939년 9월 13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태어난 라트비아의 정치인으로,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제5대 라트비아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라트비아가 독립을 회복한 이후 최초의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국제 사회와의 통합을 주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울마니스는 소련의 지배 아래 강제 이주를 겪고 가족의 성까지 변경해야 했던 파란만장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러한 개인적 경험은 그의 정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러시아군 철수 협정 체결, 유럽 평의회 가입, 유럽 연합 및 NATO 가입 신청 등 라트비아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사형 제도 폐지 선언, 시민권법 개정 추진을 통해 인권 존중과 사회적 포용성을 증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민족주의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민권법 개정 국민투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며 통합된 사회를 위한 그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퇴임 후에는 사회 활동에 집중하다가 잠시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으며, 반공주의 기념 재단의 국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그의 노력을 이어갔다. 울마니스는 라트비아가 독립 이후 직면한 도전들을 극복하고 서구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유년기와 성장 배경
군티스 울마니스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사와 관련된 어려움을 겪으며 성장했다. 특히 그의 종조부인 카를리스 울마니스 전 대통령과의 혈연 관계는 그의 삶과 정치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1. 출생과 가족
군티스 울마니스는 1939년 9월 13일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두아르즈 울마니스(Eduards Ulmanis라트비아어, 1912년~1942년)는 라트비아의 전 대통령 카를리스 울마니스의 동생인 야니스 울마니스(Jānis Ulmanis라트비아어, 1865년~1936년)의 아들이다. 그의 종조부 카를리스 울마니스는 전쟁 간기 라트비아의 주요 정치인이었으며, 1934년에 권위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대통령 직함을 채택했다. 1940년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이후인 1941년, 군티스 울마니스는 겨우 1세의 나이에 어머니 베라 울마니스(Vera Ulmanis라트비아어, 결혼 전 성은 슈텔체(Štelce라트비아어))와 함께 라트비아 파두레스 교구의 '스트렐리' 지역에서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의 아버지 에두아르즈는 소련에 대한 간첩 행위 혐의로 기소되어 1941년에 10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강제 이주 생활을 하던 가족은 1946년 라트비아로 돌아왔지만, 소련 점령 하의 리가에는 정착이 허용되지 않아 쿨디가 지역의 에돌레에 있는 친척 집에서 지냈다. 1949년, 남아있던 울마니스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마저 추가 강제 이주(일명 3월 강제 이주)의 위기에 처하자, 군티스 울마니스의 어머니는 재혼하여 성을 룸피티스(Rumpītis라트비아어)로 변경했다. 덕분에 군티스 울마니스는 당시 강제 이주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55년 첫 여권을 발급받을 당시, 그는 친부의 성인 '울마니스'를 다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가족은 유르말라로 이주하여 생활했다.
2.2. 교육
유년기에는 에돌레와 유르말라의 품푸리 중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중학교 졸업 후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산업 계획 경제학을 전공했다. 1963년에 라트비아 국립대학교를 졸업하며 학업을 마쳤다.
3. 대통령 재임 전 경력
군티스 울마니스는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소련군 복무, 경제학자로서의 직업 생활, 리가 시 행정 업무 참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의 가족 배경으로 인한 해직과 이후의 하급 공무원 생활은 소련 체제 하에서의 그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또한 '노래 혁명' 시기에 공산당 탈당 및 본래 성씨 회복 과정을 거치며 정계에 입문하여 라트비아의 독립 회복에 기여했다.
3.1. 소련 시대의 직업 생활
1963년 라트비아 국립대학교를 졸업한 울마니스는 소련군에 징집되어 1965년까지 2년간 복무했다. 복무를 마친 1965년에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입당했다. 제대 후 그는 건설 현장에서 경제학자로 첫 직업을 시작했으며, 이후 리가 시의 노면전차 및 무궤도 전차 관리직으로 승진했다.
그는 다시 리가 집행 위원회(시 정부) 계획 위원회의 부위원장직으로 승진했으나, 1971년에 카를리스 울마니스 대통령과의 가족 관계가 밝혀지면서 해직당했다. 이후 리가 시의 하급 공무원으로 일하며 경력을 이어갔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리가 공과대학교에서 건축 경제학을, 라트비아 국립대학교에서 경제 계획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으며, 리가 지구 가정 서비스 조합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3.2. 노래 혁명과 정계 입문
라트비아 독립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노래 혁명 기간 중인 1989년, 군티스 룸피티스(당시 성씨)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을 탈당하고 본래 성씨인 '울마니스'를 회복했다. 1992년 라트비아가 독립을 회복한 이후, 그는 라트비아 은행 이사회 임원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그는 그의 종조부가 몸담았던 라트비아 농민 연합에 입당하며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93년, 62년 만에 처음으로 실시된 사에이마(라트비아 국회) 선거에서 그는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진 대통령 선거의 1차 투표에서 그는 구나르스 메이에로비치스(Gunārs Meierovics)와 아이바르스 예루마니스(Aivars Jerumanis)에 이어 3위를 기록했으나, 메이에로비치스가 사퇴하면서 2차 결선 투표에서 승리하여 제5대 라트비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1991년 라트비아가 완전한 독립을 회복한 이후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4. 대통령 재임 (1993년-1999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군티스 울마니스는 라트비아의 국내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라트비아의 주권을 공고히 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4.1. 당선 및 재선
군티스 울마니스는 1993년 7월 7일 사에이마의 3차 투표에서 라트비아의 첫 독립 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선 후 그는 당 활동을 중단하고 라트비아 농민 연합의 명예 당수가 되었다.

1996년 6월 18일, 그는 1차 투표에서 일가 크레이투세(Ilga Kreituse) 사에이마 의장, 이만츠 리에파(Imants Liepa), 그리고 당시 수감 중이던 전 라트비아 공산당 의장 알프레츠 루빅스(Alfrēds Rubiks)를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의 대통령 임기는 1999년 7월 7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가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이어졌다.
4.2. 국내 정책 및 개혁
울마니스 대통령은 국내 정책에 있어 인권과 사회 통합을 강조했다. 그는 유럽 평의회의 규범에 따라 1996년 라트비아에서 사형 제도의 집행을 일시 중단한다고 선언하며, 라트비아 법률에서 사형 제도의 폐지를 촉구했다.
특히 1998년에는 라트비아 시민권법 개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 개정안은 1991년 8월 21일 이후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비시민권자들이 연간 취득할 수 있는 시민권의 할당량인 이른바 "귀화 제한"을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성향의 의원 36명이 반대하며 국민투표를 요구하여, 울마니스는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야만 했다. 그는 이후 국민들을 대상으로 개정안 채택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캠페인을 벌여 최종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도록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는 통합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울마니스 대통령은 라트비아 역사 연구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99년에는 총리와 함께 라트비아 역사 위원회를 설립하여 라트비아 내 전체주의 체제와 그 영향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국제 사회에 구 소비에트 연방의 전체주의 체제를 규탄할 것을 촉구했다.
4.3. 외교 정책 및 국제 관계
군티스 울마니스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외교 정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라트비아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국제 및 지역 기구, 그리고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구축하고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대통령 재임 중 가장 중요한 외교적 성과 중 하나는 라트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의 철수에 관한 라트비아-러시아 협정을 성공적으로 체결한 것이다. 이 협정은 라트비아의 주권을 확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라트비아는 유럽 평의회에 가입했고, EU와 NATO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는 등 서구 국제사회로의 통합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라트비아를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서방 세계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5. 퇴임 후 활동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군티스 울마니스는 잠시 정계를 떠나 다양한 사회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정계로 복귀하여 의정 활동을 펼치기도 했으나, 곧 다시 은퇴하여 사회 활동과 개인 생활에 집중했다.
5.1. 사회 활동 및 은퇴
1999년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준 울마니스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사회 활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군티스 울마니스 재단'을 설립했으며, 2006년 리가에서 개최된 2006년 IIHF 아이스하키 세계 선수권 대회의 조직 위원장을 맡아 성공적인 개최에 기여했다. 또한 리가 성 재건축 협의회 의장직을 수행하며 라트비아의 중요한 역사적 건축물 복원에도 참여했다.
5.2. 정계 복귀 및 재은퇴
2010년, 군티스 울마니스는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그는 인민당과 라트비아 제1당/라트비아의 길 연합으로 구성된 신설 정당 연합인 '더 나은 라트비아를 위하여'(Par Labu Latviju!라트비아어)의 의장이 되었다. 이 연합은 2010년 10월 총선에서 8석을 얻는 데 그쳤으나, 울마니스는 사에이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2011년, 그는 다음 총선에서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제11대 사에이마가 출범한 2011년 11월 이후 그는 의원직에서 물러나며 다시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그는 연합을 구성하는 어떠한 정당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2011년에는 이 연합의 의장직에서도 물러났다.

5.3. 기타 대외 활동
군티스 울마니스는 반공주의 기념 재단의 국제 자문 위원회 일원으로 활동하며 전 세계적인 반공 운동에 기여했다.
2015년 9월 21일에는 전 최고 경영자 아이가르스 칼비티스가 라트비아 가제의 최고 경영자 자리를 맡기 위해 사임한 후, 아이스하키 클럽 디나모 리가의 최고 경영자(CEO)로 취임하기도 했다.
6. 개인 생활 및 저작
군티스 울마니스는 1962년 아이나 슈텔체(Aina Štelce라트비아어)와 결혼하여 아이나 울마니스(Aina Ulmane라트비아어)가 되었다.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는데, 딸 군트라(Guntra라트비아어, 1963년생)와 아들 알빌스(Alvils라트비아어, 1966년생)이다. 이들 자녀는 세 명의 손주(파울라, 루돌프스, 마티스 - 각각 1994년, 2000년, 2006년생)를 두었다. 잡지 '카스 야운스(Kas Jauns라트비아어)'에 따르면, 그는 혼외자녀 한 명을 더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여가 시간에는 주로 역사책과 회고록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또한 테니스, 농구, 배구 등 운동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름을 스마르데 교구(Smārde Parish)에 있는 자택에서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울마니스는 두 권의 자서전을 집필했다. 첫 번째 자서전인 《아직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No tevis jau neprasa daudz라트비아어')》는 1995년에 출판되었고, 두 번째 자서전인 《나의 대통령 시절(Mans prezidenta laiks라트비아어')》은 1999년에 출판되었다.
7. 훈장
군티스 울마니스는 대통령 재임 중 및 퇴임 후에 라트비아 국내외에서 다양한 훈장과 영예를 수여받았다.
7.1. 국내 훈장
- 라트비아: 삼성 훈장 대십자 훈장(사슬 포함)
7.2. 해외 훈장
- 덴마크: 코끼리 훈장 기사 (1997년 3월 18일)
- 에스토니아: 테라 마리아나 십자 훈장 칼라 (1996년 10월 23일)
- 독일: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특별 훈장
- 아이슬란드: 송골매 훈장 기사 대십자 (1998년 6월 8일)
- 노르웨이: 성 올라프 훈장 기사 대십자
- 폴란드: 백수리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