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구본찬(具本粲, 구본찬Gu Bon-chan한국어)은 1993년 1월 31일에 태어난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이다. 그는 리커브 부문에서 활약하며 국제 무대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남자 양궁 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2관왕을 달성했다. 또한 2015년 세계 양궁 선수권 대회에서도 두 개의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세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2. 생애
구본찬은 대한민국의 양궁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그의 생애는 양궁 선수로서의 성장과 국제 무대에서의 활약으로 특징지어진다.
2.1. 출생 및 배경
구본찬은 1993년 1월 31일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능성 구씨이며, 신장은 181 cm, 체중은 84 kg이다.
2.2. 학력
구본찬은 다음과 같은 교육 과정을 거쳤다.
- 용황초등학교 졸업
- 신라중학교 졸업
- 경북체육고등학교 졸업
- 국립경국대학교 체육학과 학사
2.3. 소속
현재 구본찬은 현대제철 양궁단에 소속되어 선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4. 코치
구본찬은 선수 경력 동안 박채순 코치와 문형철 국가대표 코치의 지도를 받았다.
3. 선수 경력
구본찬은 2014년 국제 대회 데뷔 이후 다수의 주요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기록하며 세계적인 양궁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3.1. 국제 대회 데뷔 및 초기 경력
구본찬은 여러 아시아 대회에 참가한 후, 2014년 양궁 월드컵에서 국제 무대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초기 경력으로는 2013년 아시아 양궁 선수권 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혼성팀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는 단체전 동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2015년 광주 유니버시아드에서는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을 따냈다.
3.2. 주요 대회 성과
구본찬의 선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는 2015년 세계 양궁 선수권 대회와 2016년 하계 올림픽에서의 메달 획득이다.
3.2.1. 2015 세계 양궁 선수권 대회
201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 양궁 선수권 대회에서 구본찬은 남자 단체전과 리커브 혼성팀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개인전 리커브 종목에도 출전하여 기량을 선보였다.
3.2.2. 2016년 하계 올림픽

구본찬은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2016년 하계 올림픽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남자 단체전과 남자 개인전 양궁 종목에 출전하여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며 대회 2관왕에 올랐다.
남자 단체전에서는 이승윤, 김우진과 함께 팀을 이루어 금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미국과의 금메달 결정전에서 세 세트에 걸쳐 여섯 발 연속으로 10점을 쏘는 완벽한 기량을 선보였다. 이 승리는 한국 양궁 역사상 올림픽에서 미국 양궁팀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남자 개인전에서는 결승에서 프랑스의 장샤를 발라동을 꺾고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구본찬은 한국 남자 양궁 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에서 2관왕을 달성하는 위업을 이루었다.
3.2.3. 기타 주요 대회
구본찬은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 대회 외에도 다양한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 2013년 아시아 양궁 선수권 대회: 단체전 금메달, 혼성팀 은메달
-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단체전 동메달
- 2015년 광주 유니버시아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
- 2016년 양궁 월드컵 파이널 (덴마크 오덴세): 혼성팀 금메달, 개인전 동메달
3.3. 올림픽 이후 활동
2016년 리우 올림픽 이후, 구본찬은 2017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0위로 탈락하며 국가대표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리우 올림픽 이후 7년째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하고 있다.
4. 방송 출연
구본찬은 2016년 SBS의 코미디 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부담스런 거래' 코너에 특별 출연하여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도 했다.
5. 평가 및 영향
구본찬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양궁 선수로는 최초로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며 2관왕을 달성한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완벽한 경기 운영과 특히 단체전 결승에서의 연속 10점 기록은 그의 뛰어난 기량과 정신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성과는 한국 양궁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후배 선수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