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클레멘스 5세의 본명은 베르트랑 드 고트이며, 프랑스 아키텐 지방의 빌랑드로에서 빌랑드로 영주 베라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1.1. 유년기 및 교육
베르트랑은 어린 시절을 아키텐 지방에서 보냈으며, 이후 툴루즈에서 예술을, 오를레앙과 볼로냐에서 교회법과 민법을 공부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2. 초기 경력
교육을 마친 베르트랑은 보르도의 생앙드레 대성당의 참사회원이자 제의방지기로서 초기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1294년 알바노의 주교급 추기경이자 프랑스 교황 특사로 임명된 그의 형 베라르 드 고트 리옹 대주교의 총대리를 지냈다. 그는 이어서 생베르트랑드코망주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주교좌 성당을 크게 확장하고 장식하는 데 기여했다. 1297년에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사제가 되었고, 같은 해 보르도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보르도 대교구장으로서 베르트랑 드 고트는 명목상 잉글랜드 국왕의 신하였으나,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2. 교황 선출
1304년 7월 교황 베네딕토 11세가 선종한 후, 프랑스파와 이탈리아파 추기경들 간의 대립으로 인해 페루자에서 열린 콘클라베는 11개월간의 사도좌 공석 기간을 겪었다. 양측 추기경들의 세력이 거의 동등했기 때문에 교황 선출이 지연되었다.
1305년 6월, 베르트랑 드 고트가 교황 클레멘스 5세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11월 14일 즉위식을 가졌다. 당시 그는 이탈리아인이 아니었고 추기경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선출은 중립적인 인물에 대한 선택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동시대 연대기 작가 조반니 빌라니는 그가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에 생통주의 생장당젤리에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공식적인 합의를 맺었다는 소문을 기록했다. 이 소문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미래의 교황이 추기경단의 콘클라베에서 특정 조건들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선출 소식을 비공식적으로 전달받은 베르트랑은 비엔에서 보르도로 돌아왔다. 보르도에서 그는 공식적으로 교황으로 인정받았으며,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로부터 존 헤이버링이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베르트랑은 처음에는 비엔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했으나, 필리프 4세의 반대로 인해 리옹으로 변경했다. 1305년 11월 14일, 필리프 4세가 참석한 가운데 리옹에서 그의 교황 즉위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클레멘스 5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후 처음으로 한 일 중 하나는 9명의 프랑스인 추기경을 서임한 것이었다.
클레멘스 5세의 즉위 축하 행사 중, 브르타뉴 공작 장 2세가 교황의 말을 군중 사이로 이끌고 있었다. 너무 많은 관중이 담장 위에 몰려들면서 담장이 무너져 공작이 깔리는 사고가 발생했고, 공작은 그로부터 나흘 뒤 사망했다.
3. 재위 기간
클레멘스 5세의 교황 재위 기간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교황권의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3.1.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의 관계
클레멘스 5세는 재위 초부터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정치적, 재정적 영향력에 놓여 있었다. 1306년 초, 클레멘스 5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교황 칙서인 《클레리키스 라이코스》(Clericis Laicos라틴어)의 내용을 프랑스 국왕에게 적용되지 않도록 해석하여 완화시켰다. 이 칙서는 세속 정부가 교회의 동의 없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했었다. 또한 그는 세속 통치자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며 필리프 4세의 정치적 계획을 위협했던 보니파시오 8세의 칙서 《우남 상크탐》(Unam Sanctam라틴어)을 사실상 철회함으로써, 이전 교황들의 정책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보였다.
필리프 4세는 아나니 사건 당시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이단 혐의를 재조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클레멘스 5세는 이러한 압력에 굴복하여 1309년 2월 아비뇽에서 이례적인 재판을 시작했으며, 이는 2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증인 소환 문서에서 클레멘스 5세는 보니파시오 8세의 무죄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을 표명하면서도 국왕의 요구를 충족시키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결국 1311년 2월, 필리프 4세는 클레멘스 5세에게 서한을 보내 비엔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을 요청하며 재판 절차를 포기했다. 이에 클레멘스 5세는 아나니에서 보니파시오 8세를 납치하는 데 가담했던 모든 이들을 사면했다.
3.2. 성전 기사단 탄압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프랑스에서 수백 명의 성전 기사단원들이 체포되었다. 이는 재정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왕권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효율적인 왕실 관료 체제가 주도한 조치였다. 필리프 4세가 이 움직임의 배후에 있었으며, 이는 클레멘스 5세의 역사적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필리프 4세는 클레멘스 5세가 즉위한 날부터 성전 기사단에게 고리대금, 신용 팽창, 사기, 이단, 남색, 부도덕, 남용 등의 혐의를 제기했다. 교황의 양심은 프랑스 국가가 교회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더욱 압박을 받았다.
필리프 4세는 플랑드르 전쟁의 전비 마련을 위해 교회에 과세하려 했고, 이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격렬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필리프 4세는 이미 몇 년 전 유대인과 이탈리아 금융가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재정난을 해결한 전력이 있었다. 성전 기사단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필리프 4세에게는 기사단의 재산이 매력적인 목표였다. 또한 필리프 4세는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라는 십자군 사명을 자신이 직접 통제하는 새로운 기사단을 통해 이루고자 했으며, 그의 통제 밖에 있던 강력한 성전 기사단은 제거 대상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고질적인 재정난, 물가 상승, 과도한 세금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성전 기사단은 최적의 희생양이었다.
1311년, 클레멘스 5세는 국왕의 뜻에 따라 비엔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성전 기사단을 이단으로 단죄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교황은 기사단의 평판이 좋지 않고 교황의 은행가이자 동방 순례자들의 보호자로서의 유용성이 다했다고 판단하여 기사단 해산을 결정했다. 성전 기사단원들에게 제기된 이단 및 남색 혐의가 사실인지 여부는 역사상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이전 세대에 만연했던 히스테리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며, 음모론자들과 유사 역사학자들에 의해 이 주제가 다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전 기사단의 프랑스 내 자산은 구호 기사단에게 양도되었으나, 필리프 4세는 죽는 순간까지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무단으로 사용했다. 1314년, 성전 기사단의 총장 자크 드 몰레를 비롯한 최고 간부들은 이단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자크 드 몰레는 죽음을 앞두고 필리프 4세와 클레멘스 5세를 저주했다고 전해지며,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3.3. 아비뇽 유수

1309년 3월, 교황청은 지난 4년간 머물렀던 푸아티에에서 아비뇽 인근의 브나스크 백작령으로 이전했다. 당시 브나스크 백작령은 프랑스 영토가 아니라 시칠리아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받은 봉토였다. 이 이전은 사실상 이 영토의 수도인 카르팡트라로의 이동이었다. 프랑스 측은 로마 귀족들의 알력과 무장 민병대로 인한 치안 불안정, 그리고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이 화재로 전소되는 등 로마의 위험한 상황을 이유로 안전을 내세워 이전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페트라르카가 고대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에 비유하여 "아비뇽 유수"(1309년~1377년)라고 부른 장기적인 교황청 이전의 전조가 되었다. 이는 '왕들의 아버지'에 비유될 정도로 강력했던 교황권이 쇠퇴의 길목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클레멘스 5세는 결국 한 번도 로마에 입성하지 못했으며, 이후 약 70년간 교황청은 아비뇽에 머물며 프랑스 국왕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아비뇽 유수는 세속 권력이 교권을 장악한 중세 시대의 한 현상으로 평가된다.
클레멘스 5세의 재위 기간은 이탈리아에게도 혼란의 시기였다. 교황령은 세 명의 추기경에게 통치권이 위임되었으나, 수도 로마는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의 파벌 다툼으로 인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131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에 입성하여 밀라노에 비스콘티 가문을 황제 대리로 세웠고, 1312년 클레멘스 5세의 특사에 의해 로마에서 황제관을 수여받았으나 1313년 시에나 인근에서 사망했다.
페라라가 에스테 가문을 배제한 채 교황령에 편입되면서 교황군은 베네치아 공화국 및 에스테 가문과 충돌했다. 파문과 성무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효과가 없자, 클레멘스 5세는 1309년 5월 베네치아를 상대로 한 십자군을 선포하며,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베네치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처럼 노예로 사고팔 수 있다고 선언했다.
제국과의 관계에서 클레멘스 5세는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동생인 발루아 백작 샤를의 황제 후보 지지를 위해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프랑스가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대신 그는 룩셈부르크의 하인리히(하인리히 7세)를 인정했으며, 그의 대표자들이 1312년 라테라노에서 하인리히에게 황제관을 수여했다. 그러나 하인리히가 나폴리의 로베르와 갈등을 빚자, 클레멘스 5세는 로베르를 지지하며 황제를 파문과 성무 금지령으로 위협했다. 하지만 하인리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위기는 해소되었다.
3.4. 비엔 공의회

클레멘스 5세는 1311년에 비엔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의 주요 목적은 성전 기사단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공의회는 성전 기사단을 이단으로 단죄하는 것을 거부했으나, 교황의 압력과 기사단의 나쁜 평판을 고려하여 기사단 해산을 결정했다. 이 결정은 칙서 《보크스 인 카엘로》(Vox in coelo라틴어)를 통해 공포되었으며, 성전 기사단의 재산은 구호 기사단에게 이전되었다.
또한 공의회에서는 올리비가 주장한 영혼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단죄하고, 람베르 드 베그와 베긴이 주창한 이단(인간이 지상에서 완전함에 도달하여 죄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을 규탄했다. 마지막으로 공의회는 특히 성직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교회 개혁 칙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일본어 문헌에 따르면, 이 공의회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폐회되었다고 평가된다.
3.5. 십자군 및 몽골과의 관계

클레멘스 5세는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를 원나라의 수도 칸발리크(지금의 베이징)에 파견했다. 조반니는 1294년에 베이징에 도착하여 죽을 때까지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많은 동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베이징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많은 성당이 건설되었다. 1307년, 클레멘스 5세는 몬테코르비노를 대주교로 임명하고, 여러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을 보좌 주교로 임명했으나, 이들 중 네 명만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클레멘스 5세는 이슬람에 대항하기 위한 프랑크-몽골 동맹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몽골 제국과 간헐적으로 외교적 접촉을 시도했다. 1305년 4월, 몽골 일칸국의 통치자 울제이투는 부스카렐로 데 지졸피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클레멘스 5세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에게 보냈다. 1307년에는 톰마소 우지 디 시에나가 이끄는 또 다른 몽골 사절단이 유럽 군주들에게 파견되었다. 그러나 양측 간의 군사적 협력으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몇 년 안에 동맹의 희망은 사라졌다. 1313년에는 울제이투가 다시 서방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같은 해, 필리프 4세는 레반트로 십자군 원정을 떠나겠다는 서약을 했다.
1308년, 클레멘스 5세는 1309년 봄 성지에서 맘루크 술탄국에 대항하는 십자군 설교를 지시했다. 그 결과 1309년 7월, 이른바 빈자의 십자군이 아비뇽 성문 앞에 모여들었다. 클레멘스 5세는 이들에게 대사를 내렸으나, 이들이 구호 기사단이 이끄는 정규 원정에 참여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원정대는 1310년 초에 출정했지만, 성지로 향하는 대신 구호 기사단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로도스섬을 정복했다. 빈자의 십자군은 결국 성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3.6. 기타 정책 및 활동
클레멘스 5세 재위 기간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는 롬바르디아의 돌치노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폭력적으로 진압한 것과 1313년 클레멘스 교령집(Clementine Constitutions라틴어)을 공포한 것이었다. 클레멘스 교령집은 1317년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재공포되었다. 또한 그는 페루자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오를레앙 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4. 죽음

클레멘스 5세는 1314년 4월 20일 선종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동안 밤에 천둥번개가 쳤고, 번개가 교회가 있는 곳에 떨어져 불이 났다고 한다. 불길이 너무 거세서 진화되었을 때 교황의 시신은 거의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는 자크 드 몰레가 화형당하기 전 필리프 4세와 클레멘스 5세를 저주했던 것이 실현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필리프 4세 역시 같은 해에 사망했다. 클레멘스 5세는 자신의 유언에 따라 생가인 빌랑드로와 가까운 위제스트의 대학 교회에 안장되었다.
5. 평가 및 유산
클레멘스 5세의 재위 기간은 교황청과 중세 유럽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교황직을 수행했으며, 이는 교황권의 약화와 세속 권력의 강화를 상징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5.1. 비판 및 논란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권에 대한 지나친 종속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비판을 받는다. 그의 재위는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이는 교황권의 위상을 크게 약화시켰다. 특히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이전한 아비뇽 유수는 교황권 쇠퇴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성전 기사단 해산 과정에서의 그의 역할 또한 논란의 대상이다. 성전 기사단원들에게 제기된 혐의의 진위 여부는 여전히 역사적 난제로 남아 있으며, 당시의 히스테리적인 분위기와 음모론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다. 많은 동시대인들은 표면적인 명분 외에 기사단을 와해시키려는 정치적, 경제적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실제로 프랑스 왕은 기사단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재정난 해결을 위해 그들의 재산을 탐했으며,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기사단을 조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프랑스의 고질적인 재정난과 물가 상승, 과도한 세금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성전 기사단을 이용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클레멘스 5세는 이러한 필리프 4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사단 해산을 결정함으로써 교황권의 독립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5.2. 대중문화에서의 모습
스티븐 퓨웰(Stephen Fewell영어)은 드라마 《나이트폴》(Knightfall영어) 시즌 2에서 교황 클레멘스 5세 역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