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곽자흥의 생애는 그의 초기 반란 활동부터 주원장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변화하는 권력 구도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1.1. 초기 생애와 반란의 시작
곽자흥은 1302년 6월 12일, 호주 정원현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역술가였고 어머니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는 세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둔 가정의 중간 아들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의협심이 강하여 협객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했고, 성격은 급했지만 싸움을 잘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곽자흥은 백련교 지방 조직의 지도자이자 미륵불 신봉자로서, 큰 변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여 충성스러운 병사들을 모았고, 1352년 2월, 손덕애 등 네 명의 친구를 대장으로 삼아 추종자들과 함께 호주를 점령하며 반란을 시작했다.
1.2. 호주에서의 활동과 리더십
곽자흥은 호주를 점령하며 반란군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그의 리더십은 초기부터 불안정했으며 휘하 부하들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원나라는 호주 점령에 대해 처음에는 무기력하게 대응하며, 무질서한 마을 약탈과 사찰 방화에 그쳤다. 1352년 2월, 주원장이 머물던 사찰이 불타자, 주원장은 같은 해 4월 호주로 가 곽자흥의 휘하에 합류하게 된다. 1352년 말, 토크토아가 지휘하는 원나라 군대가 서주에서 반란군 지도자 '참깨 이'를 몰아내자, 그의 장군들인 팽대와 조균용은 1353년 초 호주로 피신했다. 이로 인해 호주의 부족한 자원이 더욱 고갈되었고, 곧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곽자흥은 팽대 편을 들었고, 이로 인해 손덕애와 조균용이 이끄는 반대 파벌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정에서 돌아온 주원장이 곽자흥의 젊은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팽대를 반대 파벌의 진영으로 데려가고 손덕애의 집을 습격하여 곽자흥을 구출했다. 1352년 겨울, 수리 기술자 가루가 이끄는 원나라 군대가 호주를 포위했으나, 가루가 1353년 6월 사망하면서 포위가 풀렸다. 팽대 사망 후 조균용은 호주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고, 이로 인해 곽자흥과 주원장은 소외되었다.
1.3. 주원장과의 관계와 권력 투쟁
주원장은 곽자흥의 눈에 들기 시작했고, 곽자흥의 젊은 아내는 주원장이 자신의 양녀(훗날 마황후)와 결혼하도록 설득했다. 주원장은 마황후의 영민함과 기민함에 매료되었다고 전해진다. 주원장은 또한 곽자흥의 젊은 아내와 가까운 관계를 발전시켰고, 결국 그녀의 딸을 첩으로 맞이했다. 곽자흥은 주원장에게 초주와 합주의 병권을 위임했다. 1353년 가을, 곽자흥은 주원장에게 독립적인 지휘권을 부여했고, 이는 주원장이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조균용과 곽자흥은 수이를 포위하며 서주 점령을 노렸다. 조균용은 주원장이 실패하기를 바라며 그를 양쯔강 남쪽으로 보냈으나, 주원장은 오히려 정원, 여패채, 초주를 점령하고 원나라 장군 장지원에게 기습 공격을 가했다. 이러한 성공으로 주원장의 병력은 2만 명으로 불어났다. 곽자흥과 그의 1만 명의 병사들은 조균용을 떠나 주원장에게 합류했다.
이후 주원장과 곽자흥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두 사람은 합주를 점령하기로 합의했는데, 곽자흥이 먼저 병력을 보냈고 주원장의 장군 탕화가 나중에 도시를 점령했다. 주원장은 또한 곽자흥의 처남인 장천우를 포함한 곽자흥의 장군들을 모욕했다. 원나라의 반격 시도가 실패한 후, 주원장은 곽자흥의 옛 적이었던 손덕애가 그들의 군대에 합류하도록 허락했고, 이는 곽자흥의 주원장에 대한 불만을 더욱 키웠다. 이러한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곽자흥은 주원장이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사망
곽자흥은 1355년 5월, 하양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한국어 문헌에서는 그의 사망일이 1355년 8월 18일, 사망지는 초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사망은 주원장이 반란군 내에서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 사후 영향과 평가
곽자흥의 죽음은 주원장의 세력 통합과 명나라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 역사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평가되었다.
3.1. 주원장의 세력 통합과 자녀들의 운명
곽자흥의 사망 후, 그의 큰아들 곽천서와 처남 장천우는 스스로 곽자흥의 후계자임을 자처했고, 북홍건적의 명목상 황제인 한림아에 의해 인정받았다. 주원장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나중에 한림아의 정당성을 이용하여 곽자흥의 두 친인척을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그러나 곽천서와 장천우는 1355년 10월 주원장의 난징 공격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 곽자흥의 작은아들은 1356년 4월 주원장의 부사령관이 되었으나, 반란을 꾀하다가 처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주원장이 북홍건적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곽자흥의 장남은 전사했고, 차남 곽천서와 삼남 곽천택은 화를 두려워한 주원장에 의해 모살되었다고도 전해진다. 곽자흥의 딸 곽혜비는 주원장의 측실이 되어 주춘, 주계, 주훼 등의 왕자를 낳았다.
3.2. 추증된 작위와 역사적 관점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 후, 곽자흥의 공을 기리고자 1370년 곽자흥에게 '저양왕'(滁陽王중국어)의 작위를 추증했다.
청나라 시대 강희제는 『명사』에 주원장에 대한 비방, 특히 백련교와의 연관성에 대한 언급이 포함된 것을 우려했다. 이에 『명사』의 편찬자 장정옥은 곽자흥의 전기(傳記)를 한림아의 전기와 묶어 배치한 이유를 주원장이 1367년까지 한림아에게 명목상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이는 곽자흥이 백련교와 깊이 연루되었던 점이 후대 역사에서도 중요한 논란거리였음을 보여준다. 곽자흥은 비록 명나라 건국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의 초기 반란과 주원장과의 관계를 통해 명나라 건국사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