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즉위
군트람의 출생 배경, 가족 관계, 그리고 왕위 계승 과정을 다룬다.
1.1. 출생과 가족 관계
군트람은 532년경 수아송에서 클로타르 1세와 왕비 잉군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님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 중에서는 둘째였다. 그의 형제로는 샤리베르트 1세, 시기베르트 1세, 그리고 킬페리히 1세가 있었다.
1.2. 왕위 즉위
561년 부왕 클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메로빙거 왕조의 전통에 따라 프랑크 왕국은 그의 네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군트람은 이 중 프랑크 왕국의 4분의 1을 상속받아 오를레앙의 왕이 되었으며, 오를레앙을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그는 형제들인 샤리베르트 1세, 시기베르트 1세, 킬페리히 1세와 함께 분할된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2. 통치와 정치 활동
군트람의 왕으로서의 주요 활동, 정치적 사건, 군사 작전 및 주변 세력과의 외교 관계를 연대기적으로 다룬다.
2.1. 메로빙거 왕조의 권력 투쟁

567년 그의 형 샤리베르트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영토는 살아남은 형제들인 군트람, 시기베르트 1세, 킬페리히 1세에게 분할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파리를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합의했다. 샤리베르트의 미망인 테우데힐트는 군트람에게 결혼을 제안했으나, 557년 파리에서 소집된 교회 회의가 그러한 전통을 근친상간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군트람은 그녀를 아를의 수도원에 더 안전하게 머물게 했다.
573년, 군트람은 형 시기베르트 1세와 내전에 휘말렸고, 575년에는 형 킬페리히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성 그레고리우스의 평가에 따르면, 킬페리히의 성격 때문에 군트람은 나중에 동맹을 철회했고 킬페리히는 물러났다. 이후 군트람은 시기베르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들의 충실한 동맹으로 남았다. 575년 시기베르트가 암살당하자 킬페리히는 아우스트라시아를 침공했으나, 군트람은 당시 갈리아 최고의 장군이었던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장군 뭄몰루스를 보내 킬페리히를 몰아냈다. 뭄몰루스는 킬페리히의 장군 데시데리우스를 물리쳤고, 네우스트리아 군대는 아우스트라시아에서 퇴각했다.
577년, 군트람의 두 아들 클로타르와 클로도미르가 이질로 사망하자, 그는 2년 전 그가 왕국을 구했던 조카이자 시기베르트의 아들인 힐데베르트 2세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정했다. 그러나 힐데베르트 2세는 항상 숙부에게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581년, 킬페리히는 군트람의 많은 도시를 점령했으며, 583년에는 힐데베르트와 동맹을 맺고 군트람을 공격했다. 이때 군트람은 킬페리히와 화평을 맺었고, 힐데베르트 2세는 물러났다. 584년, 군트람은 힐데베르트의 불충에 보복하여 그의 영토를 침공하고 투르와 푸아티에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는 네우스트리아를 통치하게 된 다른 조카 클로타르 2세의 세례에 참석하기 위해 침공을 중단해야 했다. 7월 4일 성 마르티노 축일에 오를레앙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례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군트람은 대신 셉티마니아를 침공했다. 곧 화평이 이루어졌다.
584년 또는 585년, 군도발트라는 인물이 클로타르 1세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왕을 자처하고 군트람의 소유이던 푸아티에와 툴루즈를 포함한 남부 갈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군트람은 그를 '제분업자의 아들 발로메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하하며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군도발트는 코망주로 도주했고, 군트람의 군대는 성채를 포위했다. 성채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군도발트의 추종자들이 그를 넘겨주면서 그는 처형되었다.
587년, 프레데군트가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11월 28일, 군트람은 트리어로 가서 조카 힐데베르트 2세, 제수이자 평생 동맹이었던 시기베르트의 아내 브룬힐다, 힐데베르트의 누이 클로도신드, 힐데베르트의 왕비 파일레우바, 트리어 주교 마그네리크, 베르됭 주교 아게리크와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앙델로 조약이라 불리며, 군트람이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2.2. 국내 통치와 반란 진압
군트람은 기독교 원칙에 따라 통치하려 노력했다. 그는 억압받는 자들의 보호자, 병자들의 간병인, 그리고 백성들의 자애로운 부모였다고 기록된다. 그는 특히 역병과 기근 시기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등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법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집행했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법을 적용했다. 동시에 자신을 향한 두 차례의 암살 시도를 포함하여, 개인적인 모욕이나 범죄에 대해서는 항상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589년에는 조카 바시나가 푸아티에의 성 십자가 수도원에서 일으킨 반란을 그의 주교들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
2.3. 군사 작전과 대외 관계
군트람은 국경을 위협하는 이민족들과도 맞서 싸웠다. 587년, 군트람은 브르타뉴의 통치자 와로크 2세에게 복종을 강요했다. 그는 578년의 맹세를 서면으로 갱신하도록 했고, 낭트 지역 습격에 대한 보상으로 1,000 솔리두스를 요구했다. 588년까지도 이 보상금은 지불되지 않았으며, 와로크는 군트람과 클로타르 2세 모두에게 지불을 약속했는데, 클로타르 2세는 아마도 반 지방에 대한 종주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589년 또는 590년, 군트람은 서로 적대적인 베폴렘과 에브라케인을 지휘관으로 삼아 와로크에 대한 원정군을 파견했다. 에브라케인은 프레데군트의 적이기도 했으며, 프레데군트는 바요의 작센족을 보내 와로크를 도왔다. 베폴렘은 3일 동안 홀로 싸우다 전사했고, 와로크는 채널 제도로 도주하려 했으나 에브라케인이 그의 선박을 파괴하여 와로크는 평화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협상으로 맹세 갱신과 조카를 인질로 내주는 조건이 수락되었지만, 이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브르타뉴인들은 독립적인 정신을 유지했다.
589년, 군트람은 셉티마니아에 대한 마지막 진격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 개인 생애와 인품
군트람의 사적인 삶, 결혼 및 자녀 관계, 그리고 그가 보여준 인품과 종교적 신념을 다룬다.
3.1. 결혼과 자녀
군트람은 세 명의 여성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들의 관계와 자녀는 다음과 같다.
- 첫 번째로 그는 자신의 백성 중 한 명의 노예였던 베네란다를 첩으로 두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군도바트를 두었다. 그러나 군도바트는 군트람이 마르카트루드와 결혼한 후 오를레앙으로 보내졌는데, 마르카트루드는 자신의 아들을 낳은 후 질투심에 사로잡혀 군도바트를 독살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으로 마르카트루드는 신의 심판으로 자신의 아들을 잃고 군트람의 미움을 받아 버림받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두 번째 아내 마르카트루드는 마그나르의 딸이었다. 그녀는 군트람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군도바트 독살 사건 이후 신의 심판으로 자신의 아들을 잃었다.
- 세 번째 아내는 보빌라라고도 불린 아우스트레길드였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장남 클로타르와 차남 클로도미르를 두었다. 하지만 이 두 아들도 577년에 이질로 사망했다.
3.2. 신앙심과 기독교적 통치
군트람은 한때 방탕한 시기를 보냈으나, 이후 과거의 죄에 대해 깊은 후회를 하고 남은 생애를 자신과 국가를 위한 참회에 바쳤다. 그는 속죄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자신을 신에게 바쳤다. 이후 그의 성공적인 통치 기간 내내 그는 기독교 원칙에 따라 통치하려고 노력했다. 성 그레고리우스 투르에 따르면, 군트람은 억압받는 자들의 보호자였고, 병자들을 돌보았으며, 백성들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특히 역병과 기근의 시기에 자신의 부를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는 법을 엄격하고 정의롭게 집행했으며, 어떤 사람에게도 차별 없이 법을 적용했다. 또한 자신을 향한 두 차례의 암살 시도를 포함하여, 개인적인 범죄나 모욕에 대해서는 항상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군트람은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아낌없이 짓고 후원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군트람이 살아생전과 사망 후에도 많은 기적을 행했으며, 그중 일부는 자신이 직접 목격했다고 기록했다.
4. 죽음과 성인 추대
군트람의 죽음과 그가 사후 기독교 성인으로 추대된 과정을 다룬다.
4.1. 죽음
군트람은 592년 3월 28일 샬롱쉬르손에서 사망했다. 그의 조카인 힐데베르트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군트람은 자신이 샬롱에 세웠던 성 마르셀 교회에 안장되었다.
4.2. 성인으로서의 추대와 공경
군트람이 사망한 직후, 그의 백성들은 그를 성인으로 공포했으며, 가톨릭 교회는 3월 28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한다. 16세기 위그노 전쟁 당시, 위그노들은 그의 유해를 흩뜨렸지만, 그의 두개골만은 훼손하지 못했다. 현재 그의 두개골은 샬롱쉬르손에 있는 성 마르셀 교회에 은제 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5. 유산과 평가
군트람이 남긴 유산과 역사적, 사회적 평가를 종합적으로 제시한다.
5.1. 긍정적 평가와 기여
군트람은 성 그레고리우스 투르에 의해 "선한 왕 군트람"으로 불릴 만큼 당대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는 초기 생애의 방탕함을 깊이 참회하고 이후 기독교적 원칙에 따라 통치하며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특히 역병과 기근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는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어 백성을 돌보았으며, 억압받는 자들을 보호하고 병자들을 보살피는 데 힘썼다. 또한 법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집행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를 포함한 개인적인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의 이러한 자비롭고 정의로운 통치는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그는 또한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건설하고 후원하여 기독교 신앙의 확산과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후 즉시 성인으로 추대된 것은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그가 남긴 긍정적인 영향력을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5.2. 비판과 논란
군트람의 통치나 행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는 그의 "방탕한 시기"가 언급될 수 있다. 비록 그가 이 시기를 참회하고 뉘우쳤다고 하지만, 초기 메로빙거 군주들의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중 두 차례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권력이 항상 안정적이지 않았거나, 일부 귀족 및 세력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의 조카인 힐데베르트 2세와의 불안정한 동맹 관계, 그리고 힐데베르트가 보인 불충은 메로빙거 왕조 내부의 고질적인 권력 다툼과 배신을 보여주는 예시로, 군트람 역시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환경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브르타뉴와의 지속적인 분쟁에서 최종적인 복종을 얻어내지 못하고 브르타뉴인들이 독립적인 태도를 유지한 점은 그의 군사적, 외교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