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만화가이자 평론가로서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복잡한 가족 배경과 성장 과정을 거쳤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1953년 8월 31일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 위치한 외가의 불교 사원에서 두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에도 시대 말기에 도사 근왕당의 반란 진압에 가담했던 도사번의 번사 小林 伝七고바야시 덴시치일본어에서부터 이어졌다. 1927년에 태어나 2006년 1월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던 1945년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원래 오키나와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오키나와현으로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시기가 늦어 미야자키현에서 본토 결전을 준비했다고 한다. 전후 공무원(우체국 직원)으로 취직한 아버지는 노동 조합에 가입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그는 가족 앞에서 쇼와 천황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을 좋아했으며, 어머니가 불경하다고 웃을 정도로 황실에 대한 농담을 즐겼다. 아버지는 또한 진지한 저축주의자였다.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어머니는 1932년 8월 16일에서 1933년 8월 15일 사이에 태어난 쇼와 한 자리수 세대 여성으로,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12세였다. 그녀는 진언종 사원의 딸이었고, 외증조부는 메이지 시대에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한 근위병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이상주의적인 공산주의 사상을 지지했던 아버지와 현실주의적인 불교 사상을 지지했던 어머니 간에 사상적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1950년대 이후에 태어난 시라케 세대 인물이지만, 자신은 같은 세대의 인물들과는 다른 특이한 인물이라고 자각하고 있다. 1990년대 헤이세이 시대 초기에 연재된 《고마니즘 선언 차별론 스페셜》의 소재가 된 부라쿠민 차별 문제를 후쿠오카 지역 사회에서 목격하며 성장했다. 그는 전후 쇼와 시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좌익 진영이 일본 제국의 조상, 국방, 애국심을 비판하는 것을 보며 평소 비정상적인 감각에 위화감을 느꼈다. 30세 무렵에는 전후 일본 사회에 위화감을 느끼는 젊은 만화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전후 사상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상가로서 단카이 세대와는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여동생은 영화 《역분사 가족》에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와 여자 프로레슬러를 모두 지망하는 소녀 캐릭터의 모델이 되었다.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자신의 만화에서 30대에 사랑하는 사람이 수술실에 들어갔고, 아내가 부인과 질환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언급하며, 자신에게는 자녀가 없음을 밝혔다. 또한 그의 아내는 고바야시가 다른 여성들과 교류하는 것에 관대하다고 한다. 자녀가 없는 요인으로는 아내의 불임 외에 금전적인 사정도 있었다고 한다.
1.2. 유년기 및 학창 시절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어린 시절부터 기관지 천식을 앓아 심할 때는 기관지가 좁아져 팔굽혀펴기 자세를 취해야만 숨을 쉴 수 있었다. 몸이 매우 말라서 '숙주나물', '해골', '황금박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부모는 그에게 "너는 어른이 되기 전에 죽을 거야. 보험금도 들어놨으니까."라고 말하며, 그를 위한 별채를 마련해 주는 등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자립심을 키우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버지가 이웃 주민들과 마작을 자주 쳐서 발생하는 소음에 고바야시가 격분했기 때문에 별채가 생겼다고 한다.
여름방학 등 장기 휴가 때는 지방에서 밀교 사원의 주직을 맡고 있던 외할아버지 시노하라 류쇼의 절에 맡겨졌다. 외할아버지는 승려임에도 여성 관계가 있는 등 파격적인 인물이었지만, 대동아 전쟁 중 뉴기니섬에 파견되었을 때 배우 가토 다이스케와 함께 현지에서 장병들을 위한 위문 연극을 공연했고, 이것이 훗날 영화 《남쪽 섬에 눈이 내린다》로 제작된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고바야시도 그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이 절에서 겪은 경험은 이후 《고마니즘 선언》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영향을 미 미쳤으며, 고바야시는 자신을 "부동명왕의 환생"이라고 칭하기도 한다(실제로 글자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력에 대한 비유이다).
어릴 적에는 부모의 방침으로 물건을 거의 사지 못했고, 그 경험이 물욕에 대한 집착을 약화시켰다고 한다. 오랫동안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았던 것도 그 영향이다. 초등학교 중반에는 몸이 약했지만 급우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고 반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흔했던 스파르타식 남성 담임 교사(전후 군인 출신 중년들이 교직에 다수 복귀한 것이 이유)가 남녀 불문하고 학생들을 때렸다. 고바야시는 이 담임에게 홈룸 등 학급 행사 진행을 엄격하게 배웠다.
지적 장애가 약간 있고 돼지코를 가진 급우가 있었는데, 소풍 때 도시락을 함께 먹을 친구가 없을 때는 그와 웃으며 함께 있었다고 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아동 문화에 스며들자 《닌자 부대 겟코》, 《스타 트렉》 등을 시청했다. 어린 시절 동경했던 인물은 《우주 가족 로빈슨》의 닥터 스미스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64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고바야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문 아카하타 기사를 스크랩북으로 만들어 여름방학 숙제로 제출했다. 그는 이 전쟁을 미국의 침략 전쟁으로 비판했다. 이 숙제는 학교 자유 연구 공모전에서 가작으로 선정되어 전시되었다. 다만 신문 아카하타 기사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반공주의자였던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중학생 때는 급우 3명과 함께 직접 만화 잡지 "기마구레"를 제작했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입학 시험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학교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후쿠오카 시립 후쿠오카 상업고등학교(현재의 후쿠오카 시립 후쿠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주판 계산, 부기, 세무 회계 수업이 있는 현지 사업가 자녀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였다. 그는 진학 학교에도 합격했지만, 일부러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이유에 대해 "집에서 가깝다", "한가해서 만화를 그릴 수 있다", "학교의 3분의 2가 여자다", "공부하는 녀석이 없어서 조금만 공부하면 우등생"이라고 밝혔다. 상업 관련 자격증 취득이 졸업 조건이었기 때문에, 1학년 때 일본상공회의소 부기 검정 2급 및 주판 3급 자격증을 취득한 후, 고등학교 생활은 거의 기타를 치며 놀았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에는 스포츠형 머리였던 머리를 기르는 등 종종 생활 지도 교사에게 꾸중을 들었다. 동급생 중에는 가이 요시히로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도쿄도로 상경하여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제자가 되어 만화가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담임 교사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에게 대학교에 가서 책을 읽으라고 권하면서 후쿠오카 대학 인문학부 프랑스어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이때 수험 공부 준비에 착수한 것이 훗날 《도쿄 대학 일직선》을 그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프랑스어 상급 회화 능력자였던 그가 프랑스어를 전공한 동기는,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상학부에는 진학하고 싶지 않았고, 당시 미셸 폴나레프 등 프렌치 팝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로 미셸 폴나레프를 부르면 멋있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어 학습의 영향으로 《이로하니 호사쿠》의 "후만타레부"(ふまんたれぶー일본어)나 《왕괴짜 돈만이》의 거북이들 이름 등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명칭이나 어구가 다수 사용되었다. 또한 프랑스 여행 시 일본어밖에 할 줄 모르는 일본인 관광객을 무시하던 현지 여성 점원에게 프랑스어로 말을 걸자 매우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 경험이 있다고 한다.
대학 시절에는 좌익 활동에 약간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일의 좌익 활동에서 권유 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미미하거나, 종교 활동의 권유가 더 많은 신자를 모으는 등 당시 좌익 활동이 대중의 지지를 잃고 있다는 현실을 목격하고 위화감을 느꼈다. 그 결과 "자신과는 다른 세상이다"라고 깨닫고 좌익 활동 동료들과 결별한 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지금 이걸 해두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며 빈혈이 올 정도로 독서에 몰두하거나 아르바이트에도 열심이었다.
아르바이트하던 찻집의 단골손님 중 스모 이야기를 좋아하는 야쿠자 간부가 있었는데, 그와 대화를 맞추기 위해 스모에 대한 지식을 책으로 필사적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건설업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선배와 자동차에 동승했을 때, 나란히 달리던 차를 향해 "야! 학생! 불평해!"라며 불합리한 명령을 받거나, 찾는 물건을 찾지 못해 변명하자 "어딘가에 있으니 찾아와!"라며 소리를 지르는 등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허약 체질 때문에 육체노동에 적합하지 않아 해고 직전이 되었을 때, 아르바이트 선배들이 "좋은 녀석이니 계속 고용해 달라. 그만큼은 우리가 감당하겠다"고 고용주에게 호소하는 등의 일화가 있다. 그는 그 일들을 통해 동료들의 따뜻함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나약함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전쟁론 2》에서는 대학 시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친한 친구가 고바야시가 만화가로 성공한 후 심야에 긴 전화 통화를 하고 "다음에 또 만나자"고 말한 뒤 자살했다고 언급했다.
1.3. 초기 경력 및 데뷔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1976년 《주간 소년 점프》에 만화 《도쿄 대학 일직선》을 연재하며 데뷔했고,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주간 영 점프》에 후속작인 《도쿄 대학 쾌진격》을 연재했다. 데뷔 당시 후쿠오카에서 집필 활동을 하던 그는 1982년 도쿄도로 이주하여 신주쿠구 시나노마치에 거주했다. 그는 도쿄 한가운데 살고 싶었지만 어디가 한가운데인지 몰라 도구 어소 바로 옆에 거처를 정했으나 생활에 불편함이 생겨 곧바로 이사했다고 한다.
《도쿄 대학 쾌진격》 종료 후, 《주간 영 점프》의 당시 부편집장이었던 스나미 오사무로부터 어떤 작품을 그려도 괜찮다는 확답을 받은 고바야시는 러브 코미디 등 나약해진 젊은이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만화 "(誅일본어) 천벌연구회"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연재 1회부터 인기 투표에서 그라비아 페이지보다 낮은 최하위를 기록하며 조기 종료되었다. 이후 슈에이샤와의 전속 계약을 종료했다. 당시 그의 작품으로는 《풍운 와나게 야로》, 《멘팟친》 등이 있다.
이 무렵 그는 데즈카 오사무의 유명한 기법인 스타 시스템을 일시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 예로는 《도쿄 대학 일직선》의 촌마게 선생이나 "(誅일본어) 천벌연구회"의 수장인 류 등이 꼽힌다. 고바야시가 가장 손을 대고 싶어 했던 캐릭터는 《도쿄 대학 일직선》의 명조연 '다분 타고사쿠'였는데, 그는 《멘팟친》의 적대 캐릭터 외에도 단편 "다분 더 지골로" 등을 발표했다.
이후 다분을 발전시킨 캐릭터로 《영 점프》에 단편 "누노누키 호사쿠덴"을 게재했다. 이어서 《주간 소년 챔피언》에서 《이로하니 호사쿠》를 연재하여 단행본 9권으로 《도쿄 대학 일직선》에 이은 기록을 세웠다.
2. 만화가 경력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초기 개그 만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1990년대 초반부터는 정치 비평 만화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2.1. 초기 작품과 성공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1976년 《주간 소년 점프》에 만화 《도쿄 대학 일직선》을 연재하며 만화가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도쿄 대학 입시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개그 만화로, 당시 큰 인기를 얻었다. 1980년부터 1981년까지는 후속작인 《도쿄 대학 쾌진격》을 연재했다.
이후 여러 작품의 부진을 겪었으나,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주간 소년 챔피언》에 연재한 《이로하니 호사쿠》가 다음 성공작이 되었다. 그리고 1986년 5월부터 1994년 9월까지 《월간 코로코로 코믹》에 연재한 《왕괴짜 돈만이》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고바야시 요시노리 자신도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이 작품은 1989년부터 TV 아사히 계열에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고, 인도에서도 방영되어 높은 인기를 얻었다.
《왕괴짜 돈만이》는 1989년 제34회 쇼가쿠칸 만화상 아동 부문을 수상했다. 그러나 시상식에서 심사위원들이 그의 작품에 대해 음습하고 비꼬는 듯한 비판 발언을 하자, 고바야시는 격분하여 "이런 저속한 만화에 상을 준 심사위원들의 배짱에 감사드립니다"라는 통렬한 비꼬는 코멘트로 반격했다. 이 사건은 이듬해부터 심사위원진이 전면 교체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이 전말은 당시 잡지 《다카라지마》에 연재하던 "오콧차마군"에 그려졌다. 이 사건이 훗날 그의 만화 작품 스타일을 180도 전환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시사 논평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만화를 통한 시사 논평이라는 새로운 방식이 주목받았다.
2.2. 정치 비평으로의 전환
1992년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기존의 작품 스타일을 180도 전환하여 자신의 세 번째 히트작인 《고마니즘 선언》을 잡지 《SPA!》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기존의 개그 만화와 달리 정치, 사회, 시사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비평 만화로, 그의 활동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고마니즘 선언》은 이후 겐토샤, 쇼가쿠칸 등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그는 사상 관련 서적을 출판하고 2002년부터 2012년까지 보수주의 성향의 계간지 《와시즘》의 책임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정치 평론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의 만화는 설정의 모순을 개의치 않는 전개와 뛰어난 발상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세세한 설정에 집착하면 결과적으로 내용이 재미없어진다"는 작가의 생각 때문이며, 더 좋은 설정을 떠올리면 과감히 과거 설정을 버리는 방식을 취한다.
2006년에는 스토리 개그 만화인 《늦게 핀 할아버지》를 《빅 코믹》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는 고바야시의 눈병 발병 이후 심경 변화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5월에는 교라쿠 산업에서 파칭코 기계 "CR 파칭코 오봇차마군"이 출시되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는 《소설 겐토》에 《신 왕괴짜 돈만이》를 연재했는데, 등장인물들의 나이는 그대로 유지한 채 배경을 연재 당시의 현대로 옮겼다.
2.3. 주요 작품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창작했으며, 특히 《고마니즘 선언》 시리즈를 통해 정치 및 사회 평론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구분 | 작품명 (원제) | 연재 기간 및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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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히트작 | 《도쿄 대학 일직선》 (東大一直線일본어) | 1976년 ~ 1979년 (주간 소년 점프). 데뷔작이자 초기 대표작. |
《왕괴짜 돈만이》 (おぼっちゃまくん일본어) | 1986년 ~ 1994년 (월간 코로코로 코믹). 대중적 성공을 거둔 개그 만화. 1989년 쇼가쿠칸 만화상 수상. | |
정치 비평 만화 시리즈 | 《고마니즘 선언》 (ゴーマニズム宣言일본어) | 1992년 ~ (주간 SPA! 등). 그의 정치적, 사회적 견해를 담은 대표작. |
《신고마니즘 선언 스페셜 전쟁론》 (新・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戦争論일본어) | 1998년. 《고마니즘 선언》 시리즈 중 가장 유명하며 150만 부 이상 판매됨. | |
《신고마니즘 선언 스페셜 타이완론》 (新・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台湾論일본어) | 2000년. 대만의 독립 문제를 다룸. | |
《신고마니즘 선언 스페셜 오키나와론》 (新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沖縄論일본어) | 2005년. 오키나와 문제를 다룸. | |
《신고마니즘 선언 스페셜 야스쿠니론》 (新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靖國論일본어) | 2005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를 다룸. | |
《고마니즘 선언 스페셜 천황론》 (ゴーマニズム宣言スペシャル・天皇論일본어) | 천황과 황실에 대한 견해를 다룸. | |
《고마니즘 선언 스페셜 코로나론》 (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コロナ論일본어) |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견해를 다룸. | |
기타 주요 작품 | 《이로하니 호사쿠》 (いろはにほう作일본어) | 1984년 ~ 1986년 (주간 소년 챔피언). |
《늦게 핀 할아버지》 (遅咲きじじい일본어) | 2006년 ~ 2008년 (빅 코믹). | |
《신 왕괴짜 돈만이》 (新・おぼっちゃまくん일본어) | 2018년 ~ 2020년 (소설 겐토). 현대적 배경으로 재해석된 《왕괴짜 돈만이》. | |
캐릭터 디자인 | 《라이브 어 라이브》 (ライブ・ア・ライブ일본어) | 1994년 (슈퍼 패미컴). 원시편 캐릭터 디자인 담당. |
3. 정치 및 사회적 견해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며, 다양한 정치 및 사회 문제에 대해 독자적이고 논쟁적인 견해를 피력해 왔다. 그의 주장은 일본 사회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종종 격렬한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3.1. 이념 및 핵심 사상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며, 대동아 전쟁 긍정론과 반미주의를 분명히 내세웠다. 그는 대동아 전쟁이 자위 전쟁이며, 일본이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백인에 의한 식민지 체제에 전면적으로 맞서 싸운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관점에 대해 "나는 '공'(公)을 지키는 것이지 '권력'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지키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다. 나는 자유민주당이 정권을 잡든 야당이 정권을 잡든, '공'에서 벗어난다면 비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친미 보수 세력을 "친미주의자의 개"라고 조롱하며 강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아베 신조 정권에 대해서도 현재의 체제는 전후 체제임을 지적하며, "아베 신조 총리가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추진한다면 권력과 공이 겹치므로 지지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전후 체제의 보강'이 아닌가? 전후 체제는 '공'도 아니고, '체제' 그 자체가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3.2. 역사관 및 논쟁적 주장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부인하는 대표적인 역사 수정주의자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증거 불충분"을 주장하며 언론 보도 내용에 의문을 제기했다. 1996년 8월, 잡지 《SAPIO》에 연재된 《신 고마니즘 선언》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
같은 해 12월 2일, 후지오카 노부카쓰, 니시오 간지 등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되었을 때, 고바야시 요시노리도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니시오 간지는 기자회견에서 "검정을 통과한 7개 출판사의 중학교 교과서가 증거 불충분에도 불구하고 일제히 종군 위안부 강제 연행설을 채택했다. 이는 안이한 자기 비하 사관이 도달한 하나의 귀결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97년 1월 21일, 고바야시를 포함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회원 7명은 고스기 다카시 문부대신을 만나 교과서의 위안부 관련 기술이 검정 기준을 위반했다며 삭제를 요구했다.
그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의회 연설에 대해 "나는 미국에 아첨한 자학사관에 화가 났다. 나는 미국의 개로 전락한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더라도 영령을 우롱하는 행동이라고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발언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3.3. 현대 일본 정치에 대한 견해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개헌론자이면서도, 일본국 헌법 제9조에 대해서는 100% 믿지 않지만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안보법제는 100%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입헌주의는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을 강화하는 평화안전법제는 "종미법안"(미국에 종속시키는 법안)이라는 관점에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평화안전법제의 호칭에 대해 "'전쟁법안'은 낙인찍기라고 하지만, 입에 발린 말로도 '평화안전법제'라고 부를 수 없다. 일본이 동맹국의 전쟁 후방 지원을 통해 무기, 탄약, 인력을 공급하는 병참 역할을 한다면 완전히 전쟁법안이다. 야당은 당당하게 '전쟁법안'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2013년 11월 아사히 신문 1면 칼럼에서 일본 정부의 새로운 비밀 보호법을 강력히 비판하며, 이 법이 치안유지법처럼 전전 및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반 국민에게 사용되었음을 강조했다.
황위 계승 문제에 대해서는 여계 천황을 용인하고 남계 유지론자를 비판하며 일본의 구황족의 황적 취득론에 반대했다. 그는 남계 유지론자 및 지지자들을 "남계 절대주의자", 후에는 "남계 고집주의자"라고 묘사하며, 이들을 "황실론 전문가가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통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아리타 요시후와의 공저 《통일협회 문제의 어둠》에서 기시 노부스케, 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 등 3대에 걸친 정치권과의 관계를 지적했다.
공모죄에 대해서는 중의원 법무위원회에 민진당의 추천을 받아 참고인으로 출석하여, "공모죄의 매우 위험한 점은, 발언하는 시민들이 위축되어 민주주의가 건전하게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라며 법제화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야마오 시오리를 총리로 하는 모임"의 대표를 자처했다. 야마오 시오리가 불륜 의혹으로 인해 민진당을 탈당한 이후에는 민진당을 강하게 비판하고 야마오 시오리의 탈당 기자회견을 높이 평가했다.
3.4. 사회 문제와 논평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종종 "넷 우익의 산파"로 지적받지만, 정작 본인은 넷 우익을 싫어하며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넷 우익은 《전쟁론》의 부작용이다", "이웃 나라를 욕하며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고 거만해진 일본인들에게는 미의식의 조각도 없다"고 말했다. 후지 TV 항의 시위에 대해서도 "넷 우익 계열의 녀석들은 강경한 말을 하면 보수,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너희들은 연간 수입이 20.00 만 JPY 이하의 하층민인데, 그러면 되는 건가?", "자신의 입장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고 그 점에 대해 확실히 화낼 정도로 말하고 싶어진다"고 비난했다. 또한 2012년 12월 27일자 《아사히 신문》 조간에서 자신의 작품 《왕괴짜 돈만이》를 사용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대한 신랄한 풍자 삽화와 함께 "아베 신조 총리와 이른바 '넷 우익'은 공생 관계에 있다"고 지적했다.
SEALDs에 대해서는 "SEALDs라는 젊은이에게 호감"이라는 글을 블로그에 게재하며 멤버 오쿠다 아키와도 대담을 가졌으나, "멋진 시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빌어먹을 놈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모기 겐이치로와의 대담 중에는 "9조 수호를 말하는 순간 미일 안전 보장 조약 찬성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아무래도 모순이 발생하고 만다. SEALDs의 아이들은 그런 것을 더 공부하면 좋겠다"고 발언했다.
일본을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들의 바쿠가이를 환영하는 자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외국인 관광객이 오는 것이 뭐가 그렇게 좋은가? 관광객들의 바쿠가이 따위를 믿고 경제를 살리려는 것은 얄팍한 수단일 뿐이다", "요즘은 우리 동네 근처까지 중국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지루하다. 누구나 배외주의라고 생각할까 봐, 인문주의자인 척하며 장사꾼도 아닌 주제에 바쿠가이가 반갑다며 환영하는 척하는데 진심인가?", "나는 외국인 관광객을 부르는 것을 국책으로 삼는 것을 멈춰줬으면 좋겠다. 특히 중국인은 눈에 거슬린다"고 비판했다.
스기타 미오가 LGBT에 대해 "생산성이 없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서는 "아이를 낳지 않아서 생산성이 없다면 아베 신조 총리도 생산성이 없는 것이다. 스기타 미오는 아베 신조 총리를 향해 '당신은 생산성이 없다'고 직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스기타 미오는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몸이면서도 정치적인 목표가 차별밖에 없는 비생산적인 국회의원"이라고 비판했다. LGBT에 대해서는 "동성애는 취미의 문제가 아니라 선천적인 뇌의 문제이며 본인의 의식으로는 어쩔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전혀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뇌 안의 문제이며, 그것을 차별하거나 편견을 갖거나 그 사람들이 보통적으로 품는 감정을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 없다", "LGBT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은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국민학교에 다녔고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던 세대를 "소국민 세대"(少國民 世代일본어)라고 부른다.
영혼, 초능력, UFO 등 오컬트에 대해서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밖에 믿을 수 없다"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으며,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하기보다는 과학을 사용해서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오컬트 연구가로 유명해진 쓰노다 지로에 대해서는 "본업인 만화가 전혀 팔리지 않게 되었으니 지금 하고 있는 오컬트는 거의 개그밖에 되지 않는다"고 강하게 공격하며, 오컬트를 풍자한 단편 만화 《우시로의 나카오카군》(うしろの中岡くん일본어, 쓰노다 지로의 만화 《우시로의 햐쿠타로》와 심령 사진 감정가 나카오카 도시야의 합성어)을 발표했다. 이러한 반오컬트 사상 때문에 그는 과거에는 물리학자 오쓰키 요시히코 교수의 팬이라고 밝혔지만, 나중에는 "오쓰키 교수도 해답을 내놓지 못한 것이 단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바야시 자신은 《고마니즘 선언》에서 자신이 밀교 사원에 머물렀을 때 영적인 체험을 했다고 언급하며 완전히 오컬트를 부정하지 못하는 모호한 결말을 남기기도 했다.
《고마니즘 선언 시바라쿠 1》(ゴー宣・暫1일본어) 제3막 제2장 〈북오프는 문화 파괴다!〉에서는 중고 서점 북오프가 새로 보이는 "헌 책"을 너무 일찍 진열하여 신간 도서 판매량과 제작자의 보수를 줄이고 있다며 "만화가들은 원고료만으로는 확실히 적자이다! 단행본이 팔려야 월급을 주고 경비를 내고 수익이 겨우 난다!"(143쪽)고 지적했다. 그는 북오프가 일본 만화 산업을 지탱하는 시스템을 파괴한다고 비판하며 "물건에는 '적정 가격'이라는 것이 있다!"(146쪽)고 주장했다. 동시에 재판매 제도 및 위탁 제도를 옹호했다.
그는 나카자와 신이치와 함께 후쿠오카에서 강연을 진행하던 도중, 나카자와 신이치가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에 대해 청중들에게 "창가학회를 비롯한 종교 단체에 조사한 결과, 어떤 종교도 옴진리교의 소행이 아니라고 했다. 다른 조직에 의해 하치조섬으로 끌려가 묻혔다"고 발언하자, 강연 후 신문 기자가 고바야시에게 해당 사건에 대해 묻자 "거짓말이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또한 "자기의 입장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면 무슨 말이든 다 해버린다. 저 사람은 창가학회의 우에키 히토시이다. 저 정도의 상태가 좋으면 용서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발언했다.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과 관련하여 저출산 대책의 측면에서 "사실혼이야말로 일본의 전통이다"라며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반면 "일본 최고재판소가 부부동성은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나는 이러한 헌법 판단에 별로 이의가 없다. 결혼 이전의 '성씨'가 편하면 통칭을 사용하면 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 국내의 코로나19 유행을 제1의 권력이 된 매스 미디어가 불안을 부추긴 인포데믹으로 보았다. 또한 코로나19 범유행 기간 중의 긴급사태 선언 발령을 위헌으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은 두 번 코로나19에 걸렸으나 약을 복용하지 않고 자가면역으로 치유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약물 치료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코로나19 치료에 갈근탕을 사용하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음모론을 싫어하며,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한다.
4. 개인적인 삶과 취미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만화가로서의 활동 외에도 다양한 개인적인 관심사와 독특한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다.
4.1. 관심사와 취미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일본의 아이돌 걸 그룹 AKB48의 열렬한 팬이었다. 2016년 5월 1일에는 자신의 블로그에 "나는 더 이상 오타쿠가 아니다"라는 글을 게재하며 "오타쿠 졸업"을 선언했다. 과거 그가 선호했던 멤버로는 AKB48의 오시마 유코, 이치카와 미오리, 와타나베 마유, NMB48의 와타나베 미유키, HKT48의 무라시게 안나를 꼽았다. 한편 HKT48의 멤버 사시하라 리노의 안티 팬임을 공언하며 향후에는 NMB48을 응원하겠다고 자신의 블로그에 선언했다. 한때 《고마니즘 선언》에서 아키모토 야스시를 비판했다가 나중에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미네기시 미나미의 삭발 사죄가 전 세계적으로 냉담하게 보도되던 중, 그는 "따분한 '양식파'들의 지루한 비난은 모두 내가 떠맡겠다"고 말하며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과거 한 방송에서 오시마 유코에 대해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했으나, 고바야시가 다음날 블로그에서 이를 부인하자 오시마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훗날 일본 무도관에서 만났을 때 고바야시에게 "저는 그 발언, 기뻤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프로레슬링은 그의 유명한 취미 중 하나로, 마감 직전에도 일을 서둘러 마치고 관람 시간을 따로 만들 정도였다. 그는 프로레슬링을 직접 하는 것은 아니고 관람만 한다. 그는 "폭력에 대한 동경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며, 그의 작품이나 개그에도 프로레슬링이나 격투기를 모티브로 한 내용이 많다. 국내 프로레슬링에서는 안토니오 이노키를 지지하여 선거에서 이노키에게 투표하기도 했으나, 이후 이노키의 부진을 보고 투표하지 않은 적도 있다. 또한 《이로하니 호사쿠》의 부록 페이지에서는 "현재 조슈 리키에게 푹 빠져 링사이드에서 작전을 지시하는 것이 꿈"이라는 발언도 있었으며, 《왕괴짜 돈만이》 작품 속에서는 조슈를 패러디한 "추장 리키"라는 프로레슬러가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장애인 프로레슬링을 세상에 알린 것도 《고마니즘 선언》의 공헌 중 하나이며, 장애인 프로레슬링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갓난아기 때부터 가요곡을 들으며 자랐고,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유행곡을 파악하고 있어 "히트 여부를 내가 심사한다"고 말할 정도로 가요곡에 정통하다. 취재 온 언론사 관계자가 "요시린 기획 입사 시험에는 노래방이 있나요?"라고 직원에게 물을 정도로 노래방 실력이 뛰어나며, 전용 마이크를 가지고 있는 직원도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핑크 레이디, 사와다 겐지, 쇼노 마요, 가시와바라 요시에 등을 《도쿄 대학 일직선》에 등장시켰다. 특히 엔카를 좋아하며, 그중에서도 후지 아야코(간무리 지로는 남자 가수 중)의 열렬한 팬이다. 《고마니즘 선언》에도 후지 아야코가 등장하는 회차가 두 번 있었으며, 그녀와의 만남도 성사되었다.
그는 만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영화 감독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영화 감상을 즐겼다. 《스타워즈》, 《미지와의 조우》가 개봉했을 때 일찍이 감상했으며, 당시 그의 작품에는 패러디적 표현이 다수 등장한다. 그는 1980년 자율 영화 《생명 영원히》, 1981년 자율 영화 《나카스 일대 천벌연구회》를 제작했다. 또한 그의 만화 아이디어가 1984년 영화 《역분사 가족》의 각본이 되기도 했다.
4.2. 건강 및 생활 습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천식은 대학 시절 약간 재발했지만, 언젠가 사라졌고 만화가 데뷔 후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강인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2006년 1월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우편국 직원)가 몇 년 전부터 다시 천식을 앓게 되는 것을 보고 "나이가 들면 재발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2021년 현재 천식을 앓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펜과 같이 가늘고 긴 물건을 잡을 때 보통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지만, 고바야시는 검지와 엄지 사이에 끼운다. 이 때문에 검지와 엄지 사이에 펜 굳은살이 6개나 있어 스스로 "일본에서 가장 많은 펜 굳은살을 가진 만화가"라고 자칭한다. 그의 특이한 펜 굳은살은 자신을 모델로 한 만화가 고바야시 야샤노리가 주인공인 만화 《야샤》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그의 생활 주기는 《왕괴짜 돈만이》 시절 어시스턴트가 "이틀 깨어 있고 여섯 시간 잔다"고 말했을 정도로 오랫동안 야행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력 회복 수술을 받은 후에는 아침형 인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역대 비서들에 따르면 그는 "결벽증 수준의 청결 애호가"이다. 한때는 집 이외의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아 외부에서 수분 섭취를 극도로 피하기도 했다(현재는 의사가 수분 부족을 지적하여 적극적으로 섭취하고 있다). 또한 목욕 수건이 깔린 의자(통칭 "타월 의자")를 애용한다.
2005년 가을에는 백내장으로 인해 시력이 현저히 나빠져 수술을 받았고, 이로 인해 《신 고마니즘 선언》 연재를 중단했다. 이는 구 《고마니즘 선언》 시절, 잡지 《소문의 진상》 기사가 발단이 되어 당시 비서였던 스에나가 나오미가 퇴직한 충격으로 원고를 마감하지 못한 이래 처음 있는 휴재였다. 시력은 회복되었으나 "안압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다음 주에도 휴재했다. 그의 생활 및 건강에 대한 이야기는 만화 《눈알 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5. 평가 및 영향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만화가로서의 예술적 성취와 정치 평론가로서의 논쟁적인 활동으로 인해 일본 사회와 문화에 복합적인 평가와 영향을 미쳤다.
5.1. 비평적 평가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원래 《사자에상》처럼 누구나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가족 만화를 목표로 했지만, 찬반양론이 격렬한 만화가가 되었다. 그는 만화 그 자체에 대한 모욕이나 만화가라는 이유로 비판받는 것에 대해 격렬히 분노했다. 앞서 언급된 쇼가쿠칸 만화상 시상식에서의 사건이나 후술할 세이부 마이와의 사건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고마니즘 선언》 작품 속에서 "권위주의에 지지 마라"며 만화를 낮게 보는 시선을 비판했으나, 이후 세이부 마이의 발언에 일정 부분 이해를 표하며 만화를 어디까지나 서브컬처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서브컬처에 불과한 만화가 일본에서 각 세대에게 폭넓게 지지받고, 또한 일본 문화의 주역적 입장을 요구받는 것을 비판하며, 그 원인이 메인컬처인 문학 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 같은 만화가에게 지식인들이 져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주장을 《신 고마니즘 선언》 1권에서 펼치기 전, 1995년 7월 방영된 토론 프로그램 《아사마데 나마테레비》에서 고바야시는 세이부 마이와 동석하여 세이부의 주장에 동의하는 형태로 "《아사마데 나마테레비》에서 세이부 씨가 전철 안에서 만화를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옛날 같으면 매우 화냈겠지만 지금은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프로그램에서는 미야다이 신지나 오시마 나기사 등으로부터 반론을 받았고, 오시마는 "메인, 서브라며 문화의 높낮이를 나누는 것에 의미는 없다"는 취지의 비판을 받았다. 방청객들로부터도 세이부 마이를 비판하던 시절의 《고마니즘 선언》을 칭찬하면서도 비슷한 의미의 비판을 받았다.
5.2. 논란 및 비판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등 역사 수정주의적 견해로 인해 지속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 왔다. 그는 종종 "넷 우익의 산파"로 지목되지만, 정작 본인은 넷 우익을 싫어하며 "넷 우익은 《전쟁론》의 부작용이다", "이웃 나라를 욕하며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고 거만해진 일본인들에게는 미의식의 조각도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후지 TV 항의 시위에 대해서도 "넷 우익 계열의 녀석들은 강경한 말을 하면 보수,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너희들은 연간 수입이 20.00 만 JPY 이하의 하층민인데, 그러면 되는 건가?", "자신의 입장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고 그 점에 대해 확실히 화낼 정도로 말하고 싶어진다"고 비난했다. 또한 2012년 12월 27일자 《아사히 신문》 조간에서 자신의 작품 《왕괴짜 돈만이》를 사용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대한 신랄한 풍자 삽화와 함께 "아베 신조 총리와 이른바 '넷 우익'은 공생 관계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대표작인 《전쟁론》은 도학회의 《톤데모 본의 세계 R》에서 "엉터리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고마니즘 선언 스페셜 오키나와론》은 메도루마 슌에 의해 표절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5.3. 사회 및 문화에 미친 영향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작품과 논평은 일본 사회 담론, 대중문화, 그리고 정치 지형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전쟁론》은 1998년 첫 출간 이후 150만 부 이상 판매되며 일본 대중에게 역사 문제에 대한 논쟁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의 초기 히트작인 《왕괴짜 돈만이》는 인도에서도 인기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며 해외에서도 인지도를 얻었다. 1989년 쇼가쿠칸 만화상 시상식에서 그의 비꼬는 수상 소감은 이듬해 심사위원진이 전면 교체되는 사태로 이어지며 일본 만화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1992년 《고마니즘 선언》 연재를 통해 그는 기존의 개그 만화에서 벗어나 정치, 사회, 시사 비평이라는 새로운 만화 장르를 개척하며 독자들에게 시사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다. 또한 그의 작품은 장애인 프로레슬링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