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국조 원덕대왕(國祖 元德大王)은 고려의 건국자 태조 왕건의 조상으로 추존된 인물에게 바쳐진 시호이다. 그의 정확한 정체성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여러 논란과 학설이 존재하며, 이는 고려 왕실의 정통성 확립 과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국조는 태조의 증조부 또는 고조부로 여겨지며, 개성 왕씨의 시조로도 알려져 있다. 본 문서에서는 국조 원덕대왕의 명칭 유래, 그의 정체성을 둘러싼 역사적 논란, 고려 태조와의 가계 관계, 추존 과정, 그리고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상세히 다룬다.
2. 정체성 논란
국조 원덕대왕의 실제 인물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학설은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주며, 이는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고려 후기 학자들에 의해 초기 기록의 내용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제기되면서, 국조의 정체성은 더욱 복잡해졌다.
2.1. 강보육설
초기 역사서인 《편년통록Pyeonnyeon Tongnok한국어》과 《고려사절요Goryeosa Jeoryo한국어》는 국조를 강보육(康寶育)으로 지목하고 있다. 《편년통록》에 따르면 강보육은 본래 손호술(損乎述)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이후 보육(寶育)으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들은 그가 의조로 추정되는 작제건의 외할아버지였다고 밝히고 있다.
강보육의 가계는 강호경의 아들인 강충의 아들로 전해지며, 강보육에게는 이제건(伊帝建)과 보승(寶勝)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다. 강보육은 그의 조카이자 형제 이제건의 딸인 강덕주(康德周)와 혼인하여 딸 강진의(康辰義)를 낳았다. 이 강진의가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왕제건의 어머니가 된다.
2.2. 비판 및 다른 인물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이제현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강보육설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기했다. 이제현은 《고려사》에 인용된 그의 사론(史論)에서, 왕씨 가문의 직계 남성 선조가 아닌 강보육에게 시호가 추증된 점에 의문을 표했다. 그는 만약 정화왕후 강씨가 강보육의 딸이라면, 국조가 강보육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제현의 주장에 따르면, 현존하지 않는 문헌인 《왕대종족기Wangdae Jongjok-gi한국어》에는 고려 태조의 증조모인 정화왕후가 국조의 왕후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성원록Seongwonrok한국어》에는 보육성인(寶育聖人)이 원덕대왕의 외조부라고 기록되어 있어, 강보육을 국조로 보는 김관의의 설과 상충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국조가 강진의의 남편, 즉 태조의 증조부라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강진의의 남편은 전통적으로 당나라 숙종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려 후기에는 이미 이 설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일부 기록에서는 당나라 선종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고려 후기 학자 이색은 국조가 강보육이 아니라 강호경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는 국조의 정체성이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고려 왕실의 혈통과 정통성 인식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3. 고려 태조와의 관계 및 가계
국조 원덕대왕은 고려 태조 왕건의 선대 가계의 중요한 기점으로 여겨지며, 그의 정체성 논란 속에서도 태조와의 혈연적 연결 고리는 지속적으로 탐구되었다.
강씨 가문의 시조로 알려진 강호경은 중국 경조군 출신인 강숙의 차남의 67세손으로 전해진다. 강호경의 아들 강충에게는 이제건과 강보육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강보육은 조카인 이제건의 딸 강덕주와 결혼하여 딸 강진의를 낳았다.
이후 강진의는 어느 중국인과의 사이에서 왕제건을 낳았다. 왕제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는데, 《편년통록Pyeonnyeon Tongnok한국어》과 《고려사절요Goryeosa Jeoryo한국어》는 당나라 숙종을, 《편년강목Pyeonnyeon Gangmok한국어》은 당나라 선종을 지목한다.
왕제건은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당나라로 가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서해 용왕의 딸인 용녀(龍女)를 만나게 된다. 이 용녀는 훗날 원창왕후가 되며, 《성원록Seongwonrok한국어》에 따르면 그녀는 중국 평주 출신의 두은점(頭恩坫) 각간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제건은 이 용녀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다.
왕제건과 서해 용왕의 딸(원창왕후) 사이에서 아들 왕륭이 태어났다. 그리고 왕륭의 아들이 바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다. 이러한 가계는 국조 원덕대왕을 중심으로 고려 태조의 선대 혈통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한다.
국조 원덕대왕의 부인은 정화왕후 강씨이며, 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관계 | 호칭 | 관계 | 호칭 |
|---|---|---|---|
| 아들 | 의조 경강대왕 懿祖 景康大王 | 왕후 王后 | 원창왕후 두씨 元昌王后 頭氏 |
| 손자 | 세조 위무대왕 世祖 威武大王 | 왕후 王后 | 위숙왕후 한씨 威肅王后 韓氏 |
| 증손자 | 태조 太祖 | 왕후 王后 | 신혜왕후 등 |
4. 시호와 추존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 2년(919년)에 자신의 조상들을 추존하여 시호를 올리는 작업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국조에게는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려사》 권1에 따르면, 태조는 "증조고(曾祖考)를 시조(始祖) 원덕대왕으로, 비(妃)를 정화왕후로, 조고(祖考)를 의조 경강대왕으로, 비를 원창왕후로, 고(考)를 세조 위무대왕으로, 비를 위숙왕후로 추시(追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추존은 단순히 조상에 대한 예우를 넘어, 새로운 왕조인 고려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선대 조상에게 웅장한 시호를 부여하고 그들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왕건은 자신의 통치가 하늘의 뜻과 조상의 덕에 기반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특히 국조를 '시조'로 명명하고 '원덕대왕'이라는 시호를 올린 것은 왕건의 혈통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기존의 왕씨 가문이 지닌 유서 깊은 전통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5. 역사적 평가
국조 원덕대왕의 정체성 논란은 고려 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이는 고려 왕실의 복잡한 정통성 확립 과정을 반영하는 중요한 역사적 쟁점이다. 시대와 학자에 따라 국조에 대한 해석은 다양했으며, 특히 고려 후기에는 초기 기록의 신뢰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강해졌다.
초기 기록인 《편년통록Pyeonnyeon Tongnok한국어》과 《고려사절요Goryeosa Jeoryo한국어》는 국조를 강보육으로 비정함으로써, 왕실의 외척인 강씨 가문과의 혈연적 연결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 이는 고려 건국 초기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다양한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왕권의 기반을 다지려 했던 태조의 정책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제현과 이색 등 고려 후기 학자들이 제기한 비판은, 시간이 흐르면서 왕실의 정통성이 더욱 확고해지고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특히 왕씨 가문의 직계 남성 선조를 국조로 보려는 시각은, 왕씨 성을 가진 인물을 시조로 삼아 고려 왕실의 독자적인 정통성을 더욱 강화하려 했던 후대 왕실의 노력을 대변한다.
결론적으로, 국조 원덕대왕의 정체성 논란은 고려 왕조가 건국 초기부터 안정적인 왕권과 정통성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역사적 해석을 시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는 단순한 계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왕조의 기원을 신성시하고 후대 왕실의 권위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이념적 목적이 내포된 복잡한 역사적 과정으로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