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다 로한(幸田露伴, 幸田 成行고다 시게유키일본어, 1867년 8월 22일 ~ 1947년 7월 30일)은 일본의 소설가이자 고증가, 학자이다. 본명은 시게유키이며, '가규안(蝸牛庵)', '사사노쓰유(笹のつゆ)', '라이온 도슈(雷音洞主)', '다쓰텐시(脱天子)' 등 다양한 호를 사용했다. 에도 시타야에서 태어나 병약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도쿄 제1중학교와 아오야마 가쿠인 등에서 수학하며 문학적 소양을 길렀다. 전신 기사로 근무하던 중 쓰보우치 쇼요의 작품을 접하고 문학의 길에 투신했다.
1889년 단편 『이슬 방울』로 등단한 이래 『풍류불』, 『오층탑』, 『운명』 등 문어체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의 지위를 확립했다. 특히 오자키 고요와 함께 '홍로 시대(紅露時代)'를 이끌며 메이지 시대 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이상주의적 경향과 의고전주의적 특징을 보이며, 한문학, 일본 고전, 도교 등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심오한 사상을 담아냈다.
소설 외에도 『일국의 수도』, 『물의 도쿄』와 같은 선구적인 도시론, 『요리토모』, 『다이라노 마사카도』 등의 역사 전기, 그리고 마쓰오 바쇼의 작품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와 도교 관련 학술 논문 등 방대한 양의 비소설 작품을 남겼다. 1937년에는 일본 최초로 문화 훈장을 수훈했으며,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와 함께 근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낚시, 바둑, 장기 등 다양한 취미를 가졌으며, 미래 사회를 예견하는 글을 쓰기도 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의 딸 고다 아야 또한 저명한 수필가이자 소설가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문학적 유산을 이었다.
2. 생애
고다 로한의 개인적인 배경, 성장 과정, 가족 관계 및 주요 삶의 사건들을 연대기 순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2.1. 출생 및 유년기
고다 로한은 1867년 8월 22일(게이오 3년 旧暦7月23日음력 7월 23일일본어), 무사시국 에도 시타야 산마이바시정(三枚橋町, 현 도쿄도 다이토구)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시게유키(成行)이며, 어릴 적 이름은 데쓰시로(鉄四郎)였다. 아버지는 막신이었던 고다 리조(幸田利三, 후에 시게노부成延로 개명)였고, 어머니는 유우(猷)였다. 고다 가문은 에도 시대에 다이묘의 업무를 중개하는 직책인 표어방주중(表御坊主衆)을 맡았다.
로한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여 생후 27일 만에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어린 시절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이듬해 우에노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은 아사쿠사 스와 정(浅草諏訪町)으로 이주했다. 시타야로 돌아온 후에는 간다에 정착했다. 시타야 이즈미바시 길(下谷泉橋通り)에 있던 세키 치요(関千代, 서예가 세키 셋코関雪江의 언니)의 학원에서 글쓰기를 배웠고, 오카치 정(御徒士町)의 아이다(會田) 선생의 학원에서는 소독(素読)을 배웠다.
2.2. 교육 및 초기 영향
1875년(메이지 8년), 세키 치요의 권유로 도쿄 사범 학교 부속 초등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초소시(草双紙)와 독본(読本)을 즐겨 읽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1878년(메이지 11년), 도쿄부 제일중학교(현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 정칙과에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오자키 고요, 우에다 만넨, 가노 고키치 등과 동급생으로 지냈다. 그러나 가계 사정으로 인해 중퇴하고, 14세에 도쿄영학교(현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에 진학했으나 역시 중도에 그만두었다.
이후 도쿄부 도서관에 자주 다니면서 아와시마 간게쓰를 알게 되었다. 또한 형 시게쓰네(成常)의 영향을 받아 하이쿠에 관심을 가졌으며, 기쿠치 쇼켄의 영희숙(迎羲塾)에서는 지즈카 레이스이와 함께 한학(漢学)과 한시(漢詩)를 배웠다.
2.3. 초기 경력 및 문학 활동 시작
16세 때 고다 로한은 국비생으로 체신성 관립 전신수기학교(電信修技学校, 훗날의 체신관리연습소)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전신 기사로서 홋카이도 요이치에 부임했으며, 현지 게이샤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요이치에서 그는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 신즈이』와 『당세 서생 기질』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문학의 길에 대한 열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에 1887년(메이지 20년), 그는 관직을 포기하고 도쿄로 돌아왔다. 홋카이도에서 도쿄까지의 여정은 그의 작품 『돌관 기행(突貫紀行)』의 소재가 되었다. 또한 이 여정 중에 지은 하이쿠 "里遠し いざ露と寝ん 草枕"(사토 도오시 이자 쓰유토 넨 구사마쿠라, "고향은 멀고, 이슬과 함께 풀베개 베고 자자")에서 '로한(露伴)'이라는 호를 얻게 되었다.
관직을 면직당한 후, 아버지가 시작한 지물포 '아이아이도(愛々堂)'에서 일하면서 이하라 사이카쿠의 작품을 탐독했다. 이 무렵 그는 『호색오인녀』의 사본을 직접 필사하기도 했다. 1889년(메이지 22년), 로한은 『이슬 방울(露団々)』을 집필하여 아와시마 간게쓰를 통해 『도시의 꽃(都の花)』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야마다 비묘의 극찬을 받았으며, 이후 『풍류불(風流仏)』(1889년)과 시타야구 야나카 덴노지를 모델로 한 『오층탑(五重塔)』(1892년)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3. 문학 활동 및 작품
고다 로한의 문학 활동은 소설과 단편, 역사 전기, 수필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문학적 스타일과 학술적 깊이를 보여준다. 그는 고전 연구에도 매진하여 일본 문학사와 사상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3.1. 주요 소설 및 단편
고다 로한은 문어체를 기반으로 한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했으며, 특히 이상주의적 경향과 고전적인 미학을 추구했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과 단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이슬 방울』(露団々, 1889년): 작가로서의 첫 작품으로, 아와시마 간게쓰를 통해 『도시의 꽃』에 발표되어 야마다 비묘의 호평을 받았다.
- 『풍류불』(風流仏, 1889년): '자유의 상징', '예술의 부처', '우아한 부처' 등으로도 알려진 작품으로,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이다.
- 『눈 흩날리다』(雪紛々, 1889년 11월 ~ 12월):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되었다.
- 『인연 밖의 인연』(縁外縁, 1890년 1월): 『일본의 문화(日本之文華)』에 게재되었으며, 같은 해 6월 『대촉루(対髑髏, '해골과의 만남')』로 제목이 바뀌어 단편집 『엽말집(葉末集)』에 수록되었다.
- 『고래잡이』(いさなとり, 1891년 ~ 1892년): 포경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 『오층탑』(五重塔, 1892년): 시타야구 야나카의 덴노지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그의 문단적 지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작품은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 『풍류 미진장』(風流微塵蔵, 1893년 ~ 1895년): 『국회』에 연재되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다.
- 『수염 남자』(ひげ男, 1896년): '수염 사무라이'로도 알려져 있다.
- 『새 날개옷 이야기』(新羽衣物語, 1897년): 당시 담배 신제품의 경품으로 간행된 독특한 사례의 작품이다.
- 『완큐 이야기』(椀久物語, 1899년 ~ 1900년)
- 『하늘 치는 파도』(天うつ浪, 1903년 1월 ~ 1905년 1월): 미완성으로 중단된 작품이다.
- 『해학 손으로 쓴 미래 일기』(滑稽御手製未来記, 1911년): 미래에 대한 예측을 담은 작품이다.
- 『유정기』(幽情記, 1915년 ~ 1917년): 이 시기에 쓰인 작품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 『운명』(運命, 1919년): 명나라 건문제가 영락제에게 쫓겨난 뒤 수십 년간 숨어 살았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나, 다카시마 도시오는 중국 사서의 단순한 베끼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중국을 무대로 한 문어체 작품들이 다수 있다.
- 『눈 때리기』(雪たたき, 1939년)
- 『연환기』(連環記, 1941년)
- 시집으로는 『은둔처를 떠나며』(Leaving the Hermitage, 1905년)가 있다.
3.2. 역사 전기 및 수필
1904년 『하늘 치는 파도』의 집필이 중단된 이후, 고다 로한은 주로 역사 전기(史伝)와 고전 평석(評釈)으로 활동의 초점을 옮겼다. 그의 비소설 작품들은 폭넓은 지식과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준다.
역사 전기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다.
- 『니노미야 손토쿠 옹』(二宮尊徳翁, 1891년)
- 『요리토모』(頼朝, 1908년)
-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
-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
수필 및 평론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한 나라의 수도』(一国の首都, 1899년 ~ 1901년): 『신소설』에 연재되었으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도시론으로 평가받는다.
- 『물의 도쿄』(水の東京, 1901년): 『문예 클럽』에 발표된 또 다른 도시론 작품이다.
- 『시오마치구사』(潮待ち草, 1906년)
- 『가규안 야담』(蝸牛庵夜譚, 1907년 11월): 이 작품에는 『유선굴』이 수록되어 있다.
- 『소품십종』(小品十種, 1908년 6월)
- 『보통 문장론』(普通文章論, 1908년 10월): "문장은 즐겁게 써야 한다"는 등 초심자를 위한 문장 지침서이다.
- 『노력론』(努力論, 1912년)
- 『변경도 보존도』(変更も保存も, 1921년): 일본의 우익 단체인 고쿠본샤에서 발행한 학회지 '국본'에 실린 작품이다.

3.3. 문학 사조 및 영향
고다 로한은 메이지 시대 문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 인물이다. 그는 동시대 작가 오자키 고요와 함께 '홍로 시대(紅露時代)'라는 문학적 황금기를 이끌었다. 당시 "사실주의의 오자키 고요, 이상주의의 고다 로한"으로 병칭되며 메이지 문학의 한 시대를 구축했고, 근대 문학의 발전에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오자키 고요, 쓰보우치 쇼요, 모리 오가이와 함께 '홍로소오 시대(紅露逍鴎時代)'로 불리기도 한다.
로한은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의 대표적인 작가로, 한문학, 일본 고전, 그리고 다양한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을 창작했다. 그는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와 함께 근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3.4. 고전 연구 및 학술 활동
고다 로한은 단순한 소설가를 넘어 고전 연구와 학술 활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이하라 사이카쿠의 작품이나 『남총리견팔견전』 등을 평석했으며, 누나미 게이온, 오타 미즈호 등 마쓰오 바쇼 연구회 회원 6명과 함께 『바쇼 하이쿠 연구(芭蕉俳句研究)』를 공동 저술했다. 특히 1920년(다이쇼 9년)부터 『바쇼 칠부집(芭蕉七部集)』의 주석 작업을 시작하여 17년에 걸쳐 만년인 1947년에 평석을 완성했다.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당나라의 전기 소설 『유선굴』이 일본의 『만요슈』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논한 『유선굴』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그의 주요 학술적 성과로 인정받아 1911년(메이지 44년)에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는 계기가 되었다.
1908년(메이지 41년)에는 오랜 친구이자 교토제국대학 문과 대학 초대 학장이었던 가노 고키치의 초청으로 국문학 강좌의 강사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나이토 고난도 동양사 강좌의 강사로 초빙되었다. 당시 로한은 소설가로, 나이토는 언론인으로 유명했지만 학자로서의 역량은 미지수였기에 가노의 초빙은 파격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로한의 지도를 받았던 중국학자 아오키 마사루에 따르면, 그의 강의 내용은 일본 문체 발달사, 『소가 이야기』와 『와산』에 대한 문학론, 지카마쓰 세와 조루리 등이었으며, 능숙한 화자는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평판은 매우 좋았다고 한다. 다만 칠판 글씨가 초서로 휘갈겨 쓰는 데다, 체격이 건장하고 머리가 커서 글씨를 가려 학생들이 필기하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로한은 학자로서도 충분한 소양을 갖추었지만, 어떤 사정으로 여름휴가 때 도쿄로 돌아간 뒤 1년도 채 되지 않아(교토로 이주한 것은 그해 초였다) 대학을 그만두었다. 로한 자신은 농담 삼아 "교토는 산밖에 없어서 낚시를 못해서"라고 말했지만, 관료적이고 빡빡한 대학 분위기가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내 기미(幾美)가 병약했던 것도 이유로 추정된다(아내 기미는 이듬해 1910년에 사망).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던 시기를 거쳐 『유정기』(1915년~1917년 작품을 모은 단편집)와 『운명』(1919년)을 발표하며 큰 호평을 받고 문단에 복귀했다. 이 작품들은 중국 고전을 바탕으로 했으며, 이후로도 중국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소설 집필뿐만 아니라, 도교 연구에서도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세계적으로 도교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에 여러 선구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도교 연구는 남조 다케노리가 "도교 서적을 두루 섭렵했지만 가장 감명받은 것은 로한과 앙리 마스페로의 것이었다"고 언급할 정도로, 앙리 마스페로의 『도교』와 함께 오늘날까지도 도교 연구의 고전으로 명성이 높다.
3.5. 하이쿠 평석
- 『겨울 일기 발췌』(冬の日記抄, 1924년 9월, 이와나미 서점)
- 『봄날 · 광야 발췌』(春の日・曠野抄, 1927년 6월, 이와나미 서점)
- 『히사고 · 원시 발췌』(ひさご・猿蓑抄, 1929년 12월, 이와나미 서점)
- 『숯가마 · 속 원시 발췌』(炭俵・続猿蓑抄, 1930년 1월, 이와나미 서점)
- 『평석 바쇼 칠부집』(評釈 芭蕉七部集, 1947년 완성): 이와나미 서점에서 7권 세트로 출간되었으며, 1983년과 1993년에 복각되었다.
3.6. 기행 · 일기
- 『침두산수』(枕頭山水, 1893년 9월, 박문관)
- 『가규안 일기』(蝸牛庵日記, 1949년 8월, 중앙공론사)
3.7. 희곡
- 『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
3.8. 교가
- 도쿄 도립 스미다가와 고등학교 교가
4. 개인적 관심사 및 활동
고다 로한은 문학 활동 외에도 다양한 취미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4.1. 호와 취미
고다 로한은 '가규안(蝸牛庵)' 외에도 '사사노쓰유(笹のつ유)', '라이온 도슈(雷音洞主)', '다쓰텐시(脱天子)' 등 다수의 호를 사용했다. 특히 '가규안'은 집이 없는 달팽이에 비유한 이름으로, 그가 잦은 이사를 해야 했던 자택을 은유한다.
그는 문학 활동 외에도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낚시, 바둑, 장기 외에도 요리, 사진 등에 조예가 깊었다. 낚시의 경우, 여러 강으로 낚시를 다니고, 낚싯바늘의 형태에 대한 해박한 지식, 미끼로 사용할 지렁이를 기르는 방법 등을 일기, 수필, 시가에 남겼다. 장기의 경우, 12세 명인 오노 고헤이, 13세 명인 세키네 긴지로, 14세 명인 기무라 요시오에게 사사했으며, 장기사 연구에도 힘써 잡지 『태양』에 「장기 잡고(将棋雑考)」, 「장기 잡화(将棋雑話)」와 같은 논문을 기고했다. 1916년 오노 명인으로부터 초단, 1917년 이노우에 요시오 8단으로부터 2단, 1922년 세키네 명인으로부터 4단 면장을 수여받았다(모두 아마추어 단위). 또한 1957년, 로한의 10주기에는 일본장기연맹으로부터 6단이 추증되었다.
4.2. 미래에 대한 통찰
로한은 미래학자로서의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1911년에 발표된 『해학 손으로 쓴 미래 일기(滑稽御手製未来記)』에서는 무선 송전, 움직이는 보도, 모노레일, 전기자동차 등이 기록되어 있어 그의 시대를 앞선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5. 수상 및 평가
고다 로한은 일본 문학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아 다양한 수상과 높은 평가를 받았다.
5.1. 수상 경력 및 문학적 평가
1937년 4월 28일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문화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같은 해 제국예술원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또한 제국학사원 회원이기도 했다. 문화 훈장 수상 당시 그는 "이 몇 년간은 거의 붓을 들지 않았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와 함께 근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나란히 일컬어진다. 그의 작품은 문어체의 아름다움과 이상주의적 경향, 그리고 깊이 있는 사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운명』과 같은 작품에 대해서는 다카시마 도시오가 "중국 사서를 에둘러 베껴 쓴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등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6. 개인 생활
고다 로한의 개인 생활은 복잡한 가족 관계와 건강 문제, 그리고 만년의 삶의 변화를 담고 있다.
6.1. 결혼과 가족
고다 로한은 고다 시게노부(성연)와 유우 부부의 넷째 아들이다. 아버지 시게노부는 오쿠보즈슈(奥坊主衆, 에도 성 중궁의 잡무 담당)를 지낸 이마니시 가문 출신으로, 표보즈슈(表坊主衆, 에도 성 표면의 잡무 담당)였던 고다 도시사다(幸田利貞)의 외동딸 유우의 데릴사위로 들어와 리조(利三)라는 이름으로 표보즈슈를 지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시게노부로 개명하고 대장성의 하급 속관이 되었으나 1885년 관제 개혁으로 비직(非職)이 되었다.
로한에게는 여러 형제가 있었다. 맏형 시게쓰네(成常, 1858년~1925년)는 도쿄 미상회소 서기를 거쳐 사업가가 되어 사가 방적 사장 등을 역임했다. 둘째 형 군지 나리타다(郡司成忠, 시게타다重忠)는 해군 군인이자 탐험가로, 군지 가문으로 양자 입적되었다. 남동생으로는 역사학자 나리토모(成友, 시게토모重友)가 있었고, 막내 동생 슈조(修造)는 도쿄 음악 학교 재학 중 요절했다. 여동생 노부(延)는 피아니스트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고우(幸)도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고우의 아들인 작가 다카기 다쿠는 로한에 대한 저작을 남겼으며, 고다 가문의 유산 상속 분쟁을 모델로 한 소설 『피와 피(血と血)』를 발표하기도 했다.
고다 가문은 본래 법화종을 종지로 삼았으나, 면직된 아버지 시게노부가 학우 이와키 히로시(岩城寛)와 우에무라 마사히사의 권유로 기독교로 개종했고, 다른 가족들도 입교했다. 그러나 요이치 부임지에서 돌아온 로한은 우에무라의 개종 권유를 거절하여, 부모 형제 중 유일하게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로한은 29세(서양 나이 28세, 대략 1895년)에 야마무로 기미(山室幾美)와 결혼했다. 기미는 로한의 든든한 이해자였으며, 슬하에 장녀 우타(歌), 차녀 아야(文), 장남 시게토요(成豊)를 두었다. 기미는 1910년(메이지 43년)에 인플루엔자로 사망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12년(다이쇼 원년)에는 장녀 우타마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12년(다이쇼 원년), 로한은 기독교인이었던 고다마 야요(児玉八代)와 재혼했다. 야요의 배려로 딸 아야는 미션계 학교인 여자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1926년(다이쇼 15년), 장남 시게토요가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이는 훗날 고다 아야가 소설 『동생(おとうと)』으로 발표하는 계기가 되었다. 재혼한 아내 야요는 1933년(쇼와 8년)부터 로한과 별거에 들어갔고, 1945년에 사망했다.
딸 아야는 아버지 로한의 사망 직전 잡지 『예림한보(藝林閒歩)』에 수필을 기고했으며(잡지 발행은 로한 사망 직후), 로한 사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수필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이후 소설도 쓰면서 작가로 활동했다. 아야의 외동딸 아오키 다마 또한 수필가이며, 그 딸인 아오키 나오는 독일 문학 분야의 에세이스트이다. 이처럼 고다 로한의 문학적 재능은 딸과 외손녀, 증손녀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전해졌다.
6.2. 만년 및 죽음
1945년, 고다 로한은 딸 아야, 외손녀 다마와 함께 재혼한 아내 야요의 별거처가 있던 나가노현으로 피난했다. 이후 시즈오카현 이토시로 옮겼으며, 아야와 다마는 잠시 쓰치하시 도시히코의 집에 머문 뒤 1945년 10월 지바현 이치카와시 스가노(菅野)에 집을 빌려 이주했다. 로한 또한 1946년 1월 28일 스가노의 집으로 옮겨왔다.
이치카와 시기 로한은 고령에 백내장을 앓아 거의 와병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쓰치하시 도시히코의 구술 필기를 통해 『바쇼 칠부집 평석』을 완성하는 열정을 보였다.
1947년 7월 30일, 로한은 폐렴에 협심증이 병발하여, 피난 후 이주했던 지바현 이치카와시 스가노(현 스가노 4초메)에서 향년 79세(만 80세)로 사망했다. 딸 아야는 로한의 모습을 『잡기(雑記)』로 집필했는데, 이 작품은 로한의 80세 기념으로 발행될 예정이었으나, 로한의 사망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이 책을 보지 못했다.
장례식은 세 칸밖에 안 되는 작은 자택에서 소박하게 치러졌지만, 당시 현직 총리였던 가타야마 데쓰와 아베 요시시게가 참석했으며,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조사가 헌정되기도 했다. 그의 묘소는 이케가미 혼몬지에 있으며, 계명은 로한 거사이다.

로한이 오랫동안 거주했던 스미다구 데라지마 정(寺島町)의 민가가 노후화되어 철거된 후, 그 자리에는 공원이 건설되었다. 이 공원은 1963년 4월 24일 완공되어 5월 초 개원식이 열렸고 '로한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공원은 2020년 현재에도 '스미다 구립 로한 아동 유원지'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7. 유산 및 영향력
고다 로한은 일본 근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문학적, 학술적 업적은 후대에 다양한 형태로 계승되고 평가받고 있다.
7.1. 문학사적 평가
고다 로한은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와 함께 근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3대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오자키 고요와 함께 '홍로 시대'를 구축하며 메이지 시대 문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특히 문어체 작품인 『오층탑』과 『운명』 등을 통해 문단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립했으며, 이상주의적 경향과 의고전주의적 특징을 문학에 구현했다.
그는 단순한 소설가를 넘어 한문학, 일본 고전, 그리고 도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학술적 연구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세계적으로 도교 연구가 미미했던 시기에 발표한 그의 도교 관련 논문들은 앙리 마스페로의 저서와 함께 오늘날까지도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그의 작품 중 일부가 (예를 들어 『운명』에 대한 다카시마 도시오의 비판처럼) 표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그의 방대한 저술과 학술적 깊이는 일본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했다.
7.2. 후대에 미친 영향
고다 로한의 영향력은 그의 문학적 유산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났다. 그의 딸 고다 아야는 저명한 수필가이자 소설가로 활동하며 아버지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고, 그의 문학적 재능은 외손녀 아오키 다마와 증손녀 아오키 나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의 옛 거주지인 무코지마 '가규안'은 박물관 메이지무라로 이전 보존되어 등록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삶의 흔적을 보존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또한 그의 작품 『해학 손으로 쓴 미래 일기』에서 무선 전력 전송, 무빙워크, 모노레일, 전기자동차 등을 예견한 것은 그의 놀라운 선견지명을 보여주며, 후대 사람들에게도 흥미로운 고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장기 연구와 기여는 일본장기연맹으로부터 사후 6단 추증으로 인정받았으며, 도쿄도립 스미다가와 고등학교의 교가를 작사하는 등 문학 외적인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전집 『로한 전집』은 생전에 제자 우루시야마 마타시로를 중심으로 편찬되었고, 사후에는 시오야 산 등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이와나미 서점에서 증보판(전 44권, 1978년~1980년)이 간행되는 등 그의 작품은 꾸준히 연구되고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그의 여러 작품은 현대에 재간행되거나 한국어로 번역되어 새로운 독자들에게도 소개되고 있다.
8. 대중 문화 속의 고다 로한
고다 로한은 그의 삶과 작품이 지닌 문학적, 인간적 깊이로 인해 다양한 대중 문화 매체에서 영감을 주었다. 특히 그의 딸 고다 아야의 자전적 작품을 원작으로 한 '동생' 시리즈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여러 차례 그려졌다.
매체 | 제목 | 연도 | 배역 | 배우/성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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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동생』 | 1960년 | 아버지 | 모리 마사유키 |
영화 | 『동생』 | 1976년 | 아버지 | 기무라 이사오 |
영화 | 『제도 이야기』 | 1988년 | 고다 로한 | 다카하시 고지 |
영화 | 『우리 사랑의 악보 다키 렌타로 이야기』 | 1993년 | 고다 로한 | 시바타 쿄헤이 |
텔레비전 드라마 | 『동생』 | 1958년 | 아버지 | 가토 지아 |
텔레비전 드라마 | 『동생』 | 1981년 | 아버지 | 스즈키 미즈호 |
텔레비전 드라마 | 『동생』 | 1990년 | 아버지 | 나카조 시즈오 |
텔레비전 드라마 | 『고이시카와의 집』 | 1996년 | 고다 로한 | 모리시게 히사야 |
텔레비전 드라마 | 『야마다 후타로 가라쿠리 사건첩』 | 2001년 | 고다 로한 | 미노와 유타 |
텔레비전 드라마 | 『고다 집의 사람들』 | 2002년 | 고다 로한 | 나카무라 바이자쿠 |
연극 | 『유복시인』 | 1964년 | 고다 로한 | 히라 미키지로 |
연극 | 『유복시인』 | 1989년 | 고다 로한 | 나카노 세이야 |
연극 | 『오페라 다키 렌타로』 | 1998년 | 고다 로한 | 후지타 요시히사 |
애니메이션 | 『제도 이야기』 | 1991년 | 고다 로한 | 야라 유사쿠 |
9. 관련 항목
- 일본 문학
- 오자키 고요
- 쓰보우치 쇼요
- 모리 오가이
- 나쓰메 소세키
- 고다 아야
- 다카기 다쿠
- 이하라 사이카쿠
- 마쓰오 바쇼
- 지카마쓰 몬자에몬
- 다니자키 준이치로
- 앙리 마스페로
- 가타야마 데쓰
- 아베 요시시게
- 박물관 메이지무라
- 문화 훈장
- 일본학사원
- 일본 예술원
-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
-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 도교
- 장기
- 바둑
- 낚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