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게리 프랜시스(Gerald Charles James Francis제럴드 찰스 제임스 프랜시스영어, 1951년 12월 6일 출생)는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다. 그는 선수 시절 주로 미드필더로 활약했으며, 특히 퀸스 파크 레인저스에서 팀의 핵심 선수이자 주장을 맡아 1976년 구단의 역사상 첫 리그 우승에 근접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도 12경기에 출전하여 8경기에서 주장을 역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나, 고질적인 등 부상으로 인해 국제 경력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다.
감독으로서도 그는 브리스틀 로버스와 퀸스 파크 레인저스, 토트넘 홋스퍼 등 여러 구단을 이끌었다. 특히 브리스틀 로버스를 3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승격시켰고, 퀸스 파크 레인저스에서는 프리미어리그 출범 초기 런던 연고 팀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하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토트넘 홋스퍼 감독 재임 시기에는 주요 선수 기용과 관련된 팬들과의 갈등, 특히 대런 앤더턴의 부상 관리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스카이 스포츠 해설가로 활동하며 축구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다.
2. 선수 경력
게리 프랜시스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선수이자 주장으로, 그의 경력은 퀸스 파크 레인저스에서의 전성기와 이어지는 다른 구단에서의 활약으로 나눌 수 있다.
2.1. 초기 선수 경력
프랜시스는 1969년 3월 리버풀을 상대로 퀸스 파크 레인저스 (QPR)에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1970년대 내내 그는 QPR의 주장 겸 중앙 미드필더로서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으며, 특히 1976년 QPR이 구단 역사상 첫 리그 우승에 근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12경기에 출전했으며, 그중 8경기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섰다. 하지만 고질적인 등 부상으로 인해 그의 국제 경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979년 그는 QPR을 떠나 크리스털 팰리스로 이적했으나, 이후 두 번째로 QPR에 복귀했으며, 잠시 활약한 뒤 코번트리 시티로 이적했다. 이 시기에도 그는 부상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2.2. 후기 선수 경력
1983년 8월, 프랜시스는 엑서터 시티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이 시즌은 팀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이후 그는 카디프 시티, 스완지 시티, 포츠머스 등 여러 구단에서 짧은 기간 동안 선수로 활동했다. 1985년 브리스틀 로버스로 이적하여 32경기에 출전했으며, 1986년 이 팀에서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윔블던에서 짧은 기간 동안 비선수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3. 감독 경력
선수 생활을 마친 게리 프랜시스는 감독으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으며, 여러 구단을 이끌며 다양한 성과와 경험을 쌓았다.
3.1. 브리스틀 로버스 (1기)
윔블던에서 수비 코치로 활동한 후, 게리 프랜시스는 3부 리그에 소속된 브리스틀 로버스의 감독으로 보비 굴드의 후임을 맡았다. 1990년, 그는 브리스틀 로버스를 3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2부 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불과 1년 후, 그는 친정팀인 퀸스 파크 레인저스의 감독직을 맡기 위해 브리스틀 로버스를 떠났다.
3.2. 퀸스 파크 레인저스 (1기)
1991년 6월 1일, 프랜시스는 퀸스 파크 레인저스(QPR)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1992-1993 시즌, QPR은 5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며 모든 런던 연고 팀 중 가장 높은 순위에 올랐다. 이듬해인 1993-1994 시즌에는 9위, 1994-1995 시즌에는 8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1994년 11월, 프랜시스는 로프터스 로드를 떠나 토트넘 홋스퍼로 향했다.
QPR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프랜시스는 당시 리그에서 가장 위협적인 선수들을 보유한 팀을 구축했다. 이 시기 클럽의 최고 선수 중 한 명은 단연 레슨 퍼디낸드였다. 퍼디낸드는 1986년 비리그 팀인 헤이즈에서 QPR에 합류했지만, 프랜시스 부임 전 시즌에 18경기 8골을 기록하며 1군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프랜시스는 퍼디낸드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켰고, 이는 1992-1993 시즌 그가 리그에서 20골을 터뜨리는 성과로 보답받았다. 퍼디낸드는 1995년 뉴캐슬로 600.00 만 GBP에 이적하기 전까지 5시즌 동안 78골을 기록하며 잉글랜드에서 가장 두려운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고, 1993년에는 처음으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1997년 7월, 프랜시스는 토트넘 홋스퍼 감독 재임 중 퍼디낸드를 다시 600.00 만 GBP에 영입했다.
1993년 11월, 월드컵 예선 탈락의 책임을 지고 그레이엄 테일러 감독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사임했을 때, 게리 프랜시스 또한 후임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결국 테리 베나블스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1994년 3월, 1부 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목표로 하던 야심찬 클럽인 울버햄프턴 원더러스는 프랜시스에게 1부 리그로 강등하여 팀을 맡아달라는 매력적인 제안을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고 울버햄프턴은 대신 그레이엄 테일러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3.3. 토트넘 홋스퍼
1994년 11월 15일, 게리 프랜시스는 토트넘 홋스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1994-1995 시즌은 토트넘에게 "거의" 성공할 뻔한 시즌이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7위를 기록하며 UEFA 컵 진출권에 단 두 계단 차이로 미치지 못했고, FA컵 준결승에서는 에버턴에 패배했다. 그러나 이후 두 시즌 동안은 중위권에 머무르며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기록했고, 결국 1997년 11월 19일, 토트넘이 프리미어리그 강등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에 프랜시스는 사임했다.
토트넘 재임 기간 동안 프랜시스는 스타 플레이어 대런 앤더턴의 기용 방식을 두고 팬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프랜시스가 앤더턴에게 충분한 회복 시간을 주지 않고 경기에 출전시켜 그의 고질적인 부상을 악화시켰고, 이로 인해 앤더턴이 1995-1996 시즌 단 8경기, 1996-1997 시즌 17경기 출전에 그치게 된 주된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선수 관리에 대한 논란은 그의 감독 경력에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3.4. 퀸스 파크 레인저스 (2기)
1998년 9월, 게리 프랜시스는 두 번째로 QPR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떠난 지 4년 동안 QPR은 침체기를 겪으며 1부 리그 강등권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프랜시스는 부임 후 두 시즌 동안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해냈으나, 30여 년 만에 최하위권으로 추락할 위기가 임박한 2001년 2월, 그는 결국 사임했다. 잠시 QPR의 축구 디렉터로 활동하다가, 2001년 6월 브리스틀 로버스의 두 번째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3.5. 브리스틀 로버스 (2기)
2001년 6월 27일, 게리 프랜시스는 두 번째로 브리스틀 로버스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2001-2002 시즌 초반 3연승을 거두며 팀은 2부 리그 승격에 대한 희망을 품었으나, 곧이어 부상 선수들이 속출하며 팀의 경기력이 급격히 하락했다. 결국 프랜시스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프랜시스가 떠난 후 브리스틀 로버스는 계속해서 하락세를 보이며 내셔널리그 강등을 단 한 계단 차이로 면할 수 있었다. 브리스틀 로버스에서 프랜시스는 그레이엄 먹스워디와 이언 홀러웨이와 함께 일했다. 이 시기 이후로 프랜시스는 더 이상 감독직을 맡지 않았다.
3.6. 코치 경력
2008년 10월 4일, 게리 프랜시스는 뉴캐슬 유나이티드로부터 1군 코치직 제안을 받았으나, 직책 기간의 불확실성 때문에 이를 고사했다. 대신 같은 시기 스토크 시티의 1군 코치 제안을 수락하여 부임했으며, 2012-2013 시즌을 끝으로 스토크 시티를 떠났다.
이후 프랜시스는 전 스토크 시티 감독인 토니 퓰리스를 따라 크리스털 팰리스의 코치로 합류했다. 퓰리스 감독이 2014년 8월 예기치 않게 팀을 떠난 후에도, 프랜시스는 키스 밀렌 임시 감독을 돕기 위해 코치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2014년 8월 28일, 닐 워녹이 새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구단은 프랜시스가 팀을 떠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4. 개인 생활
게리 프랜시스는 어린 시절 브렌트퍼드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인 로이 프랜시스 또한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에 브렌트퍼드에서 프로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그의 두 아들인 애덤 프랜시스와 제이크 프랜시스는 퀸스 파크 레인저스의 아카데미 선수 출신이다.
5. 수상 및 영예
게리 프랜시스는 선수와 감독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수상과 영예를 얻었다.
-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감독: 1회 (1994년 12월)
6. 감독 통계
게리 프랜시스의 감독 경력 통계는 다음과 같다.
팀 | 취임 | 퇴임 | 경기 수 | 승리 | 무승부 | 패배 | 승률 (%) |
---|---|---|---|---|---|---|---|
엑서터 시티 | 1983년 7월 20일 | 1984년 5월 14일 | 46 | 6 | 15 | 25 | 13.0 |
브리스틀 로버스 | 1987년 7월 1일 | 1991년 5월 13일 | 206 | 85 | 63 | 58 | 41.3 |
퀸스 파크 레인저스 | 1991년 6월 1일 | 1994년 11월 11일 | 158 | 59 | 47 | 52 | 37.3 |
토트넘 홋스퍼 | 1994년 11월 15일 | 1997년 11월 19일 | 142 | 55 | 42 | 45 | 38.7 |
퀸스 파크 레인저스 | 1998년 10월 16일 | 2001년 2월 25일 | 125 | 36 | 42 | 47 | 28.8 |
브리스틀 로버스 | 2001년 6월 27일 | 2001년 12월 24일 | 31 | 9 | 10 | 12 | 29.0 |
통산 | 708 | 250 | 219 | 239 | 35.3 |
7. 미디어 활동
감독직에서 은퇴한 후, 게리 프랜시스는 스카이 스포츠의 축구 해설가로 자주 출연하며 미디어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경기 분석과 해설을 제공하며 대중과 소통을 이어갔다.
8. 평가와 비판
게리 프랜시스는 퀸스 파크 레인저스에서 선수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으며, 팀의 핵심 미드필더이자 주장으로서 1976년 팀이 리그 우승에 근접하는 역사적인 성과를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도 주목할 만했으나, 고질적인 부상으로 인해 그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감독 경력에서는 브리스틀 로버스를 승격시키고, QPR을 프리미어리그 상위권으로 이끄는 등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QPR 시절 레슨 퍼디낸드와 같은 선수를 성장시킨 것은 그의 선수 발굴 및 육성 능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토트넘 홋스퍼 감독 재임 당시에는 스타 선수 대런 앤더턴의 부상 관리 문제로 팬들의 비판과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는 앤더턴에게 충분한 회복 시간을 주지 않고 무리하게 경기에 출전시켜 선수 경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일화는 그의 선수 관리 방식에 대한 중요한 논란으로 남아 있다. 전반적으로 그의 감독 경력은 빛나는 성공과 함께 아쉬운 결과가 교차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띤다.
9. 같이 보기
- 퀸스 파크 레인저스 FC
- 토트넘 홋스퍼 FC
- 프리미어리그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미드필더
- 축구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