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및 초기 생애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초기 생애는 그의 정체성만큼이나 불확실하지만, 그가 수도사였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1.1. 수도사 시절과 망명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는 1600년경 모스크바 총대주교 이오프에게 학식과 자신감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차르였던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의 존재를 전해 듣고 젊은 그리고리를 체포하여 심문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리고리는 수도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수도원을 떠나 1601년경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중, 보리스 고두노프의 추적을 피해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 내 오스트로흐의 콘스탄틴 오스트로지스키 공작에게로 도주했다. 이후 그는 비시니오비에츠키 가문의 비호 아래 들어갔다.
1.2. 폴란드에서의 활동과 지지 확보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귀족들은 그리고리의 주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아담과 미하우 비시니오비에츠키 공작은 이를 모스크바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할 기회로 보았다. 당시 그가 폴란드 선왕 스테판 바토리의 사생아라는 소문도 돌았는데, 후세의 일화에 따르면 그가 폭력적인 주인에게 맞았을 때 이 사실을 무심코 내뱉었다고 한다.
그리고리 본인은 자신이 이반 4세의 미망인이자 어머니인 마리야 나고야가 보리스 고두노프의 암살 시도를 미리 알아채고 자신을 의사에게 맡겨 여러 수도원에 숨겨 키웠다고 주장했다. 의사가 죽은 후 그는 폴란드로 도피했으며, 비시니오비에츠키 가문의 비호를 받기 전까지 잠시 교사로 일했다고도 증언했다. 이반 4세를 알던 일부 사람들은 그가 실제로 어린 황자와 닮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그리고리는 승마와 읽고 쓰기에 능했으며, 러시아어, 폴란드어, 프랑스어에 유창한 등 귀족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아담 비시니오비에츠키, 로만 루진스키, 얀 피오트르 사피에하를 비롯한 여러 폴란드 귀족들은 그리고리의 주장을 믿었든 안 믿었든 간에 그를 보리스 고두노프에 대항할 인물로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1604년 3월, 그리고리는 크라쿠프의 지그문트 3세 국왕의 궁정을 방문했다. 국왕은 그를 잠정적으로 지원했지만,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지는 않았다. 강력한 예수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리고리는 1604년 4월 17일 공개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교황 특사 클라우디오 랑고니를 설득하여 그의 주장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궁정에 머무는 동안 그리고리는 폴란드 귀족 예지 무니셰프의 딸 마리나 므니제치를 만났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그가 마리나의 아버지에게 청혼하자, 즉위 시 프스코프,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등 러시아 도시들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무니셰프 가문에 부여하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결혼을 허락받았다.
2. 러시아 침공 및 차르 즉위
가짜 드미트리 1세는 폴란드에서의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러시아 침공을 감행했으며, 보리스 고두노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권력 장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1. 군사 작전 및 초기 성공
보리스 고두노프는 드미트리가 도망친 수도사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불확실했으며, 차르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오히려 약해졌다. 특히 드미트리 지지자들이 반대 소문을 퍼뜨리면서 보리스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몇몇 러시아 보야르들도 차르 보리스에게 세금을 내지 않을 "합법적인" 이유를 얻기 위해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드미트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약 3,500명의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 사병들로 구성된 소규모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1605년 3월 이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했다. 남부 코사크를 비롯한 보리스의 많은 적대자들이 모스크바로 향하는 긴 행군에 드미트리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 연합군은 러시아 군대와 두 차례 교전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승리하여 체르니히우, 푸티블, 세프스크, 쿠르스크를 점령했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크게 패배했다.
2.2. 보리스 고두노프의 사망과 집권
드미트리의 대의는 1605년 4월 13일 보리스 고두노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구원받았다. 인기가 없던 차르의 죽음은 드미트리에 대한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했다. 승리했던 러시아 군대는 드미트리 편으로 돌아섰고, 다른 병력들도 진격하는 폴란드 군대의 대열에 합류했다. 6월 1일, 모스크바의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 즉위한 차르 표도르 2세와 그의 어머니 마리야 스쿠라토바-벨스카야를 투옥했다.
6월 20일, 드미트리는 아이작 마사의 기록에 따르면 8,000명의 코사크와 폴란드인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개선 입성했다. 그리고 7월 21일, 그가 직접 선택한 새로운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그리스인 이그나티오스에 의해 차르로 즉위했다.
3. 통치 기간
가짜 드미트리 1세의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다양한 국내 정책을 시도하고 외교 관계를 구축하려 했으며, 특히 종교 정책과 결혼으로 인해 큰 사회적 반발에 직면했다.
3.1. 국내 정책 및 개혁 시도

새로운 차르가 된 드미트리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반 4세의 묘소와 그의 미망인 마리야 나고야의 수녀원을 방문했다. 마리야 나고야는 그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의 이야기를 "확인"해주었다. 고두노프 일가는 차르 표도르 2세와 그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대부분 처형되었으며, 다만 크세니야는 드미트리에게 강간당한 후 5개월 동안 첩으로 지냈다.
슈이스키, 골리친, 로마노프 등 보리스 고두노프가 추방했던 많은 귀족 가문들은 사면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다. 미래 로마노프 왕조의 시조인 표도르 로마노프는 곧 로스토프의 수좌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한편, 새로운 차르를 인정하지 않았던 옛 총대주교 이오프는 추방되었다.
드미트리는 일련의 정치 및 경제 개혁을 도입할 계획이었다. 그는 성 유리 날을 복원하여 농노들이 다른 영주에게 충성을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농민들의 상황을 완화하려 했다. 러시아 궁정에서 그가 총애했던 18세의 이반 흐보로스티닌 공작은 역사가들에 의해 러시아 최초의 서구화론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3.2. 외교 관계 및 종교 정책
대외 정책에서 드미트리는 자신을 후원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 및 교황령과의 동맹을 추구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전쟁 준비를 위해 화기의 대량 생산을 명령했다. 그는 서신에서 자신을 표트르 1세가 이 칭호를 사용하기 1세기 전부터 "러시아의 황제"라고 칭했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칭호가 인정받지 못했다. 드미트리의 왕실 초상화는 당시로서는 특이하게도 수염이 없고 뒤로 넘긴 검은 머리를 특징으로 했다.
드미트리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개방성을 보였는데, 이는 러시아 정교회와 갈등을 야기했다. 러시아 차르가 다른 신앙을 가진 여성과 결혼할 경우, 일반적으로 그녀는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마리나 므니제치와 결혼할 때 그녀가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이는 드미트리가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와 교황 바오로 5세로부터 러시아 정교회와 성좌를 재통합하겠다고 약속하여 지지를 얻었다는 소문이 돌게 했다. 이러한 소문은 러시아 정교회, 보야르, 그리고 일반 대중 모두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3.3. 결혼과 사회적 반발
1606년 5월 8일, 드미트리는 모스크바에서 마리나 므니제치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그에 대한 사회적 반발을 더욱 심화시켰다. 불만을 품은 바실리 슈이스키 공작은 차르가 가톨릭, 루터교, 그리고 소도미를 퍼뜨린다고 비난하며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난은 대중의 지지를 얻었는데, 특히 드미트리가 러시아 관습을 무시하는 외국인들로 자신을 둘러쌌기 때문이었다. 당시 보수적인 러시아 사회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러시아 연대기 작가 아브라미 팔리친에 따르면, 드미트리는 러시아 교회가 이단으로 간주하는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병사들이 정교회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슈이스키의 추종자들은 차르 드미트리가 폴란드인 수행원들에게 도시 성문을 잠그고 모스크바 시민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러한 명령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팔리친의 연대기는 이를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기록했다.
4. 죽음과 사후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반란으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의 시체는 잔인하게 처리되었다. 그의 죽음은 러시아의 동란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4.1. 반란과 암살

1606년 5월 17일 아침, 드미트리가 마리나와 결혼한 지 열흘 만에 수많은 보야르와 평민들이 크렘린을 습격했다. 드미트리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도망치려 했으나, 낙하 도중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목욕탕으로 도망쳐 숨으려 했지만, 보야르들에게 발각되어 끌려 나왔다. 보야르들은 그가 군중에게 호소하여 다시 지지를 얻을 것을 우려하여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4.2. 사후 처리 및 영향
드미트리의 시체는 난도질당하고 불태워졌으며, 그 재는 대포에 넣어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되었다. 팔리친에 따르면, 드미트리의 죽음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으며, 그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모스크바 거리에는 엄청난 양의 이단자의 피가 흘렀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드미트리의 통치는 단 11개월 만에 끝났고, 바실리 슈이스키 공작이 그의 뒤를 이어 차르가 되었다. 드미트리의 죽음 이후에도 가짜 드미트리 2세와 가짜 드미트리 3세라는 두 명의 사칭자가 더 나타났으며, 마리나 므니제치는 가짜 드미트리 2세를 자신의 죽은 남편으로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5. 평가 및 논란
가짜 드미트리 1세의 통치와 그의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의 정체성과 종교적, 외교적 행보를 둘러싼 비판과 의혹이 얽혀 복합적이다.
5.1. 비판과 의혹
가짜 드미트리 1세는 그의 정체성 자체가 사칭자라는 점에서 가장 큰 비판과 의혹을 받았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를 도망친 수도사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라고 선언했고, 심지어 그를 아들로 인정했던 마리야 나고야조차 그의 죽음 이후에는 그가 드미트리 황자가 아니었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그의 종교적 행보 또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마리나 므니제치와의 결혼 시 그녀가 정교회로 개종하는 전통을 깨뜨린 것은 러시아 정교회와 보야르, 일반 대중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그는 또한 이단으로 간주되던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병사들이 정교회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용하여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외세 개입 문제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가 폴란드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침공하고, 폴란드인 수행원들을 가까이 두며 그들의 행패를 용인한 것은 러시아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렸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그가 가톨릭과 소도미를 퍼뜨린다고 비난하며 반란을 주도했고, 이는 드미트리가 외국인들로 자신을 둘러싸고 러시아 관습을 무시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더욱 큰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5.2. 역사적 평가
가짜 드미트리 1세는 체스터 S.-L. 더닝과 같은 역사가들에게 "군사 작전과 민중 봉기를 통해 왕위에 오른 유일한 차르"로 평가받는다. 이는 그의 집권 방식이 기존의 계승 질서와는 완전히 달랐음을 보여준다. 그의 통치는 비록 1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류리크 왕조의 단절 이후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서기 전까지의 혼란기인 동란 시대의 서막을 열고 그 혼란을 심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농민들의 상황을 완화하려는 시도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획하는 등 개혁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 그의 정체성에 대한 의혹과 종교적, 외교적 정책으로 인한 반발은 결국 그의 몰락을 초래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여 러시아의 혼란을 장기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 자체가 러시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영향 및 대중문화 속 모습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삶과 통치는 후대의 러시아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학 및 예술 작품의 영감이 되었다.
6.1. 후대에 미친 영향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죽음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촉발했으며, 이는 동란 시대의 폭력성과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의 짧은 통치 이후에도 가짜 드미트리 2세와 가짜 드미트리 3세와 같은 다른 사칭자들이 계속 등장하여 러시아 사회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특히 마리나 므니제치가 가짜 드미트리 2세를 자신의 죽은 남편으로 "인정"한 사건은 이러한 사칭 행위에 대한 대중의 혼란과 동란 시대의 복잡성을 잘 보여준다. 그의 행적은 러시아의 정치적 안정성을 뒤흔들고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위한 격동의 시대를 예고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6.2.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의 묘사
가짜 드미트리 1세의 극적인 삶은 여러 유명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운문극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가짜 드미트리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푸시킨은 그를 어린 황자가 살았다면 되었을 나이를 알게 된 후 황자를 사칭하는 젊은 수련 수도사로 묘사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했다. 푸시킨은 드미트리를 앙리 4세에 비유하며, 그가 용감하고 관대하며 허풍쟁이이고 종교에 무관심하며 정치적 대의를 위해 신앙을 버리고 쾌락과 전쟁을 사랑하며 환상적인 계획에 몰두하고 음모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푸시킨은 드미트리와 바실리 4세의 통치, 그리고 이어진 동란 시대에 대한 추가적인 희곡을 쓸 계획이었으나, 37세에 결투로 사망하면서 그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다.
- 푸시킨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에서는 가짜 드미트리, 폴란드인,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를 악마화한다. 가짜 드미트리와 마리나 므니제치의 약혼은 예수회에 의해 조장된 것으로 묘사되며, 마리나가 사칭자를 유혹하기를 주저하자 예수회원이 그녀를 지옥불로 위협하여 무릎을 꿇게 만든다. 이는 마리나가 병적인 야망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다고 믿었던 푸시킨의 관점과는 대조적이다. 오페라의 대단원에서 사칭자의 왕위 등극은 성스러운 바보 니콜라이에 의해 탄식되는데, 니콜라이는 푸시킨의 희곡에서는 차르 보리스가 진짜 드미트리를 살해한 것을 질책하기 위해서만 등장한다. 무소륵스키의 오페라에서 성스러운 바보는 "울어라, 울어라 정교회 영혼이여"라고 외치며 "적이 올 것이고" "밤보다 더 검은 어둠"이 찾아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 가짜 드미트리의 이야기는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드미트리우스, 알렉산드르 수마로코프, 알렉세이 호먀코프, 빅토랭 종시에르의 오페라 디미트리, 그리고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오페라 디미트리에서도 다루어졌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의 유일한 장편 산문 작품인 말테의 수기에서 가짜 드미트리의 몰락을 서술한다.
- 해럴드 램은 단편 더 울프 마스터에서 가짜 드미트리의 죽음을 각색하여, 그가 속임수로 암살에서 살아남아 그를 배신했던 코사크의 추적을 받으며 동쪽으로 도망쳤다고 묘사한다.
- 닥터 후 오디오 드라마 박스 세트인 더 나인스 닥터 어드벤처스: 백 투 어스 (볼륨 2.1)의 두 번째 이야기에도 가짜 드미트리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에서 가짜 드미트리는 로봇 군대로 러시아를, 그리고 세계를 정복하려는 외계인들의 통제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