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가와카미 하지메는 학자로서의 삶과 사회 운동가로서의 삶을 넘나들며 격변하는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생애는 학문적 탐구에서 시작하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 변혁 운동으로 이어졌다.
1.1. 출생 및 유년기
가와카미 하지메는 1879년 10월 20일, 야마구치현 구가군 이와쿠니마치(현재의 이와쿠니시)에서 옛 이와쿠니번 사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할머니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다소 버릇없이 자랐다고 전해진다.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도시의 극심한 빈부 격차를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는 훗날 그가 빈곤 문제에 천착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인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1901년 11월 20일에는 도쿄 혼고 중앙회당에서 키노시타 나오에와 다나카 쇼조 등이 주최한 아시오 동산 광독 사건 관련 연설회에 참석하여 큰 감명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 하오리, 목도리 등을 기부하여 《도쿄 마이니치 신문》에 "특별한 뜻을 가진 대학생"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1.2. 교육
가와카미 하지메는 야마구치현립 야마구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898년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과에 입학했다. 그는 1902년 대학을 졸업했으며, 이후 국가학회 잡지에 기고하면서 경제학을 통해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1.3. 초기 경력 및 언론 활동
대학 졸업 후 1903년 도쿄 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 강사로 취임한 가와카미는 이후 센슈 학교, 대만협회전문학교, 가쿠슈인 등에서 강사를 겸임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이와 동시에 그는 요미우리 신문에 경제 관련 기사를 집필하며 언론인으로서의 활동도 시작했다. 1905년 12월 5일 교직을 사임한 그는 12월 8일 이토 쇼신이 주장하는 무아애(無我愛)를 실천하는 '무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으나, 1906년 2월에 탈퇴하고 요미우리 신문사에 입사했다.
1.4. 교토 제국대학 교수 및 학문 연구
1908년 타지마 킨지의 요청으로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부임한 이래 가와카미 하지메는 본격적인 연구 생활에 몰두했다. 1912년에는 그동안의 연구를 총괄한 논문집 《경제학 연구》를 저술했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2년간 유럽 유학을 떠났으며, 1914년에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그는 교토 제국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1920년 9월에는 동 대학 경제학부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이 시기부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깊이 경도되어 연구를 심화해 나갔으며,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5.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빈곤 이야기'
가와카미 하지메는 사회의 빈곤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 끝에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다. 그는 1916년 9월 11일부터 12월 26일까지 《도쿄 아사히 신문》에 《빈곤 이야기》를 연재했고, 이듬해 1917년 3월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분위기 속에서 빈곤이라는 사회 문제에 경제학적으로 접근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에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일부 내용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결론적으로는 부자들이 사치를 줄여야 빈곤이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와카미는 《빈곤 이야기》에서 "워킹 푸어가 발생하는 것은 부유층이 사치를 부려 사회가 빈자들의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며, 사회 전체가 사치를 멈추고 검소하게 생활하면 빈곤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후쿠다 토쿠조나 사회주의자 사카이 토시히코로부터 "현실적이지 않다"는 강도 높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19년 1월 20일, 그는 개인 잡지 《사회문제연구》(社會問題硏究샤카이몬다이겐큐일본어)를 창간하여 1930년 10월까지 발행했다. 이 잡지를 통해 그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널리 전파했다. 1921년 가와카미가 집필한 논문 '단편'은 잡지 《카이조》의 발행 금지를 초래했으며, 이 논문은 훗날 도라노몬 사건을 일으킨 난바 다이스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1924년 노농파의 쿠시다 타미조가 가와카미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하자, 가와카미는 그 비판이 타당함을 인정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진수를 더욱 깊이 탐구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는 《자본론》 등 마르크스주의 문헌 번역에 매진했으며, 1927년 2월부터 1928년 12월까지 《사회문제연구》에 '유물사관에 관한 자기청산'을 발표했다. 이 시기에 발표된 그의 《경제학 대강》과 《자본론 입문》은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일본의 이론 경제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 사회 운동 및 정치 참여
1928년 4월 18일, 가와카미 하지메는 '마르크스주의 강좌' 광고용 책자에 부적절한 단문을 작성하고, 가가와현에서 진행한 선거 연설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었으며, 사회과학 연구회 회원 중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자들이 나왔다는 이유로 교토 제국대학에서 사직을 강요받아 결국 사직(의원 면직)했다. 당시 문부성이 전국의 대학에 좌경 교수 처분 방침을 내렸던 상황도 그의 사직에 영향을 미쳤다. 흥미롭게도 같은 날 가와카미의 특별 승급이 결정되어 4급봉에서 2급봉으로 700 JPY의 증봉 명령이 발령되기도 했다.
대학을 떠난 후 그는 오야마 이쿠오를 중심으로 한 노동농민당 결성에 참여했다. 1930년 교토에서 도쿄로 거처를 옮겼으나, 곧 노동농민당의 노선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오야마와 결별했다. 그는 잡지 《카이조》에 《제2 빈곤 이야기》를 연재했는데,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입문서로서 널리 읽혔다. 쇼와 공황 시기에는 디플레이션을 방치해도 문제가 없으며,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더라도 자본주의 경제의 한계는 해소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7. 공산당 활동, 투옥 및 전향
교토 제국대학을 퇴직하고 《자본론》 번역에 몰두하던 가와카미 하지메는 쇼와 시대 초기부터 지하 일본 공산당에 기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직의 말단 활동가들에게만 기부했지만, 1931년 여름 무렵 일본대학의 민법학자 스기노하라 슌이치를 통해 당 중앙과 연락이 닿아 직접 당 중앙에 자금을 지원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매월 100 JPY 단위의 금액이었으나, 점차 1000 JPY 단위의 임시 기부를 여러 차례 요청받았다. 당시 100 JPY는 현재 가치로 약 20.00 만 JPY에 해당한다.

1932년 9월 9일, 가와카미 하지메는 직접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에 1.50 만 JPY를 제공했다. 같은 달 그는 잠복 활동을 시작하며 지하 운동에 참여했다. 입당 후 그의 주요 임무는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의 편집을 돕고, 정치 팸플릿 제작에 참여하며 직접 집필하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 그가 수행한 가장 잘 알려진 작업은 코민테른이 발표한 32년 테제('일본의 정세와 일본 공산당의 임무에 관한 테제')를 신속하게 입수하여 번역하고, 7월 10일 '아카하타' 특별호에 당 명의(혼다 히로후지 명의)로 발표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잠복 활동을 이어갔으나, 1933년 1월 12일 나카노구의 한 화가 집에서 경시청 특고과에 의해 검거되었다. 같은 해 1월 26일,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33년 7월 6일, 그는 이치가야 형무소의 미결수 독방에서 '옥중 독어'라는 은퇴 성명을 각 신문에 발표하며 모든 실제 운동과의 절연을 표명했다.
1933년 8월 1일, '신생 공산당 사건'으로 불리는 일본국 정부의 제4차 검거에서 도쿄 상과대학 교수 오츠카 킨노스케, 옛 규슈대학 교수 카자하야 야소지 등과 함께 검거되었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토요타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후에 이치가야 형무소로 이감). 이로 인해 그는 정4위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훈3등 및 대례기념장 (다이쇼)을 박탈당했다. 수감 중에 그는 자신의 공산당 활동에 대한 패배 선언과 '전향'(사상 전환)을 발표하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옥중에서 그는 한시에 심취하여 직접 한시를 짓고 조조와 육유의 시를 즐겼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출옥 후에 더욱 정리되어 《육방옹감상》(육방옹은 육유의 호) 등의 저서로 발표되었다.
1.8. 석방 후 저술 활동
1937년 6월 15일 새벽, 가와카미 하지메는 은사로 인해 1년 3개월이 감형되어 총 3년 9개월의 복역을 마치고 출옥했다. 출소 당일, 자택에서 신문 기자들의 사진 촬영에 응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족에게 대필시킨 수기(手記)를 발표했다. 이 수기에서 그는 "출옥을 계기로 마르크스 학자로서의 나의 생애를 마감한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자서전 등의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1941년 도쿄도 스기나미구 아마누마에서 교토시로 거처를 옮겼다. 종전 후 활동 복귀를 계획했으나, 1946년 1월 30일 노쇠와 영양실조에 폐렴이 합병되어 교토시 사쿄구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계명은 천신원 정진일조 거사(天心院精進日肇居士)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자서전》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비밀리에 집필되었으며, 1946년 연재된 후 1947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어 널리 읽혔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일본 문학사에서 전례 없는 찬사를 받았다"고 평가되었다. 또한 그는 출옥 후 《자본론》을 독일어에서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2. 사상 및 저술
가와카미 하지메의 사상은 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사회 문제, 특히 빈곤의 근본 원인을 파헤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일본에 소개하고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저술은 당시 일본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경제학 이론
가와카미 하지메는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인 모순을 비판했다. 그는 에드윈 로버트 앤더슨 셀리그먼(Edwin Robert Anderson Seligman에드윈 로버트 앤더슨 셀리그먼영어)의 《역사의 경제적 해석》(Economic Interpretation of History역사의 경제적 해석영어)을 번역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을 일본에 처음 소개하는 등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는 《빈곤 이야기》에서 워킹 푸어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을 부유층의 사치와 그로 인해 사회가 빈자들의 필수품을 생산하지 않는 데서 찾았다. 그는 사회 전체가 사치를 멈추고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빈곤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후쿠다 토쿠조나 사회주의자 사카이 토시히코와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로부터 "현실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24년 노농파의 쿠시다 타미조가 가와카미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했을 때, 가와카미는 이를 겸허히 수용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진수를 더욱 깊이 탐구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일본 경제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과 이론은 사회 정의와 경제적 평등에 대한 그의 깊은 관점을 보여준다.
2.2. 주요 저작
가와카미 하지메는 방대한 양의 저술과 번역을 남겼으며, 이는 일본 사회와 학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요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 《사회주의 평론》(社會主義評論, 1905)
- 《경제학상지근본관념》(經濟學上之根本觀念, 1905)
- 《일본존농론》(日本尊農論, 1905)
- 《인생의 귀취》(人生の歸趣, 1906)
- 《일본농정학》(日本農政學, 1906)
- 《무아애의 진리》(無我愛の眞理, 1906)
- 《경제학원론》(經濟學原論, 1907)
- 《인류원시노생활》(人類原始ノ生活, 1909)
- 《시세지변》(時勢之變, 1911)
- 《경제학 연구》(經濟學硏究, 1912)
- 《금과 신용과 물가》(金ト信用ト物價, 1913)
- 《경제원론》(經濟原論, 1913)
- 《조국을 돌아보며》(祖國を顧みて, 1915)
- 《사회문제관견》(社會問題管見, 1918)
- 《빈곤 이야기》(貧乏物語, 1917): 가난 문제에 대한 경제학적 접근을 담은 그의 대표작으로,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근세경제사상사론》(近世經濟思想史論, 1920)
- 《사회조직과 사회혁명에 관한 약간의 고찰》(社會組織と社會革命に關する若干의 考察, 1922)
- 《유물사관 연구》(唯物史觀硏究, 1923)
- 《자본주의 경제학의 사적 발전》(資本主義經濟學의 史的發展, 1923)
- 《마르크스 자본론 약해》(マルクス資本論略解, 1925)
- 《계급투쟁의 필연성과 그 필연적 전환》(階級闘爭의 必然性과 其의 必然的轉化, 1926)
- 《유물사관의 해설》(唯物史觀의 解說, 1926)
- 《인구 문제 비판》(人口問題批判, 1927)
- 《경제학 전집 제1권 경제학 대강》(經濟學全集 第1卷 經濟學大綱, 1928):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일본 이론 경제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마르크스주의 경제학》(マルクス主義經濟學, 1928)
-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초 이론》(マルクス主義經濟學의 基礎理論, 1929)
- 《자본론 입문》(資本論入門, 1929): 마르크스주의 입문서로 널리 읽혔다.
- 《소아병을 극복하라》(小兒病을 克服하라, 1929)
- 《마르크스주의를 위하여》(マルクス主義를 爲하여, 1929)
- 《자본주의적 착취의 메커니즘》(資本主義的搾取의 カラクリ, 1930)
- 《대중에게 호소하다: 노농당의 입장에서》(大衆에 訴하오: 勞農黨의 立場에서, 1930)
- 《제2 빈곤 이야기》(第二貧乏物語, 1930)
- 《추억 단편의 부·초출》(思ひ出 斷片의 部・抄出, 1946)
- 《가와카미 선생으로부터의 편지》(河上先生으로부터의 便紙, 1946)
- 《잡초집》(雑草集, 1946): 시집
- 《자본주의적 착취란 무엇인가》(資本主義的搾取란 무엇인가, 1946)
- 《여행자》(旅人, 1946): 시집
- 《고향》(ふるさと, 1946)
- 《계급투쟁의 필연성 및 그 필연적 전환》(階級闘爭의 必然性 및 그 必然的轉化, 1947)
- 《가와카미 하지메로부터 쿠시다 타미조에게 보낸 편지》(河上肇로부터 櫛田民蔵에게 보낸 便紙, 1947)
- 《옥중사어》(獄中贅語, 1947)
- 《고책》(古机, 1947)
- 《자서전》(自叙伝, 1947-1948, 전 4권): 사망 후 간행되어 널리 읽힌 베스트셀러이다.
- 《육유 감상》(陸放翁鑑賞, 1949)
- 《서양과 일본 외》(西洋과 日本 外, 1951)
- 《멀리서 희미하게 종이 울린다》(遠く에서 희미하게 鐘이 울린다, 1957)
- 《만년의 생활 기록》(晩年의 生活記錄, 1958)
- 《경제학사 강의》(經濟學史講義, 1973)
- 《가와카미 하지메 옥중 왕복 서간집》(河上肇 獄中 往復 書簡集, 1986-1987)
- 《가와카미 하지메 평론집》(河上肇 評論集, 1987)
- 《가와카미 하지메의 유묵》(河上肇의 遺墨, 2007)
그의 저작들은 여러 전집으로도 간행되었다.
- 《가와카미 하지메 저작집》(河上肇著作集, 전 12권, 치쿠마쇼보, 1964-1965)
- 《가와카미 하지메 시집》(河上肇詩集, 치쿠마쇼보, 1966)
- 《가와카미 하지메 전집》(河上肇全集, 전 28권, 이와나미 쇼텐, 1982-1984)
- 《속·가와카미 하지메 전집》(続・河上肇全集, 전 7권, 이와나미 쇼텐, 1985)
또한 그는 다양한 번역서도 남겼다.
- 《인생의 의의》(人生의 意義, 레프 톨스토이 저, 오다 요리조 공역, 1906)
- 《바그너 씨 경제학 원론》(ワグナー氏経済学原論, 아돌프 바그너 저, 1906)
- 《가치론》(価値論, 니콜라스 피어슨 저, 카와다 시로 공역, 1911)
- 《물재의 가치》(物財의 價値, 프랭크 페터 저, 1911)
- 《자본 및 이자율》(資本 및 利子率, 어빙 피셔 저, 1912)
-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如何히 生活해야 하는가, 어빙 피셔, 유진 엘 피스크 공편, 1917)
- 《임금 노동과 자본/임금, 가격, 이윤》(賃労働과 資本/勞賃, 価格 및 利潤, 카를 마르크스 저, 1923)
- 《레닌의 변증법》(レーニン의 弁證法, 아브람 데보린 저, 1926)
- 《임금 노동과 자본》(賃労働과 資本, 카를 마르크스 저, 1927)
- 《임금, 가격 및 이윤》(勞賃・価格 및 利潤, 카를 마르크스 저, 1927)
- 《노농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건설 사회주의로의 길》(勞農 러시아의 社會主義的 建設 社會主義로의 길, 니콜라이 부하린 저, 오하시 츠모루 공역, 1927)
- 《자본론 제1권》(資本論 第1卷, 카를 마르크스 저, 미야가와 미노루 공역, 1928-1929)
-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하여》(弁證法的 唯物論에 對하여, 1929)
- 《독일 이데올로기》(ドイッチェ・イデオロギー,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 공역, 1930)
- 《정치경제학 비판》(政治經濟學 批判, 카를 마르크스 저, 미야가와 미노루 공역, 1931)
3. 개인 생활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그의 아버지는 야마구치현의 사족인 가와카미 타다시이며, 어머니는 야마구치현 사족 가와카미 마타사부로의 둘째 딸이자 가와카미 킨이치의 여동생인 타즈였다. 타즈는 하지메를 임신한 지 9개월 만에 이혼했다. 이후 아버지 타다시의 후처에게서 이복동생 가와카미 노부스케가 태어났으나, 후처 또한 출산 3개월 만에 이혼했다. 그의 남동생 가와카미 사쿄는 화가였으며, 《빈곤 이야기》 출간 시에는 가와카미 사쿄가 디자인한 장정이 사용되었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1902년 오츠카 켄자부로의 딸이자 오츠카 타케마츠의 여동생, 오츠카 유쇼의 누나이며, 남작 이노우에 미츠의 손녀인 히데(秀, 1885-1966)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남 2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대학 재학 중 사망했다. 부인 히데는 《루스닛키》라는 저서를 남겼으며, 쿠사카와 야에코는 히데를 다룬 소설 《질주하는 말 가와카미 하지메의 아내》를 집필하기도 했다.
장녀 시즈는 교토 제국대학 교수 하무라 니키오의 아내이다. 차녀 요시(가와카미 요시코)는 지하 활동가로, 어머니 쪽 외삼촌이자 일본 공산당 당원으로서 여러 사건을 일으킨 오츠카 유쇼의 하우스키퍼로 활동했다. 오츠카는 가와카미 하지메에 대해 "정직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편협해 보일 정도로 정신을 한곳에 집중할 수 있는 특성을 지녔다"고 평했다. 그의 처남은 스에카와 히로시이다.
4. 평가 및 영향
가와카미 하지메는 일본의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학문적 업적, 사회 운동에서의 역할, 그리고 문학적 성취는 후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4.1. 긍정적 평가
가와카미 하지메는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에드윈 로버트 앤더슨 셀리그먼의 저서를 번역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을 일본에 처음 소개하는 등 서구의 진보적 사상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대표작인 《빈곤 이야기》는 당시 사회의 심각한 빈곤 문제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을 제시하며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경제학 대강》과 《자본론 입문》 등의 저서는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일본의 이론 경제학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교토 제국대학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가르치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했고, 개인 잡지 《사회문제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널리 전파했다.
학자로서의 면모 외에도 그는 뛰어난 문장가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말년의 저술 활동, 특히 비밀리에 집필된 자서전 《자서전》은 "일본 문학사에서 전례 없는 찬사를 받았다"고 평가될 정도로 문학적 성취가 높았다. 그는 한시에도 조예가 깊어 직접 한시를 짓고 조조와 육유의 시를 탐독하며 문학적 소양을 발휘했다.
4.2. 비판 및 논란
가와카미 하지메의 사상과 정치적 행보는 당대에도, 그리고 후대에도 여러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초기작인 《빈곤 이야기》에서 제시된 빈곤 해결책, 즉 부자들의 사치 자제와 사회 전체의 검소한 생활이라는 주장은 후쿠다 토쿠조나 사카이 토시히코와 같은 비판자들로부터 "현실적이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들은 빈곤의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를 간과하고 피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을 비판했다.
그의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일본 공산당 가입과 이후의 '전향'(사상 전환)이다. 그는 치안유지법으로 인해 불법화된 공산당에 가입하고 지하 운동에 참여하는 등 급진적인 정치적 활동을 펼쳤다. 이는 당시 일본국 정부의 탄압을 받았던 행위였으며, 결국 그의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다. 옥중에서 그가 발표한 전향 선언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정치적 선택과 사상적 변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낳았다. 일부에서는 그의 전향을 사상적 변절로 보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거나, 혹은 사상적 재고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사회 정의 실현 과정에서 지식인이 겪을 수 있는 고뇌와 선택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있다.
4.3. 후대에 미친 영향
가와카미 하지메의 사상과 저술, 그리고 활동은 일본 사회, 경제학계, 문학계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본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정착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저서들은 후대의 학자들과 사회 운동가들에게 중요한 지적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그의 《자본론》 번역은 일본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 원전을 직접 접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었다.
그의 《빈곤 이야기》는 대중의 빈곤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의 개인 잡지 《사회문제연구》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대중에게 확산시키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가와카미 하지메와 후쿠다 토쿠조의 학문적 라이벌 관계는 당시 일본 경제학계의 논쟁을 활성화시키고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자서전 《자서전》은 그의 사상적 고뇌와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후대 독자들에게 큰 감동과 영감을 주었다. 그의 영향은 만화 작품인 무라카미 모토카의 《용-RON-》에 주인공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로 등장하는 등 대중문화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5. 사망
가와카미 하지메는 1946년 1월 30일, 교토시 사쿄구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원인은 노쇠와 영양실조가 겹친 상태에서 폐렴이 합병된 것이었다. 그의 계명은 천신원 정진일조 거사(天心院精進日肇居士)이다. 그의 자서전 《자서전》은 그가 사망한 이듬해인 1947년에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