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위타야 라오하쿨(วิทยา เลาหกุล위타야 라오하쿨태국어; 1954년 2월 1일 출생)은 태국의 축구 감독이자 전 축구 선수이다. 그는 '코치 헹'이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태국 축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라오하쿨은 독일 분데스리가의 헤르타 BSC에서 뛰며 유럽 클럽에서 활약한 최초의 태국 축구 선수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선수 은퇴 후에는 태국과 일본에서 여러 클럽 팀과 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도하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으며, 2016년부터 2018년까지 태국 축구 협회(FAT)의 기술 이사를 역임하는 등 태국 축구의 기술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경력은 태국 축구 선수들의 해외 진출과 태국 축구 전반의 수준 향상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위타야 라오하쿨은 1954년 2월 1일 태국 람푼 주에서 14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두 형 또한 태국 리그에서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18세에 라차프라차 FC에 입단하며 본격적인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1973년 나콘시탐마랏 주에서 열린 제7회 태국 지역 스포츠 대회에 람푼 주 5지구 축구팀 소속으로 참가하여 우승 메달과 함께 대회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며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았다.
3. 선수 경력
위타야 라오하쿨의 선수 경력은 태국 국내에서 시작하여 일본을 거쳐 유럽의 분데스리가에 진출하는 등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약하며 태국 축구의 새 역사를 썼다. 그는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오가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3.1. 태국에서의 선수 경력
라오하쿨은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라차프라차 FC에서 97경기에 출전하여 28골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또한 하카 FC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다. 1975년 3월 15일 아시안컵에서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3대1 승리를 거둔 경기를 통해 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처음으로 발탁되었다.
3.2. 일본에서의 선수 경력
1976년 퀸스컵에서 얀마 디젤이 우승하는 것을 본 라오하쿨은 이 팀의 관심을 받아 1977년 얀마 디젤에 입단하며 일본에 진출한 최초의 태국 선수가 되었다. 그는 1977년 5월 팀에 합류했으나, 일본 축구 협회의 외국인 선수 이적 규정으로 인해 1978년 1월부터 공식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1978년 1월 15일 미쓰비시 중공업과의 경기에서 JSL 데뷔전을 치렀다. 얀마 디젤에서 두 시즌 동안 총 20경기에 출전하여 4골 2도움을 기록했다. 그는 JSL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인 외국인 선수였다. 일본에서의 활약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한 시즌 최우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일본 FA컵에서 6골을 기록하며 최다 득점자에 올랐고, 일본 리그에서 총 14골을 득점했다.
1986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마쓰시타 FC에서 선수로 뛰었다. 그는 1987년 7월 JSL컵부터 마쓰시타에서 활약했으며, 헤드 코치를 겸임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90년 1990-91 JSL 시즌 8라운드를 끝으로 선수 등록이 말소되며 은퇴했다. 마쓰시타에서 세 시즌 동안 총 37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했다.
3.3. 유럽에서의 선수 경력
일본에서 돌아온 후, 에스파뇰과 1. FC 쾰른과의 태국 대표팀 경기에서 그의 플레이가 서독 헤르타 BSC 스카우트의 눈에 띄었다. 1979년 헤르타 BSC로 이적하며 유럽 클럽에서 뛰는 최초의 태국 축구 선수가 되었다. 1979년 8월 12일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와의 경기에서 독일 분데스리가에 데뷔했다. 1979-80 시즌에는 리그 3경기 출전에 그쳤으나, 팀이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된 1980-81 시즌 이후 두 시즌 동안 총 31경기에 출전했다.
1982년에는 1. FC 자르브뤼켄으로 이적했다. 1982-83 시즌 오버리가 남서부 (당시 독일 3부 리그)에서 우승하며 2. 분데스리가로 승격하는 데 기여했다. 1983-84 시즌에는 2.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했다. 자르브뤼켄에서 두 시즌 동안 최소 53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했다. 독일 언론은 그의 활약을 "타이 붐(THAI BOOM)"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총 6년간 활약한 후 태국으로 돌아왔다.
3.4. 선수로서의 주요 성과
-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우승: 1977년, 1985년 (주장)
- 오버리가 남서부 우승: 1983년 (1. FC 자르브뤼켄)
- 일본 리그 베스트 11 선정
- 일본 FA컵 최다 득점 (6골)
3.5. 선수 시절 개인 기록
연도 | 클럽 | 리그 | 리그 경기 | 리그 득점 | JSL컵 경기 | JSL컵 득점 | 천황배 경기 | 천황배 득점 |
---|---|---|---|---|---|---|---|---|
1977 | 얀마 | JSL 1부 | ||||||
1978 | 얀마 | JSL 1부 | ||||||
1987 | 마쓰시타 | JSL 2부 | 18 | 3 | 2 | 1 | ||
1988-89 | 마쓰시타 | JSL 1부 | 21 | 3 | 1 | 0 | ||
1989-90 | 마쓰시타 | JSL 1부 | 16 | 0 | 1 | 0 | ||
1990-91 | 마쓰시타 | JSL 1부 | 0 | 0 | 1 | 0 | ||
JSL 1부 총계 | 57 | 7 | ||||||
JSL 2부 총계 | 18 | 3 | 2 | 1 |
- 얀마 통산 2시즌 20경기 4득점
- 마쓰시타 통산 3시즌 37경기 3득점
4.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위타야 라오하쿨은 지도자로 전향하여 태국과 일본에서 다양한 팀을 이끌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는 특히 유소년 육성과 기술 발전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4.1. 일본에서의 지도자 경력
1988년부터 마쓰시타 전기의 코치로 부임했으며, J리그 창립 멤버인 감바 오사카의 헤드 코치로서 일본에서 8년간 지도자 생활을 했다. 1990년에는 천황배 우승을 이끌었다.
2007년에는 JFL 소속의 가이나레 돗토리의 헤드 코치로 부임했다. 같은 해 8월 미즈구치 요지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감독으로 승격했다. 2009년까지 3년간 돗토리를 지휘하며 팀을 항상 상위권에 올려놓아 J리그 진출권을 얻을 수 있는 4위권 경쟁을 벌였으나, 매번 종반에 부진하며 J리그 진출에는 실패했다.
2009년 12월 태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척추 골절의 중상을 입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회복이 늦어져 2010년 2월 1일 가이나레 돗토리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4.2. 태국에서의 지도자 경력
일본에서 돌아온 후, 그는 방콕 은행 FC를 맡아 1996-97 시즌 태국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이끌었다. 1997년에는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촌부리 FC의 감독을 맡아 이듬해 프로빈셜 리그 우승과 2006년 태국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2007년 촌부리 FC를 태국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킨 지 1년 만에 팀을 떠나 일본 가이나레 돗토리로 이적했다. 2011년에는 다시 촌부리 FC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2013년 시즌 종료 후 촌부리 FC 감독직에서 사임하고 기술 이사로 활동했다. 촌부리 FC 감독 재임 시절에는 가토 요시오, 가토 미쓰오 부자 코치와 트레이너 시라키 요헤이 등 다수의 일본인 스태프를 영입하여 팀을 강화했다. 또한 쿠시다 잇토와 가이나레 돗토리 시절 제자였던 히구치 다이키 등의 선수가 팀에 합류했다.
4.3. 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7년부터 1998년까지 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1997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제19회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에서 태국 대표팀을 이끌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U-16 태국 대표팀 감독도 역임했다.
4.4. 기술 이사 (Technical Director) 역할
2013년 시즌 종료 후 촌부리 FC의 감독직에서 물러나 현재까지 촌부리 FC의 기술 이사(TD)를 맡고 있다. 2016년 2월 15일 태국 축구 협회(FAT)의 기술 개발 부회장 겸 기술 이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U-23 태국 대표팀이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후 해임되었으나, 2019년 6월 12일 발족한 태국 대표팀 강화 위원회에서 기술 이사로 복귀했다. 이후 니시노 아키라가 태국 대표팀 감독으로 영입되는 과정에서 라오하쿨의 지지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도되었다.
2005년에는 태국 축구 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시 회장이었던 위칫 겟깨우에게 118대 16표로 크게 패하며 당선되지 못했다.
4.5. 지도자로서의 주요 성과
- 개인
- 태국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감독: 1997년 (방콕 은행 FC)
- 팀
- 천황배 우승: 1990년 (마쓰시타 전기 산업 축구부)
- 퀸스컵 우승 (태국): 1992년 (마쓰시타 전기 산업 축구부)
- 태국 프리미어리그 우승: 1996-97 시즌 (방콕 은행 FC)
-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금메달: 1997년 (태국 국가대표팀)
- 태국 프리미어리그 준우승: 2011년 (촌부리 FC)
- 태국 FA컵 우승: 2010년 (촌부리 FC)
- 코 로얄컵 우승: 2008년, 2009년, 2011년, 2012년 (촌부리 FC)
4.6. 감독 기록
일본 국내 기록
연도 | 소속 | 클럽 | 리그전 | 컵대회 | ||||||
---|---|---|---|---|---|---|---|---|---|---|
순위 | 경기 | 승점 | 승 | 무 | 패 | 리그컵 | 천황배 | |||
2007 | JFL | 돗토리 | 14위 | - | 2회전 | |||||
2008 | 5위 | 34 | 57 | 17 | 6 | 11 | - | 1회전 | ||
2009 | 5위 | 34 | 56 | 16 | 8 | 10 | - | 2회전 |
- 2007년 순위는 최종 순위.
5. 개인 생활 및 기타
위타야 라오하쿨은 일본어, 특히 간사이벤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별명 '헹'은 태국어로 '행운'을 의미한다. 그의 키는 177 cm이고 몸무게는 70 kg이다.
6. 평가 및 영향력
위타야 라오하쿨은 태국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유럽 분데스리가와 일본 JSL에 진출한 최초의 태국 선수로서, 이후 많은 태국 선수들이 해외 리그로 진출하는 데 길을 열어준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선수로서의 성공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 태국과 일본의 여러 클럽 팀과 태국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리그 우승과 국제 대회 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태국 축구 협회의 기술 이사로서 태국 축구의 장기적인 발전 전략 수립과 유소년 육성 시스템 구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기여는 태국 축구의 국제적 위상 강화와 전반적인 수준 향상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7. 수상 경력
위타야 라오하쿨은 선수 시절과 지도자 시절에 걸쳐 다양한 개인상 및 팀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 선수
- 팀
-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우승: 1977년, 1985년
- 오버리가 남서부 우승: 1983년
- 개인
- 일본 리그 베스트 11
- 일본 FA컵 최다 득점 (6골)
- 지도자
- 팀
- 천황배 우승: 1990년 (마쓰시타 전기 산업 축구부)
- 퀸스컵 우승 (태국): 1992년 (마쓰시타 전기 산업 축구부)
- 태국 프리미어리그 우승: 1996-97 시즌 (방콕 은행 FC)
-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 금메달: 1997년 (태국 국가대표팀)
- 태국 프리미어리그 준우승: 2011년 (촌부리 FC)
- 태국 FA컵 우승: 2010년 (촌부리 FC)
- 코 로얄컵 우승: 2008년, 2009년, 2011년, 2012년 (촌부리 FC)
- 개인
- 태국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감독: 1997년 (방콕 은행 FC)
- 팀
- 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