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교육
프랜시스 오토 매티슨은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으며 학자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1. 어린 시절과 가정 환경
매티슨은 1902년 2월 19일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프레더릭 윌리엄 매티슨(1868~1948)과 루시 오르네 프랫(1866) 사이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프레더릭 윌리엄 매티슨은 아연 생산 분야의 산업 리더이자 시계 및 공작 기계 제조업자로 성공했으며, 일리노이주 라살의 시장을 10년간 역임하기도 했다. 프랜시스의 세 명의 형제자매는 프레더릭 윌리엄(1894년생), 조지 드와이트(1897년생), 루시 오르네(1898년생)였다.
패서디나에서 매티슨은 폴리테크닉 스쿨에 다녔다. 부모님의 별거 후, 그는 어머니와 함께 라살에 있는 친조부모님 댁으로 이사했다. 이후 뉴욕주 태리타운에 위치한 해클리 스쿨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다.
1.2. 학창 시절과 교육
매티슨은 1923년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 그는 학생 신문인 《예일 데일리 뉴스》(Yale Daily News영어)의 편집장이자 문학 잡지인 《예일 문학 잡지》(Yale Literary Magazine영어)의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예일 대학교의 비밀 학생 단체인 스컬 앤 본스의 회원이었다.
그는 대학의 드포레스트상 수상자로서 "악마의 하인들"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예일 대학교의 행정부를 "대학 생활과 동떨어져 대기업과 결탁한 이사회에 의해 지배되는 독재 체제"라고 비난하며 자신의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예일 대학교 학부 마지막 해에는 알페우스 헨리 스노우상을 수상했는데, 이 상은 "지적 성취, 인격, 개성의 조합을 통해 동급생들에게 높은 학문의 최고 전통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고취함으로써 예일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교수진이 판단한" 졸업생에게 수여되는 상이었다.

로드 장학금 수혜자로서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1925년 문학 학사(B.Litt.)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1926년 문학 석사(M.A.) 학위를, 1927년 박사(Ph.D.) 학위를 빠르게 마쳤다. 박사 학위 취득 후 그는 예일 대학교에서 2년간 가르쳤으며,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뛰어난 교수 경력을 시작했다.
2. 학문 활동 및 저술
매티슨은 하버드 대학교의 학자이자 문학 비평가로서 미국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주요 저서 및 비평
매티슨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미국학 학자이자 문학 비평가로 활동했으며, 역사 및 문학 학부 과정을 이끌었다. 그는 T. S. 엘리엇, 랄프 왈도 에머슨, 제임스 가문(앨리스 제임스, 헨리 제임스, 헨리 제임스 시니어, 윌리엄 제임스), 사라 오네 주엣, 싱클레어 루이스, 허먼 멜빌,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트 휘트먼 등 여러 작가들에 대한 중요한 학술 저작들을 쓰고 편집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저서인 《미국인의 르네상스: 에머슨과 휘트먼 시대의 예술과 표현》(American Renaissance: Art and Expression in the Age of Emerson and Whitman영어, 1941)은 19세기 중반 미국 문학 문화의 번성기를 다룬다. 이 책은 에머슨, 소로, 멜빌, 휘트먼, 너새니얼 호손을 중심으로 1850년부터 1855년까지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 시기에 에머슨을 제외한 모든 작가들이 매티슨 시대에 걸작으로 여겨지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멜빌의 《모비 딕》, 휘트먼의 《풀잎》의 여러 판본, 호손의 《주홍 글씨》와 《일곱 박공의 집》, 그리고 소로의 《월든》 등이 포함된다. 이 책의 영향으로 19세기 중반 미국 문학은 흔히 '미국인의 르네상스'로 불리게 되었다. 2003년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영어)는 이 책이 "사실상 미국 문학 분야를 창조했다"고 평가했다.
매티슨은 원래 《미국인의 르네상스》에 에드거 앨런 포를 포함할 계획이었으나, 포가 책의 전체적인 구상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제외했다. 그는 《미국 문학사》(Liter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영어, 1948)에서 포에 대한 장을 집필했지만, 일부 편집자들은 이 장이 매티슨 특유의 탁월함과 섬세함이 부족하며 "눈에 띄게 구식"이라고 평가했다.
매티슨은 1950년에 출판된 《옥스퍼드 미국 시집》(The Oxford Book of American Verse영어)을 편집했는데, 이 시집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 모더니즘 시를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중요한 미국 시 선집이다.
2.2. 학문적 영향력
매티슨은 미국학을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정립하는 데 기여한 초기 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연구, 특히 《미국인의 르네상스》는 19세기 미국 문학 비평과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며 후대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비평적 접근 방식과 문학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미국 문학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2.3. 기타 학술 활동
매티슨은 잘츠부르크 글로벌 세미나(Salzburg Global Seminar영어)와 관련된 초기 학자 중 한 명이었다. 1947년 7월, 그는 개회 강연에서 "우리 시대는 역사의 인식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역사의 많은 부분은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불안이 아닌 약속의 기회로서 또 다른 종류의 역사적 인식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역사적이라고 과장 없이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문화와 인문학의 주요 기능을 새롭게 수행하기 위해, 즉 인간을 다시 인간과 소통하게 하기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했다.
또한 1948년 매티슨은 존 크로우 랜섬(John Crowe Ransom영어)과 라이오넬 트릴링(Lionel Trilling영어)과 함께 켄욘 영어 학교(Kenyon School of English영어)의 설립자 중 한 명이었다.
3. 정치적 활동
매티슨은 자신의 학문적 명성만큼이나 진보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치적 활동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3.1. 정치적 성향 및 활동
매티슨의 정치적 성향은 좌파적이고 사회주의적이었다. 이미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였던 그는 1940년대 후반에 받은 유산을 그의 친구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Paul Sweezy영어)에게 기부했다. 스위지는 이 돈, 거의 1.50 만 USD에 달하는 금액을 새로운 저널을 창간하는 데 사용했으며, 이 저널이 바로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영어)가 되었다.
하버드 캠퍼스에서 매티슨은 진보적 대의를 공개적으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1940년 5월, 그는 미국 노동총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영어)의 산하 단체인 하버드 교사 노조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하버드 크림슨》(The Harvard Crimson영어)은 그의 취임 연설을 보도했는데, 매티슨은 이 연설에서 캠퍼스 노조 헌장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직된 노동 운동에 가입함으로써, 우리는 이 강력한 진보적 세력에 기여하고 지원을 받으려는 우리의 열망을 표명한다. 교사들을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줄이고...그들 사이의 공동 목표 의식을 증대시키며, 특히 이 분야에서 교육의 발전과 모든 반동에 대한 저항에 협력하고자 한다."
1948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진보당 전당대회에서 매티슨은 헨리 A. 월리스(Henry A. Wallace영어)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지지했다.
3.2. 매카시즘 시대의 정치적 압박
당시 확산되던 매카시즘의 좌파 대학 학자들에 대한 감시를 반영하듯, 그는 허버트 필브릭(Herbert Philbrick영어)에 의해 보스턴 지역의 소위 "공산주의 전선 단체"의 활동가로 언급되었다.
특히 1949년 4월 4일자 《라이프》(Life영어) 잡지의 "바보들과 동조자들이 공산주의 전선을 꾸민다"라는 제목의 기사 섹션에는 그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아서 밀러, 릴리언 헬먼, 랭스턴 휴즈, 노먼 메일러와 같은 저명한 학자, 과학자, 성직자, 작가 50명과 함께 사진으로 실렸다. 여기에는 하버드 동료 교수인 커틀리 매더(Kirtley Mather영어), 코를리스 라몬트(Corliss Lamont영어), 랄프 바튼 페리(Ralph Barton Perry영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감시와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영어)의 조사는 그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그의 죽음에 기여한 요인으로 추정된다.
4. 개인사
매티슨은 친구들에게 "매티"(Matty영어)로 불렸다. 그의 사적인 삶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복잡한 면모를 보였다.
4.1. 성 정체성과 관계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동성애자였던 그는 직업 경력 내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비밀로 유지했지만, 개인적인 삶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저작들에서도 동성애적 관심의 흔적이 엿보인다. 2009년 하버드 대학교는 성명을 통해 매티슨이 "20세기 중반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공공연한 비밀'로 살았던 특이한 동성애자의 사례로 두드러진다"고 언급했다.
매티슨은 자신보다 20살 연상인 화가 러셀 체니(Russell Cheney영어)와 20년간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체니는 미국의 주요 비단 생산자 중 한 곳인 체니 가문 출신으로, 매티슨과 마찬가지로 사업적으로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1925년 체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티슨은 그들의 관계를 세상에 알리기보다는 믿을 수 있는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체니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계획하면서, 매티슨은 예일 대학교의 비밀 단체인 스컬 앤 본스의 동료들에게 그들의 관계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체니가 매티슨의 월트 휘트먼에 대한 관심을 북돋웠기 때문에, 《미국인의 르네상스》가 "매티슨의 체니에 대한 사랑의 궁극적인 표현이자 동성애 예술가에 대한 비밀스러운 찬사"였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동안 매티슨은 케임브리지나 보스턴에 거주했지만, 두 사람은 종종 메인주 키터리에 있는 공동 별장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했다. 러셀 체니는 1945년 7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2. 사생활의 영향
매티슨과 체니 사이의 편지를 엮은 《쥐와 악마: F. O. 매티슨과 러셀 체니의 일기 편지》(Rat & the Devil: journal letters of F. O. Matthiessen and Russell Cheney영어)가 1978년에 출판되었다. 이 제목은 두 사람이 서로를 지칭할 때 사용했던 가명에서 따온 것으로, 매티슨은 "악마"(Devil영어), 체니는 "쥐"(Rat영어)였다. 1992년에는 이 서한집이 마이클 보나치(Michael Bonacci영어)가 쓰고 연출한 연극 《사랑에 빠진 악마와 쥐》(Devil & Rat in Love영어)로 각색되기도 했다. 이 연극은 전년도에 사망한 보나치의 파트너를 기리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5. 사망
매티슨의 죽음은 당시 사회적,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5.1. 사망 경위
매티슨은 1950년 4월 1일 보스턴의 호텔 맹거(Hotel Manger영어) 12층 창문에서 투신하여 자살했다. 그는 1938년에서 1939년 사이에 한 차례 신경쇠약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또한 1945년 러셀 체니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사망 전날 저녁, 매티슨은 하버드 대학교의 히긴슨 영문학 교수이자 친구인 케네스 머독(Kenneth Murdock영어)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호텔 방에 남겨진 유서에서 매티슨은 "나는 세계 정세에 우울하다. 나는 기독교인이자 사회주의자이다. 나는 그 목표를 방해하는 어떤 질서에도 반대한다"고 썼다.
5.2. 사망 원인에 대한 해석
매티슨의 죽음을 둘러싸고 당시 심화되던 반공주의 광풍이 그의 정신 상태에 미친 영향에 대한 추측이 제기되었다. 그는 곧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에 의해 악용될 반공 세력의 표적이 되고 있었으며,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영어)의 정치적 조사 또한 그의 자살에 기여한 요인일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1958년 에릭 야콥센(Eric Jacobsen영어)은 매티슨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토록 집요하게 덧씌우려 했던 '비미국적'이라는 별명을 스스로 얻은 세력의 활동에 의해 촉진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1978년 해리 레빈(Harry Levin영어)은 좀 더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며, 그가 한 번도 소속된 적이 없는 미국 공산당의 대변인들이 그의 자살을 정치적 행동으로 크게 선전했다고만 언급했다.
매티슨은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스프링필드 묘지(Springfield Cemetery (Springfield, Massachusetts)영어)에 안장되었다.
6. 유산
매티슨의 사후, 그의 학문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는 지속적으로 평가되고 기념되고 있다.
6.1. 학문적 유산
매티슨의 19세기 미국 문학 비평에 대한 기여는 형성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다른 여러 학자들과 함께 미국학을 공인된 학문 분야로 창설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 학문적 기여, 정치적 활동, 그리고 이른 죽음은 학자들과 작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자살을 이해하려는 상실감과 노력은 매티슨에게서 영감을 받은 두 편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메이 사튼(May Sarton영어)의 《상처는 충실하다》(Faithful are the Wounds영어, 1955)와 마크 멀리스(Mark Merlis영어)의 《미국학》(American Studies영어, 1994)이 그것이다.
6.2.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기념
하버드 대학교는 매티슨의 위상과 유산을 여러 방식으로 기념하고 있다. 그는 하버드 칼리지의 학부 기숙사 중 하나인 엘리엇 하우스(Eliot House영어)의 초대 선임 지도교수였다. 그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지만, 엘리엇 하우스에 있는 매티슨의 스위트룸은 'F. O. 매티슨 룸'(F. O. Matthiessen Room영어)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그의 개인 필사본과 1,700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학술 연구 목적으로 허가를 받아 이용할 수 있다. 엘리엇 하우스는 또한 초청 연사를 모시고 연례 매티슨 만찬을 개최한다.

2009년 하버드 대학교는 성소수자학(Queer studies영어) 분야에 'F. O. 매티슨 성별 및 섹슈얼리티 방문 교수직'(F. O. Matthiessen Visiting Professorship of Gender and Sexuality영어)이라는 기부 교수직을 신설했다. 당시 하버드 총장 드루 파우스트(Drew Faust영어)는 이를 "중요한 이정표"이자 "미국 내 최초의 이런 종류의 교수직"이라고 불렀다. 이 교수직은 하버드 성별 및 섹슈얼리티 코커스(Harvard Gender and Sexuality Caucus영어) 회원들과 후원자들의 150.00 만 USD 기부금으로 조성되었다.
이 교수직을 역임한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 2013년: 헨리 D. 아벨로브(Henry D. Abelove영어)
- 2014년: 게일 루빈(Gayle Rubin영어)
- 2016년: 로버트 리드-파르(Robert Reid-Pharr영어)
- 2018년: 오미세에케 나타샤 틴슬리(Omise'eke Natasha Tinsley영어)
- 2020년: 멜 Y. 첸(Mel Y. Chen영어)
- 2023년: C. 라일리 스노턴(C. Riley Snorton영어)
매티슨 사망 후 여러 세대가 지난 현재, 이 방문 교수직은 학자이자 교사로서 그의 지속적인 유산에 대한 대학의 존경을 재확인시켜 준다.
6.3. 문화적 영향
매티슨의 삶과 죽음은 후대 작가와 학자들에게 깊은 문화적, 예술적 영향을 미쳤다. 그의 비극적인 삶과 학문적 기여, 그리고 사회 참여는 문학 작품의 영감이 되었으며, 특히 그의 동성애자 정체성과 매카시즘 시대의 정치적 박해는 미국 사회와 문화의 복잡한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