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이치카와 엔오 2세는 격동적인 개인사와 함께 가부키 명가에서 태어나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자신의 예술적 길을 개척했다.
1.1. 출생과 유년기
키노시 마사히코는 1939년 12월 9일 도쿄도에서 3대 이치카와 단시로(三代目 市川段四郎일본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공칭 신장은 165cm, 체중은 68kg이었으며, 혈액형은 A형이었다. 그의 배우 예명인 하이메이(俳名일본어)는 '화과'(華果Kaka일본어)였다. 그의 어머니는 영화배우 다카스기 사나에(高杉早苗일본어)이다. 여동생으로는 배우 이치카와 야스코(市川靖子일본어)가 있으며, 남동생은 4대 이치카와 단시로이다. 그의 가문인 오모다카야(澤瀉屋일본어, 사와오모다카야)의 정식 가문 문장(定紋)은 택사(澤瀉일본어)이고, 보조 가문 문장(替紋)은 미쓰자루(三つ猿일본어)이다. 이치카와 엔오 2세는 8세 되던 1947년 1월, 도쿄극장에서 '후타리 산바소'의 쓰케지토세 역으로 첫 무대에 오르며 3대 이치카와 단코(三代目 市川團子일본어)로 습명했다. 이 시기 그는 2대 마쓰모토 하쿠오(松本白鸚일본어)가 된 6대 이치카와 소메고로(市川染五郎일본어)와 2대 나카무라 기치에몬(中村吉右衛門일본어)이 된 나카무라 만노스케(中村萬之助일본어)와 함께 10대 트리오를 결성하여 '10대 가부키'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1.2. 교육
이치카와 엔오 2세는 지요다구립 반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게이오기주쿠 중등부 및 게이오기주쿠 고등부를 거쳤다. 이후 1962년에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학력은 가부키 배우로서 폭넓은 시야와 지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3. 습명과 초기 경력
1963년 5월, 이치카와 엔오 2세는 가부키자에서 '요시쓰네 센본자쿠라'의 요시노야마 노 다다노부 역과 '구로즈카'의 오니죠 역을 맡아 3대 이치카와 엔노스케(三代目 市川猿之助일본어)로 정식 습명했다. 그러나 습명 직후인 1963년 6월에는 조부인 초대 이치카와 엔오(初代市川猿翁일본어)가 사망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부친인 3대 이치카와 단시로마저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겪었다. 연이어 집안의 두 거목을 잃은 그는 "리엔의 고아"(梨園の孤児일본어, 가부키계의 고아)로 불리며 후견인을 잃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가문의 비호를 받는 것을 피하고,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혁신적인 예술 지향성과 간사이 가부키(関西歌舞伎일본어)의 전통적인 케렌 기법을 결합하여 가부키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2. 가부키 경력과 예술적 혁신
이치카와 엔오 2세는 가부키 배우이자 연출가로서 무대 예술에 대한 깊은 열정과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가부키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2.1. 케렌 및 주노리 기법의 혁신
그는 1968년 '요시쓰네 센본자쿠라'의 여우 역을 통해 '주노리' 기법을 처음 선보였다. 이 기법은 무대 위에서 배우가 와이어에 매달려 관객석 위를 날아다니는 것으로, 그는 이 주노리를 5,000회 이상 성공적으로 공연하여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기도 했다. 주노리 5,000회 달성 기념 공연은 2000년 관우 역으로 이루어졌다. 주노리 기법은 원래 3대 지쓰카와 엔자쿠(實川延若일본어)에게서 배웠던 것으로, 이치카와 엔오 2세는 이 기법을 현대 가부키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메이지 시대의 연극 개량 운동 이후 '이단'으로 치부되며 소외되었던 케렌 연출들을 차례로 부활시킨 그의 '엔노스케 가부키'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 엔노스케 가부키는 오락성이 풍부하고 볼거리 많은 무대로 관객들에게는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당시 보수적이었던 다른 가부키 배우들과 연극 평론가들에게는 '관객에게 아첨한다'거나 '진정한 연극 예술에서 벗어난다'는 비판을 받았다. 2대 오노에 쇼로쿠(尾上松緑일본어)는 심지어 이치카와 엔오 2세의 가부키를 '키노시 서커스'(喜熨斗サーカス일본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키노시'는 이치카와 엔오 2세의 본명인 '키노시'를, '서커스'는 당시 인기를 끌던 '키노시 대서커스'에 빗댄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치카와 엔오 2세는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고 그의 혁신적인 시도들을 가부키의 주류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1984년 주니치극장에서 공연된 '도세이류 오구리 한간'에서의 주노리는 일반적인 하나미치(花道일본어, 무대와 객석을 잇는 길) 위가 아닌 객석 대각선 위를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일본 최초의 시도였다. 오늘날에는 7대 오노에 기쿠고로(尾上菊五郎일본어)를 비롯해 12대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郎일본어), 9대 마쓰모토 고시로(松本幸四郎일본어), 18대 나카무라 간자부로(中村勘三郎일본어) 등 많은 후배 가부키 배우들이 주노리 연출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2.2. 슈퍼 가부키의 창조
1986년, 이치카와 엔오 2세는 고전 예능으로 굳어진 근대 가부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슈퍼 가부키'를 창시했다. 그는 철학자 우메하라 타케시에게 각본을 의뢰하여 '슈퍼 가부키 야마토타케루'(スーパー歌舞伎 ヤマトタケル일본어)를 신바시 엔부조(新橋演舞場일본어)에서 상연했다. 슈퍼 가부키는 전통 가부키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서사, 연출, 음악 등 다양한 요소에 현대적인 감각을 도입하여 폭넓은 관객층에게 어필했다. 그의 건강 문제 이후에도 슈퍼 가부키는 3대 이치카와 우단지(市川右團次일본어), 2대 이치카와 에미야(市川笑也일본어) 등 그의 문하생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2.3. 전통극의 부흥
이치카와 엔오 2세는 잊혀진 전통 가부키극을 부활시키고 재해석하는 데도 열정을 쏟았다. 그는 '다테노 주야쿠'(慙紅葉汗顔見勢일본어, '伊達の十役', 다테의 10역)와 같이 한 명의 배우가 한 공연에서 10가지 역할을 소화하는 작품들을 부활시켰다. 이를 위해 그는 '하야가와리'(早替り일본어, 빠른 의상 교체) 기법을 혁신적으로 사용하여 무대 전환과 배우의 역할 변화를 빠르고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노력은 고전극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현대 관객들에게 새롭게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2.4. 타 예술 분야 연출 활동
이치카와 엔오 2세는 가부키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92년에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단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의 연출을 맡아 일본에서 첫 공연을 선보였으며, 이듬해에는 독일 본토에서도 초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02년에는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황금 닭'의 연출도 담당하며 오페라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과시했다. 또한 그는 교토조형예술대학(京都造形芸術大学일본어, 현 교토예술대학(京都芸術大学일본어))의 부총장이자 대학 내 춘추좌(春秋座일본어) 극장의 예술 감독을 역임하며 후학 양성과 무대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이 외에도 '우마야'(うまや일본어)라는 음식점을 프로듀스하기도 했다.
3. 개인 생활 및 인간관계
이치카와 엔오 2세의 개인 생활, 특히 가족 관계는 그의 예술적 삶만큼이나 복잡하고 다면적인 측면을 보였다.
3.1. 결혼 및 가족 관계
이치카와 엔오 2세는 두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 부인은 전 다카라즈카 가극단 유키구미의 톱 스타이자 배우인 하마 유코(浜木綿子일본어)로, 1965년에 결혼했다. 같은 해 12월, 두 사람 사이에서 장남인 카가와 테루유키(香川照之일본어, 훗날 9대 이치카와 추샤(市川中車일본어))가 태어났다. 그러나 실질적인 결혼 생활은 1년여 만에 별거로 이어졌고, 1968년에 정식으로 이혼했다. 아들 카가와 테루유키는 하마 유코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이혼의 원인은 일본 무용 후지마 류(藤間流일본어)의 명취이자 배우인 후지마 무라사키(藤間紫일본어)와의 불륜 때문이었다. 후지마 무라사키는 이치카와 엔오 2세가 12세 때 첫사랑이었지만, 16세 연상이었고 기혼자이자 자녀까지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이치카와 엔오 2세의 무용 스승인 6대 후지마 간주로(藤間勘十郎일본어, 2대 후지마 간소(藤間勘祖일본어))였다. 이치카와 엔오 2세는 후지마 무라사키를 포기하고 하마 유코와 결혼했지만, 결국 서로에 대한 마음을 끊지 못하고 아들이 1세가 되었을 무렵 가정을 버리고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의 동거는 35년간 이어졌고, 1985년 후지마 무라사키의 이혼이 성립되면서 2000년에야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후 2003년 이치카와 엔오 2세가 뇌경색을 겪고, 2009년에는 후지마 무라사키가 간부전으로 사망하는 등 불운이 이어졌다.
3.2. 아들 카가와 테루유키와의 관계
이치카와 엔오 2세와 아들 카가와 테루유키(훗날 9대 이치카와 추샤)의 관계는 복잡하고 긴장된 시간을 거쳤다. 카가와 테루유키는 대학교 졸업 후 1989년에 배우로 데뷔했고, 이를 계기로 25세 겨울에 아버지 이치카와 엔오 2세의 공연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치카와 엔오 2세는 아들을 꾸짖으며 "중요한 공연 전에 불쑥 찾아오는 것은 배우로서의 배려가 부족하다", "나는 가정을 떠나는 순간부터 다시 태어났다. 그러니 지금의 나와 너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라며 아들을 완전히 거부하고 냉정하게 대했다.
이러한 그의 진심은 훗날 은퇴명인 '엔오'를 습명한 후 NHK 스페셜에서 밝혀졌다. 그는 당시 "나는 살아도 죽어도 혼자서 해왔다. 그러니 테루유키도 배우의 길을 걷고 싶다면 나를 아버지로 생각하지 말고,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는 독립 자존의 정신으로 나아가라고 말한 것이다. 나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이후 후지마 무라사키의 노력으로 부자간의 화해가 진행되었고, 2009년 후지마 무라사키의 장례식에는 카가와 테루유키도 친족으로서 참석했다.
2011년 9월 27일, 조카인 2대 이치카와 카메지로(市川亀治郎일본어)의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 습명 발표와 자신의 2대 이치카와 엔오 습명, 그리고 카가와 테루유키와 그의 아들 마사아키(政明일본어)의 가부키계 입문 발표 기자회견에서 이치카와 엔오 2세는 눈물을 흘리며 전처 하마 유코에게 "하마 씨, 고맙다. 원한과 은혜의 저편에서, 고맙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후 카가와 테루유키의 가부키 첫 무대 리허설 중 하마 유코와 이치카와 엔오 2세가 이혼 후 약 45년 만에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다. 후지마 무라사키 사망 후,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와 친밀해졌으며, 후지마의 1주기 이후에는 전 하카타자(博多座일본어) 스태프였던 여성이 그의 주변을 돌보며 간호와 일문 인사를 돕고, 그와 동거하기도 했다. 한때 아들 일가와의 동거가 보도되기도 했으나, 이후에는 카가와 테루유키의 집 근처 맨션으로 거처를 옮겨 가가와 테루유키가 아버지를 찾아와 연습하는 방식으로 지냈다.
4. 만년, 은퇴 및 사망
이치카와 엔오 2세는 만년에 건강 문제로 인해 무대 활동이 줄었으나,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가부키계에 깊이 남아있었다.
4.1. 건강 문제 및 활동 감소
2003년 11월 17일, 이치카와 엔오 2세는 후쿠오카 하카타자에서 자신이 연출하고 출연한 '서태후' 공연 중 건강 이상을 호소하며 공연에서 하차했다. 당시 '초기 뇌경색'이라는 진단이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파킨슨 증후군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배우로서 무대에 서는 기회가 줄어들었으며, 주로 슈퍼 가부키나 자신이 부활시킨 연목들의 연출 활동을 이어갔다. 2004년부터는 연기를 중단했다.
4.2. 은퇴와 습명
2011년 9월, 2대 이치카와 카메지로(市川亀治郎일본어)의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 습명 기자회견에 아들 카가와 테루유키와 함께 8년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2년 6월 5일 신바시 엔부조에서 개막한 '6월 대가부키' 공연을 통해 그는 2대 이치카와 엔오(二代目市川猿翁일본어)라는 은퇴명을 습명하며 무대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이로써 조카인 키노시 다카히코(喜熨斗貴彦일본어)는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4.3. 마지막 활동 및 사망
은퇴 후에도 이치카와 엔오 2세는 가끔씩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3년 12월, 교토 미나미자(南座일본어)에서 열린 '2대 이치카와 엔오,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 9대 이치카와 추샤 습명 피로 구상'에 출연한 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무대 활동이었다. 2018년 2월 27일에는 주니치극장에서 열린 3대 이치카와 우단지, 2대 이치카와 에미야, 이치카와 히로타로(市川弘太郎일본어)의 밤 공연 커튼콜에 등장하여 "오모다카야!"(澤瀉屋일본어, 그의 야고)라는 외침과 함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2023년 9월 13일 오전 6시 55분, 이치카와 엔오 2세는 도쿄도에서 부정맥으로 인해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일에 맞춰 종4위에 추서되었고, 욱일중수장이 수여되었다.
5. 유산 및 평가
이치카와 엔오 2세는 가부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이 고전 예술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5.1. 업적 및 긍정적 평가
이치카와 엔오 2세는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가부키에 대한 열정과 선구적인 정신을 보여주며 여러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잊혀져가던 케렌 기법을 부활시키고 대중화하여 가부키의 오락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주노리 기법의 대가로서 5,000회 이상 공중 비행을 선보이며 기네스 세계 기록을 달성한 것은 그의 독보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슈퍼 가부키'의 창조이다. 이는 전통 가부키에 현대적인 각색과 연출, 기술적 요소를 접목하여 젊은 세대와 새로운 관객층을 가부키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역작들을 모은 '엔노스케 주하치반'(猿之助十八番일본어)과 '엔노스케 시주하치센'(猿之助四十八撰일본어)을 정리하여 가부키 레퍼토리를 체계화하는 데 기여했다. '다테노 주야쿠'와 같은 고전극을 발굴하고 하야가와리 기법을 혁신적으로 사용하여 무대 예술에 깊이를 더하고 가부키의 다양한 표현 가능성을 확장했다. 이러한 그의 활발한 활동은 무대 예술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으며, 초기에는 보수적인 가부키계의 비판을 받았지만 궁극적으로는 광범위한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5.2. 비판 및 논란
이치카와 엔오 2세의 혁신적인 시도는 전통주의자들로부터 초기에는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그의 케렌 기법을 강조한 연출은 2대 오노에 쇼로쿠에 의해 '키노시 서커스'(喜熨斗サーカス일본어)라고 불리며 가부키의 정통성을 해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은 그의 본명을 빗대어 조롱한 것으로, 한때 가부키계에서 고립무원이었던 그의 처지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도는 결국 가부키의 주류에 편입되어 다른 배우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5.3. 수상 및 영예
이치카와 엔오 2세는 그의 예술적 업적을 인정받아 수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다.
- 1965년: 제11회 테아토론상
- 1969년: 나고야 펜클럽상
- 1976년: 예술선장 신인상
- 1980년: 마쓰오 예능상 우수작
- 1981년: 볼로냐시 문화 공로장
- 1984년: 마이니치 예술상
- 1985년: 일본 문화 디자인상
- 1987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오피시에(2등)
- 1988년: 도민 문화 영예장
- 1990년: 예술선장 문부대신상
- 1996년: 요미우리 연극 대상 우수남우상, 기쿠치 간상
- 2000년: 자수포장
- 2010년: 문화공로자
- 2013년: 제22회 몽블랑 국제 문화상
- 2023년: (사후) 종4위, 욱일중수장
6. 작품
이치카와 엔오 2세는 가부키 무대에서의 뛰어난 연기와 연출뿐만 아니라, 영화, TV, 저술 활동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쳤다.
6.1. 주요 무대 공연
그의 주요 무대 공연은 다음과 같다.
- 요시쓰네 센본자쿠라(義経千本櫻일본어)의 여우 다다노부 역
- '다테노 주야쿠'(慙紅葉汗顔見勢일본어, '伊達の十役')의 10역 하야가와리
- 슈퍼 가부키 야마토타케루(スーパー歌舞伎 ヤマトタケル일본어)의 야마토타케루(ヤマトタケル일본어) 역
- 슈퍼 가부키 오구리(スーパー歌舞伎 オグリ일본어)의 오구리 한간(小栗判官일본어) 역
6.2. 기타 매체 출연
- 영화
- '대충신장'(大忠臣蔵일본어, 1957년, 쇼치쿠) - 오이시 치카라 역
-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일본어, 1958년, 쇼치쿠 오오후나) - 케사키치 역
- '오사카 성 이야기'(大坂城物語일본어, 1961년, 도호) - 기리가쿠레 사이조 역
- '충신장 하나노 마키 유키노 마키'(忠臣蔵 花の巻・雪の巻일본어, 1962년, 도호) - 오이시 치카라 역
- 텔레비전 드라마
- 시오노기 TV 극장 '젊은 시절의 노부나가'(若き日の信長일본어, 1964년, 후지 TV)
- 기타
- '가는 해 오는 해'(ゆく年くる年일본어, 1984~1985년판, TV 도쿄 제작) - 종합 사회
6.3. 저술 및 출판
- '연기자의 눈'(演者の目일본어, 아사히 신문사, 1976년)
- '엔노스케 수라 무대 - 미래는 오늘에 있다'(猿之助修羅舞台 - 未来は今日にあり일본어, 야마토야마 출판사, 1984년; PHP 문고, 1994년)
- '엔노스케의 가부키 강좌'(猿之助の歌舞伎講座일본어, 신초샤 '톤보노 혼', 1984년)
- '이치카와 엔노스케 가부키의 시공'(市川猿之助 歌舞伎の時空일본어, PARCO 출판국, 1986년, 이나코시 코이치(稲越功一일본어) 사진)
- '이치카와 엔노스케'(市川猿之助일본어, 고단샤, 1993년) 신판
- 요코우치 겐스케(横内謙介일본어)와 공저 '꿈꾸는 힘 슈퍼 가부키라는 미래'(夢みるちから スーパー歌舞伎という未来일본어, 슌추샤, 2001년)
- '슈퍼 가부키 모노즈쿠리 노트'(スーパー歌舞伎 ものづくりノート일본어, 슈에이샤 신서, 2003년)
- 평전
- '이치카와 엔노스케의 일'(市川猿之助の仕事일본어, 연극 출판사, 1995년)
- 미쓰모리 다다카쓰(光森忠勝일본어) '이치카와 엔노스케 기울기 일대'(市川猿之助 傾き一代일본어, 신초샤,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