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팔룡 (藤本 英雄후지모토 히데오일본어)은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뛰어난 선수이자 감독, 그리고 해설가이다. 한국 부산에서 이팔룡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일본으로 이주하여 야구 경력을 시작한 그는, 투수로서 경이로운 기록들을 세우며 일본 야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는 통산 평균자책점 1.90과 통산 승률 0.697이라는 일본 프로 야구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1943년에는 투수 삼관왕을 달성하고 단일 시즌 최저 평균자책점(0.73)과 최다 완봉승(19회)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50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며 그 이름을 역사에 새겼다. 그의 경력은 일본 야구 연맹 시대와 일본 프로 야구 시대를 아우르며 도쿄 교진군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과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활약했다. 또한 25세의 나이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선수 겸 감독을 맡아 일본 프로 야구 최연소 감독 기록을 세웠으며, 선수 은퇴 후에도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하는 등 야구계에 다방면으로 공헌했다. 그의 탁월한 업적은 197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후지모토 히데오의 본명은 이팔룡으로, 1918년 5월 18일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 부산에서 태어났다. 8세가 되던 해에 일본으로 이주하여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히코섬에서 성장했다. 그는 일본에서 후지모토 히데오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중학생 시절에는 藤本 八龍후지모토 하치류일본어로 불리기도 했다. 1943년에 결혼하면서 부인의 집안인 나카가미(中上) 가문에 입양되어 본명은 中上 英雄나카가미 히데오일본어로 변경되었으나, 선수 등록명은 은퇴할 때까지 계속 '후지모토 히데오'를 사용했다.
2.1. 유년기 및 교육
이팔룡은 어린 시절 일본 시모노세키시 히코섬으로 이주한 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그는 시모노세키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35년 봄과 1937년 봄에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며 뛰어난 야구 실력을 선보였다. 이 시기 그는 매일 히코섬에서 연락선을 타고 통학했는데, 같은 배에 동승했던 후일의 배우 미치요 고구레가 이팔룡의 팬이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팔룡은 호세이 대학 야구부와도 연관이 있었던 시모노세키 상업고등학교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대학 야구부 출신 마사미 사코하타에게 코치를 받은 인연으로 1938년 메이지 대학에 진학했다. 당시 나고야 킨샤치군의 겐자부로 오카다로부터 프로 입단 제안을 받았으나 학업을 이유로 거절했다. 메이지 대학 재학 중 그의 강속구 때문에 포수들은 투구 연습 시에도 레가스와 체스트 프로텍터를 착용해야 했다고 한다.
1940년 메이지 대학의 에이스 히데오 시미즈가 중퇴하고 프로에 진출하자, 이팔룡이 에이스 자리를 이어받아 그해 가을 리그에서 4승 무패, 평균자책점 0.62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42년 봄 리그에서는 9승 1패(3완봉승 포함)를 기록했고, 타격에서도 타율 0.310으로 베스트 10에 들면서 팀의 우승에 다시금 공헌했다. 같은 해 9월,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문부성의 조치에 따라 졸업이 앞당겨졌다. 그는 메이지 대학에서 통산 34승 9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도쿄 6대학 리그 역대 10위이자 현재까지 메이지 대학 투수 최다승 기록이다.
3. 프로 선수 경력
이팔룡은 프로 선수 경력 동안 압도적인 투수 기록을 세우며 일본 야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여러 구단을 거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핵심 투수로 자리매김하며 전성기를 이끌었다.
3.1. 초기 경력 및 전전 시대 (1942-1944)
메이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이팔룡은 도쿄 교진군 외에도 아사히군, 난카이군, 한큐 등 여러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 시모노세키 상업고등학교 선배인 교진군의 기쿠지 히라야마의 권유로 교진군 대표 다다오 이치오카를 만나 1942년 시즌 도중인 9월 25일 도쿄 교진군에 입단했다. 당시 도쿄 6대학 리그 최고의 강속구 투수였던 그의 프로 입단은 큰 화제를 모았으며, 주장 시게루 미즈하라가 징집된 직후였기에 9월 27일 다이요군과의 첫 등판 시 요미우리 신문에 선발 예고가 대대적으로 게재되어 당시 교진군 주최 경기 사상 최다 관중인 NaN 경 16942명을 동원했다. 그러나 이팔룡은 당시 한 달가량 연습을 하지 못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아키라 노구치와 다케오 사토에게 홈런을 허용하며 3실점했다. 8회부터는 빅토르 스타루힌의 구원을 받아 간신히 승리 투수가 되었다. 후지모토 다쓰노리 감독은 당시 이팔룡이 충분히 몸을 만들고 등판했다면 당시 프로 야구 타자들이 도저히 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프로 야구의 강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데뷔시켰다고 밝혔다. 이후 열흘 정도 만에 컨디션을 회복한 이팔룡은 10월 6일 아사히군과의 3차 등판에서 완봉승으로 2승을 거둔 후 폐막까지 연승을 이어가며 신인으로서 무결점 10연승을 달성했다.
입단 2년 차인 1943년, 전년도 26승 투수 빅토르 스타루힌이 병으로, 21승 투수 슈이치 히로세가 징집으로 전열을 이탈하자 이팔룡은 에이스로서 홀로 분투했다. 5월 22일 나고야군과의 경기(고라쿠엔 구장)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또한 여름철 7월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한 달간 8완봉승을 포함한 11연승을 기록했으며, 100이닝 동안 단 2자책점만을 허용했다. 특히 8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62이닝 무실점이라는 압도적인 투구를 선보였다. 결국 이팔룡은 시즌 총 84경기 중 46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34승, 평균자책점 0.73, 253탈삼진을 기록하며 최다승, 최우수 평균자책점, 최다 탈삼진의 투수 삼관왕을 차지했다. 또한 0.756의 최고 승률과 리그 1위인 19회 완봉승을 기록하며 투수 오관왕을 달성했다. 1943년에 기록한 평균자책점 0.73과 19완봉승은 현재까지 일본 프로 야구 기록으로 남아있다. 압도적인 투수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해 최고수훈선수는 리그 유일의 3할 타자였던 오창성에게 돌아갔다. 같은 해 그는 결혼하며 나카가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으나, 선수 등록명은 계속 '후지모토 히데오'를 유지했다.
1944년에는 투수이면서도 3번 타자로 출전했으며, 감독과 주장을 겸임했다. 25세의 감독 취임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 기록으로, 이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인원 부족을 겪는 전시에 그는 팀을 지탱했다. 선수들은 오전에는 도시바 후추 공장에서 일하고 오후에 야구 연습을 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야구장이 고구마 밭으로 변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이팔룡의 인맥을 통해 도쿄 다이타바시에 있던 메이지 대학 운동장을 빌려 연습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해 봄 시리즈에서 11승 3패, 승률 0.786을 기록하며 한신 타이거스와 동률 1위에 올랐다. 이팔룡은 선수로서도 스다 히로시의 6승에 이어 5승 2패, 타율 0.320을 기록하며 팀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여름 시리즈에서는 스다가 국적을 이유로 출전할 수 없게 되면서 이팔룡의 부담이 가중되었고, 그는 5승 6패로 부진했다. 팀 또한 8승 11패로 지는 경기가 많아지면서 주력 선수가 대부분 남아있던 한신에게 우승을 내주며 교진군은 7연패를 놓쳤다.
3.2. 전후 시대 및 최전성기 (1946-1953)
이팔룡은 1946년 시즌 중반까지 감독을 겸임하다가, 나카지마 하루야스가 겸임 감독으로 교진군에 복귀한 후 선수 전업으로 돌아섰다. 이 해 그는 곤도 사다오 (23승)에 이어 21승을 거두었고, 평균자책점 2.11로 다시 최우수 평균자책점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팔룡이 교진군과 재계약할 때 받은 계약금 5000 JPY에 대해 구단 대표 다다오 이치오카가 "시즌 후에 다시 돌려줄 테니 일단 반환해달라"고 요구하여 반환했는데, 시즌 후에도 돌려주지 않아 구단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추부니혼 드래건스 구단 대표 마사시 아카미네의 권유를 받아 1947년 주니치로 이적했다. 이적에는 나카지마와의 감독 교체에 따른 감정적 문제도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주니치에는 히데오 시미즈, 기요시 스기우라 등 메이지 대학 출신 주력 선수들이 있었지만, 메이지 대학 인맥을 통한 권유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서로를 라이벌로 여겨 쉽게 단합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주니치에서 그는 17승, 평균자책점 1.83 (리그 2위)을 기록하며 시미즈 히데오 (23승)와 쓰구히로 핫토리 (16승)와 함께 주니치의 2위 약진을 이끌었다. 하지만 시즌 후반에 어깨 부상을 당하여 8월 초 이후 5연패를 기록하며 승수를 늘리지 못했고, 9월 말에는 전열에서 이탈했다.
1948년에는 미하라 오사무 총감독의 요청으로 교진군에 복귀했으며, 교진군은 주니치에게 이적금으로 6.00 만 JPY를 지불했다고 전해진다. 시즌 초에는 주로 외야수로 출전했으나, 이번에는 다리 부상을 입어 투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외야수로 전향하는 동안 투구할 수 있을 정도로 어깨가 회복되었다. 투수 복귀를 위한 연습을 하던 중, 역시 어깨 부상으로 2군에 있던 미쓰오 우노와 캐치볼을 하던 중 이팔룡이 던진 공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꺾이는 것을 우노가 지적했다. 이를 계기로 밥 펠러의 투구술에 관한 책 『하우 투 피치』(또는 할 뉴하우저의 『하우 투 피칭』)를 참고하여 슬라이더를 습득했다. 어깨 부상으로 구위는 떨어졌으나 부활하여 1949년에는 래빗볼 도입으로 리그 전체의 투수 성적이 악화되는 가운데, 리그에서 유일하게 1점대 평균자책점(1.94)을 기록했다. 이로써 개인 통산 세 번째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고, 24승(리그 2위)을 기록하는 등 안정적인 성적을 남겼다. (이 24승은 스다 히로시의 27승 중 6구원승을 제외하면 선발승으로는 리그 최다였다.)
1950년 6월 28일 니시닛폰 파이레츠와의 경기(아오모리 시영 야구장)에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이 경기에서 원래 선발은 후쿠조 다다였으나, 그가 갑작스러운 식중독으로 쓰러지면서 이팔룡이 긴급 선발로 등판했다. 게다가 이팔룡 자신도 전날 밤 "아오모리에서의 등판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하코다테에서 아오모리로 이동하는 세이칸 연락선 안에서 밤늦게까지 마작을 하는 등 거의 수면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등판하여 기록을 달성했다. (원래 선발은 히로시 나카오였는데, 나카오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이팔룡에게 등판 기회가 돌아왔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경기에는 신문기자 4명만이 있었을 뿐 카메라맨은 한 명도 없어, 퍼펙트 게임 달성 당시의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 (장마를 피해 도호쿠·홋카이도 원정 중이었고, 전날 하코다테 경기 후 원정에 동행했던 기자들 대부분이 도쿄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중학생이던 슈지 데라야마가 이 경기를 관전했으며, 어린 시절의 레이 나카니시가 배트보이를 맡았다. 이 해에도 그는 26승(리그 3위), 평균자책점 2.44(리그 2위)의 호성적을 거두었다.
1951년에는 15승, 평균자책점 3.13(리그 10위)의 성적이었으나, 23승의 기요시 마쓰다와 21승의 다케히코 벳쇼를 제치고 야수진의 추천을 받아 난카이 호크스와의 1951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이 경기에서 10안타를 맞으면서도 중요한 순간을 막아내 완봉승을 거두었으며, 5차전에서도 2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팀의 우승을 확정 짓는 투수가 되었다. 그는 1952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승리 투수가 되고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1953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승리를 추가하며 요미우리의 3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로도 1952년에는 16승 6패, 평균자책점 2.36(리그 6위), 1953년에는 17승 6패, 평균자책점 2.08(리그 2위)로 안정적인 기록을 남겼다. 이팔룡은 1949년부터 1953년까지 5년 연속 매년 15승 이상을 기록하며 다케히코 벳쇼, 다쿠미 오토모 등과 함께 요미우리 제2기 황금 시대의 투수진을 지탱했다.
3.3. 선수 생활 후반기 및 은퇴 (1954-1955)
1954년에는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1승에 그쳤다. 이듬해 1955년에는 구위가 급격히 저하되어 개막 이후부터 전력에서 이탈했다. 그해 유일한 등판은 시즌 폐막 직전인 10월 11일 히로시마전(와카야마 현영 무코노시바 야구장)이었다. 선발 아키라 호리우치에 이어 경기 중반 5회부터 등판하여 맞바람을 활용한 커브로 호투하며 1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 승리 투수가 되었고,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같은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 200승은 일본 프로 야구 역대 6번째 기록이다.
그의 통산 승률 0.697은 통산 2000이닝 이상 투구한 투수 중 역대 1위 기록이다. 또한, 통산 200승 이상을 거둔 투수 중 유일하게 통산 100패를 기록하지 않은 투수로 남아있다. (통산 150승 이상 투수 중에서는 마사키 사이토도 100패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의 통산 평균자책점 1.90 또한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4. 선수 특징 및 플레이 스타일
후지모토 히데오는 매우 뛰어난 스태미나를 자랑하는 투수였다. 그는 경기 전 투구 연습에서 최소 100구 이상을 던졌으며, 경기 중에는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연투를 할 경우에는 전날보다 다음 날에 컨디션이 더 좋았다고 한다.
그의 대표적인 구종은 슬라이더였다. 이팔룡과 교진군 입단 동기였던 노보루 아오타에 따르면, "후지모토 히데오의 슬라이더는 던진 후 손에서 공이 뜨는 것까지는 직구와 같았고, 거기서 스윽 하고 꺾였다. 후대의 프로 야구에서 이팔룡과 같은 슬라이더를 던진 투수는 가즈히사 이나오와 도모히토 이토밖에 없다"고 회고했다.
이팔룡은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타격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44년에는 타율 0.268을 기록하며 타격 성적 9위에 올랐다. 1950년에 기록한 7홈런은 2010년대 쇼헤이 오타니의 등장 전까지 투수 최다 홈런 기록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일본 시리즈에서도 19타수 6안타, 타율 0.316을 기록하는 등 중요한 경기에서도 타격 능력을 발휘했다. 1946년 12월 개봉한 영화 '2사 만루' 홍보 기획으로 같은 해 11월 요미우리컵 쟁탈 일본 야구 대회에서 다이에이가 '2사 만루에 홈런을 친 선수에게 1.00 만 JPY 상금'을 내걸었을 때, 투수이면서도 홈런을 치고 상금을 획득하기도 했다.
5. 코치 및 은퇴 후 경력
선수 은퇴 후 이팔룡은 195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선수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여 선수들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1957년에는 1군 투수 코치로 자리를 옮겼지만, 1957년 일본 시리즈에서 니시테쓰에게 패배한 후 시나가와 가즈에 구단 사장에 의해 고로 다니구치와 함께 코치직에서 해임되었다.
교진군 퇴단 후 그는 메이지 대학 선배인 도쿠로 고니시의 초빙으로 다이와 증권 감독(1958년-1961년)을 역임했으며, 1961년에는 팀을 도시 대항 야구 대회로 이끌었다. 당시 다이와 증권의 한 임원이 우연히 이팔룡과 같은 시모노세키 상업고등학교 출신이어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고니시 총감독-나카가미 감독 체제가 되었다고 한다. 팀에는 후에 메이지 대학 감독 및 총감독을 맡게 되는 다카히코 벳푸와 1년차 선수였던 야스오 고유미바, 아키라 미타 등이 있었다. 간토 가쿠인 대학과의 경기에서 히로아키 아오키에게 노히트 노런을 당했지만, 이팔룡은 "사이드 스로의 슈트는 프로에 적합할 것 같다"고 판단하여 그의 친정팀 교진군에 아오키를 추천하기도 했다。
이후 닛폰 TV '○요일 나이터' 해설자와 호치 신문 평론가를 겸임했으며, 1968년에는 조국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그는 서울, 부산, 대전, 대구에서 소년 야구 교실을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야구 협회 설립을 지원하는 등 야구 보급에 힘썼다. 이러한 활동은 한국 야구 발전에 중요한 기여로 평가받는다.
1973년에는 아내와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요미우리 신문 로스앤젤레스 지국 주재원으로 취임했다. 이는 사실상 교진군의 미국 담당 스카우트로서 활동하며, 스코어북을 작성하면서 미국 각지를 순회했다. 이팔룡이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할 당시 여름방학이 되면 자녀와 가족들도 로스앤젤레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영어 공부를 하며 후지 TV '아메리카 메이저리그 실황 중계' 해설자(1978년-1979년)로도 활동했으며,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1승 3패 열세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꺾고 역전 우승한 1979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호치 신문에 전 7경기 평론을 기고했다. 1차전에서는 "아침에 호텔 창밖을 보니 눈이 쌓여 있었다..."며 현지 소식을 전했고, 오후에 눈 섞인 비가 그치고 기온 3 °C 속에서 경기가 진행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원고 마감에서는 "과거 일본인들은 내야 수비가 뛰어나다고 했지만, 수비 범위의 넓이 등 이 시리즈만 보더라도 여전히 차이가 있다. 분명히 시시한 실수도 많다. 또한 그 점이 즐겁다"며 메이저리그의 매력을 피력했다. 1976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 개인 생활 및 일화
이팔룡은 2군 감독 시절 지인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으며, 타고난 연습 열정으로 빠르게 실력이 향상되어 핸디캡이 5 정도까지 내려갔다. 이팔룡의 영향으로 그의 두 아들도 학창 시절 야구부를 그만두고 대학에서 골프부에 들어갔다. 가족 모두가 지바 컨트리 클럽의 회원이 되었고, 딸도 육아가 일단락된 후 골프를 시작하여 이팔룡 부녀가 함께 라운딩을 즐겼다. 만년에는 손자도 골프부였기에 3세대가 함께 라운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마작도 즐겼는데, 역만에 대해 평화로 맞서는 등 상대방이 큰 패를 만들수록 더욱 과감하게 맞서는 경향이 있었다.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승부에는 약한 편이었다. 1950년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을 때 구단에서 5.00 만 JPY의 상금이 나왔으나, 이 돈 전부가 뎃쓰하루 가와카미, 노보루 아오타, 다케히코 벳쇼 등에게 마작 빚으로 넘어가 버렸다. 주변에서는 그를 안쓰럽게 여겨 한동안 마작 멤버에서 제외했는데, 그러자 이팔룡은 야구장으로 이동할 때 마작패 하나를 유니폼 주머니에 넣어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마작패를 구하기 쉽지 않아 패 하나가 없으면 게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이팔룡을 멤버로 포함시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7. 유산 및 영예
이팔룡은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7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그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여러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통산 평균자책점 1.90과 통산 승률 0.697은 모두 일본 프로 야구 최고 기록이며 (2000이닝 이상 투구 기준), 1943년 시즌에 기록한 평균자책점 0.73과 19완봉승은 일본 프로 야구 단일 시즌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그는 1943년 최다승, 최우수 평균자책점, 최다 탈삼진을 석권하며 투수 삼관왕을 달성했고, 최고 승률과 최다 완봉승까지 더해 투수 오관왕을 이룬 역대 3번째 선수였다. 1949년에는 사와무라 에이지상과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투수로서 1950년에 기록한 7개의 홈런은 훗날 오타니 쇼헤이가 경신하기 전까지 투수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1950년) 달성자라는 명예 또한 그의 유산 중 하나이다.
8. 사망
이팔룡은 1997년 4월 26일 오전 1시 22분, 도쿄도 지요다구의 도쿄 경찰 병원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9. 상세 정보
이팔룡의 뛰어난 선수 경력을 뒷받침하는 세부적인 통계와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의 연도별 투수 및 타자 성적, 감독 경력, 그리고 주요 수상과 기록들은 그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상을 보여준다.
9.1.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볼넷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회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42 | 도쿄 교진군 | 14 | 12 | 9 | 4 | 2 | 10 | 0 | -- | -- | 1.000 | 433 | 111.0 | 64 | 2 | 36 | -- | 0 | 53 | 0 | 0 | 15 | 10 | 0.81 | 0.90 |
1943 | 56 | 46 | 39 | 19 | 3 | 34 | 11 | -- | -- | 0.756 | 1664 | 432.2 | 212 | 3 | 168 | -- | 1 | 253 | 9 | 0 | 57 | 35 | 0.73 | 0.88 | |
1944 | 21 | 19 | 17 | 5 | 1 | 10 | 8 | -- | -- | 0.556 | 693 | 169.2 | 132 | 3 | 62 | -- | 1 | 113 | 2 | 0 | 54 | 30 | 1.59 | 1.14 | |
1946 | 31 | 25 | 21 | 9 | 1 | 21 | 6 | -- | -- | 0.778 | 870 | 217.1 | 171 | 6 | 81 | -- | 0 | 83 | 1 | 0 | 63 | 51 | 2.11 | 1.16 | |
1947 | 추부니혼 | 35 | 31 | 27 | 4 | 1 | 17 | 15 | -- | -- | 0.531 | 1062 | 275.0 | 220 | 7 | 52 | -- | 5 | 77 | 1 | 0 | 67 | 56 | 1.83 | 0.99 |
1948 | 요미우리 | 22 | 12 | 9 | 0 | 1 | 8 | 5 | -- | -- | 0.615 | 517 | 131.0 | 104 | 3 | 24 | -- | 3 | 51 | 2 | 1 | 33 | 25 | 1.72 | 0.98 |
1949 | 39 | 31 | 29 | 5 | 5 | 24 | 7 | -- | -- | 0.774 | 1137 | 288.0 | 238 | 14 | 55 | -- | 6 | 137 | 1 | 0 | 72 | 62 | 1.94 | 1.02 | |
1950 | 49 | 34 | 33 | 6 | 8 | 26 | 14 | -- | -- | 0.650 | 1442 | 360.1 | 307 | 25 | 70 | -- | 2 | 156 | 1 | 0 | 117 | 98 | 2.44 | 1.05 | |
1951 | 31 | 25 | 16 | 3 | 3 | 15 | 7 | -- | -- | 0.682 | 822 | 206.1 | 189 | 7 | 41 | -- | 3 | 88 | 1 | 1 | 89 | 72 | 3.13 | 1.11 | |
1952 | 34 | 25 | 14 | 5 | 3 | 16 | 6 | -- | -- | 0.727 | 830 | 213.2 | 169 | 11 | 38 | -- | 2 | 89 | 0 | 0 | 68 | 56 | 2.36 | 0.97 | |
1953 | 29 | 25 | 13 | 3 | 7 | 17 | 6 | -- | -- | 0.739 | 777 | 198.2 | 166 | 9 | 30 | -- | 1 | 73 | 0 | 0 | 60 | 46 | 2.08 | 0.99 | |
1954 | 5 | 5 | 0 | 0 | 0 | 1 | 2 | -- | -- | 0.333 | 83 | 19.2 | 21 | 3 | 4 | -- | 1 | 4 | 0 | 0 | 15 | 13 | 5.85 | 1.27 | |
1955 | 1 | 0 | 0 | 0 | 0 | 1 | 0 | -- | -- | 1.000 | 16 | 5.0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20 | |
통산 : 13년 | 367 | 290 | 227 | 63 | 35 | 200 | 87 | -- | -- | 0.697 | 10346 | 2628.1 | 1994 | 93 | 661 | 0 | 25 | 1177 | 18 | 2 | 710 | 554 | 1.90 | 1.01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통산 승률과 평균자책점은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성적(통산 성적은 2000투구회 이상).
9.2. 연도별 타자 성적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희생타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42 | 도쿄 교진군 | 14 | 47 | 41 | 3 | 9 | 1 | 1 | 0 | 12 | 7 | 0 | 0 | 0 | -- | 6 | -- | 0 | 3 | -- | 0.220 | 0.319 | 0.293 | 0.612 |
1943 | 63 | 200 | 183 | 11 | 34 | 5 | 0 | 0 | 39 | 12 | 5 | 2 | 3 | -- | 14 | -- | 0 | 10 | -- | 0.186 | 0.244 | 0.213 | 0.457 | |
1944 | 34 | 143 | 123 | 19 | 33 | 6 | 2 | 1 | 46 | 11 | 8 | 2 | 1 | -- | 19 | -- | 0 | 9 | -- | 0.268 | 0.366 | 0.374 | 0.740 | |
1946 | 52 | 140 | 126 | 15 | 29 | 6 | 2 | 1 | 42 | 19 | 2 | 1 | 0 | -- | 14 | -- | 0 | 12 | -- | 0.230 | 0.307 | 0.333 | 0.640 | |
1947 | 추부니혼 | 61 | 141 | 127 | 14 | 32 | 3 | 0 | 1 | 38 | 11 | 3 | 2 | 1 | -- | 13 | -- | 0 | 11 | -- | 0.252 | 0.321 | 0.299 | 0.621 |
1948 | 요미우리 | 57 | 138 | 129 | 8 | 28 | 2 | 1 | 0 | 32 | 9 | 5 | 2 | 0 | -- | 8 | -- | 1 | 8 | -- | 0.217 | 0.268 | 0.248 | 0.516 |
1949 | 52 | 139 | 116 | 20 | 33 | 6 | 1 | 3 | 50 | 19 | 2 | 1 | 7 | -- | 16 | -- | 0 | 12 | -- | 0.284 | 0.371 | 0.431 | 0.802 | |
1950 | 88 | 194 | 172 | 19 | 49 | 4 | 1 | 7 | 76 | 24 | 2 | 2 | 0 | -- | 22 | -- | 0 | 13 | 7 | 0.285 | 0.366 | 0.442 | 0.808 | |
1951 | 55 | 104 | 88 | 9 | 25 | 3 | 1 | 0 | 30 | 18 | 1 | 0 | 2 | -- | 13 | -- | 1 | 10 | 4 | 0.284 | 0.382 | 0.341 | 0.723 | |
1952 | 38 | 98 | 86 | 6 | 18 | 2 | 0 | 1 | 23 | 10 | 1 | 0 | 3 | -- | 9 | -- | 6 | 6 | 6 | 0.209 | 0.284 | 0.267 | 0.552 | |
1953 | 29 | 83 | 74 | 9 | 21 | 4 | 0 | 1 | 28 | 11 | 0 | 0 | 6 | -- | 3 | -- | 0 | 8 | 5 | 0.284 | 0.312 | 0.378 | 0.690 | |
1954 | 5 | 8 | 8 | 0 | 1 | 0 | 0 | 0 | 1 | 0 | 0 | 0 | 0 | 0 | 0 | -- | 0 | 1 | 0 | 0.125 | 0.125 | 0.125 | 0.250 | |
1955 | 1 | 2 | 2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0 | 0.000 | 0.000 | 0.000 | |
통산 : 13년 | 549 | 1437 | 1275 | 133 | 312 | 42 | 9 | 15 | 417 | 151 | 29 | 12 | 23 | 0 | 137 | 0 | 2 | 103 | 22 | 0.245 | 0.319 | 0.327 | 0.646 |
9.3. 감독 성적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44 | 도쿄 교진군 | 2위 | 35 | 19 | 14 | 2 | 0.576 | 8 | 5 | 0.236 | 1.92 | 26세 |
1946 | 2위 | 105 | 64 | 39 | 2 | 0.621 | 1 | 24 | 0.257 | 2.59 | 28세 |
- 1946년 시즌 도중 6월 10일에 나카지마 하루야스로 교체됨.
- 감독 통산 성적 : 60경기 34승 3무 23패(승률 0.596)
9.4. 타이틀 및 수상
- 최다승 : 1회 (1943년)
- 최우수 평균자책점 : 3회 (1943년, 1946년, 1949년)
- 최다 탈삼진 : 2회 (1943년, 1944년) ※당시는 연맹 표창 대상이 아니었다.
- 최고 승률 : 3회 (1943년, 1946년, 1949년)
- 사와무라 에이지상 : 1회 (1949년)
- 베스트 나인 : 1회 (1949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1976년)
9.5. 주요 기록
- 통산 평균자책점 : 1.90 (일본 프로 야구 기록, 2000투구회 이상 기준)
- 통산 승률 : 0.697 (일본 프로 야구 기록, 2000투구회 이상 기준)
- 시즌 최고 평균자책점 : 0.73 (1943년,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시즌 최다 완봉승 : 19회 (1943년, 노구치 지로와 타이 기록)
- 시즌 최다 선발승 : 32승 (1943년, 스다 히로시, 노구치 지로와 타이 기록)
- 신인 최다 연승 : 10연승 (1942년, 1리그 시대 기록)
- 퍼펙트 게임 : 1회 (1950년 6월 28일, 대 니시닛폰 파이레츠전, 아오모리 시영 야구장)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
- 노히트 노런 : 2회
- 1943년 5월 22일, 대 나고야군전 (고라쿠엔 구장)
- 1950년 6월 28일, 퍼펙트 게임 (위와 동일)
- 통산 200승 : 1955년 10월 11일 달성 (역대 6번째)
- 연속 경기 완봉승 : 6경기 (1943년 8월 2일 ~ 9월 12일,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연속 이닝 무실점 : 62이닝 (1943년 8월 1일 ~ 9월 15일, 1리그 시대 기록)
- 완투 경기 최소 투구수 : 75구 (1946년 10월 27일, 대 한큐군전)
- 2일 연속 완봉승 : 2회 (1943년 8월 16일 ~ 17일; 9월 18일 ~ 19일,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투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 7개 (1950년, 센트럴 리그 기록) ※2014년 오타니 쇼헤이가 10홈런으로 갱신.
- 올스타전 출장 : 2회 (1951년, 1953년)
- 마덕스 달성 : 1회 (1950년 6월 28일, 퍼펙트 게임과 동일 경기)
9.6. 등번호
- 35 (1942년 ~ 1943년)
- 23 (1946년)
- 3 (1947년)
- 17 (1948년 ~ 1956년)
- 31 (1957년)
- 참고: 1944년 시즌은 전체 6개 구단에서 등번호가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