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 및 교육
황선애는 유년 시절부터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배드민턴에 입문한 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며 엘리트 선수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배드민턴 입문
황선애는 충청남도 대덕군 신탄진읍 (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자치기 놀이를 즐겨 했는데, 자주 학교 유리창을 깨뜨리자 신탄진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배드민턴 라켓을 잡게 되면서 배드민턴을 시작했다. 당시 황선애의 아버지는 여자가 운동하는 것을 반대하여 라켓을 부러뜨리기까지 했지만, 황선애는 새벽부터 몰래 배드민턴 연습을 하며 열정을 이어갔다. 초등학교 시절 잠시 탁구를 하기도 했으나, 학교 탁구팀이 해체되고 배드민턴팀으로 대체되면서 배드민턴으로 완전히 전향했다. 중학교 시절에도 대전 지역에서 배드민턴을 계속했고, 동네에 있던 한국 담배회사 본사 여자팀과 인근 군인팀 선수들(훗날 한국의 최고 코치들이 된 젊은 선수들)의 훈련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1.2. 학력
황선애는 신탄진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신탄중앙중학교를 거쳐 경상남도 마산시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성지여자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성지여자고등학교는 당시 배드민턴 프로그램으로 매우 유명한 학교였으며, 황선애는 집에서 200 km 이상 떨어진 마산에서 학교 생활을 했다. 이후 한국체육대학교를 졸업했다.
2. 선수 경력
황선애는 1978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이후부터 1987년 은퇴하기까지 약 10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드민턴 선수로 활약했다. 특히 1981년 전영 오픈 우승과 세계 랭킹 1위 달성은 그녀의 선수 경력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2.1. 선수 경력 초반 및 국가대표 발탁
황선애는 성지여자고등학교 재학 시절, 대한배드민턴협회에 의해 1978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태국 방콕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지병인 위궤양이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겪었다.
2.2. 국제적 명성 (1981년-1982년)
황선애는 1981년 1월에 열린 제1회 일본 오픈에 초청 선수로 참가했다. 1월 24일 결승에서 일본의 도쿠다 아츠코를 세트스코어 2-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국제배드민턴연맹(IBF)에 가입한 지 24년 만에 이룬 첫 국제 대회 우승이었다. 이 우승으로 황선애는 스웨덴 오픈과 전영 오픈에 초청받았다.
이어서 황선애는 스웨덴 오픈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후 열린 1981년 전영 오픈 여자 단식 결승에서는 당시 2회 연속 우승자였던 덴마크의 레네 쾨펜을 상대로 11-1, 11-2의 세트스코어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는 대한민국 배드민턴 선수로서 최초의 전영 오픈 우승이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이었다. 이 우승 직후인 1981년 6월, 황선애는 국제배드민턴연맹으로부터 여자 단식 세계 랭킹 1위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녀의 전영 오픈 우승은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으며, 청와대에 초청되어 당시 대통령과 만났고, 대한체육회로부터 박종학 선수와 함께 1981년도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또한 일본과 영국의 배드민턴 관련 잡지 표지 모델로도 선정되었다.
1981년 월드 게임에는 단식과 복식에 모두 참가했다. 단식에서는 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중국의 장애링 선수에게 패하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복식에서는 김연자 선수와 함께 출전하여 준결승까지 올랐지만, 전영 오픈 복식 챔피언조인 영국의 노라 페리와 제인 웹스터 조에게 패하며 동메달을 획득했다.
1981년 시즌 말에 입은 발목 부상과 이로 인한 약 6개월간의 훈련 부족으로 황선애는 1981-1982 시즌 초기에 슬럼프를 겪었다. 1월에 열린 일본 오픈 전에는 감기에 걸리기도 하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1982년에 참가한 4개 대회에서 모두 초반에 탈락했다. 그러나 강행숙 선수와 함께 출전한 1982년 아시안 게임 여자 복식에서는 결승전에서 같은 한국 선수인 김연자, 유상희 조를 세트스코어 2-1 (18-13, 7-15, 15-7)로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또한 이 대회에서 여자 단체전 동메달도 추가했다. 아시안 게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회 종료 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2.3. 부상과 복귀 (1983년-1985년)
1983년에 접어들면서 황선애는 계속되는 부상(허리 통증 포함)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훈련 페이스가 심각하게 저해되었다. 결국 국가대표팀에서 탈락하여 국내 대학부 대회에만 참가해야 했다. 그러나 1985년 3월, 3년 만에 국가대표팀에 다시 발탁되었으며, 주로 복식 선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1985년 6월에는 1985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 강행숙 선수와 여자 복식으로 출전하여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준결승에서 중국의 우딕시와 린잉 선수조에게 패하며 동메달을 획득했다. 같은 해 9월에 열린 인도 오픈에서는 복식 결승에서 영국의 길리언 클라크와 길리언 가워스 조를 세트스코어 2-0 (15-7, 15-9)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2.4. 은퇴
1986년 3월 스칸디나비아 오픈에서 발목 부상을 입었으며, 1986년 4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우버컵 대회 예선에서는 발목과 허리 부상이 재발하여 선수 활동이 어렵다는 협회의 결정에 따라 대표팀에서 떠났다. 결국 황선애는 1987년에 현역 배드민턴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
3. 주요 타이틀 및 성과
황선애는 선수 경력 동안 수많은 주요 대회에서 우승과 메달을 획득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 부문 | 대회 | 연도 | 결과 | 비고 | |
|---|---|---|---|---|---|
| 전영 오픈 배드민턴 선수권 대회 | |||||
| 단식 | 전영 오픈 | 1981 | 금메달 | 대한민국 최초 우승 | |
| 월드 게임 | |||||
| 단식 | 월드 게임 | 1981 | 은메달 | ||
| 복식 | 월드 게임 | 1981 | 동메달 | 파트너: 김연자 | |
| 아시안 게임 | |||||
| 복식 | 1982년 아시안 게임 | 1982 | 금메달 | 파트너: 강행숙 | |
| 단체 | 1982년 아시안 게임 | 1982 | 동메달 | ||
| 국제배드민턴연맹 세계 선수권 대회 | |||||
| 복식 | 1985년 세계 선수권 대회 | 1985 | 동메달 | 파트너: 강행숙 | |
| 기타 오픈 토너먼트 | |||||
| 단식 | 스웨덴 오픈 | 1981 | 금메달 | ||
| 단식 | 일본 오픈 | 1981 | 금메달 | ||
| 단식 | 차이니스 타이베이 오픈 | 1981 | 금메달 | ||
| 단식 | 일본 오픈 | 1982 | 동메달 | ||
| 복식 | 인도 오픈 | 1985 | 금메달 | 파트너: 강행숙 | |
4. 수상 및 영예
황선애는 뛰어난 선수 경력을 통해 여러 차례 공식적인 포상과 영예를 얻었다.
- 체육훈장 거상장 (1981년 5월 15일)
- 대한체육회 최우수 선수상 (1981년)
- 대통령 표창 (1982년, 아시안 게임 공로)

5. 은퇴 이후의 삶
황선애는 선수 은퇴 후에도 스포츠 분야와 교육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사회에 기여했다. 1989년부터 대전에 위치한 대성여자고등학교에서 배드민턴 코치와 교사로 활동하며 20년 이상 후학 양성에 힘썼다.
6. 유산과 영향
황선애는 한국 배드민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 선수 최초의 전영 오픈 우승과 세계 랭킹 1위 달성은 당시 한국 스포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는 한국 배드민턴의 국제적인 위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어려운 가정 환경과 아버지의 반대,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녀의 도전 정신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또한, 그녀는 성공적인 여성 스포츠인으로서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 여성 선수들에게 롤모델이 되었다. 그녀의 활약은 한국 배드민턴이 '골목 스포츠'에서 벗어나 국제 무대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7. 같이 보기
- 배드민턴
- 전영 오픈 배드민턴 선수권 대회
- 아시안 게임
- 대한민국 배드민턴 국가대표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