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나바라 여왕 호아나 2세(Jeanne잔프랑스어 또는 Juana II de Navarra후아나 2세 데 나바라스페인어, 1312년 1월 28일 ~ 1349년 10월 6일)는 132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나바라를 통치한 여왕이다. 프랑스 왕 루이 10세의 유일한 생존 자녀였던 그녀의 왕위 계승권은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와 관련된 투르 드 네슬 사건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의심받았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프랑스 귀족들은 여성 군주를 반대하며 살리카 법을 적용하여 호아나를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배제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와 나바라 간의 동군연합이 해체되었고, 호아나는 외교적 협상을 거쳐 나바라의 합법적인 여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남편 필리페 3세와 함께 나바라를 공동 통치했으며, 이 기간 동안 왕국의 행정 및 사법 시스템을 강화하고 투델라 인근의 관개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재건에 힘썼다. 특히, 반유대인 폭동의 가해자들을 처벌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도록 명령함으로써 법치와 사회 통합을 중시하는 면모를 보였다. 프랑스 영지로 인해 나바라에 자주 부재했지만, 현지 총독을 통해 왕국을 안정적으로 관리했으며, 남편 사망 후에는 단독 통치를 이어갔다. 백년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를 지지했으나, 그의 군사적 실패에 실망하여 독자적인 외교적 조치를 취하며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는 실용적인 통치력을 발휘했다. 1349년 흑사병으로 사망했으며, 나바라 왕위는 아들 카를로스 2세에게 계승되었다. 호아나 2세의 통치는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나바라 왕국의 안정과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초기 생애와 계승 문제
호아나 2세는 복잡한 가족 배경과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여러 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탄생은 어머니와 관련된 스캔들로 인해 정통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는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2.1. 탄생과 불확실한 정통성
호아나는 1312년 1월 28일, 나바라 왕 루이 1세(프랑스 왕 루이 10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의 유일한 생존 자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의 장남이었다.
1314년, 호아나의 어머니 마르그리트와 필리프 4세의 다른 며느리들인 호아나와 블랑슈는 두 기사, 오네이 형제(필리프 드 오네이와 발터 드 오네이)와의 간통 혐의로 체포되었다. 고문 끝에 오네이 형제 중 한 명이 마르그리트와 블랑슈의 정부였다고 자백했다. 오네이 형제는 곧 처형되었고, 마르그리트와 블랑슈는 투옥되었다. 이 투르 드 네슬 사건 이후, 호아나의 어머니가 호아나가 태어난 해에 외도를 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호아나의 정통성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마르그리트는 투옥된 채 1315년 4월에 사망했다.
필리프 4세가 1314년 11월 26일 사망하자, 호아나의 아버지 루이 10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 루이 10세는 1316년 6월 5일 사망하기 직전, 자신의 임종 자리에서 호아나가 자신의 합법적인 딸임을 선언했다. 당시 그의 두 번째 왕비 클레망스 드 옹그리는 임신 중이었다. 7월 16일에 프랑스의 유력 귀족들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만약 클레망스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프랑스 왕위에 오르고, 딸을 낳으면 그 딸과 호아나는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및 브리 백국(루이 10세가 어머니 호아나 1세로부터 물려받은 세 영지)만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호아나는 부르고뉴에 있는 어머니의 친척들에게 보내지며, 그녀의 결혼은 프랑스 왕실 가족 구성원들의 동의 없이 결정될 수 없도록 합의되었다.
2.2. 프랑스 왕위 계승 위기와 계승권 박탈

클레망스는 1316년 11월 13일 아들 장 1세를 낳았으나, 그는 5일 만에 사망했다. 파리에 있던 호아나의 외삼촌 외드 4세는 호아나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리프 4세의 둘째 아들인 필리프 5세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필리프는 외드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필리프는 1317년 1월 9일 랭스에서 자신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2월 2일 프랑스 귀족 회의인 삼부회는 여성이 프랑스 왕위를 상속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필리프의 입지를 강화했다. 나바라 귀족들 또한 대표단을 파리로 보내 필리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필리프는 또한 샹파뉴와 브리를 호아나에게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
호아나의 외할머니인 아녜스 드 프랑스는 필리프 5세의 대관식에 항의하는 서한을 주요 프랑스 귀족들에게 보냈지만, 필리프 5세는 큰 반대 없이 왕위에 올랐다. 샹파뉴의 귀족들에게 호아나의 이름으로 서한이 보내져, 필리프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말고 호아나의 샹파뉴 권리를 보호할 것을 촉구했다. 또 다른 서한에서 외드 4세는 필리프 5세의 호아나 상속권 박탈이 "법률, 관습, 제국, 왕국, 봉토, 남작령에서 비슷한 경우에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용법과 상반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필리프 5세의 숙부 샤를 드 발루아가 호아나 지지자들을 격퇴했다.
필리프와 외드는 1318년 3월 27일 합의를 맺었다. 필리프는 자신의 맏딸(역시 호아나라는 이름의 호아나)을 외드와 결혼시키고, 그들에게 부르고뉴 백국과 아르투아 백국의 상속권을 인정했다. 반면 호아나는 사촌 필리페 드 에브뢰와 결혼하게 되었으며, 필리프 5세가 아들 없이 사망할 경우 샹파뉴와 브리를 상속받을 권리와 함께 15,000 리브르 투르누아에 해당하는 연금을 지참금으로 받았다. 이 합의에서 호아나는 12세가 되면 프랑스와 나바라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기로 합의되었으나, 실제로 이러한 포기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없다.
2.3. 필리페 3세와의 결혼과 프랑스에서의 초기 생활
호아나와 필리페 드 에브뢰의 결혼은 1318년 6월 18일에 거행되었다. 이후 호아나는 남편의 할머니인 브라반트의 마리와 함께 살았다. 비록 두 사람이 가까이 살았지만, 나이 차이 때문에 필리페와 호아나는 함께 양육되지 않았다. 이들의 결혼은 1324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3. 나바라 왕위 계승
프랑스 카페 왕조의 직계 남성 혈통이 단절되면서, 호아나 2세는 나바라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복잡한 정치적 협상과 외교적 노력을 통해 최종적으로 나바라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3.1. 프랑스와의 동군연합 해체
1322년 초, 필리프 5세가 생존한 아들 없이 사망했다. 그의 동생이자 필리프 4세의 마지막 생존 아들이었던 샤를 4세가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바라 귀족들은 샤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는 나바라의 전통적인 특권인 푸에로스(Fueros)를 승인하지 않았다. 1328년 2월 1일 샤를 4세가 사망하면서 또 다른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당시 샤를의 미망인 잔 드 에브뢰는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귀족들과 다른 유력 영주들은 파리에 모여 섭정을 선출했다. 프랑스 영주 대다수는 사망한 왕의 가장 가까운 부계 혈족인 발루아의 필리프가 섭정직에 가장 강력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3월 13일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모인 나바라 영지 대표들은 프랑스 총독을 두 명의 지역 영주로 교체했다.
4월 1일 샤를의 미망인은 딸 블랑슈를 낳았다. 그녀의 탄생으로 프랑스 카페 왕조의 직계 남성 혈통이 샤를 4세의 죽음과 함께 단절되었음이 분명해졌다. 호아나와 그녀의 남편은 모두 프랑스 군주들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위를 주장할 수 있었으나, 발루아의 필리프를 포함하여 최소 다섯 명의 다른 계승권자들이 있었다. 계승권자들의 대표들은 생제르맹앙레에서 타협점을 찾기 위해 만났다. 5월, 나바라 총회는 호아나에게 "계승권과 상속권에 의해" 왕관이 그녀에게 속하기 때문에 나바라를 방문하여 정부를 장악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발루아의 필리프는 5월 29일 랭스에서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나바라의 호아나 1세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바라, 샹파뉴, 브리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7월에 필리프는 프랑스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호아나와 그녀의 남편이 나바라를 통치할 권리를 인정했다. 그는 또한 호아나와 필리페가 샹파뉴와 브리를 프랑스 왕실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영지로 남기기 위해, 이를 포기하는 대신 롱그빌, 모르탱, 앙굴렘 백국을 받는 데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3.2. 즉위 협상과 대관식
1328년 5월 나바라 총회의 결정 이후, 호아나는 나바라의 합법적인 군주로 인정받았다. 이 결정으로 나바라의 호아나 1세와 필리프 4세의 결혼으로 형성되었던 나바라와 프랑스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이어진 몇 달 동안, 호아나와 그녀의 남편은 나바라의 행정에서 필리페 드 에브뢰의 역할에 대해 영지 의회와 긴 협상을 진행했다. 나바라 사람들은 호아나의 세습적 통치권을 인정했지만, 그녀의 남편 역시 권위를 주장했다. 부부의 부재 기간 동안 나바라의 도시들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포그롬이 발생했다.
호아나와 필리페 드 에브뢰는 앙리 드 쉬이와 필리프 드 멜룬이라는 두 명의 프랑스 영주를 나바라에 보내 협상을 대리하도록 했다. 나바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왕비의 통치를 남편이 공유할 권리를 승인하는 것을 꺼려했다. 1328년 11월 론세스바예스 회의에서 총회 대표들은 필리프가 나바라 행정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군주의 방패 위 추대 및 관중에게 돈을 던지는 것과 같은 대관식의 모든 전통적인 요소들은 호아나와 관련해서만 실행될 것이라고 명시했다. 필리프가 아내의 왕국에서 통치할 권리를 강조하기 위해 앙리 드 쉬이는 바울로가 고린도전서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말한 것을 인용했다. 쉬이는 또한 호아나가 남편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을 승인하고 동의했다고 강조했다.
호아나와 필리페는 1329년 초 나바라에 도착했다. 3월 5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두 사람 모두 방패 위에 추대되었고, 의식 중에 돈을 던졌다. 그들은 왕실의 특권을 설정하는 대관 선서를 했다. 헌장에는 호아나가 나바라의 "진정한 자연적 상속자"임을 명시했지만, "나바라 왕국 전체가 그녀의 배우자에게 복종할 것"이라고도 선언했다. 그러나 나바라 사람들은 호아나와 필리페 모두 그들의 상속자가 21세가 되는 즉시 왕관을 포기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100,000 리브르의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호아나는 또한 나바라 획득과 관련된 남편의 지출에 대해 보상했다.
4. 나바라 여왕으로서의 통치
호아나 2세는 남편 필리페 3세와 함께 나바라를 공동 통치하며 왕국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했다. 그들은 행정 개혁, 인프라 구축, 그리고 이웃 국가들과의 평화로운 관계 유지에 힘썼다.
4.1. 필리페 3세와의 공동 통치

호아나 2세와 필리페 3세는 공동 통치 기간 동안 긴밀하게 협력했다. 그들의 공동 통치 시기에 보존된 85건의 왕실 법령 중 41건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그러나 자료들은 필리페가 특히 입법을 포함한 여러 정부 분야에서 더 적극적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아내를 언급하지 않고 단독으로 38건의 법령에 서명했다. 호아나의 이름으로만 발행된 문서는 단 6건에 불과했다.
4.2. 행정 및 국정 운영
대관식 후, 왕실 부부는 반유대인 폭동의 가해자들을 처벌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도록 명령했다. 왕실 요새들은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수리되었고, 카스텔르노에 새로운 성이 건설되었다. 투델라 주변의 건조한 들판의 관개 시스템 또한 왕실 부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건설되었다. 그들은 또한 이웃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미 1329년에 맏딸 호아나와 아라곤 상속자 페드로의 약혼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살라망카에서 1330년 3월 15일 카스티야와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4.3. 나바라 부재와 현지 행정
호아나와 필리페는 1331년 9월 나바라를 떠났다. 역사가 엘레나 우드아크레는 "왕실 부부는 프랑스 영토의 필요와 나바라 통치의 균형을 맞춰야 했고, 이는 그들이 모든 영지에서 시간을 나누어 보내도록 강요했다"고 언급한다. 역사가 호세 마리아 라카라에 따르면, 호아나와 필리페는 "나바라 사람들의 취향과 관습에 거의 익숙해지지 못했고, 그들의 언어에 서툴렀기 때문에" 왕국에 자주 부재했다. 군주들이 부재하는 동안, 프랑스 총독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나바라를 관리했다.
피테로 수도원 소유권을 둘러싼 국경 분쟁은 1335년 카스티야와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아라곤의 페드로 4세는 나바라를 지지했고, 1336년 2월 28일 카스티야와 새로운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호아나와 필리페는 1336년 4월 나바라로 돌아왔다. 그들의 두 번째 방문은 1337년 10월까지 지속되었다. 필리페는 두 번 더 나바라를 방문했으나, 호아나는 동행하지 않았다.
4.4. 필리페 3세 사망 이후의 단독 통치
필리페 3세는 1343년 9월 사망했다. 호아나는 곧 왕실 부부의 이름으로 나바라를 관리했던 필리프 드 멜룬을 윌리엄 드 브라헤로 교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윌리엄 드 브라헤도 해임하고 장 드 콩플랑으로 교체했다. 역사가 엘레나 우드아크레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나바라 행정에 대한 필리페와의 불일치를 반영했을 수 있다. 1344년, 나바라의 푸에로스 사본이 여왕을 위해 현지 로망스어로 (ydiomate Navarre) 준비되었는데, 프랑스어 변형 (ydioma galicanum) 번역을 위한 여분의 열은 결국 비어 있었다. 아마도 프랑스어는 호아나가 나바라 관련 문제를 처리할 때도 사용했던 자연스러운 언어였을 것이다. 호아나는 1345년 올리테에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을 설립했다.
5. 말년과 죽음
호아나 2세의 생애 마지막 시기는 백년 전쟁의 혼란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결국 흑사병으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5.1. 백년 전쟁에서의 역할
호아나는 나바라를 다시 방문하기로 결정했지만, 백년 전쟁 중 프랑스에 있는 가족 영지가 침략당할 가능성 때문에 결코 돌아가지 못했다. 그녀와 남편은 호아나의 숙모인 이사벨라의 아들로서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던 에드워드 3세에 맞서 필리프 6세를 지지했다. 그러나 1346년까지 호아나는 군사 지도자로서 필리프 6세의 실패에 실망했다. 11월에 그녀는 과감하게 랭커스터 백작과 휴전을 체결하여, 그녀의 영지 앙굴렘을 통해 에드워드 군대가 자유롭게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가로 자신의 영지 보호를 약속했다. 그녀는 또한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거나 필리프의 군대가 기존 요새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필리프는 그녀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5.2. 사망과 안장

호아나는 1349년 10월 6일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유언에서 아들에게 올리테의 산타 마리아 예배당에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나, 그녀의 심장은 남편의 심장과 함께 파리의 현재는 철거된 자코뱅 수도원 교회에 묻혔다.

6. 가족과 후손
호아나 2세는 남편 필리페 3세와 함께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관계가 조부모나 부모의 잘 기록된 결혼 생활만큼 가깝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들은 효율적인 공동 통치자였다. 이는 그들의 결혼 생활이 특별한 애정이나 어려움으로 특징지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거의 떨어져 있지 않았다.
6.1. 자녀
필리페 드 에브뢰와 결혼하여 낳은 자녀는 다음과 같다.
- 잔 (1326년경 ~ 1387년): 미래의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아내가 될 예정이었으나, 롱샹의 프란치스코회 수녀가 되었다.
- 마리아 (1329년경 ~ 1347년):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첫 번째 왕비.
- 루이 (1330년 ~ 1334년)
- 블랑슈 (1331년 ~ 1398년): 필리프 6세의 두 번째 왕비.
- 카를로스 (1332년 ~ 1387년): 에브뢰 백작 및 나바라 왕위 계승자.
- 필리프 (1333년경 ~ 1363년): 욜랑드 드 당피에르와 결혼.
- 아녜스 (1334년 ~ 1396년): 푸아 백작 가스통 3세와 결혼.
- 루이 (1341년 ~ 1372년): 보몽르로제 백작. 첫 번째로 마리아 드 리자라주와 결혼했고, 두 번째로 두라초 공작부인 호아나와 결혼.
- 잔 (1342년 이후 ~ 1403년): 로앙 자작 장 1세와 결혼.
6.2. 가계
호아나 2세는 카페 왕조의 직계 후손으로, 프랑스와 나바라 왕실의 복잡한 혈통을 지니고 있다.
- 아버지: 루이 10세 (프랑스 왕 및 나바라 왕 루이 1세)
-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
- 친할아버지: 필리프 4세 (프랑스 왕)
- 친할머니: 호아나 1세 (나바라 여왕)
- 외할아버지: 로베르 2세 (부르고뉴 공작)
- 외할머니: 아녜스 드 프랑스
이러한 혈통은 그녀가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후에도 나바라의 합법적인 상속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