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테오필 드 비오의 삶은 종교적 배경, 궁정에서의 활동, 그리고 이로 인한 박해와 추방으로 점철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배경
테오필 드 비오는 1590년 로트에가론주 아쟁 근처의 클레락에서 태어났다. 그는 위그노로 양육되었으며, 1615년부터 1616년까지 기옌 지역에서 캉달 백작의 휘하에 들어가 위그노 반란에 참여했다.
1.2. 궁정 생활과 초기 경력
반란 이후 사면을 받은 테오필 드 비오는 왕궁에서 빛나는 젊은 시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영혼의 불멸성을 의심했던 이탈리아 철학자 루칠리오 바니니의 에피쿠로스적 사상과 접하게 되었다. 바니니는 이단과 마법 실행 혐의로 고발되어 1619년 툴루즈에서 혀가 잘린 뒤 교수형에 처해지고 시신이 불태워졌다. 비오는 잠시 루이 13세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1.3. 박해와 추방
비오는 이단적 견해와 리베르탱적인 생활 방식으로 인해 1619년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잉글랜드를 여행했으나, 1620년 다시 궁정으로 돌아왔다. 1622년에는 그의 이름으로 음란한 시집인 『Le Parnasse satyrique프랑스어』가 출판되었는데, 이 시집에는 다른 작가들이 쓴 시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623년, 비오는 예수회에 의해 그의 양성애를 포함한 도덕적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는 투옥되어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맨발로 나타나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비오가 숨어있는 동안, 그의 형상이 본을 떠 만들어진 인형이 대신 화형에 처해졌으나, 그는 결국 잉글랜드로 도피하던 중 붙잡혀 파리의 콩시에르주리 감옥에 거의 2년간 수감되었다. 그의 재판은 학자들과 작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비오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55편의 팸플릿이 출판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그의 사형 선고는 영구 추방으로 변경되었고, 비오는 남은 생애를 샹티이 성에서 몽모렌시 공작의 비호 아래 보냈다.

1.4. 후반 생애와 죽음
추방 선고를 받은 후, 테오필 드 비오는 몽모렌시 공작의 보호를 받으며 샹티이에서 생애 마지막 몇 달을 보냈다. 그는 162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2. 문학 경력과 작품
테오필 드 비오는 당대의 문학적 흐름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관과 문체를 구축했다.
2.1. 문학관과 문체
비오는 자유사상가인 리베르탱이었으며, 고전주의의 기틀을 다진 동시대의 프랑수아 드 말레르브와는 달리 고전주의 문학의 속박을 싫어했다. 그는 동시대 작가들이 낡은 문학만을 답습한다고 비판하며, 고전문학에 반대하고 '자연스럽고 쉬운' 문체로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비오는 동시대 작가들의 "은유적 과잉과 고상한 학식"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말레르브와 같은 개혁가들이 제시한 제약들을 "불모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제약에 대한 그의 무시는 그가 비순응주의자로서의 명성을 얻는 데 기여했다. 그의 시적 스타일은 말레르브의 논리적이고 고전주의적인 제약을 거부하고, 후기 르네상스의 감성적이고 바로크적인 이미지에 충실했다. 이는 마치 살바토르 로사의 그림처럼 천둥, 뱀, 불꽃의 환상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송시 『Un corbeau devant moi croasse프랑스어』(영어: A crow before me caws)에서 잘 드러난다.
2.2. 주요 작품
테오필 드 비오는 희곡, 시, 산문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2.2.1. 희곡
그의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1621년에 공연된 『Les Amours tragiques de Pyrame et Thisbé프랑스어』(피람과 티스베의 비극적인 사랑)가 있다. 이 작품은 알렉상드랭으로 쓰여진 총 5막의 비극으로,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며 결국 두 주인공의 동반 자살로 끝난다.
2.2.2. 시
비오는 풍자시, 소네트, 송시, 비가 등 다양한 형식의 시를 썼다. 그의 후원자들에게 헌정된 10수의 송시 연작인 『La Maison de Sylvie프랑스어』(실비네 집)가 있으며, 그의 시적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Un corbeau devant moi croasse프랑스어』(영어: A crow before me caws)가 있다. 또한, 그의 투옥이나 추방과 관련하여 왕에게 보내는 두 편의 우울한 탄원 시가 있으며, 이러한 슬픔의 분위기는 숲 한가운데 있는 시인을 비가적으로 묘사하며 고전적 모티프를 혼합한 송시 『On Solitude프랑스어』(고독에 대하여)에서도 나타난다.
2.2.3. 산문 및 기타
그의 산문 작품으로는 1623년에 출판된 『Fragment d'une histoire comique프랑스어』(코믹 소설의 단편)가 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문학적 취향을 드러냈다. 또한, 플라톤의 『파이돈』을 각색한 『Traité de l'immortalité de l'âme프랑스어』(영혼불멸론)은 산문과 운문이 혼합된 형태로 쓰였다.
3. 평가와 유산
테오필 드 비오와 그의 작품은 당대에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재평가되었다.
3.1. 당대 평가
테오필 드 비오는 동시대의 고전주의 작가들에게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예수회의 고발과 재판은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재판을 둘러싸고 55편에 달하는 찬반 팸플릿이 출판된 것은 당시 그가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지 보여준다.
3.2. 후대 평가
17세기 후반의 고전주의 작가들에게 비판받아 한동안 잊혀졌던 테오필 드 비오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이후 그는 바로크 문학과 리베르탱 문학의 주요 인물로 재평가받았다.
3.3. 현대적 해석
현대 학계에서는 테오필 드 비오가 겪은 박해가 사상적이기보다는 주로 정치적인 알력에 기인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는 그의 작품과 사상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