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클레망 아데르는 프랑스 오트가론주 뮈레에서 태어나 툴루즈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전기 및 기계 공학 분야에서 여러 혁신을 이끌어낸 인물입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아데르는 가론강 상류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던 교량 및 도로 기술자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열정은 수중 항해선이나 지상 차량을 넘어, 공중을 비행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1.2. 초기 경력
아데르는 원래 전기 공학을 전공했으며, 1870년에는 프랑스에서 자전거 스포츠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다양한 전기 기계 및 도구 제작을 통해 빠르게 부를 축적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비행 꿈을 실현하기 위한 연구에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초기 직업 활동은 녹음기, 전화기, 극장용 증폭기 제작 등이었습니다.
2. 전기 및 기계 발명
아데르는 전기 및 기계 공학 분야에서 여러 혁신을 이루어냈습니다. 1878년, 그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발명한 전화를 개량했으며, 이듬해인 1880년에는 파리에 최초의 전화망을 구축했습니다.
1881년에는 테아트로폰Théâtrophone프랑스어이라는 시스템을 발명했습니다. 이는 청취자가 각 귀에 별도의 채널을 받아 배우들의 연기를 스테레오로 인지할 수 있게 하는 전화 전송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발명 덕분에 1881년에는 약 3 km 떨어진 거리에서 오페라 공연의 첫 스테레오 전송이 가능해졌습니다.
1903년에는 파리-마드리드 경주를 위해 V8 엔진을 고안했습니다. 3~4개의 엔진이 생산되었지만, 판매되지는 않았습니다.
3. 항공기 개발
V8 엔진 개발 이후, 아데르는 기계 비행 문제에 관심을 돌렸고, 남은 생애 동안 이 분야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습니다. 그는 루이 피에르 무이야르가 새의 비행을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선구적인 항공기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3.1. 아데르 에올 (Ader Éole)


아데르는 1886년에 그의 첫 비행 기계인 에올Éole프랑스어을 제작했습니다. 에올은 박쥐와 같은 형태의 단엽기로, 그 자신이 발명한 경량 증기 기관으로 구동되었습니다. 이 증기 기관은 4기통에 20마력의 출력을 냈으며, 무게는 51 kg에 불과했습니다. 이 엔진은 4개의 날개를 가진 프로펠러를 구동했습니다. 에올의 날개 길이는 약 14 m였으며, 총 무게는 약 300 kg이었습니다. 날개는 박쥐의 날개처럼 변형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890년 10월 9일, 아데르는 에올의 비행을 시도했습니다. 항공 역사가들은 이 시도를 약 20 cm 높이에서 약 50 m를 비행한 동력 이륙이자 지면 효과 내에서의 통제 불능 비행으로 평가합니다. 이는 라이트 형제의 라이트 플라이어 호보다 13년 앞선, 보조 장치 없이 동력으로 이륙한 최초의 시도였으나, 우발적이었고 조종이 불가능했습니다. 에올(Éole)이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프랑스어 형태입니다.
3.2. 아데르 아비옹 II (Ader Avion II)
아데르는 이어서 아비옹 IIAvion II프랑스어라는 두 번째 항공기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이 항공기는 제피르(Zephyr) 또는 에올 II(Éole II)라고도 불렸습니다. 대부분의 자료는 이 항공기의 작업이 완료되지 못하고, 아비옹 III 개발을 위해 중단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데르는 나중에 1892년 8월 파리 근교 사토리에서 아비옹 II로 약 100 m를 비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3.3. 아데르 아비옹 III (Ader Avion III)

아데르의 진전은 당시 프랑스 육군 장관이었던 샤를 드 프레시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프랑스 육군의 지원을 받아 아데르는 아비옹 IIIAvion III프랑스어를 개발하고 제작했습니다. 이 항공기는 린넨과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박쥐와 같은 형태였으며, 날개 길이는 약 14.6 m였습니다. 각각 30마력 증기 기관으로 구동되는 두 개의 4날 견인식 프로펠러가 장착되었습니다.
아데르는 1897년 10월 12일 사토리의 원형 활주로에서 지상 활주 시험을 수행했으며, 이틀 뒤인 10월 14일 비행을 시도했습니다. 짧은 활주 후 기체는 돌풍에 휘말려 활주로를 벗어나 멈춰 섰습니다. 일부 목격자들은 아비옹 III가 공중으로 떠올라 약 270 m 이상을 비행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이들은 이륙조차 하기 전에 파손되었다고 단언했습니다. 비록 베트남어 자료에서는 약 300 m를 비행했다고 언급하지만, 프랑스 육군은 이 시험 결과에 실망하여 자금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육군은 시험 결과를 기밀로 유지했습니다. 1910년 11월, 육군 위원회는 아데르의 비행 시도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그의 비행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명시했습니다.
참고로 '비행기'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아비옹'은 그의 시제기인 아비옹에서 유래했습니다.
4. 저서 및 출판물
클레망 아데르는 항공 개발의 적극적인 옹호자로 활동했습니다. 1909년, 그는 『군사 항공L'Aviation Militaire프랑스어』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5년 동안 10쇄를 발행할 정도로 매우 인기 있었습니다.
이 책은 공중전에 대한 그의 비전과 현대 항공모함의 형태(평평한 비행갑판, 함교, 갑판 엘리베이터, 격납고)를 예견한 것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아데르는 특히 항공모함이 '모든 장애물이 없는 평평하고 넓은 비행갑판을 갖추어야 하며, 선체의 항해선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넓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미래의 항공모함이 '착륙장처럼 보일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항공모함에 대한 아이디어는 파리의 미국 해군 무관에 의해 본국에 전달되었고, 이는 1910년 11월 미국에서 첫 함상 비행 시험으로 이어졌습니다.
5. 개인적인 삶과 말년
클레망 아데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중 앞에서 사라진 후, 말년에는 툴루즈 교외에서 포도원을 경영했습니다. 그는 1922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했으며, 1925년 5월 3일 툴루즈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아비옹 III는 현재까지 파리 공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6. 평가 및 영향
아데르는 초기 동력 비행 노력으로 여전히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의 항공기는 프랑스어에 '비행기'를 뜻하는 '아비옹'이라는 단어를 안겨주었습니다. 1938년, 프랑스는 그를 기리는 우표를 발행했습니다. 또한 에어버스는 툴루즈에 있는 항공기 조립 공장 중 한 곳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습니다. 클레망 아데르는 "항공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합니다.
6.1. 비판과 논란


프랑스 이외의 항공사 연구자들 중 일부는 아데르의 비행 시도가 모두 추락으로 끝났으며, 그가 말년에 자신의 성과를 과장했다고 주장하며 항공사에서 그의 높은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1890년 10월 9일 에올의 비행에 대해서는 비교적 반론이 적으며, 아데르는 여전히 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 성공 이후, 프랑스 정부는 아데르의 비행에 대한 정보를 성공적인 것으로 공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