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크리스토퍼 스트래치는 1916년 11월 16일 잉글랜드 햄프스티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와 교육은 학문적 배경과 개인적인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스트래치는 올리버 스트래치(영국 외무부 관리)와 레이첼 (레이) 코스텔로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리처드 스트래치는 인도 식민지 행정에 관여했으며, 증조부인 헨리 스트래치는 준남작이었다. 크리스토퍼에게는 작가인 누나 바버라 스트래치가 있었다. 1919년, 그의 가족은 51 고든 스퀘어로 이사했다. 스트래치 가문은 정부, 예술, 행정, 학문 등 여러 분야에서 명성이 높은 집안이었으며, 버지니아 울프,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하여 크리스토퍼의 삼촌인 리턴 스트래치가 속해 있던 블룸즈버리 그룹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13세에 그레셤 스쿨에 입학한 스트래치는 뛰어난 지성의 징후를 보였지만, 전반적으로 학업 성취는 좋지 않았다. 1935년에는 앨런 튜링이 다니던 것과 같은 학교인 케임브리지 대학교킹스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그곳에서도 학업에 열중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수학을 전공했지만, 이후 물리학으로 전과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3학년 말에 신경 쇠약을 겪었는데, 이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케임브리지로 돌아왔지만, 자연과학 트라이포스에서 "낮은 2등급"의 성적을 받는 데 그쳤다.
2. 경력
스트래치의 전문적인 경력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구 물리학자로서 시작되어, 교사직을 거쳐 컴퓨터 과학의 핵심 분야에서 혁신적인 연구 및 개발 활동으로 이어졌다.
2.1. 초기 경력 및 교직
학업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된 스트래치는 표준전신전화회사(Standard Telephones and Cables스탠다드 텔레폰스 앤 케이블스영어) (STC)에 연구 물리학자로 입사했다. 그의 첫 임무는 레이더에 사용되는 진공관 설계에 필요한 수학적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복잡한 계산에는 미분 해석기의 사용이 필수적이었고, 계산 기계와의 이 첫 경험이 스트래치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그는 이 분야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연구 학위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고, 스트래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STC에서 계속 근무했다. 전쟁 후, 그는 오랜 염원이었던 교사가 되어 세인트 에드먼즈 스쿨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3년 뒤인 1949년에는 더 권위 있는 해로우 스쿨로 자리를 옮겨 3년간 재직했다.
2.2. 연구 및 개발 활동
1951년 1월, 스트래치는 친구의 소개로 영국 국립 물리 연구소(National Physical Laboratory내셔널 피지컬 래버러토리영어) (NPL)의 마이크 우저를 만나게 되었다. NPL은 앨런 튜링이 1945년에 고안한 오토매틱 컴퓨팅 엔진(ACE)의 축소판인 파일럿 ACE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상태였다.
스트래치는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1951년 5월 체커 게임 프로그램의 초안을 개발했다. 이는 최초의 비디오 게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프로그램은 파일럿 ACE의 메모리를 완전히 소진할 정도로 방대했으며, 1951년 7월 30일 NPL에서 처음 실행되었을 때 프로그램 오류로 인해 실패했다. 그는 더 큰 메모리 용량을 가진 맨체스터 마크 1에 대해 듣고, 옛 동창인 앨런 튜링에게 매뉴얼을 요청하여 1951년 10월경 자신의 프로그램을 해당 기계의 명령어 집합에 맞게 변환했다. 1952년 여름까지 이 프로그램은 "합리적인 속도로 체커 게임을 완전히 플레이"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게임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노아 워드립-프루인은 이를 "M.U.C. 드래프츠"라고 명명했다.

스트래치는 1951년 맨체스터 대학교의 페란티 마크 1 컴퓨터에서 영국 최초의 컴퓨터 음악을 프로그래밍했으며, 이는 컴퓨터가 연주한 음악 중 가장 오래된 녹음본으로 남아있다. 녹음된 곡은 영국 국가인 "하나님, 국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였다. 그해 후반, BBC의 외부 방송팀이 "하나님, 국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 "검은 양", "인 더 무드" 세 곡의 짧은 발췌본을 추가로 녹음했다. 2016년, 캔터베리 대학교 연구원들이 이 아세테이트 마스터 디스크를 복원했고, 그 결과물은 사운드클라우드에서 들을 수 있다.
1952년 여름, 스트래치는 페란티 마크 1을 위한 "사랑 편지 생성기"를 프로그래밍했는데, 이는 전자 문학의 최초 사례로 알려져 있다. 1952년 5월에는 BBC 홈 서비스의 사이언스 서베이 프로그램에서 "동물과 기계의 제어 연구"(사이버네틱스)에 관한 두 부분으로 나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스트래치는 1952년부터 1959년까지 영국 국립 연구 개발 공사(National Research Development Corporation내셔널 리서치 디벨롭먼트 코퍼레이션영어) (NRDC)에서 근무했다. 세인트 로렌스 해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미국 내 여러 컴퓨터 센터를 방문하여 그들의 명령어 집합을 목록화했다. 이후 그는 엘리엇 401 컴퓨터와 페란티 페가수스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작업을 수행했다. 도널드 B. 길리스와 함께 그는 프로그램 재배치를 위한 베이스 레지스터 설계 등 세 건의 컴퓨터 설계 특허를 출원했다. 또한 로저 펜로즈와 잠시 협력하여 항공기 진동 분석 연구에도 참여했다.
스트래치는 1959년에 시분할 개념을 개발했다. 그는 그해 2월 특허를 출원했으며, 파리에서 열린 제1회 유네스코 정보처리회의에서 "대형 고속 컴퓨터에서의 시분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이 개념을 J. C. R. 릭클라이더에게 전달했다. 이 논문은 1963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컴퓨터 센터에서 "시분할 컴퓨터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인정받았다.
2.3. 컨설턴트 및 학술 경력
1959년 스트래치는 NRDC를 떠나 컴퓨터 컨설턴트가 되어 NRDC, EMI, 페란티 등 여러 기관과 광범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작업에는 컴퓨터의 논리 설계, 오토코드 제공, 그리고 이후 고수준 프로그래밍 언어 설계가 포함되었다. 페란티 오리온 컴퓨터용 오토코드를 제작하는 계약을 위해 스트래치는 피터 랜딘을 고용했으며, 랜딘은 스트래치의 컨설팅 기간 동안 유일한 조수가 되었다.
1962년, 스트래치는 컨설턴트직을 유지하면서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자리를 얻었다. 1965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합류하여 프로그래밍 연구 그룹의 초대 소장이 되었고,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 최초의 컴퓨터 과학 교수로 임명되어 울프슨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도 겸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저명한 컴퓨터 과학자 데이나 스캇과 협력했다.
1971년, 스트래치는 컴퓨터 과학 분야의 선구적인 업적을 인정받아 영국 컴퓨터 학회의 명예 특별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에는 로버트 밀른과 함께 애덤스 상 공모전에 제출할 에세이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이를 책으로 개정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스트래치는 라이트힐 인공지능 논쟁에 대한 녹화본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3. 주요 업적 및 기여
크리스토퍼 스트래치는 컴퓨터 과학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혁신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업적들을 남겼다.
3.1. 프로그래밍 언어 설계 및 이론
스트래치는 CPL(Combined Programming Language)을 개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영향력 있는 강의 노트인 Fundamental Concepts in Programming Languages는 L-값과 R-값의 구분을 공식화했으며, 이는 이후 C 프로그래밍 언어와 같은 현대 프로그래밍 언어의 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함수형 프로그래밍에서 사용되는 개념인 "커링"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비록 그가 이 개념 자체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용어 사용으로 인해 널리 알려졌다. 그는 페란티 페가수스 컴퓨터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3.2. 초기 컴퓨터 프로그램 및 시뮬레이션
스트래치는 초기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컴퓨터의 가능성을 넓혔다. 1951년부터 1952년 사이에 파일럿 ACE와 맨체스터 마크 1을 위한 체커 게임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이는 비디오 게임의 시초 중 하나로 여겨진다. 또한 1951년에는 페란티 마크 1에서 영국 최초의 컴퓨터 음악을 생성하여 "하나님, 국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를 포함한 여러 곡을 연주하게 했다. 1952년 여름에는 페란티 마크 1을 이용한 "사랑 편지 생성기"를 프로그래밍했는데, 이는 컴퓨터 생성 문학의 최초 사례로 기록된다.
3.3. 시분할 시스템 및 의미론
스트래치는 1959년에 시분할 개념을 개발하여 컴퓨터 자원의 효율적인 공유를 가능하게 했다. 그는 같은 해 유네스코 정보처리회의에서 "대형 고속 컴퓨터에서의 시분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이 개념을 널리 알렸으며, 이는 이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시분할 컴퓨터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데이나 스캇과 함께 표시적 의미론 분야를 개척하여 프로그래밍 언어의 의미를 수학적으로 형식화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3.4. 매크로 생성기 및 시스템 개발
그는 초기 매크로 확장 언어 중 하나인 GPM(General Purpose Macrogenerator제너럴 퍼포스 매크로제너레이터영어, 범용 매크로 생성기)을 설계하고 구현했다. GPM은 단 250개의 기계어 명령으로 구현될 정도로 뛰어난 프로그래밍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GPM은 오늘날 오토컨프 등에서 사용되는 m4와 같은 후대 매크로 프로세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3.5. 컴퓨터 과학 용어 정의
스트래치는 현대 컴퓨터 과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몇 가지 핵심 용어를 정의하고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대표적인 용어로는 다형성과 참조 투명성이 있다. 이 용어들은 오늘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 의해 널리 활용되고 있다.
4. 사상 및 철학
스트래치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본질과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컴퓨터 과학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을 정립했다.
4.1. 프로그래밍 언어 개념론
그의 저작인 Fundamental Concepts in Programming Languages와 같은 강의 노트를 통해 스트래치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근본적인 개념들을 탐구하고 체계적으로 형식화했다. 그는 특히 L-값과 R-값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등, 언어 설계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이러한 그의 이론적 기여는 프로그래밍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후대의 언어 설계자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5. 개인적인 삶
스트래치에 대한 공개된 정보 중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다. 그는 학업 중 신경 쇠약을 겪었는데, 이는 그의 동성애 성향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사망
크리스토퍼 스트래치는 1975년 5월 18일 감염성 간염으로 사망했다. 초기에는 황달로 진단받았으나, 잠시 회복되는 듯하다가 병이 재발하여 사망에 이르렀다. 그의 사망 후 1977년부터 토니 호어 경이 옥스퍼드 대학교 프로그래밍 연구 그룹의 수장직을 계승했다.
7. 유산 및 평가
크리스토퍼 스트래치의 업적은 컴퓨터 과학 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학계와 산업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7.1. 긍정적 평가
옥스퍼드 대학교 컴퓨터 과학부에는 그를 기리는 "크리스토퍼 스트래치 컴퓨터학 교수직"이 설치되어 있다. 이 교수직은 다음과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역임했다.
| 역대 교수 | 재직 기간 |
|---|---|
| 토니 호어 경 FRS | 1988년 - 2000년 |
| 샘슨 아브람스키 FRS | 2000년 - 2021년 |
| 요시다 노부코 | 2022년 - 현재 |
2016년 11월에는 스트래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스트래치 100"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옥스퍼드 웨스턴 도서관에서 보들리 도서관 컬렉션에 소장된 크리스토퍼 스트래치 아카이브를 관람하는 시간도 포함되었다. 1971년 그는 컴퓨터 과학 분야의 선구적인 업적으로 영국 컴퓨터 학회의 특별 연구원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안았다.
7.2. 비판 및 논란
스트래치의 활동이나 사상과 관련된 구체적인 비판적 관점이나 논란은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8. 영향
스트래치의 업적과 사상은 후대 컴퓨터 과학 분야의 발전과 현대 컴퓨팅 기술의 진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8.1. 후대에 미친 영향
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개념들은 현대 컴퓨터 과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시분할 시스템은 다중 사용자 환경과 운영체제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표시적 의미론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형식적 정의와 분석에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다. 또한 L-값과 R-값의 구분, 커링과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 이론에 대한 그의 기여는 후대 언어 설계자들이 더욱 견고하고 표현력 있는 언어를 구축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GPM과 같은 초기 매크로 확장 언어 설계는 m4와 같은 현대 도구의 기반이 되었다.
8.2. 특정 분야에 대한 기여
- 프로그래밍 언어:** CPL의 개발과 프로그래밍 언어의 근본 개념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언어 설계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L-값과 R-값의 구분 개념은 C 언어와 같은 많은 언어에 내재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 운영체제:** 시분할 시스템 개념의 선구적인 개발은 현대 운영체제가 여러 사용자와 작업을 동시에 처리하는 방식의 초석을 놓았다.
- 소프트웨어 개발:** 체커 게임, 컴퓨터 음악, 사랑 편지 생성기와 같은 초기 프로그램들은 컴퓨터가 단순한 계산 도구를 넘어 창의적이고 지능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소프트웨어 응용 분야의 지평을 넓혔다. 다형성과 참조 투명성 같은 용어의 정의는 소프트웨어 설계 및 이론의 발전에 기여했다.
9. 기념 및 추모
크리스토퍼 스트래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교 컴퓨터 과학부는 그의 이름을 딴 "크리스토퍼 스트래치 컴퓨터학 교수직"을 운영하며 그의 학문적 유산을 기리고 있다. 2016년 11월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스트래치 100" 행사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개최되었으며, 이 행사에서는 보들리 도서관에 소장된 크리스토퍼 스트래치 아카이브가 전시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