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년과 배경
1.1. 가족 배경
퀸틴 맥개럴 호그는 1907년 10월 9일 런던의 베이스워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탠리 볼드윈 내각에서 영국 대법관을 역임했던 헤일셤 자작 1세 더글러스 호그였으며,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브라운(Elizabeth Brown)이었다. 조부인 퀸틴 호그는 상인이자 자선사업가, 교육 개혁가로 활동했다. 그의 증조부인 제임스 호그 경은 얼스터 출신의 사업가이자 정치인이었다. 그의 중간 이름인 '맥개럴'은 노예를 대규모로 소유했던 얼스터 출신의 찰스 맥개럴에서 유래했는데, 찰스 맥개럴은 퀸틴 호그의 조부(역시 퀸틴 호그)의 처남으로서 그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바 있다.
1.2. 교육
호그는 서닝데일 스쿨과 이튼 칼리지에서 교육받았다. 이튼에서는 킹스 스칼라로 선정되었고 1925년 뉴캐슬 장학금을 수상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크라이스트 처치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옥스퍼드 대학교 보수당 연합과 옥스퍼드 유니언의 회장을 역임했다. 1928년에는 명예 중간고사(Honours Moderations)에서 1등을, 1930년에는 인문학(Literae Humaniores)에서 1등을 차지했다. 1931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올 소울즈 칼리지에서 법학 부문 수상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1932년에는 링컨스 인으로부터 법정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특히, 그는 1933년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이 회관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왕과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는 동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2. 초기 정치 경력과 제2차 세계 대전
2.1. 정치 입문과 의회 활동
호그는 1924년 영국 총선에서 첫 선거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사망할 때까지 모든 총선 캠페인에 참여했다. 1938년, 그는 옥스퍼드 보궐선거의 영국 의회 후보로 지명되었다. 뮌헨 협정 직후 치러진 이 선거에서는 노동당 후보인 패트릭 고든 워커가 보수당에 대항하는 통일된 도전을 위해 사퇴하도록 설득되었고, 밸리올 칼리지의 학장인 A. D. 린제이는 '독립 진보' 후보로 출마했다. 호그는 "히틀러는 호그를 원한다"는 대중적 슬로건으로 인해 경악했다는 린제이를 근소한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그는 1938년부터 1950년까지 옥스퍼드 선거구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5월 노르웨이 논쟁에서 그는 네빌 체임벌린에 반대하는 투표를 했으며, 윈스턴 처칠을 지지했다.
2.2. 전시 복무
제2차 세계 대전 중 호그는 소총 여단의 소대장으로 잠시 사막 전역에 참전했다. 그의 지휘관은 이튼 칼리지의 동창이었으며, 그와 부지휘관 다음으로 호그는 대대에서 세 번째로 나이가 많은 장교였다. 1941년 8월, 오른쪽 다리를 거의 잃을 뻔한 무릎 부상 후, 호그는 더 이상 전선에서 복무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판단되어 제너럴 "점보" 윌슨의 참모로 복무한 뒤 소령 계급으로 군을 떠났다. 1945년 총선을 앞두고 호그는 유죄 판결자 (Guilty Men)라는 책에 대한 반박으로 좌파는 결코 옳지 않았다라는 책을 저술했다. 1945년에는 제1차 처칠 내각에서 항공부 차관을 역임했다.
3. 각료 경력과 작위 계승
3.1. 작위 계승과 공직 복귀
1950년 호그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호그는 헤일셤 자작 2세를 승계하여 영국 상원에 입성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 경력이 끝났다고 생각하여 몇 년간 변호사 경력에 집중했으며, 1953년 칙선 변호사가 되었고 1955년에는 케네스 디플록의 뒤를 이어 자신의 법률 사무실 대표가 되었다. 1951년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다시 집권했을 때 그는 공직 제안을 거절했다. 1956년에는 재정적인 이유로 앤서니 이든 내각의 체신부 장관직을 거절했으나, 6주 후 해군 장관직을 수락했다. 하지만 그의 임명은 크랩 사건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해군 장관으로서 헤일셤은 이든의 이집트에 대한 군사력 사용 계획을 보고받았는데, 그는 이를 '미친 짓'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머스케티어 작전이 시작되자, 그는 수에즈 운하가 점령될 때까지 영국이 후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작전 도중 루이 마운트배튼이 항의의 표시로 해군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헤일셤은 그에게 서면으로 직무에 남아있을 것을 명령했다. 그는 마운트배튼이 자신의 장관에게 보호받을 권리가 있으며, 작전 수행으로 인해 해군의 명예가 훼손된다면 자신이 사임해야 한다고 믿었다. 헤일셤은 위기 동안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해럴드 맥밀런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보았으며, 그가 신경 쇠약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3.2. 내각 및 당 지도부 역할 (1957-1963)
1957년 호그는 맥밀런 내각에서 8개월간 영국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후, 같은 해 9월 추밀원 의장과 영국 보수당 의장직을 수락했다. 당 의장으로서 그는 보수당이 패배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1959년 영국 총선에서 주목할 만한 승리를 이끄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총선 직후 헤일셤은 잠시 소외되었고, 1964년까지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일했다. 과학부 장관으로서 그의 재임 기간은 성공적이었으며, 1973년에는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동시에 헤일셤은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왕실 도서관장,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다시 추밀원 의장, 그리고 1960년부터 1963년까지 영국 상원 원내총무를 역임했는데, 1957년부터 1960년까지는 상원 원내 부총무였다. 그는 또한 맥밀런으로부터 여러 특별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스포츠 담당 장관, 1963년부터 1964년까지 북동부 지역 실업 문제 담당 장관, 그리고 1963년부터 1964년까지 고등 교육 담당 장관을 맡았다.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었던 헤일셤은 사실상의 스포츠 장관 임명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으며, 후에 "[스포츠 장관]이라는 발상 자체가 늘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독재, 그것도 가장 역겨운 형태의 대중주의적 또는 파시스트적 독재의 냄새를 풍긴다"고 기술했다.
3.3. 사회 문제에 대한 입장과 논란
헤일셤은 울펜든 위원회에 출석하여 동성애에 대해 증언했다. 역사가 패트릭 히긴스는 그가 이 기회를 "자신의 혐오감을 표현하는 기회"로 삼았다고 말했다. 그는 "인류가 동성애 행위를 '부자연스럽다'고 묘사하는 본능은 단순한 편견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며, 동성애자들이 타락시키고 "전도하는 종교"와 같다고 비판했다.
1963년 6월, 동료 장관인 존 프러퓨모가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의회에 거짓말을 한 사실을 인정한 후 사임해야 했을 때, 헤일셤은 텔레비전에서 그를 맹렬히 비난했다. 노동당 의원 레지널드 패짓은 이를 "친구의 내장을 걷어차는 예술의 거장적인 공연"이라고 비꼬았다. 그는 덧붙여 "방종으로 인해 헤일셤 경과 같은 모습이 된 사람에게 성적 절제는 우스꽝스러운 감각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1963년 7월 15일, 그는 애버렐 해리먼과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 협상에 참여했다.
4. 1963년 보수당 당수 선출 위기
4.1. 작위 포기와 당수 경선
1963년 보수당 전당대회 시작과 함께 해럴드 맥밀런이 건강상의 이유로 총리직 사임을 갑작스럽게 발표했을 때, 헤일셤은 영국 상원 원내총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 보수당 당수 선출에는 공식적인 투표 절차가 없었다. 맥밀런의 처음에는 선호하는 후임자였던 헤일셤은 새로 제정된 1963년 귀족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작위를 포기하고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영국 하원으로 복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 전당대회에서 그가 보인 홍보성 행동들, 예를 들어 공개적으로 어린 딸에게 젖을 물리거나 지지자들이 'Q'(퀸틴의 약자) 배지를 배포하도록 허용한 것 등은 당시에는 천박하게 여겨졌고, 결국 맥밀런은 고위 당원들에게 그를 후임자로 선택하도록 독려하지 않았다.
4.2. 결과와 하원 복귀
결국 맥밀런의 조언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알렉 더글러스흄을 맥밀런의 후임 총리로 지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일셤은 1963년 11월 20일 자신의 작위를 포기하고 다시 '퀸틴 호그'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오랜 지역구였던 세인트 메릴본에서 실시된 1963년 세인트 메릴본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70년까지 이 지역구 의원으로 활동했다.

선거 운동가로서 호그는 강력한 수사와 극적인 제스처로 유명했다. 그는 1960년대에 흔했던 야유꾼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데 능했으며, 1964년 총선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한 번은 정치 연설 도중, 그는 강단에 몸을 기울여 장발의 야유꾼을 가리키며 "자, 이봐요, 당신이 남자든 여자든 간에, 당신은 충분히 했어!"라고 말했다. 경찰이 그 남자를 내보내자 군중은 박수갈채를 보냈고, 호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설을 이어갔다. 또 다른 때에는 노동당 지지자가 해럴드 윌슨의 플래카드를 흔들자, 호그는 지팡이로 그것을 쳐서 떨어뜨리기도 했다.
5. 대법관 재임
5.1. 첫 번째 재임 (1970-1974)
에드워드 히스가 1970년 총선에서 승리하자 호그는 서식스주 허스트몬수의 세인트 메릴본의 헤일셤 남작이라는 종신 귀족 작위를 받고 영국 대법관이 되었다. 호그는 세습 작위를 포기한 후 종신 귀족으로 영국 상원에 복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헤일셤이 대법원장으로 위저리 경을 선택한 것은 반대자들의 비판을 받았으나, 후에 위저리의 후임으로 레인 경을 임명하며 법조계의 인정을 다시 얻었다. 1962년 10월, 그는 한 언론인에게 자신이 작위를 물려받았을 때 1970년에 보수당 정부가 집권하면 "어떤 바보가 나를 대법관으로 만들지도 모른다"고 말하여, 그의 대법관 임명은 일부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첫 대법관 재임 기간 동안, 헤일셤은 1971년 법원법 통과를 감독했는데, 이 법안은 고대 순회 재판소와 분기별 회의를 영구적인 왕립 형사법원으로 대체함으로써 영국 사법부를 근본적으로 개혁했다. 이 법안은 또한 대법관부의 책임 하에 통일된 법원 서비스를 구축하여, 그 결과 해당 부서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는 또한 히스 내각의 논란이 많았던 1971년 산업 관계법을 상원에서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법안은 단명한 국립 산업 관계 법원을 설립했다.
5.2. "선택적 독재" 이론
헤일셤은 에드워드 히스 정부가 끝난 후인 1974년에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1976년에 '선택적 독재'(Elective Dictatorship)라는 용어를 대중화시켰으며, 나중에 이 개념을 상세히 설명한 민주주의의 딜레마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 이론은 의회가 의회 민주주의에서 행정부에 의해 지나치게 지배되는 현상을 비판하며, 정부가 마치 독재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5.3. 두 번째 재임 (1979-1987)
그러나 1978년 두 번째 부인의 비극적인 승마 사고 사망 이후, 그는 다시 적극적인 정치 활동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는 처음에는 에드워드 히스와 마거릿 대처의 그림자 내각에서 무임소 그림자 장관으로 활동했으며,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마거릿 대처 내각에서 다시 대법관을 역임했다.
헤일셤은 전통주의적인 대법관으로 널리 평가받았다. 그는 자신의 직책이 가진 전통적인 역할에 큰 비중을 두었으며, 전후 어떤 전임자들보다 자주 영국 상원의 항소 위원회에 참석했다. 상원을 주재하는 부대표 임명은 그가 사법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그는 종종 직접 울섹에 앉아 의사 진행을 맡기도 했다. 그는 영국 변호사 제도를 보호하려 노력했으며, 고등법원에 사무 변호사를 임명하거나 그들의 변호권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1971년의 광범위한 법원 시스템 개혁을 시행하는 데 책임이 있었고, 법 개혁과 법률 위원회의 활동을 옹호했다. 비교적 대처에게 순종적인 각료였지만, 정권 말인 1987년에는 대처와 이견을 보이며 사직했다.

5.4. 은퇴 후 법 개혁에 대한 견해
은퇴 후, 헤일셤은 대처 정부의 법조계 개혁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성공 보수 도입에 반대하며, 법률 직업이 "그랜섬과 같은 마을의 길모퉁이에 있는 식료품점 같지 않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마거릿 대처의 고향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그는 1990년 법원 및 법률 서비스법이 "법 개혁이 따라야 할 방법론의 거의 모든 원칙"을 무시했으며, "직업과 사법부의 일부를 국유화하려는 시도"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말년에 헤일셤은 우울증을 앓았으나, 평생의 고전 문학 사랑으로 어느 정도 관리했다. 그는 사망 직전까지 올 소울즈 칼리지 운영 이사회의 활동적인 구성원으로 남아있었다.
6. 저술 활동
6.1. 주요 저서와 사상
호그의 1945년 저서 좌파는 결코 옳지 않았다는 빅터 골란츠의 '승리 도서' 시리즈에 실린 프랭크 오웬, 마이클 풋, 피터 하워드의 유죄 판결자 (Guilty Men)와 톰 윈트링엄의 Your M.P.에 대한 강력한 반박이었다. 이 두 책은 전쟁 중 출판되어 보수당 의원들을 유화주의자나 전쟁 이득자로 비난하려는 시도였다. 윈트링엄의 책은 1945년 총선 직전에 재출판되어 당시 보수당에 대한 여론을 돌리는 주요 요인으로 여겨졌다。 호그의 책은 윈트링엄의 유화 정책에 대한 통계와 자신의 애국적인 통계를 대비시키며, 노동당 의원들이 전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는 펭귄 페이퍼백으로 출판된 보수주의를 위한 변론일 것이다. 이 책은 존 파커 하원의원의 노동당은 계속 전진한다(Labour Marches On)에 대한 유사한 반박이었다. 1945년 보수당의 참패 이후인 1947년에 대중 시장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출판된 이 책은 보수주의에 대한 잘 쓰여지고 일관성 있는 주장을 제시했다. 이 책에 따르면, 보수주의의 역할은 모든 변화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유행과 이데올로기의 변동성에 저항하고 균형을 맞추며,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유기적이고 인간적인 전통주의를 지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에는 보수주의자들이 종종 지배적인 영국 자유주의의 정책에 반대하여 공장 규제, 시장 개입, 그리고 자유 방임주의 자본주의의 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통제를 선호했지만, 20세기에는 보수주의의 역할이 사회 민주주의가 선호하는 규제, 개입, 통제라는 반대 방향의 겉보기 위험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6.2. 영적 및 자서전적 저술
헤일셤은 신앙과 믿음에 대한 저술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75년에는 자신의 영적 자서전인 내가 들어갔던 문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증거에 관한 법적 논증을 사용한 간략한 기독교 변증학 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에는 자살에 대한 특히 감동적인 구절이 있었는데, 그가 젊었을 때 이복형 에드워드 마저리뱅크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 경험은 헤일셤에게 자살은 항상 잘못된 것이라는 깊은 확신을 남겼다. 그의 기독교 저술은 로스 클리퍼드의 저술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헤일셤은 회고록 참새의 비행 (1991)에서 신앙의 주제를 다시 다루었는데, 이 책의 제목은 베다의 앵글인의 교회사에 기록된 참새와 신앙에 대한 언급,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다.
6.3. 주요 저서 목록
- One Year's Work. (1944) (퀸틴 호그 저)
- The Times We Live In. (1944) (퀸틴 호그 저)
- The Left Was Never Right. (1945) (퀸틴 호그 저)
- The Purpose of Parliament. (1946) (퀸틴 호그 저)
- The Case for Conservatism. (1947) (퀸틴 호그 저). 1959년 보수주의적 변론으로 개정, 재출판 (헤일셤 자작 저)
- The Iron Curtain, Fifteen Years After. With a Reprint of [Winston Churchill's] '철의 장막 연설' (1946). (1961, 1964) (헤일셤 자작 저)
- Science and Government. (1961) (퀸틴 호그, 세인트 메릴본의 헤일셤 남작 저)
- Science and Politics. (1963) (퀸틴 호그, 세인트 메릴본의 헤일셤 남작 저)
- The Devil's Own Song and Other Verses. (1968) (퀸틴 호그 저)
- New Charter: Some Proposals for Constitutional Reform. (1969)
- The Acceptable Face of Western Civilisation. (1973)
- The Door Wherein I Went. (1975) (헤일셤 경 저)
- Elective Dictatorship. (1976) (헤일셤 경 저)
- The Dilemma of Democracy: Diagnosis and Prescription. (1979) (헤일셤 경 저)
- A Sparrow's Flight: The Memoirs of Lord Hailsham of St Marylebone. (1991) (헤일셤 경 저)
- On the Constitution. (1992) (헤일셤 경 저)
- Values: Collapse and Cure. (1994) (헤일셤 경 저)
7. 개인 생활과 특징
7.1. 결혼과 가족
헤일셤은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32년 나탈리 설리번과 했으나, 전쟁에서 돌아온 그가 아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한 후 1943년에 이혼했다. 그녀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의 비서실장인 프랑수아 쿨레와 함께 있었다。 1944년 4월 18일, 그는 골웨이의 부족 중 마틴 가문의 후손인 메리 에블린 마틴 (1919년 5월 19일 ~ 1978년 3월 10일)과 결혼했다. 그들은 더글러스 마틴 호그, 3대 헤일셤 자작과 메리 클레어 호그를 포함한 다섯 자녀를 두었다.
1950년 아버지로부터 서식스주에 위치한 17세기 주택인 카터스 코너 플레이스(Carter's Corner Place)를 상속받아 10년 이상 농사를 지었다. 이 저택은 페븐시 습지와 영국 해협의 넓은 전망을 자랑했다. 1963년에는 유지 비용과 아내의 부담으로 인해 이 부동산을 매각했지만, 그 후에도 계속 방문했다. 1978년, 아내 메리는 호주 시드니 방문 중 승마 사고로 남편 앞에서 사망했다. 헤일셤은 큰 충격을 받았고, 헬멧 착용을 상기시키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서식스주 허스트몬수의 올 세인츠 교회 묘지에 있는 그녀의 묘비에는 "그의 빛나고 즐거운 동반자"라고 새겨져 있다. 1986년 3월 1일, 헤일셤은 자신의 법률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했던 디드레 마거릿 섀넌 애프트 (1928/9년 ~ 1998년)와 재혼했다. 그녀는 그의 노년에 그를 돌보았으나, 1998년에 그보다 먼저 사망했다.
7.2. 성격, 취미, 건강
헤일셤은 평생 동안 똑똑한 학창 시절의 모습, 즉 호감이 가면서도 때로는 짜증 나게 하고 단정치 못한 면모를 유지했다. 그는 대화 중 부적절한 순간에 고대 그리스 시의 긴 구절을 암송하는 습관이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열렬한 등산가였으며, 발레 알프스를 등반하다가 양쪽 발목이 부러졌다. 당시 골절 (그는 염좌라고 잘못 생각했지만)은 치유되었다. 헤일셤은 중년 후반까지도 신체적으로 활력이 넘쳤으며, 1960년대에는 보울러 모자와 핀스트라이프 정장을 차려입고 런던 주변을 불안하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그는 또한 영국 수중 탐사 클럽에서 훈련받은 스쿠버 다이빙 강사였다. 그러나 1974년 6월, 그가 나중에 썼듯이, 그의 손상된 양쪽 발목은 "일주일 간격으로 고장 났다". 그 후 그는 두 개의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 짧은 거리만 걸을 수 있었다. 노년에는 관절염도 앓았다.
8. 사망과 유산
8.1. 사망과 작위 계승
세인트 메릴본의 헤일셤 남작은 2001년 10월 12일, 94세의 나이로 런던 퍼트니 히스 자택에서 심부전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가 1963년에 포기했던 자작 작위는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장남 더글러스 호그에게 계승되었다. 1999년 상원법이 대부분의 세습 귀족의 상원 착석 권리를 박탈함에 따라, 더글러스는 하원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 자작 작위를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다른 가족 구성원들처럼 서식스주 허스트몬수의 올 세인츠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헤일셤의 사망 당시 재산은 유산 검인에서 461.85 만 GBP (2018년 가격으로 약 750.00 만 GBP)로 평가되었다.
8.2. 서훈 및 영예
헤일셤은 작위 외에도 1974년 컴패니언 오브 아너 훈장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988년에는 가터 훈장의 기사 동반자가 되었다. 그의 문장에는 "영광이 힘을 준다"(DAT GLORIA VIRES)는 모토가 새겨져 있다.

8.3. 평가와 영향
S.M. 크레트니는 헤일셤이 "어떤 평가에서든 20세기 영국 정치의 뛰어난 인물 중 한 명"이었다고 주장하며, "그의 동시대인 중 누구도 그처럼 뛰어나고 잘 훈련된 지성과 넓은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웅변 능력을 겸비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공은 "1950년대 보수당의 운명을 되살리는 역할"이었을 수 있지만, "정치에서의 실제 성과는 그의 놀라운 지적 능력과 웅변 기술을 반영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의 "감정적, 기질적 변동성, 심지어 불안정성"을 고려할 때, 만약 그가 1963년에 총리가 되었다면 "헤일셤 행정부가 무엇을 성취했을지 합리적으로 예측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2002년 지미 맥고번 감독의 영화 선데이에서는 피의 일요일 (1972년) 사건과 그 후의 위저리 재판을 다루었으며, 헤일셤 역은 배우 올리버 포드 데이비스가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