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기원전 95년경 - 기원전 46년)는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군사령관이었다. 그는 명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 출신이었으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입양되어 이름이 변경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카이사르 내전에서 그는 폼페이우스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귀족주의 보수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특히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에게 최후 통첩을 보내 내전 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시리아와 아시아 속주에서 프로콘술로 재임하며 병력과 자금을 모으기 위해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그는 파르살루스 전투와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고, 결국 기원전 46년 아프리카에서 포위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마지막 말인 "임페라토르는 잘 있다(Imperator se bene habet임페라토르 세 베네 하베트라틴어)"는 소 세네카로부터 죽음의 품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존 H. 콜린스 같은 고전학자들은 그를 개인적으로 혐오스럽고, 정치적으로는 반동적이며, 무능한 지휘관이자 속주를 착취한 인물로 평가하는 등 그의 삶과 행적에 대한 논란과 비판이 뒤따랐다.
2. 생애 초반 및 가문 배경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는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2.1. 출생 및 가계
스키피오의 본명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이며, 기원전 95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기원전 95년경 프라이토르를 역임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이고, 어머니는 리키니아였다. 그는 기원전 111년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와 기원전 95년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손자였다. 특히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기원전 133년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살해한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였다. 어머니 코르넬리아를 통해 세라피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이기도 했다. 스키피오의 아버지는 프라이토르 임기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으며, 두 아들과 두 딸을 남겼다. 그의 형제는 할아버지 크라수스에게 입양되었지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역사가 로널드 사임은 스키피오의 가계가 "화려함에 있어서 비할 데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2.2. 입양 및 이름 변경
젊은 시절의 기록에서 주로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로 불렸던 그는 기원전 80년 집정관이자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의 유언에 따라 성인으로 입양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의 이름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는 입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트리키 (귀족) 지위를 유지했다.
예지 린데르스키가 자세히 설명했듯이, 이 법적 절차는 느슨한 의미에서의 입양에 해당한다. 스키피오는 아들 없이 사망한 메텔루스 피우스의 재산을 상속받는 조건으로 메텔루스 피우스의 이름을 보존하기 위해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이름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메텔루스 피우스가 살아 있을 동안 그의 '아들'이었던 적은 없었다. 입양 이후 그는 때때로 '메텔루스 스키피오' 또는 단순히 '스키피오'로 불리기도 했다. 원로원의 포고령에 나타난 그의 공식 이름은 "Q. Caecilius Q. f. Fab. Metellus Scipio"였다.
3. 개인 생활 및 가족 관계
스키피오의 개인적인 삶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3.1. 결혼 및 자녀
스키피오는 기원전 77년 집정관이었던 마메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다. 흥미롭게도 소 카토 또한 아이밀리아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스키피오가 먼저 약혼을 파기했다가 다시 마음을 바꾸어 그녀와 결혼하면서 카토의 뜻을 꺾었다. 이 일로 카토는 크게 분노하여 법적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친구들의 만류로 그만두고, 스키피오에 대해 비난하는 시를 썼다고 한다.
부부에게는 아들 한 명이 있었는데, 같은 이름의 메텔루스 스키피오로, 18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70년경에 또 다른 아들이 태어났거나, 아들을 입양했을 가능성도 있다. 같은 시기에 부부의 훨씬 더 유명한 딸인 코르넬리아 메텔라도 태어났다.
3.2. 딸 코르넬리아의 폼페이와의 결혼
스키피오는 자신의 명망 높은 딸 코르넬리아 메텔라를 먼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푸블리우스 크라수스가 카르헤 전투에서 사망하자,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의 전 장인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새로운 장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폼페이우스에게 코르넬리아와의 결혼을 제안했고, 폼페이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코르넬리아보다 적어도 30살 이상 연상이었다. 이 결혼은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와의 동맹 관계를 단절하고 옵티마테스 (벌족파)의 옹호자임을 선언하는 중요한 정치적 행위 중 하나였다. 스키피오와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52년에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4. 정치 경력
스키피오는 로마 공화정 말기에 다양한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귀족주의 보수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4.1. 초기 공적 활동
기원전 80년, 키케로는 섹스투스 로스키우스의 변호인단에 'P. 스키피오'를 젊은 노빌레스 중 한 명으로 언급했다. 그는 미래의 집정관이 될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와 함께 이 변호인단에 참여했다.
4.2. 주요 관직 역임
스키피오는 기원전 59년 호민관을 지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의 파트리키 (귀족) 신분 때문에 논란이 있다. 린데르스키는 그의 호민관직 수행을 부정하고 귀족 신분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이는 스키피오가 귀족만이 역임할 수 있는 인테르렉스 직을 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평민 가문으로의 입양이 호민관 자격을 부여했을 수도 있다.
그는 기원전 57년 아이딜리스 쿠룰리스를 지냈을 것으로 보이며, 이때 양아버지의 사망 6주기를 기리는 장례 경기를 주관했다. 기원전 55년에는 폼페이우스와 마르쿠스 크라수스의 두 번째 집정관 재임 기간 동안 프라이토르를 역임했다.
기원전 53년에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와 함께 인테르렉스를 지냈다. 인테르렉스는 오직 귀족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직책을 맡았다는 사실은 그가 평민 호민관을 지냈다는 주장에 더욱 의문을 제기한다. 기원전 52년, 그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는데, 이 해에 그는 자신의 딸 코르넬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다.
또한 스키피오는 기원전 57년까지 신관 단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마도 기원전 63년 양아버지의 사망 후 지명되어 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3. 로마 정치에서의 역할
논란의 여지 없이 귀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스키피오는 기원전 53년 크라수스의 사망 이전까지 제1차 삼두정치의 권력에 대한 상징적인 견제 세력이었다. 로널드 사임은 "시기적절한 죽음들이 그의 가치를 높였는데, 이제 메텔루스 가문의 집정관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언급하며, 그가 당시 로마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설명했다.
5. 카이사르 내전에서의 역할
스키피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내전에서 폼페이우스 진영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5.1. 내전 발발 과정
기원전 49년 1월, 스키피오는 로마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최후 통첩을 보내도록 설득하여 내전이 불가피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2. 시리아 및 아시아 속주 프로콘술 재임

같은 해, 스키피오는 시리아 속주의 프로콘술이 되었다. 시리아와 그가 겨울을 보냈던 아시아 속주에서 그는 함선, 병력, 자금을 모으기 위해 종종 억압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그는 노예와 자유민의 인두세를 부과했으며, 기둥, 문, 곡물, 병사, 무기, 노 젓는 사람, 기계 등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에 세금을 부과했다. 카이사르는 "어떤 것에든 이름만 붙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돈을 징수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졌다"고 기록했다. 스키피오는 또한 유대 알렉산드로스를 처형했으며, 아마누스 산맥에서의 승리를 주장하며 '임페라토르' 칭호를 얻었다. 카이사르는 이 칭호 획득을 경멸적으로 언급하며, 스키피오가 "아마누스 산 근처에서 일부 손실을 입고도 자신을 '임페라토르'라고 칭했으며, 그 업적 이후 지역 국가들과 통치자들에게 막대한 금액을 요구했다"고 비꼬았다.
5.3. 주요 전투 및 패배
기원전 48년, 스키피오는 아시아에서 자신의 병력을 그리스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폼페이우스가 도착할 때까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 맞서 기동전을 펼쳤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그는 중앙을 지휘했다. 옵티마테스 진영이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후, 메텔루스는 아프리카로 도주했다. 그는 이전의 연적이었던 소 카토의 지지를 받아, 아마도 기원전 47년 초에 폼페이우스 군대의 최고 지휘권을 충성스러운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로부터 빼앗았다. 기원전 46년, 그는 탑수스 전투에서 지휘를 맡았으나, "기술이나 성공 없이" 패배했으며, 카토와 함께 격파되었다. 패배 후, 그는 이베리아 반도로 탈출하여 계속 싸우려 했으나, 푸블리우스 시티우스의 함대에 의해 궁지에 몰렸다. 그는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칼로 찔러 자살했다.
6. 최후
카이사르 내전에서 폼페이우스 진영이 패배한 후, 스키피오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6.1. 죽음의 경위
탑수스 전투에서의 패배 후, 스키피오는 이베리아 반도로 탈출하여 싸움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배가 푸블리우스 시티우스가 이끄는 함대에 의해 궁지에 몰리자, 그는 적의 손에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칼로 몸을 찔러 자살했다.
6.2. 죽음에 대한 평가

죽음에 직면한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이례적인 품위를 보여주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태연하게 "Imperator se bene habet임페라토르 세 베네 하베트라틴어" ("임페라토르는 잘 있다" 또는 "귀하의 장군은 괜찮습니다")라는 유명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이 마지막 말은 스토아 철학의 도덕 철학자 소 세네카로부터 강력한 찬사를 받았다.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예를 들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장인이었던 스키피오를 보라. 그는 맞바람에 의해 아프리카 해안으로 밀려났고, 그의 배가 적의 수중에 있음을 보았다. 그는 그러므로 칼로 자신의 몸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령관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다: '사령관은 잘 있다.' 이 말들은 그를 그의 조상들의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스키피오 가문에 운명이 아프리카에서 준 영광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카르타고를 정복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었지만, 죽음을 정복하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었다. '사령관은 잘 있다!' 장군은 달리 죽어야 하는가, 특히 카토의 장군 중 한 명은?"
7. 역사적 평가 및 논란
후대 역사가들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의 인물됨과 행적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7.1. 인물됨과 평판
고전학자 존 H. 콜린스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인물됨과 평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 스키피오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그는 개인적으로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비열했고,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으로 반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가이우스 베레스를 옹호했던 변호인이었고, 역겹도록 방탕한 생활을 즐겼으며, 무능하고 고집 센 지휘관이었다. 권력을 가졌을 때는 무절제한 폭군이었고, 속주를 강탈했으며, 채권자들로부터 시달리는 파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평민의 옹호자였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살해한 '거만한 귀족이자 평민의 적'이었던 것처럼, 그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고결한 코르넬리아의 아버지로서는 가장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오직 그가 죽음을 맞이하며 남긴 Imperator se bene habet임페라토르 세 베네 하베트라틴어라는 말에서만 그의 위대한 조상들의 고결한 인물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로널드 사임 또한 스키피오가 "로마 역사에서 그 어떤 중요성도 지니지 못한 마지막 스키피오"였다고 평가하며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반영했다.
7.2. 주요 비판 내용
스키피오에게 제기된 구체적인 비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베레스 옹호:** 그는 악명 높은 속주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의 변호에 참여하여 그의 부패를 옹호했다.
- 방탕한 생활:**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기록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집정관 시절 제멜루스가 주최한 파티에 참여했는데, 이 파티는 귀족 출신 부인들인 무키아와 플라비아, 그리고 귀족 소년 사투르니누스까지 동원하여 매춘이 이루어지는 매우 추문적인 것이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이를 "집정관과 호민관을 기리는 연회가 아니라, 그들을 고발하는 연회"라고 비판했다.
- 속주 강탈 및 착취:** 카이사르 내전기 기록에 따르면, 그는 시리아와 아시아 속주의 프로콘술로 재임하면서 노예와 자유민의 인두세를 부과하고, 기둥, 문, 곡물, 병사, 무기 등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에 세금을 부과하는 등 강압적인 방법으로 막대한 자금을 갈취했다.
- 파산 위기:** 키케로의 편지 (아티쿠스에게 보낸 서한, 9.11)에서 키케로는 스키피오가 "채권자들이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어떤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인가?"라고 언급하며 그가 파산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암시했다. 만약 그들이 승리한다면 시민들에게 어떤 행동을 취할지 예측할 수 없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 반(反) 평민적 성향:**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가 평민 옹호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을 주도했듯이, 스키피오 역시 귀족주의적 보수파의 핵심 인물로서 반평민적이고 반동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
8. 같이 보기
- 폼페이우스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카이사르 내전
- 타프수스 전투
- 파르살루스 전투
- 키케로
- 소 카토
-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 카이킬리아 씨족